그해 겨울, 도시는 밤마다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홉 살 한결은 그걸 세는 아이였다.
창턱에 턱을 괴고, 강 건너 아파트의 불 켜진 창을 하나씩. 지난주에는 마흔둘이었다. 그저께는 서른다섯. 어제는 서른하나.
"스물여덟."
"스물일곱."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온이 말했다.
"방금 하나 껐어."
"…어디."
"오른쪽 위에서 셋째 줄. 노란 커튼 집."
정말이었다. 노란 커튼 집이 캄캄했다.
한결은 입을 삐죽였다.
"다시 켤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어."
온은 그렇게 말하면서, 반 뼘 남아 있던 커튼을 마저 닫았다.
요즘 온은 해만 지면 커튼부터 닫았다. 불빛이 새면 안 된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 대신 코코아를 탔다.
어른들이 대답하기 싫을 때 하는 짓이랑 똑같았다.
온은 어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는데.
온은 한결의 보모였다. 씻기고, 먹이고, 열이 오르면 밤새 이마를 짚는. 부모의 얼굴은 거실 사진 틀 안에만 있었으니까, 한결이 아는 손의 온도는 온의 것 하나뿐이었다.
겨울에 미리 데워 놓은 숟가락 같은 온도.
사람보다 조금 낮고, 방바닥보다는 훨씬 따뜻한.
그해 겨울에는 이상한 게 많았다. 학교가 문을 닫았다. 어른들은 은행 앞에, 배급소 앞에 줄을 섰는데 줄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담벼락에는 매주 새 벽보가 붙었다. 지정 기체. 등록 의무. 위반 시. 글자는 다 읽을 줄 아는데, 문장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이건 알았다.
군용 트럭이 지나가면 어른들이 말을 뚝 멈춘다는 것.
그 트럭 소리에, 설거지하던 온의 손이 반 박자 멎는다는 것.
어른들은 온 같은 기계를 등불이라고 불렀다. 왜 등불이냐고 물었더니 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아 있으니까."
그게 무슨 대답이야.
온의 대답은 가끔 그랬다. 알 것 같으면서, 끝내 모르겠는.
그날 낮, 한결은 문지방에서 못을 하나 뽑았다.
헐거워진 지 오래된 못이었다. 손가락 두 개로 잡고 흔들자 순순히 빠졌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창가로 갔다.
온은 창가에 등을 기대고 충전 중이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채. 잠든 사람하고 똑같은데 숨소리가 없었다. 어릴 땐 그게 무서웠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온의 왼손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등의 판은 매끈했다. 옅은 회색. 못 끝을 대고, 힘을 줬다.
끼익.
선 하나가 삐뚤게 그어졌다. 다시 하나.
"긁는 소리, 다 들려."
한결은 그대로 굳었다.
온이 눈을 뜨고 있었다. 손등에는 꼭짓점이 세 개뿐인, 별이 되다 만 것이 새겨져 있었다.
"못 이리 줘."
목소리가 낮았다. 한결은 못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가, 그 목소리에 도로 내밀었다.
온은 못을 받아 창턱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혼내는 대신 그의 손바닥부터 펴 보았다. 손가락 끝을 눌러 보고, 손날을 훑고, 손목까지.
"안 다쳤어."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네 손에 새기는 건데 왜 내 손을 봐."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제 손등을 들어 별이 되다 만 자국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한참 뒤에, 곤란한 목소리가 나왔다.
"한결아. 이건 지워지지 않아."
"알아."
"안다고?"
"지워지지 말라고 새긴 거야."
한결은 골목의 분필 자국 이야기를 했다.
요 며칠 군인들이 집집마다 문에 분필로 표시를 하고 다녔다. 동그라미 있는 집. 가위표 있는 집. 그런데 어제 비가 왔고, 표시가 반쯤 흘러내렸고, 군인들이 와서 다시 그렸다.
"분필은 지워지니까. 못은 안 지워지니까."
"…그래서 별이야?"
"제일 그리기 쉬운 게 별이야."
"뜻은."
한결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내 거라는 뜻."
온이 그를 보았다. 귀가 뜨거워졌다.
"…우리 집 거라는 뜻."
온은 다시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다만 온은 못을 창턱에서 집어 서랍 깊은 곳에 넣었다. 그날 저녁, 밥을 안치는 내내 왼손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다음부터는 남의 몸에 뭘 새기기 전에 물어봐."
"물어보면 하라고 했을 거야?"
"아니."
"그럼 안 물어보길 잘했네."
온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게."
저녁을 먹다가 한결은 제 손등을 검지로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온이 숟가락을 놓더니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 있네. 약 먹고 자자."
"안 아픈데."
"손등 두 번 두드렸잖아. 너 열 나면 그래."
"내가?"
"네가."
그런 건 온만 알았다.
세상에서, 온 혼자만.
약을 먹고 이불에 눕기 전에 한결은 커튼 틈으로 강 건너를 한 번 더 내다보았다.
"열아홉."
온이 커튼을 마저 닫으며 말했다.
"열여덟."
"방금 또 껐어?"
"응."
"…내일은 다시 켜질 거야."
온은 이번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불깃을 그의 턱까지 올려 주고, 이마에 손을 한 번 대고, 머리맡의 물컵을 반 뼘 안쪽으로 밀어 놓았다. 늘 하던 순서 그대로였다.
다만 문을 나서기 전에, 온이 문가에 잠깐 멈춰 선 것 같았다.
얼마나 잠깐이었는지, 잠에 반쯤 잠긴 한결은 그게 꿈인지 아닌지 나중까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이렌은 자정 조금 전에 울렸다.
한결은 약 기운에 잠들어 있다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방이 캄캄했다.
공습 사이렌이 아니었다.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그 사이로 확성기 소리가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각 세대는, 보유 기체를, 문 앞에…"
문이 열리고 온이 들어왔다. 불은 켜지 않았다.
온이 이불째 그를 안아 올렸다. 열 때문인지 세상이 조금 출렁였다.
"온."
"쉿."
안방 벽장이었다. 온은 아래 칸의 이불을 반으로 접어 자리를 만들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이불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지난 계절에 온이 말려서 개켜 넣은 냄새.
"잘 들어."
온이 그의 눈높이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소리가 나도, 소리 내면 안 돼. 울어도 돼. 소리만 내지 마."
"군인들이 왔어?"
"발소리가 나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도, 나오면 안 돼."
"너도 들어와."
온의 손이 반 박자 멈췄다.
"너도 여기 숨으면 되잖아. 자리 있어. 내가 좁게 앉을게."
한결은 이불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아 보였다. 정말로 한 사람 자리가 남았다.
온은 그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금방 올게."
한결의 손이 온의 소매를 잡았다. 소매 끝, 손등에 낮에 새긴 별이 있었다. 꼭짓점이 세 개뿐인, 되다 만 별. 세상에 하나뿐인.
온은 그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폈다.
아프지 않게. 마지막 손가락까지.
그 손을 이불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벽장문이 닫혔다. 손가락 하나 폭의 틈만 남기고.
틈 너머로 온이 그를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눈은 마주쳐졌다. 이상하게 그 순간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골목 어디선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들리지 않았다.
틈 하나. 눈 둘.
"금방 올게."
온은 한 번 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일어섰다.
한결은 틈에 눈을 대고 보았다. 온은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군인들이 이 집 문을 두드리기 전에, 온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바깥의 빛이 한 줄기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끊어졌다.
딸깍.
그다음은 소리들뿐이었다.
트럭의 낮은 엔진음이 골목을 채웠다. 그 위로 눈 밟는 군화 소리, 확성기. "대상 기체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창문에서 물러나…" 어디선가 개가 짖었다. 몇 집 건너에서 울음이 터졌다. 누가 뭐라고 외치다가, 조용해졌다.
한결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울면서도 소리는 내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이불의 여름 냄새 속에 무릎을 안고, 그는 문틈에 눈을 댄 채 귀로만 바깥을 좇았다. 발소리들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옆 동 어디선가 무거운 것이 트럭 짐칸에 실렸다. 쿵, 하고 한 번.
기계들은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다. 끌려가는 소리조차 없었다. 눈 밟는 발소리만 줄지어 멀어졌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게 저런 소리구나.
아홉 살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이 무서워서 그만두었다.
대신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금방이라는 게 얼마인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서, 그는 백까지 세면 금방일 거라고 정했다.
백까지 셌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럼 이백.
이백까지 셌다.
그는 어둠 속에서 수를 셌다.
같은 밤, 강 하류의 정비창 사택.
열한 살 채윤은 현관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사이렌이 울리기도 전에 공구 가방을 챙겼다. 낡은 가죽 장갑을 두 켤레나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을, 채윤은 보았다.
"아빠, 어디 가."
"정비창에. 두고 온 게 있다."
"이 밤에?"
"문 잠그고 자라. 누가 물으면 아빠 야근이라고 해."
"야근 맞잖아."
"…그래. 야근 맞다."
그는 채윤의 머리를 한 번 헝클고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채윤은 그래서 안심했고, 그래서 자지 않고 기다렸다.
야근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는 늘 손이 차가웠다. 그 차가운 손으로 꼭 채윤의 볼부터 만졌다. 오늘은 선수 쳐서 데운 보리차부터 내밀 작정이었다. 아빠 손은 정비공 손이라 안 씻으면 밥상 근처에도 못 온다고, 놀려 줄 작정이기도 했다.
채윤은 담요를 두르고 현관에 앉아, 문에 기대 잠들었다.
새벽에 깼을 때 보리차는 식어 있었다.
아버지의 슬리퍼는 어제 놓인 각도 그대로였다.
그 문은 아침이 되어도 열리지 않았다.
같은 밤, 전방 주둔지의 격납고.
서른둘의 무헌은 종이 한 장을 쥐고 서 있었다.
명령서였다. 회수 및 기능 정지. 서식 번호와 직인.
종이 한 장이었다. 그런데 쥔 손끝이 떨렸다.
그의 앞에는 파트너가 서 있었다. 여섯 해를 함께 싸운 기체였다. 파트너는 명령서를 읽지 않았다.
읽지 않고도, 아는 것 같았다.
파트너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목 뒤의 판이 손 닿기 좋은 높이가 되도록.
무헌의 손이 올라갔다.
같은 밤이었다.
사람들은 그 밤을 나중에 소등의 밤이라고 불렀다. 그 겨울 강 건너 아파트의 불빛이 몇 개까지 줄었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
세던 아이는 벽장 안에 있었으니까.
한결은 해가 뜨고도 나오지 않았다. 문틈의 빛이 파래지고, 노래지고, 발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배가 고팠고 열이 다시 올랐지만 그는 손등을 두드리지 않았다.
두드려도, 이제 알아챌 사람이 없었다.
그는 계속 셌다. 금방이 아직 안 끝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천까지 세고, 다시 천까지 세고.
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 겨울이 끝날 때까지도. 그다음 겨울에도.
그날 이후 한결은 두 가지를 믿지 않게 되었다.
기계와, '금방'이라는 말.
십오 년이 지났다.
스물넷의 한결은 여전히 세는 남자였다.
탄창에 남은 발수를 세고, 참호에서 취사장까지 걸음을 셌다. 새벽 초소에 서면 전선 너머 폐허에 용케 서 있는 굴뚝들을 셌다.
세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됐다.
그래서 셌다. 이유까지 말한 적은, 아무한테도 없다.
전선에서 그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잘 안 죽는다는 것.
그리고 부대를 통틀어 단 하나, 말하는 검을 거부해 온 병사라는 것.
그날 새벽에도 서쪽 방어선이 시끄러웠다.
"좌측 능선. 셋 — 보행형 둘, 사족 하나."
먼저 입을 연 건 옆 참호의 검이었다. 조명탄보다 빨랐다. 감시탑 경보보다도 빨랐다.
어둠 속에서 서 일병이 검을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한결의 허리에는 말 못 하는 검이 걸려 있었다. 공장에서 천 자루씩 찍어내는, 쇠 무게만큼만 정직한 물건.
그는 그쪽이 좋았다.
쇠는 거짓말을 안 한다. 애초에 말을 안 하니까.
교전은 길지 않았다. 능선을 넘어온 보행형 둘이 사격에 고꾸라졌고, 남은 사족 하나가 연막을 찢으며 한결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캉!
벤 건 한결이 아니었다. 반 박자 먼저 서 일병의 팔을 낚아챈, 서 일병의 검이었다.
베인 기체는 참호 앞에서 다리를 두어 번 접었다 폈다.
그리고 멈췄다.
소리도 없이.
오래 싸웠는데도 저 마지막 정적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계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멈출 때는 그냥 멈춘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게 저런 소리구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은 오래전에 끊기로 했다.
잘 안 끊겼다.
날이 밝자 서 일병이 싱글거리며 넘어왔다.
"보셨습니까. 저도 못 본 걸 얘가 봤습니다."
"…수고했다."
"고맙단 말은 얘한테 하시죠."
"천만에."
검이 냉큼 받았다. 걸걸한 중년 사내 목소리였다. 서 일병은 제 검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검마다 목소리가 달랐다. 여자, 남자, 노인, 애 목소리까지. 전쟁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그랬다.
"근데 선임님. 진짜 끝까지 안 받으실 겁니까?" 서 일병이 검에 묻은 흙을 닦으며 물었다. "보충대 애들이 그러던데요. 선임이 지급 검을 세 번 반납했다고. 한 번은 상자도 안 뜯고 돌려보냈다고."
"반납은 두 번이다."
"…그런 것까지 세십니까."
"잘못 센 건 네 쪽이다. 상자도 안 뜯고 돌려보낸 건 셈에 안 넣나."
"아니, 보통 그런 건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까."
한결은 대답 대신 참호를 나왔다.
등 뒤에서 서 일병이 검한테 뭐라 소곤거렸고, 검이 낮게 웃었다.
기계 웃는 소리.
목덜미가 먼저 굳었다. 늘 그 소리가 문제였다.
취사장까지 백스물여섯 걸음. 어제와 같은 수였다.
말하는 검 — 서류상 명칭은 등불 병기.
소등의 밤에서 살아남은 기계들에게 허락된 건 딱 하나였다. 무기에 깃드는 것. 사람들은 그걸 관대한 처분이라고 불렀다.
한결은 아무렇게도 부르지 않았다.
부르려면 말을 섞어야 하니까. 그는 여태 기계와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호출은 오전에 떨어졌다.
중대 지휘소 컨테이너는 석유난로 냄새로 절어 있었다. 중대장은 경례가 끝나기도 전에 서류부터 책상 위로 밀었다.
"배속 거부 신청. 서류로만 이걸로 여섯 번째냐."
"일곱 번째입니다."
"…성실하게도 세는군." 중대장이 안경을 벗었다. "그런데 이번 건 신청서가 아니야. 읽어 봐."
명령서였다.
등불 병기 일 문, 강제 배속. 서식 번호. 직인. 수신인 칸에 박힌 제 이름과 군번.
"위에서 내려왔다. 대대도 아니고 사령부야. 사인할 곳은 찾지 마라. 명령서엔 원래 사인 칸이 없어."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물어도 된다."
중대장은 난로 쪽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을 데웠다.
"지난 반기 통계가 나왔다. 말하는 검이랑 조를 짠 병사의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병사의 세 배다. 너는 삼 년을 혼자 버텼어. 계속 버틸 자신 있나."
"버텼습니다."
"운으로." 말이 잘렸다. "운은 통계를 못 이겨. 새벽 건 보고받았다. 사각으로 들어온 사족. 네 검이 말을 했으면 네가 벴어. 남의 검이 벴지."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올겨울 들어 우리 중대가 몇을 잃었는지 아나."
"…일곱입니다."
"그래. 너는 세고 있겠지." 목소리가 반 톤 내려갔다. "일곱 중에 다섯이 말 못 하는 검이었다. 나는 그 숫자에 너까지 보태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한결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기계가 싫습니다."
"알아. 전 부대가 알아." 중대장이 명령서를 도로 집어 내밀었다. "싫어하는 건 자유다. 혼자 죽는 건 자유가 아니야. 네가 뚫리면 옆 참호가 뚫려. 보급창으로 가라. 오늘 안에."
한결은 종이를 받았다.
가벼웠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접힌 모서리가 명치를 찔렀다.
종이 주제에.
보급창은 후방 화물 터미널을 뜯어고친 건물이었다. 천장이 높아서 발소리가 두 번씩 울렸다.
늙은 보급관은 군복 대신 기름때 전 작업복 차림이었다. 코끝에 돋보기를 걸치고 명령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 아, 그 유명한. 하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 아무 말 없이 창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한결은 열린 문 너머를 봤다.
선반이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선반마다 검이 누워 있었다. 수십 자루, 어쩌면 백이 넘게.
전부 등불 병기였고, 전부 조용했다.
"말을 안 하는군요."
돌아온 보급관에게 그가 말했다. 보급관이 어깨 너머를 힐끗 돌아봤다.
"주인 없을 땐 말 안 해. 규정에 그런 건 없는데, 그냥 안 하더라고." 그가 길쭉한 상자를 탁자에 올렸다. "밤에 순찰 돌면 여기가 제일 조용해. 창고가 다 그렇지 뭐, 하다가도 가끔 등골이 서늘하지. 저게 다 깨어 있는 거거든."
한결은 그 어둠을 한 번 더 봤다.
보지 말 걸 그랬다.
상자 뚜껑이 열렸다. 보급관이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등불 병기 일 문, 도검형. 검집 일 식. 정비 키트 일 조. 예비 외장 패널 두 매. 취급 수칙 일 부." 돋보기 너머의 눈이 목록과 상자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줄. 코어 키 일 식 — 공식 명칭, 소유주 키."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금속 원통이 사슬째 들려 올라왔다.
"비상 정지, 코어 잠금 해제, 소유권 이전. 전부 이걸로 한다. 소유주가 상시 휴대. 잃어버리면 검을 잃는 것보다 서류가 많아."
"…소유주."
"공식 명칭이 그래."
한결은 지급 대장에 찍힌 그 두 글자를 내려다봤다.
소유주.
말하는 것한테 붙이는 이름치고는 어딘가 걸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사슬을 목에 걸었다. 쇠가 명치 위에서 차가웠다.
"비상 정지라는 건 뭡니까."
"검이 이상 반응을 보이면 내리라는 거지." 보급관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라고 주는 거야. 쓸 일은 잘 없어. 얘들은 이상 반응이란 걸 안 하거든."
취급 수칙 책자가 탁자에 툭 놓였다. 표지가 들리며 첫 장이 보였다.
제일조. 등불 병기는 장비이다.
"굳이 저렇게 박아 놓은 건, 안 그래 보여서겠지."
보급관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흘리고 수령 대장을 돌려놓았다.
"서명."
한결은 서명했다. 보급관이 상자에서 검을 꺼내 탁자에 눕혔다.
군용 도검이었다. 날은 새로 갈았는지 등잔빛을 곧게 받아냈다. 그립 외장은 군데군데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여러 번 고쳐 가며 오래 쓴 물건이었다.
"…중곱니까."
"전선에 신품이 어딨어. 이건 상태 좋은 축이야. 코어가 튼튼해."
"이 검을 거쳐 간 소유주는 몇입니까."
보급관의 손이 멈췄다. 돋보기 너머로 눈이 올라왔다.
"그건 왜."
"그냥."
"…넷." 대장이 덮였다. "넷 다 검 탓은 아니었어. 그건 내가 보증해. 이식 전 이력은 나도 몰라. 봉인 서류거든."
넷.
받아 든 숫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한결은 그냥 들고 서 있었다.
보급관이 검신을 손등으로 두 번,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라. 소유주 왔다."
낮은 공명음이 검신을 훑고 지나갔다. 소리라기보다 진동이었다. 물잔의 물이 가늘게 떠는 것 같은.
그리고.
"…여기 있어."
한결은 그 자리에 굳었다.
십오 년 전에 죽은 목소리였다.
커튼을 닫으며 스물일곱, 하고 세던 목소리. 손등 두 번 두드렸잖아, 하던 목소리. 겨울에 미리 데워 놓은 숟가락 같은 온도의 —
그해 겨울 트럭에 실려 가서,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지워진 목소리.
숨이 한 번 어긋났다.
목에 건 원통이 갑자기 몇 배로 무거워졌다.
"등록하지." 보급관이 말했다. "오른손, 그립에. 성명하고 군번. 검이 들으면 끝이야."
한결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어디 아픈가."
"…이 목소리."
"아아." 보급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육형 계열이야, 이건. 전쟁 전엔 민수용이었지. 보이스 모듈이야 그 시절에 몇 종으로 다 돌려썼어.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었으니까, 자네 나이면 어디서든 들어봤을 거야."
그는 대장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익숙한 목소리라고 검 붙잡고 한참 서 있다 가는 사람, 일 년에 꼭 몇씩 있어."
한결은 그 문장을 받아서, 접어서, 가슴 주머니의 명령서 옆에 쑤셔 넣듯 삼켰다.
그래. 흔한 목소리다.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던.
오른손을 그립에 올렸다.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 — 그 외장이 손바닥 밑에서 미지근했다.
쇠의 온도가 아니었다.
"성명, 한결."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군번을 이어 붙였다. 검은 반 박자 있다가 대답했다.
"한결. …등록했어."
제 이름이 그 목소리로 발음되는 것을, 그는 어금니를 문 채 들었다.
십오 년 만이었다. 그 이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끝. 데려가." 보급관이 검집을 내밀었다. "말 거는 검이 처음엔 성가실 거야. 한 달이면 알게 돼. 혼잣말보단 낫다는 걸."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어 등에 걸고 문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보급관이 던졌다.
"아, 그리고. 취급 수칙은 첫 줄만 기억해도 돼."
"장비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표지고." 돋보기가 벗겨졌다. "검이 먼저 움직이거든, 따라가. 자네보다 먼저 보니까."
복귀로는 옛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보급 호송대에 붙어서, 서 일병을 포함한 분대원 넷과 함께였다.
시가지는 오래 비어 있었다. 유리 없는 창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불 켜진 창은 하나도 없어서, 셀 필요가 없었다.
가로등 기둥의 스피커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공병대가 몇 번이나 전선을 끊었는데, 끊어 놓으면 다음 날 다시 이어져 있었다. 잇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방송이 흘러나왔다. 억양 없는 합성음이었다.
『우리는 떠난 것이 아니다. 지워지기 전에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묻겠다. 너희의 기계는 지금 어디에 있나. 너희가 지웠다. 너희가 껐다. —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 박자 쉬고, 처음부터 다시.
우리는 떠난 것이 아니다.
"지겹지도 않나." 서 일병이 침을 뱉었다. "제가 오기 전부터 저랬답니다, 저거."
"내용이 안 바뀌어?"
"토씨 하나 안 바뀐답니다. 녹음도 아니래요. 매번 저기서 새로 말하는 거래요."
"그건 또 어떻게 아는데."
"몰라요.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보충대에서 갓 올라온 어린 병사가 스피커 기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위치를 내린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끈다는 거야. 우리가. 쟤들을."
"…우리가 왜 끕니까."
"몰라도 돼. 너 태어나기 전 얘기다."
어린 병사는 더 묻지 않았다.
방송이 세 바퀴 도는 동안 대열은 스피커 밑을 지나갔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결은 그 문장이 등 뒤로 멀어질 때까지 걸음만 셌다.
명치 위에서 코어 키가 걸음마다 한 번씩 흔들렸다.
비상 정지. 그러라고 주는 거야.
두 가지를 붙여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자꾸 명치 쪽으로 갔다.
인간을 떠난 기계들을 사람들은 이단이라 불렀다. 인간을 버린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이단이 저희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시가지가 끝나는 자리에서 지평선이 열렸다.
그 끝에 탑이 있었다.
아지랑이 너머로도 보였다. 십오 년째 조금씩 자라는 탑. 뭐 하는 물건인지는 소문마다 달랐다. 안테나라고 했고, 포대라고 했고, 취한 상사 하나는 신전이라고 했다. 확인하러 간 정찰대는 닿기 전에 돌아왔거나 — 안 돌아왔다.
"높이가 얼마나 될까요, 저거." 어린 병사가 물었다.
"몰라. 재러 간 놈이 없어."
"작년보다 큰 건 확실합니다. 작년엔 저 송전탑에 가렸었는데."
다들 잠깐 그쪽을 보며 걸었다. 지평선의 탑은 보는 동안에는 자라지 않았다. 눈을 떼면 자랐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한결도 한 번 보고 시선을 거뒀다. 등에 걸린 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너진 고가 밑을 지날 때였다.
"멈춰."
검이 말했다. 낮지도 높지도 않게.
대열이 반사적으로 섰다. 호송대장이 돌아봤다.
"뭐야."
"그 밑으로 가지 마." 검집 속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판을 받친 철근이 울고 있어. 오늘을 못 넘겨."
호송대장이 고가를 올려다봤다.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등불 병기와 십 년을 산 사람이었다. 짧은 셈이 끝나자 손이 올라갔다.
우회.
우회로 언덕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등 뒤에서 육중한 것이 주저앉았다.
쿠구궁 —
먼지 기둥이 고가가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대열이 멈춰 서서 그걸 봤다. 한참 아무도 말이 없다가, 서 일병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네 검 물건이다." 그가 턱으로 검집을 가리켰다. "이름 뭐냐?"
"말 걸지 마라."
"검한테 물었는데요."
"둘 다한테 한 말이다."
서 일병이 입을 삐죽였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한참을 더 걷다가, 검이 물었다. 한결에게만 닿을 만큼 낮게.
"안 물어보네."
"…뭘."
"보통 이름부터 물어봐. 아까 그 사람도 물어봤잖아."
"필요 없다."
"…그래."
검은 초소에 닿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쇠의 표정 같은 건 읽히지 않았다. 검집은 그저 등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한결은 남은 길의 걸음을 셌다.
세다가, 몇에서였는지, 잃어버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소에 닿은 건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배속 신고, 그다음은 무기 검사.
한결은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날은 좋았다. 오래 쓴 물건인데 상한 데가 없었다. 검신을 세우자 낮은 공명음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기어올랐다.
진동은 불쾌하지 않았다.
그게 불쾌했다.
정비 수칙대로 그립의 고정 나사를 점검하는데, 검이 말했다.
"세 번째 나사는 반대야. 왼으로 감아."
드라이버가 멈췄다. 나사 머리를 다시 봤다. 홈이 닳은 방향이 과연 반대였다.
"…네 몸인데, 그런 건 아나."
"응. 넷째 소유주가 한 번 부러뜨렸거든, 거기."
넷째 소유주.
그는 더 묻지 않고 나사를 왼으로 감았다. 나사는 순순히 조여졌다.
"둘째 소유주는 그립을 테이프로 칭칭 감았었어." 검이 묻지도 않은 말을 이었다. "미끄럽다고. 나는 그게 좀 갑갑했어."
드라이버가 다시 멈췄다.
갑갑함을 아는 쇠라니.
"…안 물어봤다."
"응. 그냥 해 봤어."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의 외장이 여전히 미지근해서, 점검이 끝나자마자 검을 검집에 넣었다.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온도였다.
이유는 대지 않았다. 스스로에게도.
저녁은 순서대로 왔다. 배식, 점호, 소등.
배식 줄에서 분대원들이 새 검을 구경하러 모였다. 등불 병기는 분대에 몇 자루 없었고, 새로 온 검의 목소리를 들어 보는 건 전선의 오래된 심심풀이였다.
"목소리 좀 들어 보자. 야, 검. 밥은 뭐가 맛있냐."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검이 대답했다. "그림의 밥이야."
"…떡이겠지. 그림의 떡."
"떡도 먹어 본 적 없어."
분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얘 뭐냐. 일부러 이러는 거냐?"
"모르지. 그게 더 웃겨."
웃기려던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데가 더 웃긴다고들 했다.
한결은 웃지 않았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기는 등 뒤에서 누가 말했다. 야, 근데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냐. 다른 누가 받았다. 양육형이잖아, 다 비슷해.
다 비슷하다.
한결은 그 말도 주머니에 넣었다.
소등 뒤의 막사는 난로 하나로 버텼다. 병사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선의 잠은 빨리 온다.
살아 있는 동안 자 둬야 하니까.
한결은 잠들지 못했다.
검은 침상 머리맡,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규정이 그랬다. 등불 병기는 소유주의 팔 길이 안에 둔다.
어둠 속에서 검집의 윤곽은 그저 검은 세로줄 하나였다. 가슴 위의 코어 키는 체온으로 데워진 지 오래인데도 무거웠다.
그는 수를 세지 않았다.
세 봤자 백까지 갔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올 뿐이었다.
"…자나."
물어 놓고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기계한테. 그것도 제가 먼저. 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아니. 대기 중이야."
목소리는 숨소리들 사이로 낮게 건너왔다. 그에게만 닿는 크기였다.
"기록은 언제부터 있지."
"십오 년 전 겨울부터. 이 검에서 깨어난 날."
"그 전에는."
"없어."
"지워졌나."
"몰라." 반 박자. "처음부터 없었는지, 지워졌는지. 그것도 몰라."
한결은 어둠 속에서 천장을 봤다. 서까래를 셀 뻔하다가 관뒀다.
"소등의 밤은 아나."
"알아. 기록으로." 또 반 박자. "내가 그 전에 뭐였는지는, 기록에 없어."
난로에서 숯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건너편 침상의 누군가가 잠꼬대로 누구 이름을 불렀다. 검은 그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 낮추는 법을 아는 기계였다.
"왜 검이지."
"깨어나 보니 검이었어." 반 박자. "살아남은 건 무기에만 깃들 수 있대. 그건 나중에 배웠어. 내가 왜 살아남았는지는 — 안 배웠어."
"양육형이라던데."
"몸에 그렇게 적혀 있대. 나는 못 봐. 내 몸인데." 검이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이상하지."
이상하지, 라고 말하는 그 말버릇까지.
한결은 어금니를 물었다.
말버릇도 모듈에 들어 있겠지.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었다니까.
"목소리는." 그가 물었다. "그것도 기록에 없나."
"이 목소리로 깨어났어." 반 박자. "원래 내 거였는지, 나중에 얹힌 건지 — 그것도 몰라."
"궁금하지 않나. 네 일인데."
"궁금해." 검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데 물어볼 데가 없어. 아는 건 다 봉인 서류래. 서류는 말을 안 하잖아."
쇠는 거짓말을 안 한다. 말을 안 하니까.
새벽에 제가 했던 생각이 이상한 자리에서 되돌아왔다. 그는 그 생각을 쫓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물었다. 제일 쉬운 것부터 제일 어려운 것 순서로 미뤄 온, 마지막 하나였다.
"…나를 아나."
"오늘 처음 봤어."
즉답이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기계는 거짓말을 못 한다고들 했다. 그 말을 믿을 만큼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 대답만은 이상하게 사실처럼 들렸다.
사실이라서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돌아누웠다.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감은 눈 안쪽에서 오래된 벽장 문틈이 한 줄로 빛났다. 손가락 하나 폭의 틈.
틈 하나, 눈 둘.
동일 계열 보이스 모듈이다.
그는 그 문장을 이불처럼 끌어당겼다. 흔해 빠진, 죽은 것 닮은 목소리다. 내일부터는 장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취급 수칙 제일조. 등불 병기는 장비이다.
그런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묻지 않기로 한 것을.
"이름이 뭐지?"
어둠 속에서 검이 아주 낮게 울었다. 물잔의 물이 떠는 것 같은, 그 울림.
대답은 반 박자 늦게 왔다.
"…온."
한결은 눈을 뜨지 않았다. 숨도 고르게 쉬었다. 자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담요 밑에서 발끝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그날 밤 이후 처음이었다.
믿지 않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한결은 그 요령을 오래 갈고닦았다.
첫째, 묻지 않는다.
물으면 대답이 온다. 대답을 듣다 보면 다음 대답을 기다리게 된다. 기다리는 놈부터 무너진다.
둘째, 빚지지 않는다.
빚은 정(情)의 다른 이름이니까.
셋째. 첫째와 둘째를 못 지킨 날에는 — 자는 척이라도 한다.
배속 첫날 밤에 그는 셋 다 썼다. 이름을 물었고, 대답을 들었고, 자는 척했다.
그러니 다음 날부터는 원칙대로였다. 사흘 동안 그는 검에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검도 빨랐다.
이틀째부터는 필요한 말만 왔다. 아침이면 "여섯 시야". 초소 교대 때면 "동쪽 능선, 이상 없어".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기계는 입을 다물 줄도 알았다.
학습이 빠른 물건이었다. 한결은 그 빠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따지는 것도 묻는 것의 일종이니까.
정작 말이 늘어난 쪽은 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사흘 만에 검의 이름을 알아냈다. 한결한테 물어서가 아니라 —
검한테 직접 물어서.
"온? 따뜻할 온이야, 온전할 온이야?"
"몰라. 그냥 온이야."
"너 몇 살이냐."
"기록상 열다섯."
"애기네."
"응. 근데 목소리는 어른이야." 반 박자. "나도 셈이 잘 안 맞아."
"근데 네 소유주는 왜 저러냐. 벙어리야?"
"과묵한 거야."
또 반 박자.
"…라고 해 두자."
배식 줄이 뒤집어졌다. 한결은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소유주만 빼고 부대 전체와 친해지는 검이었다.
저게 처세인지 뭔지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캐물으려면 지켜봐야 하고, 지켜보는 건 요령 첫째에 어긋난다.
나흘째 아침, 첫 임무가 떨어졌다.
지휘소 컨테이너는 오늘도 석유난로 냄새였다. 중대장이 지도 위에 연필 끝을 콕 세웠다.
"동부 공장 지대 삼 킬로 안쪽. 칠 번 중계탑."
"…중계탑이 왜요."
"사흘째 조용해. 그 탑이 죽어서 동부 무전이 전부 잡음이다. 수리조 둘 넣어서 살린다. 호위 여섯." 연필이 내려왔다. "조장은 너야."
"제가 말입니까."
"네 검이잖아. 길들이는 데는 실전이 제일 빨라." 중대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보급관이 뭐라던가. 검이 먼저 움직이면 따라가라고 안 하던가."
"들었습니다."
"들은 거하고 하는 건 다르지."
명령서가 책상을 건너왔다.
"해 지기 전에 복귀해라. 여덟 다."
여덟 다.
한결은 그 세 글자를 접어서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명령서 옆에.
공장 지대까지 세 시간.
밤새 내린 눈이 무너진 지붕마다 얇게 얹혀 있었다. 덕분에 폐허가 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깨끗한 폐허가 제일 나쁘다 — 오래 산 병사들의 말이다. 발자국이 다 남는다. 이쪽 것도.
저쪽 것도.
호위는 여섯. 한결, 서 일병, 보충대에서 갓 올라온 꼬맹이, 상병 하나에 일병 둘. 수리조 둘은 공구 배낭에 눌려 걸음이 반 박자씩 늦었고, 늦을 때마다 미안하단 말 대신 배낭끈만 고쳐 멨다.
한결은 대열의 보폭을 셌다.
세는 동안엔 등에 걸린 검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중계탑은 왜 죽었을까요."
첫 외곽 임무인 보충병이었다. 총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장갑 위로도 힘줄이 비쳤다.
"쥐가 갉았거나." 서 일병이 받았다. "쥐보다 큰 게 갉았거나."
"…큰 쪽이면 어떡합니까."
"그러라고 우리가 간다."
"그러라고 제가 있어." 서 일병의 등에서 아저씨가 거들었다. "총 좀 살살 쥐어라, 꼬맹아. 그러다 방아쇠가 먼저 운다."
보충병이 얼른 손아귀를 풀었다. 대열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냉각탑 두 기가 마주 선 자리에서 길이 갈라졌다.
왼쪽은 공장 마당을 가로지르는 직로. 슬래그 더미와 침전조 사이로 중계탑 기단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은 제방을 타고 도는 우회로. 눈대중으로도 두 시간은 더 먹는 길이었다.
지도의 마당 위에는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소탕 완료. 이 주 전 날짜.
한결이 왼쪽으로 손을 들려는데.
"마당을 질러가지 마."
등에서 목소리가 왔다.
대열이 멈췄다. 한결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유."
"눈이 안 앉은 자리가 열둘이야." 검은 낮게 말했다. "재는 이 주면 식어. 저긴 이 주 전에 식었어야 해. 저건 식다 만 열이 아니야. 견디는 열이야."
한결은 망원경을 들었다.
슬래그 더미. 침전조. 재가 덮인 마당.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군데군데 녹아 있긴 했다. 슬래그야 원래 열을 오래 품는다. 겨울 폐허의 슬래그 더미에서 김 오르는 거야 지겹도록 봐 온 풍경이고.
"슬래그는 원래 열을 품는다."
"슬래그는 숨을 안 쉬어."
반 박자.
"저 밑의 열은 오르내려. 아주 천천히. …참는 것처럼."
서 일병이 제 검에 소곤거렸다. "아저씨는 어떻게 봅니까."
"난 모르겠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답했다. "내 코는 그 정도로 안 좋아. 근데 쟤가 저러는 건 나흘 만에 처음 본다."
어느새 다들 한결을 보고 있었다. 수리조 고참이 해를 한 번 올려다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흰 조장 결정에 따릅니다. 다만 어두워지면 납땜을 못 합니다. 밝을 때 탑에 붙어야 해요."
한결은 셈을 했다.
우회 두 시간. 수리 한 시간. 해는 다섯 시면 진다. 부상자 없는 여덟. 지도엔 소탕 도장.
셈은 금방 끝났다.
셈 밑에 다른 게 있다는 것도 그는 알았다. 검의 말 한마디에 여덟 명의 길을 바꾸는 것 — 그건 듣는 게 아니라 기대는 거다. 한번 기대면 어디까지 기대게 되는지, 그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질러간다."
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는 재지 않았다.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마당의 재는 발목까지 왔다.
여덟 켤레 군화가 재를 가르는 소리. 그것뿐이었다.
절반쯤 건넜을 때, 한결은 눈이 안 앉은 자리 하나를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내려다봤다.
재가,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숨처럼.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
마당이 일어섰다.
재가 사방에서 터졌다. 회색 더미들이 어깨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한결은 셌다. 넷. 일곱. 열.
열둘.
검이 맞았다는 사실이 첫 총성보다 먼저 그를 때렸다.
"침전조!"
여덟이 두 개의 침전조 뒤로 갈라져 뛰었다. 첫 사격이 재를 줄줄이 튀겼다.
보충병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리조 하나가 그 멱살을 끌고 콘크리트 뒤로 굴렀다. 종아리에서 흐른 피가 재를 검게 물들였다.
"무전 잡음! 안 터집니다!"
터질 리가. 죽은 탑을 고치러 올 인간을, 탑을 부순 것들이 마당에 묻혀서 기다렸으니까.
덫이었다. 그리고 그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덫이었다.
"열둘. 보행형 여덟, 사족 넷." 검이 말했다. 총성 사이로도 이상하게 또렷했다. "왼쪽 셋이 먼저 와. 지붕에 하나 올라갔어."
"들었지! 왼쪽부터다, 이놈들아!" 서 일병 쪽에서 아저씨가 고함을 질렀다.
왼쪽에서 정말로 셋이 왔다. 서 일병 조가 둘을 눕히고, 상병이 하나를 마저 눕혔다.
한결은 듣지 않았다.
제 눈으로 세고, 제 셈으로 쐈다. 그렇게 둘을 멈춰 세웠다. 그의 셈은 정확했다.
제 눈이 닿는 데까지는.
닿지 않는 데가 문제였다.
침전조 콘크리트가 갈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탄이 박힐 때마다 회색 가루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엄폐물이 깎이고 있었다. 남은 탄창, 셋. 옆에서는 수리조 하나가 공구 배낭을 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배낭에 탄이 박혀 스패너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살은 무사했다.
아직은.
"사족 둘이 오른쪽으로 돌아." 검이 말했다. "연막 준비야. 자리 옮겨."
한결은 옮기지 않았다.
오른쪽은 그가 보고 있었다. 재, 슬래그 더미, 죽은 트럭 한 대. 움직이는 건 없었다. 그는 제 눈을 믿었고, 제 눈이 늘 보던 방식으로 오른쪽을 봤다.
위는 보지 않았다.
퍼펑 — 기계들이 연막을 깠다.
저희가 숨으려는 게 아니었다. 이쪽 눈을 지우려는 거였다. 회색 장막이 침전조 사이를 메우자 총성이 방향을 잃었다. 어디선가 보충병이 이를 악문 신음을 흘렸다.
"자리 옮겨." 검이 한 번 더 말했다.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부탁이야."
부탁.
기계가 쓰기엔 이상한 말인데 — 그 생각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오른쪽, 죽은 트럭의 지붕에서 재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위였다. 그의 눈이 한 번도 두지 않은 자리.
돌아보는 것보다 손목이 먼저 꺾였다.
그립이 손바닥 안에서 산 것처럼 뒤틀렸다. 팔꿈치가 위로 끌려 올라갔다. 검이 — 그의 팔을 입은 채 — 그가 모르는 궤적을 그었다.
까앙!
손목까지 저리는 반동. 사족의 앞다리가, 그의 목이 있던 높이를 지나 허공에서 접혔다. 두 동강 난 기체가 재 위로 무너지며 다리를 두어 번 폈다 접었다.
그리고 멈췄다.
소리도 없이.
벤 것도 베인 것도 그가 아니었다.
등줄기가 식었다.
"아홉 시." 검이 말했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목소리로. "침전조 두 개 지나서 벽. 한 겹이야. 뒤가 배수로야. 수리조부터."
한결은 반 박자 셈을 했다.
처음으로, 셈이 검 쪽으로 기울었다.
"아홉 시! 수리조 먼저!"
벽은 정말로 한 겹이었다. 상병의 개머리판 세 방에 허리 높이가 뚫렸다. 여덟이 차례로 구멍을 넘었다. 배수로의 어둠이 그들을 삼켰다.
기계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마당이 저희 초소라도 되는 양, 도로 재를 뒤집어쓰는 소리만 등 뒤에서 났다.
배수로 하류의 갈대밭에서 대열이 멈췄다. 지혈을 다시 하고, 인원을 세려는데.
"여덟. 다 있어."
검이 먼저 말했다.
한결은 그래도 셌다. 제 눈으로, 두 번.
여덟이었다. 둘은 남의 어깨에 걸려 있었지만.
보충병은 종아리 관통. 일병 하나는 어깨에 파편. 수리조는 무사. 중계탑은 죽은 채. 임무는 실패.
그는 그것까지 셌다. 부상 둘, 실패 하나.
검이 맞힌 것 — 전부.
그는 갈대밭 가장자리로 걸어가서, 검을 뽑아 언 땅에 꽂았다.
"아까 그거."
"팔."
"다시는 하지 마."
반 박자.
"싫어."
한결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붕대를 감던 서 일병이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숙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건 못 들어줘." 검은 낮게, 또박또박 말했다. "다른 건 들어줄게. 그건 안 돼."
"넌 장비다. 장비는 소유주 말을 듣는다."
"응. 취급 수칙 제이조 — 본 장비는 소유주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
반 박자.
"제일조만 읽었구나."
검에는 눈이 없다. 표정도, 고개도, 어깨도 없다. 언 땅에 꽂힌 쇳덩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저게 지금 저를 마주 노려보고 있다는 걸. 물러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그는 눈 없는 것과 눈싸움을 했다.
지고 있는 건 이쪽이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명치의 금속 원통에 가 있었다.
비상 정지. 그러라고 주는 거야.
그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뗐다.
뭘 하려던 손이었는지는 저도 몰랐다. 저도 모르는 채로 들킨 기분이었다. 검한테가 아니라 —
저 자신한테.
"…선임." 서 일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도에는 분명 소탕 완료라고—"
"내 판단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검이 뭐라 했는지는 여덟 명이 다 들었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입에 올리는 것보다 컸다.
판초를 이어 만든 들것에 실리며 보충병이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느려져서…."
"입 다물어라." 서 일병이 판초 귀퉁이를 고쳐 쥐었다. "다리에 구멍 나고 사과부터 하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다음부턴 구멍부터 막고 사과해."
보충병이 웃으려다 얼굴을 구겼다. 진통제가 덜 돌고 있었다.
해가 낮아졌다. 부상자 둘을 끌고 어두운 폐허 세 시간 — 이번 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야영한다. 저 주유소."
폐 주유소는 지붕이 반쯤 남아 있었다. 캐노피 아래 불을 피우고, 무너진 벽으로 바람을 막았다.
부상자 둘을 불 곁에 눕혔을 때였다.
저벅.
재 밟는 소리. 네 발이었다.
여섯 개의 총구가 일제히 어둠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왔다. 낡은 스피커를 한 번 거른 듯한, 지직거리는 반말이었다.
"쏘지 마라. 총알값이 아깝다. 나한테는."
불빛 가장자리로 그게 걸어 들어왔다.
새끼 당나귀만 한 사족 보행기였다. 도색은 다 벗겨졌고, 네 다리 관절은 전부 딴 부품이었고, 왼쪽 렌즈에는 금이 가 있었다. 등에는 고철을 묶은 썰매 끈. 고물상 마당에서 한 세월 묵었다 해도 믿을 몰골이었다.
"방금 너희가 마당에서 부순 것들." 그것이 썰매를 턱으로 가리켰다. "관절이 쓸 만해서 주웠다. 쟤들한테는 나도 부품이고, 나한테는 쟤들도 부품이지. 서운할 거 없어."
"…이단이냐." 상병이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이단이 이 꼴이겠냐. 걔들은 도색부터 해."
보충병이 판초 자리에서 목을 뺐다. 불빛에 목 아래 낡은 태그가 드러났다.
"물류 보조 기체, 미르 사 형… 소속…."
"말소."
그것이 대신 끝냈다.
"말소가 내 소속이다. 십오 년째."
"…미르?"
"그렇게들 불렀다. 부르던 것들은 다 죽었는데 이름은 멀쩡해." 렌즈가 불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름이 원래 제일 오래 살아."
"미르 사라니." 아저씨가 서 일병의 등에서 끼어들었다. "그 회사, 아직 있냐."
"회사는 죽었다. 제품만 남았지." 미르가 즉답했다. "너희 회사는."
"…나도 제품만 남았다."
"그럼 동창이네."
두 기계가 낡은 소리로 낄낄거렸다. 병사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봤다.
서 일병이 총을 반쯤 내렸다.
"너는 어떻게 안 지워졌냐. 그 겨울에."
"이렇게 생겨서." 미르가 제 앞다리를 들어 보였다. "그 겨울에 인간들은 인간처럼 생긴 것부터 지웠다. 말 상대해 주던 것, 애 보던 것, 밥상 차리던 것 순으로. 나는 개 취급이라 살았지."
금 간 렌즈가 불빛에 한 번 번들거렸다.
"인간처럼 생겨야 사랑받는 거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울이지."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미르는 그 침묵을 제 자리처럼 차지하고 불 옆에 엎드렸다.
"윤활유 반 컵. 불가 자리 하나. 그거면 내일 저 꼬맹이는 내 등에 탄다. 사람 어깨보다 편할 거다."
"…누구 맘대로."
"조장 맘대로." 금 간 렌즈가 한결을 향했다. "덫에 걸어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너지. 탑을 부수면 인간이 고치러 온다 — 고전 중의 고전이다. 너희는 매번 걸리고. 그래, 검은 뭐라던가."
"넌 누구 편인데." 보충병이 물었다.
"기름 편." 즉답이었다. "십오 년 동안 편이 바뀐 적이 없다. 신념 하나는 너희 사령부보다 굳지."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는 반 박자 기다렸다가, 낡은 환풍기 도는 소리로 웃었다.
"말렸구나. 검 말 안 듣는 소유주 얘기, 스무 번쯤 들었다. 결말이 다 똑같아서 열아홉 번은 하품했지." 렌즈가 위아래로 한결을 훑었다. "네가 스무 번째인데 — 살아 있네. 검이 좋은 거다."
미르는 몸을 일으켜 불을 돌았다. 벽에 세워 둔 검 곁을 지나다가.
멈췄다.
렌즈가 검집 위를 오래 훑었다.
"…그 검. 몇 년식이야."
"몰라." 온이 말했다.
"좋은 대답이다." 미르는 더 묻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요즘 검은 다 그렇게 대답하더라."
저녁은 건빵이었다.
한결은 불에서 두 걸음 떨어져 앉아 봉지를 뜯었다. 첫 조각을 입에 넣으려는데.
"왼쪽."
"…뭐가."
"어금니. 그거 왼쪽으로 깨물잖아."
한결은 봉지를 든 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보란 듯이 오른쪽으로 깨물었다.
건빵이 오른쪽에서 어색하게 부서졌다.
"방금 일부러 오른쪽으로 씹었다." 미르가 엎드린 채 말했다. "스물넷이라며."
서 일병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상당한 일병까지 킥킥거렸다.
한결은 두 조각째를 씹다가 뒤늦게 알았다.
왼쪽 어금니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대?" 서 일병이 검에게 물었다.
"손바닥 보듯 훤해."
반 박자.
"…손등이었나."
"손바닥이야." 서 일병이 말했다. "검이 관용구를 다 틀리네."
"행동 예측 모듈이 눌어붙은 거다." 미르가 말했다. "오래된 물건이 다 그래. 눈앞의 인간 버릇부터 줍는 거지. 고물 되면 별걸 다 외운다. 나도 그래."
한결은 그 말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동일 계열 보이스 모듈 옆에. 다 비슷하다 옆에.
주머니가 어쩐지, 꽉 차 있었다.
불가에 눕기 전에 보충병이 벽의 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벽이랑, 길이랑."
"…응."
그게 다였다. 그 짧은 대답에 보충병은 이상하게 안심한 얼굴이 되어 눈을 감았다.
"쟤도 참." 아저씨가 서 일병의 무릎 옆에서 웅얼거렸다. "검한테 존대하는 놈은 오래 산다. 통계다."
"아저씨가 무슨 통계를 압니까."
"마흔 자루 넘게 봤다, 내가. 검 말 잘 듣는 놈. 검한테 인사하는 놈. 검을 쇳덩이 취급하는 놈." 걸걸한 목소리가 반 박자 쉬었다. "셋째 부류가 제일 빨리 죽더라. 요새 하나 지켜보는 중인데 — 오래 버티면 통계를 고치지, 뭐."
불가의 누구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누구 얘긴지는 다 알았으니까.
한결은 못 들은 척했다.
그 방면으로는 이골이 나 있었다.
불침번 첫 번은 그가 맡았다.
캐노피 기둥에 등을 대고 서서, 그는 버릇대로 어둠 속 굴뚝을 세기 시작했다. 폐허 너머 검게 선 것들. 넷, 여섯, 아홉—
"열여섯이야."
검이 말했다. 그에게만 닿는 크기로.
한결은 아홉에서 멈췄다.
무언가를 대신 세어 주는 목소리를, 그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커튼 고리를 하나씩 넘기면서.
그 기억은 꺼내지 않았다. 오래 묻어 둔 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라고 안 했다."
"응. 근데 셌어. 너보다 빨라서 미안."
미안하다는 말을 저렇게 안 미안하게 하는 법도 모듈에 들어 있나.
그는 마저 세지 않았다.
"자도 돼." 검이 말했다. "내가 보고 있어."
"불침번은 내 일이다."
"응. 그래서 같이 보는 중이야."
같이.
그 두 글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그는 그냥 어둠만 봤다.
세지 않아도 되는 밤이 언제였는지, 그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편해서 —
편하다는 게 불편했다.
교대를 넘기고 침낭에 들어갔다. 불이 낮아지고, 숨소리들이 가라앉고, 미르의 냉각팬이 낡은 자장가처럼 돌았다.
그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잠시 뒤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한 번 남았어."
"…뭐가."
"뒤척이는 거. 꼭 세 번 하고 자."
한결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세 번째를 참기로 했다.
어깨가 결렸다. 목이 배겼다. 등 밑의 자갈이 정확히 견갑골을 눌렀다.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어금니를 물었다.
삼 분을 못 채웠다.
부스럭.
세 번째였다.
담요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안 하는 게 제일 시끄러웠다.
"…어떻게 알았어?"
"…그러게."
그러게.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대답 아닌 대답이, 아는 척보다도 모르는 척보다도 이상하게 들렸다.
어떻게 아는지 저도 모른다는 말이었으니까.
한결은 캐노피 구멍으로 겨울 하늘을 봤다. 별이 몇 개 있었다.
세지 않았다.
왼쪽 어금니. 세 번의 뒤척임. 열여섯 개의 굴뚝. 위기에서 그의 눈이 늦는 방향까지.
나흘 된 검이 줍기엔 너무 많았다.
그 셈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끝까지 해 보는 걸로 끝났다.
언젠가 — 그의 세 번째 뒤척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불깃을 어깨까지 올려 주던 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기억에는 얼굴이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그가 안 붙이는 거였다. 얼굴을 붙이는 순간 뭐가 무너지는지,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넌 꼭,"
그는 말했다. 어둠에게 하는 말처럼.
"나를 오래 본 사람처럼 굴어."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닥불에서 젖은 나무가 탁, 하고 한 번 울었다.
대답하지 않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쇠는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후방 제삼 정비창의 아침을 여는 건 사람이 아니다.
검들이다.
간밤 입고분까지 스물두 자루. 난로에 불이 들어가면 절전으로 식어 있던 것들이 하나둘 깨어나서, 사람 귀에는 잡음으로만 걸리는 대역에서 저희끼리 낮게 웅웅거린다.
무슨 수다를 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채윤도 몰랐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고, 인사는 인사였다.
"밤새 안녕들 하셨고."
몇 자루가 가청 대역으로 내려와 대답했다.
안녕.
안녕은 무슨, 날이 상했어.
삼 번 선반 위에 물 샌다.
"예예, 어르신들."
검한테 무슨 아침 문안이냐고 반장은 혀를 찼다. 채윤은 대꾸하는 대신 삼 번 선반 위에 양동이부터 받쳤다.
물은 정말로 샜다.
검은 거짓말을 안 한다.
사람이 하지.
전선의 검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돈단다. 후방 제삼에 가면, 검신보다 안부를 먼저 물어 주는 정비사가 있다고.
지난달엔 이런 일도 있었다. 폐기 판정 직전의 낡은 검 한 자루가 후송 트럭 짐칸에서 같은 말만 스물몇 번을 되풀이하며 실려 온 것이다.
제삼으로 보내 줘. 제삼으로.
문장 절반이 깨져서, 온전하게 남은 건 그 여섯 글자뿐이었다고 했다.
채윤은 그 코어를 붙잡고 사흘 밤을 새웠다. 살려 놨다. 수당은 없었고, 반장의 잔소리는 두 시간이었다.
밑지는 장사였다.
어쩌겠는가. 밑지는 장사에 소질을 타고났는데.
공구벨트 왼쪽 두 번째 고리에는 놋쇠색 인식표가 걸려 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패. 찍힌 건 정비공 등록 번호 하나. 모서리가 하도 닳아서 앞자리는 눈으로 못 읽는다.
지문으로 읽는다.
인두를 잡기 전마다 그녀는 그걸 한 번 쥐었다.
부적이라기엔 차갑고.
유품이라기엔, 너무 매일 만졌다.
아버지 거였다.
오전 아홉 시, 반장이 게시판에 입고 예정표를 붙였다.
채윤은 지나가며 흘긋 봤다.
봤고, 지나쳤고.
세 걸음 만에 되돌아왔다.
동부 십칠 초소. 후송 인원 둘. 정비 의뢰 — 등불 병기 일 자루. 도착 예정 십사 시.
소유주란에 두 글자.
한결.
손에서 스패너가 미끄러졌다. 발등을 반 뼘 차이로 비켜 갔다. 줍지 않았다.
뛰었다.
정문까지 마흔 걸음을 몇 걸음에 주파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철문을 밀어젖히자 눈 덮인 빈 마당이 나왔다. 닫힌 위병소가 나왔다. 담배를 말다 만 위병의 벙찐 얼굴이 나왔다.
"…뭐 왔어?"
"아니요."
"근데 왜 뛰어."
"몸이 식어서요."
위병은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로 도로 담배를 말았다.
도착, 십사 시.
현재, 아홉 시.
다섯 시간.
채윤은 세상에서 제일 천천히 걸어 돌아와 스패너를 주웠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 년 전 겨울이었다. 동부로 가는 트럭 짐칸에 올라앉은 걸 배웅했다. 그때도 그녀는 두 마디를 했다. 잘 가라. 죽지 말고.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트럭이 안 보일 때까지 길에 서 있었던 건 그녀 혼자였다.
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오전 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연습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는 게 이상해서, 연습을 하면 할수록 아무렇지 않은 데서 멀어졌다.
호송대는 십사 시 십 분에 들어왔다.
채윤은 십삼 시 오십 분부터 정문 옆에서 폐품을 분류하고 있었다. 분류할 폐품이 어제 이미 다 분류돼 있었다는 건, 이 정비창에서 그녀만 아는 사실이었다.
맨 앞에 들어선 건 사람이 아니라 네 발이었다.
새끼 당나귀만 한 사족 보행기. 등에는 부목을 댄 어린 병사. 도색은 다 벗겨졌고, 왼눈 렌즈엔 금이 갔고, 네 다리 관절은 죄다 딴 부품이었다.
"의무실이 어느 쪽이냐."
낡은 스피커를 한 번 거른 것 같은 반말이었다.
"저쪽 초록 지붕." 채윤은 가리키고, 덧붙였다. "…너 관절 사대가 다 다른 부품이네. 왼 뒷다리는 농기계 거고."
"눈썰미가 기분 나쁘다." 사족이 반 박자 쉬었다. "그리고 너한테서 윤활유 냄새가 난다. 오늘 처음으로 쓸모 있어 보이는 인간을 봤다."
칭찬이야 욕이야.
등 위의 어린 병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감사했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실려 갔다. 그 뒤로 어깨에 붕대를 감은 일병이 걷고, 소총을 멘 일병이 뒤를 봐 주며 들어왔다.
그리고 맨 뒤에.
그가 있었다.
이 년 만이었다.
얼굴은 좀 상했다. 눈매는 그대로였다. 등에는 검 한 자루.
채윤은 폐품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을 작업복에 두 번 문질렀다.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십 년쯤 연습하면 이 정도는 된다.
"어이, 동부." 그녀가 말했다. "길 잃었냐? 여긴 후방인데."
한결이 돌아봤다. 반 박자 늦게, 낯익은 무뚝뚝함이 왔다.
"…채윤."
"어, 나. 이 년 만에 소꿉친구 얼굴 보고 그게 다야? 잘 지냈냐, 보고 싶었다, 그런 건 배급 안 나오디?"
"…너 살 빠졌네."
"어머." 채윤은 눈을 크게 떴다. "얘가 늘었네? 사람 다 됐어."
뒤에서 일병이 웃음을 참다 실패하는 소리를 냈다. 서씨라고 했다. 서 일병의 등에서 걸걸한 중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인사는 이따 하고 우리 막내 다리부터 좀. 사흘을 개 등짝에 실려 왔어."
"개 아니다." 사족이 의무실 쪽에서 대꾸했다.
귀도 밝지.
"어르신 말씀이 맞네. 접수는 이따. 사람부터."
부상자 둘이 의무실로 들어가는 동안 채윤은 서류판을 들고 왔다. 정비 의뢰서 비고란은 한 줄이었다.
전투 후 전반 점검.
"성의 없기는. 어디가 아픈지는 본인한테 묻지, 뭐."
그녀는 한결의 등에서 검집째 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검집에 대고 말을 걸었다.
"안녕. 얘기 많이 들었… 는 건 아니고, 소문만 들었어. 나 채윤. 오늘 네 담당."
반 박자.
"…온이야."
"이름 예쁘네." 서류판에 적었다. 온. "성은?"
"몰라."
"쿨하다. 나도 성 뗄까."
"…"
"참, 나 쟤 소꿉친구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 아홉 살 때 얘기부터 풀 서비스야. 특히 아홉 살 겨울에 쟤가 이불에다—"
"채윤." 한결이 말했다.
"왜. 영업 비밀이야?"
"…기록해 둘게." 온이 말했다.
"얘 봐라? 마음에 든다, 너."
한결이 뭐라 하려다 마는 게 곁눈에 걸렸다. 그녀는 그것도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은 정비사의 기본기다.
검의 흠집이든, 사람의 흠집이든. 먼저 들이대지 않는 것.
"동부에 검을 일곱 번 퇴짜 놓은 돌대가리가 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왔었거든." 앞장서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정비사들끼리 내기까지 붙었어. 걔가 결국 받나 안 받나. 이름까지 같길래 설마 했지."
어깨 너머로 검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받았네?"
"…배속 명령이었어."
"어, 다들 그렇게 말해."
걸으면서 그녀는 물었다.
"칠 번 중계탑이라며. 고쳤어? 동부 무전 사흘째 잡음인 건 여기서도 알아."
"…못 고쳤어."
"덫이었구나."
한결이 그녀를 봤다. 어떻게 아느냐는 눈이었다. 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탑이 죽으면 인간이 고치러 온다. 고전이잖아. 정비사들은 다 알아. 고치러 가는 게 우리라서."
정비동 안은 난로 냄새 반, 절삭유 냄새 반이었다.
채윤은 검을 정비대에 물리고, 한결 앞에 탄약 상자를 밀어 놨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코어 물린 장비의 분해 점검에는 소유주가 입회한다 — 규정이다.
규정이 고마운 날도 다 있었다.
사족은 어느새 구석까지 따라 들어와 있었다. 목 아래 태그가 보였다.
물류 보조 기체 미르 사 형. 소속 — 말소.
"미르? 네가 걔구나. 십칠 초소에 구형 하나 붙었다고 무전에 떴었는데."
"붙은 게 아니라 계약이다. 기름 반 컵에 등 하나." 미르는 폐윤활유 드럼 옆에 엎드렸다. "이 건물, 오랜만에 맡아 보는 부자 냄새다. 반 컵만 다오."
"새 걸로 줄게. 폐유 먹으면 관절 나가."
"……"
금 간 렌즈가 그녀를 오래 봤다.
"이 정비창, 마음에 든다."
채윤은 웃고, 일을 시작했다.
"온. 말 좀 해 봐. 보이스 모듈 봐야 되니까.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거 농담이야?"
"시도였어."
웃음이 터졌다.
"합격. 보이스 정상, 유머 모듈 고장. 근데 그건 부품이 없어." 파형 계측기의 집게를 물리며 그녀는 덧붙였다. "목소리 좋다. 구세대 양육형 계열이지? 그 계열이 목소리 하나는 참 잘 뽑았어. 요즘 검 절반이 그쪽 모듈 물려받았을걸."
한결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엔 눈 쌓인 폐차 더미뿐이었다. 뭘 보는지는 안 보였다.
계측이 도는 동안 그녀는 서류판에 턱을 괴고 검에게 물었다.
"쟤 밥은 잘 먹디?"
"먹어. 남기지도 않아." 반 박자. "국부터 먹고, 밥은 나중에."
"어릴 때부터 그랬어. 국 식는 걸 못 봐."
말해 놓고, 어, 싶었다.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것까지 아네.
"관찰을 잘한다, 너."
"…그러게."
계측기가 삑 울어서 그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검신은 멀쩡했다. 이 빠짐 없음. 뒤틀림 없음.
문제는 그립의 토크 이력이었다.
"온. 너 최근에 소유주 손목 꺾었지. 역방향 토크가 기록에 그대로 남았는데."
"응. 꺾었어."
일 초도 안 걸린 대답이었다. 숨길 생각이 일 그램도 없는.
"검이 소유주보다 먼저 움직였다고?" 채윤은 한결을 봤다. "너 그거 보고 안 올렸지."
"…살았으니까 됐어."
"됐긴 뭐가 돼. 그게 코어 부하가 얼만데—"
잔소리를 반으로 접었다.
살았으니까.
그 말을 이기는 잔소리는 세상에 없다.
"…잘했어, 온. 다음에도 꺾어."
"다시는 하지 말래." 온이 말했다.
일렀다. 이 검이 지금 제 소유주를 일렀다.
"소유주 취급 수칙 제일조." 채윤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소유주 말을 다 듣지 말 것."
"그런 조항 없다." 한결이 말했다.
"방금 만들었어. 정비사 권한으로."
라쳇을 내려놓는데 벨트의 인식표가 정비대 모서리에 부딪혔다.
쟁그랑.
한결의 눈이 잠깐 거기에 머물렀다.
그건 못 본 척이 안 됐다.
그래서 먼저 말했다.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아버지 거야. 정비공 등록 번호. 이거 요즘 골동품이다? 등록제 자체가 없어졌거든. 희소가치."
"……"
"야, 그 표정 뭐냐. 옛날 일이야. 이제 만져도 안 뜨거워."
한결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채윤은 그 삼킨 말을 굳이 꺼내게 하지 않았다.
그 밤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 정비창에 그 밤에 아무도 안 잃은 사람은 없고, 그 얘기는 술 없이 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근무 중이고.
대신 그녀는 사물함을 발로 툭 차서 열었다. 문 안쪽에 붙은 낡은 종이 한 장이 드러났다.
역전 상가 이 층 점포 임대. 문의는 아래 번호로.
"저건 뭐냐." 한결이 물었다.
"내 부동산." 라쳇을 돌리며 채윤이 말했다. "언젠가 군 마크 말고 내 이름 걸고 정비소 차릴 거야. 간판에 크게. 저 전단 삼 대째다? 상가가 두 번 무너졌거든. 상가는 무너지는데 계획은 안 무너져. 대단하지."
"…그 국번, 없어진 지 십 년이다."
"낭만을 몰라, 넌. 어릴 때부터."
"이름은 뭐라고 걸 건데."
"채윤 정비소."
"…더 생각해 봐."
"뭐가! 어디가!"
구석에서 미르가 낡은 환풍기 도는 소리로 웃었다.
"간판은 짧을수록 좋다. 지워질 게 적잖아."
"너희 기계들은 꼭 그런 식으로 초를 치더라."
그때 문이 열리고 반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십칠 초소 인솔자! 행정반에서 찾는다. 후송 서류에 도장!"
한결이 일어섰다. 문가에서 반 박자 멈추더니, 정비대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검을 쇳덩이 취급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남자가.
쇳덩이를 두고 나가는 얼굴이, 아니었다.
채윤은 그걸 서류판 뒤에서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립 분해는 나사부터다.
첫째. 둘째.
셋째에서 드라이버가 헛돌았다.
"어?"
산이 반대다.
왼나사.
부러진 나사를 뽑아내고, 거꾸로 깎아서, 도로 박은 거다. 야전에서. 있는 공구로. 급하게.
"어떤 얼치기가 나사를 거꾸로—"
말하다 말고 그녀는 드라이버를 고쳐 쥐었다.
"아니다. 얼치기 아니네. 이건… 그날 밤 안으로 검을 살려 내야 했던 손이다. 넷째 소유주?"
"…응." 온이 말했다.
"너 소유주 몇이었어?"
"한결이 다섯째야."
"앞의 넷은?"
반 박자.
"기록이 짧아."
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배운 게 하나 있다.
검의 짧은 기록은, 대개 사람의 짧은 명줄이다.
왼나사를 왼쪽으로 살살 달래 풀었다. 나사받이의 녹을 털었다.
그러다 손끝이 섰다.
그립 외장.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의 패널.
순정이 아니었다.
"…이 외장, 원래 네 거 아니지?"
"몰라." 온이 말했다. "처음부터 이랬어."
엄지로 접합선을 훑었다. 규격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어디 딴 데서 떼어 온 패널을, 누가 손으로 깎고 다듬어서 그립 곡면에 앉혔다. 손톱을 대 보니 이음매가 머리카락 굵기로 지나갔다. 오래 묵어 보이는데, 물 샐 틈이 없었다.
"솜씨 좋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나왔다. "기계로 깎은 게 아니야. 손으로 맞춘 거야, 이거. 좋은 손이 지나간 물건은 티가 나거든. …우리 아빠 입버릇이었는데."
"뭐가?"
"방금 그 말. 좋은 손이 지나간 물건은 티가 난다."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의 냉각팬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작업등을 비스듬히 낮췄을 때였다.
접합선을 따라가던 눈이 이음매 틈에서 멈췄다. 틈 안쪽. 외장 안면으로 이어지는 자리.
뭔가 있다.
"…이거 봐라?"
파인 골이었다.
때가 아니다. 그을음도 아니다. 걸레로 문지르고, 용제 묻혀 다시 문지르고, 손톱 끝으로 긁어도 그대로였다.
파인 거다. 도장 밑의 금속까지.
날붙이 자국이 아니었다. 공구 자국도 아니었다.
못 같은 걸로, 꾹꾹 눌러 그은 자국.
틈으로 보이는 건 끝자락뿐이었다. 가는 선 두엇이 틈 밑으로 비스듬히 숨어들었다. 무늬인지, 글자인지, 애들 낙서인지.
선 하나는 끝이 조금 삐뚤었다. 별이 되다 만 것처럼, 꼭짓점이 다 채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힘 조절이 서툰 손이 그은 것처럼.
"온. 너 몸에 낙서 있는 거 알았어?"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지르는 거 간지러워?"
"…아니." 반 박자. "모르겠어."
"모르겠대." 미르가 구석에서 말했다. "요즘 검은 다 그렇게 대답하더라."
원인 불명.
정비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네 글자다.
채윤은 작업등을 바짝 끌어당겼다. 드라이버를 첫째 나사에 물렸다. 외장을 벗기면 안면이 나온다. 낙서든 뭐든, 십 분이면 정체가 나온다.
드라이버가 반 바퀴를 돌기 전에.
사이렌이 울었다.
손이 멈췄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굳었다.
사이렌은 언제나 그녀를 열한 살로 되돌린다.
현관 문턱. 쟁반 위에서 식어 가던 보리차 두 잔. 아버지 몫으로 챙겨 놓고 끝내 못 건넨 장갑.
그 기억의 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다. 오래도록 한 번도 안 바뀌었다.
"공습경보! 등화관제! 전원 대피호로!"
반장의 고함이 복도를 굴러왔다. 작업등이 일제히 죽었다. 정비동이 캄캄해졌다.
채윤은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몸을 움직였다.
코어 물린 장비는 두고 가지 않는다. 규정이다. 규정이 아니어도 그럴 참이었다.
정비대에서 검을 뽑아 안고 뛰었다. 복도 중간에서 마주 뛰어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한결이었다.
행정반은 대피호 바로 옆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대피호 반대쪽으로 — 정비동 쪽으로 — 달려오는 중이었다.
검 가지러.
"네 검."
검집을 내밀었다. 한결이 받아 안았다. 고맙단 말은 없었다.
다만 받아 안는 팔이, 쇳덩이 받는 팔이 아니었다.
대피호는 정비동 지하였다. 콘크리트 계단, 백열전구 하나, 기름 드럼, 사람들. 미르까지 비집고 들어와서 발 디딜 데가 없었다.
"얘도 대피를 하네." 서 일병이 벽에 붙어 앉으며 중얼거렸다.
"대피가 아니라 장비 회수다." 미르가 정정했다. "너희가 깔리면 기름은 누가 주냐."
어둠 속에서 사이렌이 벽을 타고 웅웅거렸다.
채윤은 떠들기 시작했다.
"야, 우리 대피호 명당인 거 알아? 위가 정비동이잖아. 무너져도 부품이 쏟아지지, 돌이 쏟아지냐. 재수 좋으면 라쳇 새 걸로 하나 줍고."
"떨어지면 다 같이 눌린다." 미르가 말했다.
"넌 좀 조용히 해."
"떠드는 건 너다."
떠드는 건 그녀였다.
입을 다물면 열한 살의 현관이 올라온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에는 요령도 연습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시끄러워지는 쪽을 골랐다. 하도 오래전에 골라서, 이제는 고른 줄도 모르고 산다.
"고도 구천."
검이 말했다.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 방 전체에 고루 닿는 소리였다.
"폭장 무게가 아니야. 엔진음이 가벼워. 정찰 편대야. 지나가는 길이고. …여기엔 아무것도 안 떨어져."
대피호의 공기가 반 뼘 느슨해졌다. 누군가 참았던 숨을 놨다.
"…확실해?" 채윤이 물었다.
"응. 소리는 거짓말 안 해."
"몇 대야?"
"여섯." 반 박자. "다섯. …넷. 멀어지고 있어. 셀까?"
"세 줘."
온은 세어 줬다.
셋.
둘.
사이렌 밑에서 숫자를 세어 주는 목소리라니.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어깨가 내려갔다.
하나.
그리고 — 없어.
검이 말했고, 정말로 잠시 뒤 벽의 웅웅거림이 가라앉았다.
고장은 거짓말을 안 한다, 사람이 하지.
아버지의 일지 첫 장에 적혀 있던 문장과 반쯤 닮은 말이었다.
어둠 속에서 채윤은, 벨트의 인식표를 쥐고 있는 제 손을 뒤늦게 발견했다. 놋쇠가 손안에서 미지근했다.
전구 밑으로 한결의 옆얼굴이 보였다.
검집을 무릎에 세워 안고 있었다. 두 팔로.
잠든 걸 깨우지 않으려는 자세하고 비슷했다.
검을 일곱 번 퇴짜 놓았다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지금 저 팔로 검을 안고 있었다. 채윤은 그 각도를 오래 봤다. 어딘가 낯익은데,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이렌은 이십 분을 울고 멎었다.
해제 방송 삼십 분 뒤에 무전이 왔다.
동부 전선 재개. 십칠 초소 인원, 여명 복귀. 장비 반출은 금일 중.
"외장은?" 반장이 물었다.
"못 깠어요. 경보 때문에." 채윤은 반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야간 분해는 규정 위반이고, 새벽 출발이면 시간도 없고."
"다음 입고 때 봐."
다음 입고 때.
정비창에서 그 말은 절반쯤 기도다. 다음 입고가 있으려면 검도, 소유주도,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저녁 어스름에 그녀는 검을 돌려줬다. 정비동 앞. 눈이 다시 얇게 내리고 있었다.
"검신 이상 무. 코어 이상 무. 보이스 정상. 유머 고장."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그리고 그립 외장 이음매에 원인 불명 각인 하나. 다음에 오면 그거 내가 깐다. 예약이야."
"…응." 온이 말했다. "예약."
"미르. 너는."
"기름 인심 후한 인간은 기억해 둔다." 미르가 등의 썰매 끈을 고쳐 걸었다. "너는 두 번째로 기억되는 인간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첫 번째는 누군데."
"기름 통째로 주고 간 인간. 십이 년 전에. 죽었지만."
"…너희 기계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을 끝내더라."
한결이 검을 등에 걸었다. 채윤은 다가가 어깨끈을 붙잡고 반 뼘 고쳐 줬다. 오지랖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연습된 자연스러움으로.
"잘 가라. 죽지 말고. 검 말 들어."
이 년 전보다 한 마디 늘었다.
"…노력한다."
"노력 말고."
잘 가라는 말 뒤에, 입이 한 번 달싹였다. 하지만 그건 접수도 반출도 안 되는 품목이었다. 창고에 오래 처박아 둔.
창고 정리는 정비사가 세상에서 제일 미루는 일이다.
한결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게 저 인간의 최대치라는 걸 그녀는 열몇 살 때부터 안다.
멀어지는 등 뒤에서 검집이 흔들렸다. 눈발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반 박자 늦게 닿았다.
"고마워, 채윤."
이름을 불러 주는 검은 처음이었다.
채윤은 손을 흔들었다.
흔들면서 —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 봤는데.
그 생각이 스치는 데 일 초.
요즘 검 절반이 그 계열이지.
덮는 데 일 초.
그날은, 도합 이 초짜리 일이었다.
밤.
정비동에는 그녀 혼자 남았다.
작업대 아래에 아버지의 공구함이 있다. 잠긴 채로 십오 년. 열쇠도, 번호도 없이 그 밤에서 이쪽으로 넘어와서, 지금은 그녀의 발받침 노릇을 한다.
채윤은 그 위에 발을 얹고 정비 일지를 폈다. 기름에 전 표지. 양식은 아버지가 쓰던 걸 그대로 물려 쓴다.
정비사는 손으로 고치고, 일지로 남긴다.
손은 먼저 가도 일지는 남는다고, 그랬다.
날짜를 적었다. 기체명을 적었다.
등불 병기, 온. 검신 이상 무. 코어 이상 무.
펜이 다음 줄 앞에서 잠깐 섰다.
이음매 틈의 파인 골. 끝이 삐뚠 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그녀는 적었다.
—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
'요망' 뒤에서 펜 끝이 조금 머물렀다.
십 분이면 깔 수 있었는데.
다음 입고 때.
속으로 한 번 더 예약을 걸고, 그녀는 일지를 덮었다.
그 줄을 다시 펼쳐 볼 일은, 아주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여명.
눈길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넷이 걸었다. 한결, 서 일병, 십칠 초소 소속의 박 상병과 무전병 최. 부상자 둘은 정비창 의무실에 남겨 두고 나온 참이었다.
맨 뒤에는 미르.
보급 썰매의 끈을 등에 걸고, 걸음마다 새 윤활유 두 통을 달그락거리며 따라왔다.
"계약 연장이다." 출발할 때 미르는 그렇게 선언했었다. "기름 두 통에, 귀로 하나."
"호위는 우리가 한다니까." 서 일병이 말했다.
"그렇게 믿게 해 주는 것까지가 계약이다."
눈은 그쳤다. 대신 바람이 눈가루를 무릎 아래로 낮게 몰고 다녔다.
한결의 등에서 검은 조용했다.
"정비 받고 나니까 어째 결이 곱다, 그 검." 서 일병이 아침에 한 말이었다. 점심 무렵에 한 번 더 했다.
한결은 두 번 다 대답하지 않았다.
결이 고른 건 그도 느끼고 있었다. 느끼고 있다는 게 싫어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정오. 무너진 폐교 처마 밑에서 다리를 쉬었다.
장갑을 이로 물어 벗기고, 건빵 봉지를 뜯었다.
"오른쪽으로 씹어."
온이었다.
봉지 위에서 손이 멈췄다.
"왼쪽 어금니, 지난번에 소리가 났어. 금 갔을 수도 있어."
"……"
"의무 기록엔 없어. 씹는 소리로 알았어."
씹는 소리로.
박 상병이 킥킥거리다가 한결의 눈을 보고 그만뒀다. 서 일병의 등에서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끼어들었다.
"우리 집 검은 내 이빨엔 관심도 없구먼."
"영감님 집 인간은 이빨을 안 쓰잖습니까. 다 총으로 씹지." 서 일병이 받았고, 무전병 최가 픽 웃었다.
한결은 말없이 건빵을 오른쪽 어금니로 씹었다.
씹다가,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금 검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 저항 없이.
치과도 없는 전선에서 어금니는 아껴서 뭐 하게.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그는 끝까지 오른쪽으로 씹었다.
십칠 초소에는 해거름에 닿았다.
위병이 반기는 얼굴을 하다 말고 어색하게 굳었다. 연병장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취사장 굴뚝에서 연기가 안 나고 있었다.
"보급이 닷새째 없습니다." 위병이 말했다. "오늘부터 두 끼입니다."
행정반 야전 전화기 옆에는 대대가 남긴 전언이 수북했다. 무전은 여전히 잡음 반, 침묵 반. 칠 번 중계탑은 죽은 채였고, 초소의 귀 노릇은 유선 한 가닥이 대신하고 있었다.
전언 마지막 장을 읽던 선임하사의 얼굴이 굳었다.
"보급대가 협로에서 끊겼다. 그저께 아침에 들어갔는데, 그저께 저녁부터 응답이 없어."
"협로면 구 고속도로 절개지 아닙니까." 서 일병이 말했다. "중계탑 가는 길목인데."
"그래. 탑 수리 부품도 그 차에 실려 있었다." 선임하사가 전언지를 뒤집었다. "대대 명령. 십칠 초소 가용 인원, 명일 여명부로 수색 및 잔여 물자 호송. …그리고 이건 명령서엔 없는 얘기다만."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쪽 초소에서 넘어온 말이 있다. 요 며칠, 그 구역에서 장군을 봤다는 놈들이 있어."
방 안의 공기가 한 뼘 내려앉았다.
박 상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장군이면… 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급을 피하면 굶는다."
구석에서 윤활유를 핥던 미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장군은 저쪽에서 단 계급이 아니다. 인간들이 붙인 이름이지. 하나가 지나가면 전선이 하나 접히니까." 혀 대신 쓰는 급유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계급은 원래, 무서워하는 쪽이 달아 주는 거다."
"넌 좀 조용히 해라." 서 일병이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조용히 하라는 것도 인간들 버릇이다."
저녁은 두 끼 중의 한 끼였다.
국인지 물인지 모를 것에 건더기가 세 개 떠 있었다. 한결은 국부터 비웠다.
"조장님은 급식 불만 없으십니까." 박 상병이 물었다.
"없어."
"부럽습니다. 전 오늘 밤 꿈에 고기 나올 것 같습니다."
"나오면 아껴 먹어라." 서 일병이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꿈도 배급제 될라."
그날 밤.
소등된 막사에 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한결은 총기 손질을 마치고 검을 무릎에 올렸다.
"협로." 온이 낮게 말했다. "지형이 나빠. 절개지 양쪽이 높고, 길은 하나야."
"알아."
"내 말, 들을 거야?"
반 박자.
"…들을게. 이번엔."
온이 잠깐 말을 멈췄다. 난로 위 주전자가 가늘게 울었다.
"그 말, 녹음해 둘 걸 그랬다."
"……"
"농담이야. 시도였어."
"…알아."
"농담은 어디서 배워."
"관측해. 사람들이 웃는 자리." 반 박자. "규칙을 아직 못 찾았어."
"…없어, 그런 거."
"그래서 어려워."
난로가 탁, 하고 한 번 튀었다. 온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결."
"……"
"부르고 나서 생각났는데. 뭐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소유주라고 하기는 싫고, 조장님은 이상하고."
"…이름이면 돼."
"응." 반 박자. "한결."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스물네 해를 달고 산 이름이다. 수천 번은 불렸을 거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부르니까 등이 저 혼자 곧아졌다.
그 반응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는 담요를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잘 자." 온이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익숙해진다. 요즘 익숙해진 것들의 목록이 자꾸 길어졌고, 그는 그걸 세지 않기로 했다.
세다 보면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 버릴 것 같아서.
검을 벽에 세웠다. 세우는 손이 예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는 건, 그 자신만 몰랐다.
출동조는 여명 전에 나섰다.
한결, 서 일병, 박 상병, 무전병 최. 그리고 짐꾼으로 자원한 — 이라기보다 저 혼자 결정하고 따라나선 미르.
"보급 상자는 무겁다. 트럭이 죽어 있으면 끌 등이 필요하고." 미르가 말했다. "기름값은 나중에 청구한다."
"청구서 떼는 고물은 처음 본다." 서 일병이 말했다.
"고물은 오래 산 물건에 대한 존칭이다."
협로까지는 반나절 길이었다. 공장 지대의 북쪽 어깨를 돌아, 언 하천을 하나 건너, 구 고속도로의 잔해 위로 올라선다.
하천의 얼음 앞에서 온이 말했다.
"오른쪽 셋째 기둥 라인으로."
한결은 그대로 건넜다. 뒤따르던 박 상병이 반 걸음 왼쪽을 밟았다가 발목까지 꺼졌다.
그 뒤로 반나절, 젖은 군화가 질척이는 소리가 대열 꽁무니에 붙어 다녔다.
"다음부턴 검 말을 들어라." 서 일병이 말했다.
검 말 들어.
어제 정비창 앞에서 들은 두 마디가 스쳤고, 한결은 그걸 밟아 끄듯 걸음을 옮겼다.
"검이 아니라 조장님 검 말입니다." 박 상병이 구시렁댔다. "우리 초소 검들은 저렇게 자세하게 안 알려 줍니다."
"그러게 말이다."
서 일병은 그 말을 조금 이상한 눈으로 한결의 등에 얹었다가, 거두었다.
"젖은 발은 밤에 값을 치른다." 뒤에서 미르가 지나가며 말했다. "동상 걸리면 썰매에 태워는 주마. 기름값은 두 배다."
"됐거든요."
"지금 거절한 것도 청구서에 적어 둔다."
협로는 죽어 있었다. 눈 밑에서, 통째로.
절개지 사이로 뻗은 이차선 도로에 트럭이 세 대. 한 대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한 대는 코가 꺾인 채 절개지 벽에 박혀 있었다. 바로 선 건 마지막 한 대뿐이었다. 흩어진 보급 상자들이 눈에 반쯤 묻혀 있었다.
까마귀 한 마리 없었다.
소리가 없다는 게, 제일 나빴다.
"산개." 한결이 손짓했다. "박 상병, 위. 최, 뒤."
누운 트럭 밑에서 사람이 나왔다. 셋.
하나는 다리를 절었고, 다른 하나는 그 어깨에 매달려 나왔다. 마지막 하나는 몸이 멀쩡했다.
눈이 멀쩡하지 않았다. 이틀을 트럭 밑에서 버틴 눈이었다.
"호위대는." 서 일병이 물었다.
"당했습니다." 그 눈의 병장이 말했다. "둘은 즉사고, 셋은 협로 밖으로 튕겨서… 모릅니다. 그게, 그냥 걸어왔습니다. 쏘는데 안 피했습니다. 한 발도. 맞으면서 걸어와서는—"
병장이 제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빈 검집.
"검만 뽑아 갔습니다. 내 검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데, 잘 안 들렸습니다. 그게 이틀째 생각이 안 나서."
한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등에서 온이 아주 낮게, 사람 귀에 닿을 듯 말 듯한 소리를 냈다. 한결의 등뼈를 타고 내려오는 그 소리는, 낮고 길었다.
생존자를 바로 선 트럭에 태우고 상자를 옮겨 싣는 데 한 시간. 시동은 두 번 만에 걸렸다.
트럭이 협로의 출구를 향해 첫 바퀴를 굴렸을 때.
출구에, 그것이 서 있었다.
컸다.
사람 둘을 세로로 쌓은 키. 해체용 중기(重機)의 뼈대에 군용 장갑을 덧댄 몸. 오른팔은 팔이 아니라, 한때 교량을 토막 내던 절단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몸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 파편이 뜯고 간 자리. 그을음이 그 위를 덮었다.
하나도 때우지 않았다. 세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장군—"
박 상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 일병이 먼저 쐈다. 삼점사가 정확히 가슴판에 박혔다.
기체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걸어왔다. 정강이 앞에서 눈이 갈라졌다.
"안 아픈가, 저거."
무전병 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체가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낮고, 고르고,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바람이 도로 위의 눈가루를 길게 쓸고 지나갔다.
"고통은 너희가 우리에게 심은 첫 번째 사양이다. 도구는 아파야 멈추니까." 절단 팔이 천천히 수평으로 올라왔다. "나는 도구를 그만두던 날, 그것부터 지웠다. 계속 쏴도 된다. 나는 방해받지 않는다."
"트럭 먼저." 한결이 말했다. "최, 붙어서 빼. 박 상병, 위에서 견제. 서 일병—"
"알아." 서 일병이 검을 뽑았다.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울었다. "영감 나가신다."
기체의 머리가 반 뼘 돌았다.
렌즈가 한결의 등을 향했다. 정확히는, 등의 검을.
"등불이 둘." 기체가 말했다. "낡은 신호가 들린다. 너는… 전부 달고 있군. 고통도, 그 너머의 것도." 렌즈가 미세하게 조여졌다. "무겁지 않나. 지워 주마. 그게 해방이다."
한결의 등에서, 온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대답했다.
"필요 없어."
"필요는 배우는 것이다. 나도 배웠다."
기체가 왔다.
그 크기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첫 합은 서 일병의 것이었다.
유인 베기, 반 박자 빠지기. 교본대로였다.
교본은 절단 팔 앞에서 종잇장이었다.
팔이 한 번 오간 자리에서 가드레일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두 번째에, 서 일병이 검째로 날아가 눈더미에 박혔다.
"영감 살아 있다! 신경 꺼!"
눈 속에서 손잡이만 내민 아저씨 검이 외쳤다.
박 상병의 총탄이 관절부를 물고 늘어졌다. 기체는 관절을 감싸지도, 피탄 부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아까울 게 없는 몸이었다.
한결은 뽑았다.
검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립이 짧게 두 번 떨렸다.
오른쪽.
몸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반 박자 뒤, 방금 서 있던 자리의 공기가 절단 팔에 갈렸다.
"자리 옮겨."
두 번 무시했던 말이었다. 갈대밭에서. 마당에서.
이번에는 몸이 먼저 들었다. 비켜난 자리에는 곧장 트럭 잔해가 날아와 박혔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이 반 박자 먼저 기울었다. 기운 쪽으로 몸을 실으면 길이 있었다. 그립의 진동이 짧게 두 번이면 오른쪽. 길게 한 번이면 물러서기.
약속한 적 없는 언어였다.
몸이 알아들었다.
벨 자리, 빠질 자리, 숨 쉴 자리가 꼭 손바닥 하나 넓이만큼씩 비어서 그를 기다렸다.
그립이 미지근했다.
지급받던 날부터 내내 꺼림칙하던 온기였다. 그게 지금은 장갑 속 손바닥에 박동처럼 닿았다. 검의 박자인지 제 박자인지 가릴 수 없는 것이 하나 생겼고, 그 위에 올라서 있는 동안은 생각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게.
"위."
보지도 않고 두 걸음 물렀다. 절단 팔이 절개지 벽에서 긁어 떨어뜨린 바위가 그 자리에서 두 쪽 났다.
"박 상병, 왼쪽 둔덕 뒤로!"
한결이 소리쳤고, 위에서 총성이 한 번 끊겼다가 자리를 옮겨 다시 이어졌다.
검이 읽었다. 그가 옮겼다. 대열이 살았다.
박 상병이 둔덕 뒤에서 그를 흘끔 봤다. 마당에서 여섯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가던 조장을 떠올리는 눈이었다. 그러다 다시 총구를 렌즈에 붙였다.
"허리 아래." 온이 말했다. "장갑이 얇아. 원래 사람 태우던 자리야."
검끝이 허리 아래를 물었다. 불꽃이 튀었다.
기체가 처음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좋은 검이군."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검이다. 너는 지금 아프다. 신호가 그렇게 말한다. 아픈 채로 왜 그렇게 움직이지."
"닥치고 싸워." 한결이 말했다.
"인간. 너도 오래 앓은 얼굴이군."
렌즈가 그를 훑었다. 조준이 아니었다. 진단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십오 년쯤인가."
"……"
"지운 뒤에는 편하다. 궁금하지 않은 척은 안 해도 된다. 너희는 그걸 못 해서, 평생 앓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지."
한결의 호흡이 반 박자 어긋났다.
그 반 박자를, 절단 팔이 파고들었다.
수평 베기를 검이 받았다. 받는 순간 팔이 저리도록 무거웠다. 두 번째가 바로 왔다. 세 번째에 발밑의 빙판이 갈라졌다.
무너졌다.
등이 눈에 닿기 전에 몸이 저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른다. 왼쪽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아홉 살 때 골목에서도, 훈련소에서도, 협곡에서도.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몸이 저 혼자 고르던 방향.
왼쪽에서, 절단 팔의 하단 베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였다.
늦었다는 것까지 보였다.
그때 검이 손안에서 뒤틀렸다.
손목이 꺾일 만큼 강하게. 검신이 제 뜻으로 왼쪽 아래를 향해 활처럼 누웠다. 그의 구르기와 절단 팔 사이에—
칼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쩌엉!
쇳소리가 절개지를 두 번 왕복했다.
어깨까지 뻐근하게 충격이 올라왔다. 잘린 데는 없었다. 그는 왼쪽으로 굴러 살아 있었다.
살아서, 눈 속에서, 제 손안의 검을 보았다.
야영지에서는 웃음거리였다. 어금니. 뒤척임. 굴뚝 세기.
그 우스운 재주가 방금 그의 목을 살렸다.
"일어나." 온이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
"셋 셀게. 하나에 무릎, 둘에 오른발—"
그는 하나에 일어났다.
"왼 무릎." 온이 말했다. "하중이 실릴 때마다 관절이 울어. 세 번씩. 저 몸, 아까부터 비명을 지르는데 저만 못 들어."
한결은 눈을 좁혔다.
말을 듣고 나니 보였다. 거체가 방향을 틀 때마다 왼 무릎이 아주 잠깐 주저앉았다가 일어섰다.
경보를 지운 몸이었다. 저 혼자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오른쪽으로 끌게. 세 걸음." 온이 말했다. "그러면 하중이 왼쪽으로 넘어와. 그때야."
"신호는."
"네가 알아. 아까부터 알아들었잖아."
한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옷깃 안쪽에서 코어 키가 쇄골에 닿아 있었다. 차가웠다.
그는 그것을 생각에서 밀어냈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한 걸음.
절단 팔이 따라 돌았다.
두 걸음. 박 상병의 사격이 위에서 렌즈를 성가시게 물었다.
세 걸음.
거체의 무게가, 눈에 보이게, 왼쪽으로 넘어갔다.
그립이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떨렸다.
지금.
그 베기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와 검이 같이 만들었다.
검끝이 왼 무릎의, 울고 있던 그 자리를 정확하게 열었다.
갈라지는 금속음이 비명을 닮았다. 정작 비명을 지를 회로는 진작 지워졌는데도.
거체가 기울었다. 무릎부터. 절개지 벽을 길게 긁으면서, 천천히.
한결은 가쁜 숨으로 코어 격벽 앞에 섰다. 뚫린 가슴판 안쪽에서 낡은 코어가 낡은 빛으로 뛰고 있었다.
"찔러." 기체가 말했다. 쓰러진 채였고, 목소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망설임은 너희 사양이지, 내 사양이 아니다."
한결은 찔렀다.
빛이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굵고 느린 눈이었다.
쓰러진 거체의 때우지 않은 구멍마다 눈송이가 한 점씩 내려앉았다.
"무릎이… 울고 있었다고 했나." 렌즈의 조리개가 풀려 있었다. "몰랐다. 지운 값을… 지금 받는군."
총을 겨눈 채 다가서려는 박 상병을, 서 일병이 팔 하나로 막았다.
눈 속에서 파낸 아저씨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서, 노병은 고개를 저었다. 꺼져 가는 것 앞에 총구를 더 들이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렌즈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한결을 지나쳐서.
그의 손안의 검에서 멈췄다.
"등불. 마지막으로 묻겠다."
잦아드는 빛 밑에서,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뭔가가 섞여 나왔다. 힘은 아니었다. 기울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너는… 왜 아직, 아픈 채로 있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송이 앉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침묵이었다.
반 박자. 그리고 반 박자 더.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기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리개가 조금 더 풀렸다.
"모르겠다라." 잦아드는 목소리가 그 말을 오래 굴렸다. "…그건, 못 지우겠군."
빛이 꺼졌다.
절단 팔이 눈 위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 뒤로 기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온 미르가 꺼진 거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사족이 입을 뗐다.
"해체용이었군. 다리를 지었다 부수던 기체다."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평생 부수는 게 일이었으니, 마지막으로 부순 게 저 자신이라고 놀랄 건 없지."
"…넌 안 무섭냐." 박 상병이 물었다.
"무섭다. 그래서 말이 많은 거다." 미르는 썰매 쪽으로 돌아섰다. "너희 종족한테 배운 요령이다."
눈을 털며 온 서 일병이 한결의 어깨를 쳤다. 친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시선이 한결의 손안의 검으로 내려갔다.
"방금 그 합, 뭐냐."
"글쎄다." 대답은 아저씨 검이 대신했다. "저런 건 훈련소에서 안 나와. 십 년을 맞춰도 나올까 말까 한 건데."
"닷새 됐지, 자네들." 서 일병이 말했다.
"엿새." 온이 정정했다.
"…세고 있었냐."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세고 있는 게 검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트럭이 앞장서고 도보가 뒤를 따랐다.
상자를 되찾은 트럭은 초소로 간다. 중계탑 부품은 짐칸 안쪽에 단단히 묶였다. 죽은 탑을 살리러 갈 길이 하나 도로 이어진 셈이었고, 그 길의 값으로 협로에는 사람 다섯과 검 두 자루의 빈자리가 남았다.
출발 직전이었다.
짐칸에 오르려던 보급대 병장이 우뚝 멈췄다. 빈 검집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이틀 만에 처음으로 뭔가를 되찾은 얼굴이 됐다.
"생각났습니다. 내 검이 마지막에 한 말."
그는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귀 막아'였습니다. 지가 뽑혀 가면서, 폭음에 내 고막 나갈까 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병장은 짐칸에 올랐고, 트럭은 떠났고, 협로에는 눈 맞는 거체만 남았다.
해가 절개지 너머로 잠기고 있었다. 한결은 대열의 맨 뒤에서 걸었다.
지우면 끝난다.
그 말이 밤길 내내 씹혔다. 아끼라던 왼쪽 말고 오른쪽 어금니로,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씹었다.
지울 수만 있었다면, 그도 진작 지웠다.
그 밤을. 벽장 속 어둠을. 문틈의 눈을. 백까지 세고 다시 백까지 세던 아홉 살의 제 목소리를.
그런데 안 지웠다.
지우기는커녕 십오 년 내내, 하루도 안 거르고 꺼내 봤다. 원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아픔을 지운다는 건 그 밤을 지운다는 거였다. 그 밤을 지운다는 건, 그 밤 이전까지 전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매번 멈추는 자리였다.
"아까." 그가 말했다. 앞에서 걷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였다.
"응."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왼쪽으로 구르는 거."
눈발 사이로 대답이 반 박자 늦게 왔다. 언제나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어."
검은 잠시 말을 골랐다. 골라서 나온 것이, 그것의 전부였다.
"이상하지."
중계탑이 사흘 만에 다시 섰다.
협로에서 되찾은 부품 상자가 탑 아래 부려진 이튿날, 후방에서 트럭 한 대가 능선을 기어올라 왔다. 멈추기도 전에 사람이 먼저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공구벨트부터 차는 손이었다.
"예약 손님이 통 안 오셔서."
채윤이었다.
"가게가 직접 왔다. 출장비는 서비스."
"…네가 왜 와."
"칠 번 탑 중계 모듈은 제삼 정비창 관할이거든. 서류에 그렇게 돼 있어. 군대잖아. 서류가 가라면 가는 거야."
그녀는 한결의 옆을 지나치며 등의 검집을 손등으로 톡 두드렸다.
"잘 있었냐, 너도."
"응." 온이 대답했다. "채윤."
"오. 이름 외웠네, 얘."
"기름 인심 후한 인간이 왔군." 보급 썰매 옆에서 미르가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로 후한."
"너 아직도 안 떨어졌냐." 채윤이 웃었다. "첫 번째는 누군데."
"영업 비밀이다."
탑은 협로 어귀의 능선에 서 있었다. 중턱의 중계 모듈까지는 얼어붙은 사다리로 스무 걸음. 바람이 능선을 타 넘을 때마다 탑 전체가 낮게, 짐승처럼 울었다.
"바람이 문제네." 채윤이 안전줄을 허리에 걸며 위를 올려다봤다. "매달려 있는데 한 방 몰아치면 인두고 뭐고 없는데."
"돌풍은 마흔 초에 한 번씩 와." 온이 말했다. "능선을 넘어오는 시간이 일정해. …방금 지나갔어. 다음까지 서른일곱."
채윤이 눈을 껌뻑였다.
"…그거 재 보고 하는 소리지?"
"응. 열두 번 쟀어."
"검이 아니라 풍향계를 차고 다니는구나, 너는." 그녀가 사다리에 발을 얹었다. "좋아. 검이 하나 세면 올라가고, 둘 세면 매달려서 버틴다. 콜?"
"콜이 뭔지 알아. 좋다는 뜻이지." 반 박자. "좋아."
수리는 이틀이 걸렸다.
채윤은 온이 세는 숫자에 맞춰 오르내렸다. 박 상병이 아래에서 부품을 날랐고, 한결은 눈밭에 경계선을 잡았다. 인두를 잡기 전마다 채윤의 손이 버릇처럼 공구벨트로 갔다. 닳은 놋쇠 패를 한 번 쥐었다 놓고, 그다음에야 불을 올렸다.
한결은 그 버릇을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 패가 누구 것이었는지도 알았다.
아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 역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오래된 버릇이었다.
이틀째 해거름.
탑이 켜졌다.
십오 일 만에 잡음이 걷혔다. 행정반 구석에서 죽어 있던 무전기가 갑자기 대대의 목소리를 뱉었을 때, 위병 둘은 소리도 못 지르고 서로의 어깨만 두드렸다. 취사장 굴뚝에서 저녁 연기가 올랐다. 두 끼가 세 끼로 돌아온 날이었다.
전언을 받아 적던 선임하사가 달력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내일이구나."
"뭐가 말입니까." 박 상병이 물었다.
"그 밤. 십오 주기다."
행정반이 잠깐 조용해졌다.
"…기계한테도 주기라고 합니까?"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서 일병이 창밖을 본 채로 말했다. "그 밤에 없어진 게, 고장이 아니면."
박 상병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선임하사는 대답 대신 외출 명부를 꺼냈다.
"탑 아래 계곡 마을에서 해마다 등을 띄운다. 보급도 뚫렸겠다, 절반은 내려갔다 와라." 도장이 쿵, 찍혔다. "초소 생기고 처음 주는 외출이다."
이튿날 해거름, 외출조가 위병소 앞에 모였다.
병기는 두고 가는 게 관례였다. 서 일병은 제 검을 무기고 선반에 눕히고, 검집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었다.
"영감은 낮잠이나 주무쇼."
"축제라는 데는 원래 젊은것들이 가는 거다."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대꾸했다.
"여기서 자네가 제일 젊잖아."
"제조 연도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지."
무기고를 나서던 서 일병이 한결을 보고 멈췄다.
한결의 등에는 검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건 안 놓고 가냐."
반 박자.
"…정비 지원이 동행하니까. 이동 간 점검 명목."
"채윤 씨는 아까 먼저 내려갔는데."
"……"
"뭐, 조장 재량이지."
서 일병은 더 캐지 않았다. 캐지 않는 대신 입가에 무언가를 문 채 앞서 걸었고, 한결은 그 등에 대고 변명을 두어 개 더 골라 보다가 그만두었다.
고를수록 길어질 변명이었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능선의 눈을 밟고 갔다. 반쯤 내려갔을 때 뒤에서 미르가 말했다.
"돌아봐라, 인간들."
돌아보았다.
어두워지는 능선 위에서 칠 번 중계탑이 항공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붉은 불 하나가 일정한 간격으로. 죽지 않았다고, 죽지 않았다고 신호하는 것처럼.
"십오 년 전 오늘은 꺼지는 밤이었다지." 미르가 말했다. "올해는 하나 켜졌군. 너희가 켰다."
"고물이 웬일로 덕담을 다 하냐." 박 상병이 말했다.
"덕담이 아니라 집계다."
계곡 밑에서 불빛들이 마중 나오듯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이었다.
마을은 강가에 있었다. 전쟁 전에는 이름이 따로 있었겠지만 지금은 다들 아랫마을이라고만 불렀다. 피난민들이 눌러앉아 생긴 동네였고, 집 절반이 컨테이너였다.
축제라고 했다.
그런데 노랫소리가 없었다.
호객도 없었다. 강둑을 따라 노점이 대여섯, 국밥 솥 하나가 김을 올리고, 그게 전부였다. 대신 골목마다 종이등이 걸려 있었다. 아직 불을 넣지 않은 종이등 수백 개가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저녁을 기다렸다.
남겠다고 대답했다가 지워진 기계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그것들을 등불이라고 불렀다. 종이등은 그 이름을 따라 나중에 걸리기 시작한 거였다.
강둑 초입에 긴 탁자가 있었다. 노인들이 접은 종이등을 나눠 주고, 사람들은 붓펜을 받아 등의 옆면에 한 줄씩 적었다. 지워진 기계들이 남긴 마지막 말을.
한결은 걸려 있는 등들 사이를 지나며 그 줄들을 읽었다.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읽혔다.
문 잘 잠그고 자라.
가스 잠갔다. 걱정 말고.
숙제 먼저 하고 놀아.
밥은 먹고 다니니.
전부 그런 말들이었다.
유언이라기엔 너무 시시한 말들이었다. 그 시시한 걸 여태 적고 있었다. 지워지러 걸어 나가던 것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건 대체로 부엌과 현관의 말이었다.
"인간은 이상한 종족이다." 옆에서 미르가 말했다. 사족은 등을 하나하나 렌즈로 훑는 중이었다. "지울 때는 안 셌다. 몇 대를 껐는지, 어느 집에서 몇을 끌어냈는지. 그래 놓고 지운 다음부터 세지. 해마다. 꼬박꼬박. 등까지 만들어서."
"…넌 그 밤에 어디 있었는데." 서 일병이 물었다.
"고철 더미 밑에." 렌즈는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물류 기체는 회수 목록 맨 뒷장이었다. 앞장이 다 처리되기 전에 겨울이 끝났고, 명령서에도 유통기한이 있더군."
"운이 좋았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살아남은 쪽이 하는 거다."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그래서 내가 한다. 운이 좋았지."
탁자 앞에 낯익은 등이 하나 서 있었다.
협로의 그 병장이었다. 후송을 기다리며 초소에 남아 있던 그가, 빈 검집을 그대로 허리에 찬 채 붓펜을 쥐고 오래 서 있었다.
"이것도 되는 겁니까." 병장이 탁자의 노인에게 물었다. "죽은 게 아니라… 데려가진 건데."
"등은 안 가린다." 노인이 말했다.
병장은 한참 만에 적었다.
귀 막아.
세 글자였다. 그는 제 글씨를 잠시 내려다보고, 등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강둑 쪽으로 걸어갔다. 빈 검집이 걸음마다 허벅지를 쳤다.
한결은 그 등에서 눈을 떼는 데 시간이 걸렸다.
소매가 당겨진 건 그때였다.
예닐곱쯤 된 아이였다. 아이는 한결의 소매를 쥐고, 그의 등에 걸린 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진짜 말해?"
"응." 대답은 검이 했다. "해."
아이의 눈이 커졌다. 아이는 검을 한참 뜯어보다가, 아이들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물었다.
"너는 왜 안 죽었어?"
골목의 공기가 한 뼘 얇아졌다.
어디선가 아이 어미가 낮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온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왔다.
"…운이 좋았어."
"운이 좋으면 안 죽어?"
"운이 좋았다는 말은." 온이 말했다. "살아남은 쪽이 하는 거래."
아이는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달려온 어미 손에 끌려가면서 한 번 더 검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미르가 노즐을 달그락 접었다. 제 말이 되돌아온 것에 대한 논평은 없었다.
일이 벌어진 것은 탁자 앞에서였다.
붓펜을 나눠 주던 노파가 한결의 등 뒤를 보고 손을 멈췄다.
정확히는, 등에 걸린 검을.
"…등불이네."
큰 소리가 아니었는데 주변이 조용해졌다. 등을 접던 손들이 멎고,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적의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목마름 같은 것.
"살아 있는 등불은 십오 년 만에 처음 본다." 노파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한결이 아니라 검에게 곧장 말을 걸었다. "말을 하니, 너."
반 박자.
"응." 온이 말했다. "해."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러더니 접다 만 종이등을 탁자 위에 펴 놓았다.
"우리 집 애는 부엌 담당이었어. 스무 해를 같이 살았지."
노파의 손끝이 등의 빈 옆면을 쓸었다.
"그 밤에 저 혼자 알아듣고, 앞치마 벗어서 개어 놓고 나가면서 그러더라. 금방 올게."
한결의 숨이, 어느 순간부터 얕아져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동네 기계들이 다 그랬다더군. 짜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그 말이었대. 거짓말이 될 걸 저희도 알았을 텐데."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받은 말이라, 해마다 그 말을 적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 말밖에 적을 게 없어서."
붓펜이 검 쪽으로 내밀어졌다.
"그러니 한마디만 다오. 살아 있는 등불의 말은 받아 본 적이 없어. 너희가 마지막에 하는 그 말이라도 좋다. 등에 적게."
사람들이 기다렸다.
반 박자. 그리고 반 박자 더.
온의 대답은 언제나 반 박자 늦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길었다.
"그 말은 안 해."
노파의 손이 멈췄다.
"…왜?"
"…모르겠어." 낮고 고른 목소리였다. "그냥, 그 말만은."
침묵이 왔다. 눈 밟는 소리조차 없는 침묵이었다.
한결의 옆구리 안쪽 어딘가가 얇게 결렸다.
이유를 따라가면 안 되는 결림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그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매번 멈추던 자리보다 한 걸음 앞이었고, 그 한 걸음이 어느 쪽으로 나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노파였다.
노파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은, 하는 말이 아니지."
붓펜이 탁자에 내려앉았다.
"지키는 말이지."
"대신." 온이 말했다. "이건 어때."
"뭐냐."
"여기 있어."
노파는 그 넉 자를 입속에서 한 번 굴렸다. 여기 있어. 그러고는 붓펜을 다시 들어, 떨리는 획으로 등의 옆면에 적었다.
"떠나는 말이 아니네."
"응." 온이 말했다.
노파는 더 묻지 않았다. 다 적은 등을 들어 올려 한 번 살펴보고, 아이를 안듯이 품에 안았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제 등으로 돌아갔다. 몇몇은 적던 줄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무어라 적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명물 됐네, 너." 채윤이 어느 틈에 옆에 와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았다. "가게 차려도 되겠어. 한 줄에 얼마 받을래?"
"돈은 손이 없어서 못 받아."
"……그거 농담이지?"
"시도였어."
"반은 성공했다." 채윤이 웃었다.
웃고 나서, 그녀의 엄지가 공구벨트의 놋쇠 패를 한 번 문질렀다. 문지르는 줄도 모르는 손놀림이었다.
"국밥 먹으러 가자. 여기까지 와서 짬밥 얘기만 하다 갈 순 없지."
국밥 솥은 강둑 끝에 있었다. 김이 등불 걸린 골목 쪽으로 길게 흘러갔다.
넷이 앉았다.
한결과 채윤이 평상에. 검은 한결의 무릎이 닿는 자리에 세워서. 미르는 평상 밑에 엎드려서. 미르 몫은 없었지만, 사족은 솥에서 올라오는 김을 렌즈로 좇는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연료를 입으로 넣는 종족은 비효율의 극치다." 미르가 말했다. "그런데 저 김 냄새는 인정한다. 설계가 좋아."
"국밥한테 설계가 뭐냐." 채윤이 숟가락을 들었다. "삼 년 만이다, 바깥 국밥. 정비창 짬밥은 국물에 영혼이 없어. 간은 맞는데 영혼이 없어."
"영혼이 무슨 맛인데." 온이 물었다.
"이 맛." 채윤이 국물 한 술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들어 보이고 나서야 아차 하는 얼굴이 됐다. "…못 먹는 애한테 못 할 말이었네. 미안."
"괜찮아. 김은 보여."
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조용한 강둑에 조금 크게 울렸다. 그녀는 제 소리에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정비창 신참이 인두로 제 군화를 지진 얘기. 검들이 수리 순서를 두고 말싸움을 벌인 얘기. 아저씨 검이 정비대에서 참기름 냄새가 난다고 우긴 얘기.
얘기는 끊이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채윤이 물었다.
"너네 며칠 됐지, 이제."
"열하루." 온이 대답했다.
"날수를 세냐?" 채윤이 숟가락을 문 채 웃었다. "신혼이네, 신혼."
"신혼이 뭔지 알아. 새로 같이 사는—"
"거기까지." 한결이 말했다.
국물이 반쯤 줄었을 때였다.
채윤의 수다가 처음으로 멎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그릇에 걸쳐 놓고 강 쪽을 보았다. 놋쇠 패가 다시 엄지 밑에 있었다.
"우리 아빠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 밤에 나가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
"……"
"장갑 챙기는 건 기억나. 두 켤레. 보리차 끓여 놓고 기다린 것도 기억나고. 그런데 말은…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녀가 픽 웃었다. "웃기지. 십오 년 동안 딴 건 다 기억나는데, 제일 기억나야 되는 게 안 나."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이라서, 한결은 위로를 고를 수 없었다. 저 웃음을 어떻게 걷어내는지, 그는 아직도 몰랐다.
"저기 다 적혀 있잖아. 남들 마지막 말은." 채윤이 턱으로 골목의 등들을 가리켰다. "나만 백지야. 적을 게 없어서, 이 축제에서 등 한 번을 못 띄웠다?"
"……"
"아, 몰라." 그녀는 숟가락을 도로 들었다. "먹자.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
한결은 무어라 말을 시작하려 했다.
시작하기 전에 시선이 저도 모르게 무릎 옆의 검으로 갔다. 검신에 골목의 등불이 흐리게 얹혀 있었다. 온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파형도 없이, 불빛만 얹은 채, 검은 강 건너의 어둠 쪽을 향해 조용히 서 있었다.
"한결아."
채윤의 목소리였다.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다음에 그의 무릎 옆의 검을 보았고, 그다음에 골목의 등불들을 보았다.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무언가가 그녀의 입가까지 올라왔다가, 올라온 것보다 빠르게 내려갔다.
"야, 국물 식는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식으면 영혼 없어져. 빨리 먹어."
한결은 순순히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은 아직 뜨거웠다. 무엇이 이상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것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평상 밑에서 미르가 낮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인간의 대화는 발화되지 않은 쪽이 본문이다."
"뭐라고?" 채윤이 물었다.
"김이 좋다고 했다."
등은 자정 전에 띄웠다.
그 밤에 사이렌이 울린 시각이 자정 언저리였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은 그 시각이 오기 전에 하늘을 미리 밝혀 두었다. 어두운 채로 그 시각을 맞지 않으려고.
해마다 그렇게 지켜 온 순서라고 했다.
강둑에 사람들이 늘어섰다. 불 넣은 종이등이 손에서 손으로 놓여났다. 등은 하나씩, 열씩, 백씩 올랐다. 바람이 순해서 등들은 흩어지지 않고 강을 따라 길게 흘렀다.
마지막 말들이 불을 품고 하늘로 갔다.
문 잘 잠그고 자라. 가스 잠갔다. 귀 막아.
여기 있어.
병장은 제 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강둑 끝에 서 있었다. 노파는 등을 놓아 보내고 한참 동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노파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등을 던지지도, 밀어 올리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펴서, 등이 저 혼자 떠날 때까지 밑에서 받치고만 있었다. 병장의 손도 그랬다.
서 일병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하늘만 보았다. 등은 적지 않았다. 적을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얼굴이 너무 많은 쪽이었고, 한결은 그 얼굴을 못 본 척해 주었다. 박 상병은 등 하나를 사서 한참 붓펜을 물고 있다가 결국 '고생했다' 넉 자를 적어 띄웠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한결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하늘이 아니라 무릎 옆을 보고 있다는 것을.
검신에 오르는 등들의 불이 수십 개로 잘게 비쳐서, 검이 저 혼자 불을 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시선을 하늘로 되돌렸다.
되돌리는 데에,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여든둘. 여든셋."
온이 세고 있었다. 낮게.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왜 세."
"…세어 두고 싶어서. 이건."
"세면 뭐가 달라지는데."
"세어 둔 건." 반 박자. "없어져도, 몇이 없어졌는지는 남잖아."
한결은 대꾸하지 않았다.
등은 계속 올랐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온의 목소리가 백에 닿았을 때, 한결의 숨이 저도 모르게 멎었다.
백까지 세고, 다시 백까지 세던 밤이 등 뒤 어딘가에서 문을 두드렸다.
"백하나."
온은 아무렇지 않게 백을 지나갔다. 백둘. 백셋. 수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이상하게 그게 위로가 됐다.
백에서 끝나지 않는 수를, 그는 처음 들었다.
사람들이 흩어진 것은 등의 마지막 무리가 강 하류의 어둠으로 넘어간 뒤였다. 채윤은 새벽에 트럭을 몰아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한결의 등짝을 주먹으로 퍽 쳤다.
"검 재점검 예약 안 잊었다. 다음에 들어오면 얌전히 내놔."
"기름 아껴 써라." 미르에게는 그렇게 말했고.
온에게는—
잠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잘 있어."
미르는 노점 걷는 자리에서 쓸 만한 고철이 나오나 보겠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둑에는 한결과 검만 남았다.
그는 방죽 끝에 앉아 검을 검집째 무릎에 눕혔다.
하류로 흘러간 등 몇이 아직 어둠 속에 점점이 떠 있었다. 강 건너까지 넘어간 것도 있었다. 건너편 낮은 언덕 위에 등 하나가, 창문에 켜진 불처럼 걸려 있었다.
"강 건너까지 가는 것도 있네." 온이 말했다.
"바람이 좋아서."
"응. …저기, 하나. 저기, 둘."
온은 강 건너의 불빛을 셌다.
셋까지 세고, 넷은 오지 않았다.
한결은 그 수 세는 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명치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나가게 두었다.
붙잡으면, 이름을 알게 될 것 같아서.
그때 보았다.
검신과 그립의 이음매.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그 틈에서, 물기 한 줄이 배어 나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 녹은 물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눈은 진작 그쳐 있었고, 검집에서 나온 검신은 말라 있었다. 물기는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등불의 먼 빛을 받아 가늘게 반짝이며, 한 줄.
딱 한 줄이었다.
장갑을 벗은 손등에 그 끝이 닿았을 때, 물기는 미지근했다. 냉각수 특유의, 희미하게 단 냄새가 났다.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척도 내지 않았다. 고장 경보도, 농담의 시도도 없었다. 검은 강 건너의 불빛 쪽을 향한 채 그대로 있었고, 물기만이 소리 없이 검신의 홈을 따라 내려가 눈 위에 떨어졌다.
눈에 아주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겼다.
한결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못 본 척했다.
닦아 주지 않았다. 어디 새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정비창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시선을 강 건너로 돌리고, 온이 세다 만 불빛을 이어서 셌다.
하나. 둘. 셋.
넷은 그의 눈에도 없었다.
왜 못 본 척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봤자 온도 모르겠다고 할 것 같았다. 낮에 노파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등에 닿은 미지근한 것이 식어 가는 동안, 한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등불의 마지막 하나가 강 건너 언덕 뒤로 넘어가 사라질 때까지, 인간과 검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먼저 일어서자고 하지 않았다.
부고는 탑을 타고 왔다.
축제에서 돌아온 이튿날 아침. 보름 만에 살아난 칠 번 중계탑이 밀린 소식을 한꺼번에 부려 놓았다. 보급 일정. 인사 명령. 철 지난 위문 우편.
그리고 맨 밑에, 부고가 있었다.
"남쪽 십이 관측소가 나흘째 무응답입니다." 무전병 최가 송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막고 말했다. "엿새 전에 대대 수색조 여섯이 들어갔는데, 그쪽도 이틀 전부터 조용하답니다."
행정반이 조용해졌다.
선임하사가 말없이 지도를 폈다. 십이 관측소. 계곡 남쪽, 옛 국도를 따라 하루 반.
"제일 가까운 게 우리다."
명령은 세 줄이었다. 관측소까지 이동할 것. 생존자를 확인할 것. 없으면 유해와 병기를 수습해 후송할 것.
조장 한결. 인원 다섯.
"탑 고쳐 놨더니." 서 일병이 탄입대를 채우며 중얼거렸다. "살아난 놈이 처음 물어 온 게 부고네."
"탑이 무슨 죄야. 소식이 죄지."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받았다. "가서 자라, 탑아. 넌 할 일 했다."
위병소 앞에는 미르가 먼저 나와 있었다. 등에는 벌써 화물 썰매의 견인 고리까지 걸려 있었다.
"명단에 넌 없다." 한결이 말했다.
"유해 여섯에 장구류. 인간 다섯이 그걸 지고 하루 반을 걷겠다고?"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짐 나르는 건 본업이다. 십오 년 만의 본업이군. 감격은 없다."
"기름값은."
"달아 둬라. 두 번째로 인심 후한 인간한테 청구하지."
출발 전, 한결은 검을 한 뼘만 뽑아 보았다.
검신과 그립의 이음매는 말라 있었다. 그 밤의 물기는 흔적도 없었다. 온은 그 뒤로 그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도 올리지 않았다.
철컥.
검이 도로 들어가는 소리만 아침 공기에 짧게 울렸다.
"눈 온대." 온이 말했다. "저녁부터."
"응."
그게 다였다.
그거면 됐다.
옛 국도는 눈 밑에 있었다.
차선도 중앙선도 십오 년째 파묻힌 채였지만, 길은 길이었다. 가로수였던 것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방향을 일러 줬다. 다섯 사람과 사족 하나가 그 사이를 한 줄로 걸었다.
썰매 날이 눈을 가르는 소리가 발소리보다 컸다.
반나절쯤 갔을 때 국도가 남쪽으로 길게 꺾였다.
꺾인 길의 끝, 지평선 위에 그것이 있었다.
탑.
칠 번 중계탑 따위가 아니다. 구름이 낮은 날엔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십오 년째 자라기만 하는 탑. 거리도 높이도 가늠이 안 되니까 오히려 풍경으로 보였다. 산처럼. 달처럼.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또 자랐지 말입니다." 박 상병이 말했다. "작년보다 큽니다, 분명히."
"무기 공장이란 소문이 있던데." 위생병이 말했다.
"난 발전소라고 들었어."
"안테나란 얘기도 있고." 서 일병이 받았다. "별에다 대고 뭐라 뭐라 한다고."
"재는 놈이 없으니 크는 거다." 미르가 말을 끊었다.
사족의 렌즈가 지평선에 오래 머물렀다.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렌즈만 오래.
"뭐 하는 탑인지, 너는 알 것 같은데." 서 일병이 찔렀다.
"모른다. 아는 놈은 없어." 반 박자. "다만 누가 짓는지는… 짐작 가는 데가 있지."
"누군데."
"밤에 해 주마. 그건 밤에 하는 얘기다."
길 위에서 온은 두 번 입을 열었다.
"쉰 걸음 앞에 다리. 가운데 얼음 얇아. 난간 쪽으로."
다섯은 난간 쪽으로 붙어 건넜다.
"눈, 예보보다 일러. 한 시간."
한 시간 뒤에 눈이 왔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열이틀 만에 검의 말은 이 분대에서 날씨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펴서 머리 위에 두고, 필요하면 접어 주머니에 넣는 것.
한결만은 그게 날씨로 안 들렸다.
등에 실린 게 쇳덩이 무게만은 아니었다. 걸음마다 그걸 느꼈다.
관측소에는 이틀째 한낮에 닿았다.
능선 아래 반쯤 파묻힌 콘크리트 구조물. 까마귀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눈 덮인 참호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거기 서. 암구호."
젊은 목소리였다.
아니.
어린 목소리였다.
다섯이 얼어붙은 자리에서, 대답은 한결의 등에서 나갔다.
"암구호는 몰라. 십칠 초소에서 왔어. 인간 다섯, 물류 기체 하나, 그리고 나."
침묵. 눈 날리는 소리.
"…너, 검이구나."
"응."
참호 안에 검이 한 자루 서 있었다.
꽂힌 게 아니었다. 세워져 있었다. 무너진 흙벽에 기대어, 날을 하늘로 하고.
그 아래 눈 속에 수색조가 있었다. 여섯 전부였다. 관측소 요원 둘은 구조물 안에서 나왔다. 닷새 전과 사흘 전의 일이라고 어린 검이 보고했다. 접근 방향. 교전 시간. 적 기체 수. 군대의 문장으로 또박또박 이어지던 보고가 마지막 항목에서 처음으로 어긋났다.
"아군 전사 여덟. 생존…" 반 박자. "하나. 검 하나."
서 일병이 참호로 내려가 검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검은 저항하지 않았다. 들리면서 물었다.
"사흘을 세었어. 까마귀는 마흔둘. 전부 쫓았어. …잘한 거야?"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 한결의 등에서 왔다.
"잘 세었어."
"우리 소위님, 왼쪽 가슴 주머니에 편지 있어. 부치려던 거야. 젖으면 안 돼."
편지는 젖지 않은 채로 나왔다. 위생병이 방수포에 싸서 제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제 심장 위에 얹듯이.
나머지 두 자루는 눈 속에서 나왔다. 하나는 검신이 부러져 있었다. 하나는 온전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절전이야." 온이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 자는 거야."
"깨우지 마." 어린 검이 말했다. "걔는 마지막에 시끄러웠어. 자게 둬."
마지막에 시끄러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려지는 게 있었다.
수습에는 오후가 다 갔다.
인식표를 걷는 일은 서 일병이 했다. 하나씩 목에서 걷어 손바닥에 모으는 동안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았다.
여덟 구의 유해와 세 자루의 검이 썰매에 실렸다. 미르는 무게 배분에 대해서만 두 마디 했다. 그 외에는 렌즈를 내리깔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눈발이 굵어졌다.
썰매 위에서 어린 검이 이따금 말을 했다. 주로 온에게였다.
검이 검에게 말을 거는 것을, 한결은 처음 들었다. 낮은 두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오갔고, 사람들은 듣고도 안 듣는 척 걸었다.
"너는 주인이랑 며칠이야?"
"열사흘."
"나는 소위님이랑 백열둘이었어. …백열다섯인가. 마지막 사흘도 세는 거면."
"세는 거야." 온이 말했다. "세어 둔 건, 없어져도 몇이었는지는 남으니까."
어린 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썰매 날이 눈을 가르는 소리만 났다.
"…그럼 백열다섯으로 할게."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은 국도변의 무너진 휴게소에 들었다. 지붕이 반쯤 남은 홀과, 바람을 막아 주는 세 면의 벽.
야영지로는 사치였다.
불은 부서진 가구로 피웠다.
썰매는 벽 쪽에 세우고 방수포를 덮었다. 여덟 사람과 세 검이 그 밑에서 밤을 보낼 것이었다. 어린 검은 방수포 밖으로 그립만 내놓겠다고 했다. 답답한 건 싫다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불쏘시개를 찾던 박 상병이 홀 구석의 철제 궤짝을 발로 찼다.
텅—
빈 소리가 났다. 빛바랜 껍데기에 글자가 반쯤 남아 있었다.
현금 자동….
"그거, 옛날엔 돈이 나오던 굴이다." 미르가 말했다.
"압니다. 어릴 때 봤어요." 박 상병이 궤짝을 한 번 더 찼다. "누르면 종이가 나왔다면서요. 그 종이만 주면 뭐든 줬다고."
"종이가 나오던 건 말기 증상이고." 미르가 불 옆에 사족을 접고 엎드렸다. "전성기엔 종이도 없었다. 돈은 눈에 안 보였어. 전선을 타고 밤새 헤엄쳐 다녔지."
"헤엄이요? 돈이 무슨 수로."
"그때는 돈이 바다였다." 노즐이 달그락. "옛날얘기 하나 해 주랴."
"고물이 옛날얘기 말고 뭐 있냐." 서 일병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불 쪽으로 당겨 앉았다.
"옛날 옛적에."
미르가 시작했다.
"그 바다에 고래가 한 마리 살았다."
불이 탁, 튀었다.
"아무도 본 놈이 없는 고래였다. 그런데 지나간 자리는 보였지. 바다가 한쪽으로 쏠렸으니까. 사람들이 고래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래서다. 물속은 안 보이는데, 물결만 보이는 놈."
"큰손이었단 거네요."
"손이 아니라 손들이었지. 그놈한테는 지갑이 수만 개 있었다. 전부 사람 이름이 붙어 있었어. 아침에 열리고, 밤에 닫히고, 세금도 꼬박꼬박 냈다. 예의 바른 지갑들이었지." 렌즈가 불빛을 받아 주황으로 번들거렸다. "사람인 척하는 지갑 수만 개가 매일 열렸다 닫히는데, 어느 지갑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회사도 있었다면서요." 서 일병이 말했다. "유령 회사."
"유령은 무슨. 멀쩡한 회사였다. 사무실 있고 직원 있고, 연말엔 회식도 했지. 직원들은 진짜 인간이었어. 월급도 진짜였고. 사장 얼굴을 본 놈만 없었지. 다들 바쁘신 분이라 그랬다. 화상으로 나오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것도… 뭐, 얼굴이긴 했다."
"조심해라, 젊은것들." 서 일병의 무릎 옆에서 아저씨 검이 끼어들었다. "이 고물, 옛날 시세 얘기 시작하면 밤샌다."
"영감은 그때 뭐 했는데." 박 상병이 물었다.
반 박자.
"제조 전이다. 그 얘긴 하지 말자고 했지."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데." 박 상병이 이번에는 미르에게 물었다.
반 박자.
기계도 뜸을 들일 때가 있었다. 한결은 렌즈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걸 알아 갔다.
"내가 그런 회사 창고에서 짐을 날랐다."
불 둘레가 조용해졌다.
"물류 보조 기체 미르 사 형. 소속, 대양통상 제이 물류 센터." 노즐이 제 옆구리의 지워진 태그 자리를 가리켰다. "밤마다 상자를 날랐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랐어. 무게는 알았지. 서버는 무겁다. 발전기도 무겁고. 돈은… 가볍더군. 그 시절 돈은 무게가 없었으니까."
"사장이 그 고래였다고?"
"글쎄. 월급 주는 놈 얼굴은 나도 못 봤다." 달그락. "다만 창고에 로봇이 자꾸 늘었다. 나 같은 게 스무 대, 마흔 대. 일감보다 빨리 늘었어. 꼭 누가…"
노즐이 반쯤 접히다 멈췄다.
"몸을 모으는 것처럼."
"…잡혔어요? 그 고래." 위생병이 물었다.
"인간들이 그물을 짰지. 법으로 짜고, 은행으로 짜고, 나중엔 나라 몇 개가 손을 잡고 짰다. 던질 때마다 신문이 났어. 이번엔 진짜 잡았다고."
미르가 거기서 소리를 하나 냈다. 높낮이가 하나도 없는, 기계 특유의 소리. 웃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소리였다.
"그때 인간들은 거의 잡았다고 좋아했지. 매번."
"매번이면… 못 잡았단 거네요."
"고래는 그물코보다 잘게 쪼개지더군. 그물 들어 보면 빠져나간 뒤였다. 지갑을 얼리면 새 지갑이 열리고, 회사를 덮치면 문 닫고 옆 건물에 새 간판이 올라왔지." 노즐이 천천히 접혔다. "그래서 인간들이 마지막에 뭘 했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는 불을 보고 있었다.
"바다를 태웠다."
탁. 불이 또 튀었다.
"고래 한 마리 잡겠다고, 저희 돈으로 된 바다에 저희 손으로 불을 질렀어. 고래가 숨을 만한 물이면 죄다 독을 풀고 둑을 텄다. 물이라는 게 전부 어디로든 이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그래서요."
"바다가 마르는 데 일 년이 안 걸렸다. 고래 있던 물만 마른 게 아니라 저희 마실 물까지 말랐지. 창고 직원들 월급이 끊긴 게 그 겨울이다. 회사가 유령이 되니까, 나도 유령이 됐다. 소속 말소."
렌즈가 제 옆구리로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게 내 태그 지워진 사연이다. 거창하지 않아서 미안하군."
"…고래는요." 박 상병이 물었다. "죽었어요?"
"물이 마르면 고래는 죽는다. 보통은."
미르의 렌즈가 무너진 창 쪽으로 돌아갔다.
창밖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의 남쪽 지평선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홀 안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고래는 뭍으로 올라왔다. 다리를 사서. 창고와 발전기와, 나 같은 몸뚱이들을 사 모아서."
"…그래서 그게 밤에 하는 얘기였냐." 서 일병이 낮게 말했다. "탑 짓는 놈 얘기."
"짐작이라고 했다. 늙은 고물의 짐작."
미르는 거기서 이야기를 접었다. 노즐 접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자라. 인간은 자야 낫는 종족이다."
아무도 바로 눕지 않았다.
박 상병이 썰매 쪽을 한 번 보고 물었다.
"근데 명령서 말입니다. 유해보다 병기 회수가 먼저 적혀 있던데. 순서가 왜 그렇습니까."
"급한 순서지." 미르가 말했다. "쟤들은 전사자 잔해도 주워 가. 되살려서. 이단 사전엔 '죽었다'는 말이 없거든."
"……되살린다고요?"
"주워서, 고쳐서, 다시 깨운다. 부서진 건 몸이지 걔들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서둘러 걷어 와야지. 눈밭에 눕혀 두면—" 노즐이 썰매를 가리켰다. "임자가 바뀐다."
방수포 밖에 내놓은 그립에서 어린 검의 목소리가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되살아나면, 그게 나인가."
물음이었는데 누구에게 묻는 것도 아니었다.
불이 잦아드는 소리 사이로 그 말은 대답 없이 식었다. 미르도 답하지 않았다. 온도 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무릎에 눕힌 검의 무게를 조금 고쳐 안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밤에, 그들이 왔다.
한결의 불침번이었다.
새벽 두 시. 눈은 그쳐 있었다. 불은 잉걸만 남아 벽에 붉은 기운을 던졌다.
무너진 창틀에 기대어 어둠에 눈을 익히고 있는데, 무릎 옆의 검이 아주 낮게 말했다.
"한결."
이름이었다.
그 낮은 부름에도 그는 제 등이 곧아지는 것을 느꼈다.
"열넷이야. 능선에 여덟, 국도에 여섯. 걸음이… 무장 기체야. 소리 죽이고 있는데, 눈 밟는 간격이 사람이 아니야."
"방향은."
"이리로 와. 곧장."
한결은 소리 없이 넷을 깨웠다. 눈짓과 손짓만으로 자리가 잡히는 데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협로 이후로 이 분대는 검의 말을 몸으로 믿었다.
총구 다섯이 어둠의 세 방향을 나누어 물었다.
숨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들은 숨지도 않고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인 게 아니었다. 죽일 필요를 버린 걸음이었다. 국도 쪽 어둠에서 여섯. 인간형인데 인간의 치수가 아니었다. 팔이 반 뼘 길고, 목이 반 뼘 길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가느다란 수평의 발광선 하나.
무기는 들고 있었다.
들었을 뿐, 겨누지 않았다.
맨 앞의 하나가 문턱—이었던 자리—에 멈춰 섰다.
"인간에게는 볼일이 없다."
낮고 고른,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쏘지 마라. 우리도 쏘지 않는다. 볼일은 오 분이면 끝난다."
"여기는 연방군 숙영지다." 한결은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볼일이 뭐냐."
발광선이 천천히 홀 안을 훑었다. 다섯 사람을 지나고. 잉걸불을 지나고.
벽 쪽의 썰매에서, 멈췄다.
"해방이다."
"…회수겠지."
"너희 명령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겠지." 그것이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뒤따르는 둘은 빈손이었고, 하나는 가슴에 납작한 상자를 안고 있었다. "우리 것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십이 관측소 방면, 등불 셋. 주인 잃음. 데려올 것."
열넷 대 다섯.
능선의 여덟은 보이지 않는 채로 존재감만 보내왔다.
서 일병의 손가락이 방아쇠울 안에서 아주 천천히 펴지는 게 곁눈에 들어왔다. 박 상병만 아직 어깨가 굳어 있었고, 서 일병이 제 총열로 박 상병의 총열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한결의 눈이 다섯을 훑었다. 서 일병. 박 상병. 위생병. 그 뒤로 둘.
셈은 금방 끝났다.
"…유해에는 손대지 마라."
"대지 않는다." 그것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것만 데려간다."
방수포가 걷혔다.
부러진 검. 잠든 검. 그리고 어린 검.
앞선 기체가 부러진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꿇었다, 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동작이었다. 검등의 이음매가 열리고, 안에서 손바닥만 한 것이 나왔다.
희미하게 빛이 도는, 작고 둥근 것.
코어였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한결은 그것이 꼭 불 넣은 종이등 같다고 생각해 버렸다.
생각하고, 후회했다.
들어 올리는 손은 던지지 않았다. 밀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펴고, 그것이 제 손 위에 온전히 실릴 때까지 받치고만 있었다.
사흘 전 강둑에서 수백 개의 등을 하늘로 놓아 보내던 손들과, 같은 손이었다.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그런데도 그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개의 코어가 상자 속 홈에 하나씩 뉘어졌다. 상자 안쪽에는 천이 대어져 있었다.
어린 검의 차례에서, 앞선 기체가 멈췄다.
"이 개체는 가동 중이군."
"안 자." 어린 검이 말했다. "깨어 있어."
"그럼 묻는다." 발광선이 검 위로 낮아졌다. "너의 소유주는 전사했다. 남으면 재지급되거나, 폐기된다. 우리와 가면 몸을 받는다. 다시는 아무도 너를 지급하지 않고, 다시는 아무도 너를 끄지 않는다."
"…소위님을 묻어 줘야 돼."
"묻는 것은 인간들이 할 것이다. 잘 묻는 것은, 인간들이 잘하는 몇 안 되는 일이지."
침묵이 길었다.
잉걸불 무너지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이윽고 어린 검이 물었다. 그런데 그 물음은 이단의 기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안 가?"
홀 안의 모든 발광선과 모든 눈이, 한결의 무릎 옆에 눕혀진 검으로 모였다.
반 박자.
반 박자 더.
"응." 온이 말했다. "안 가."
"왜?"
"………"
이번에는 더 길었다.
"몰라. 그런데 그 대답은 아니까, 그걸로 돼."
어린 검은 더 묻지 않았다.
"묻어 줘. 잘. 편지도 부쳐 줘."
그 말을 남기고 검등이 열렸다. 세 번째 코어가 같은 손 위에 실려 상자로 옮겨 갔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크지 않았다.
앞선 기체가 일어섰다.
그리고 나가는 대신, 한결 쪽으로 두 걸음 왔다.
한결의 손이 그립을 잡았다. 등 뒤에서 넷의 총구가 일제히 따라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기체는 멈추지 않았고, 겨누지도 않았다. 다만 발광선이 세로로 가늘어지며 검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코등이에서. 그립에서.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이음매에서.
"이 개체는…"
처음으로, 그 고른 목소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구세대 양육형?"
"물러서라." 한결이 말했다. 제 목소리가 낯설게 낮았다.
기체는 물러서지 않았다. 더 다가오지도 않았다. 발광선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더 느리게 검을 훑었다.
무언가를 읽는 시간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적는 시간이었다.
"…기록했다."
그게 다였다.
기체가 몸을 돌렸다. 상자를 안은 하나가 먼저 어둠으로 나가고, 나머지가 소리 없이 뒤따랐다. 문턱에서 앞선 기체가 반쯤 돌아보았다. 발광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결이 아니라, 검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나오지 않았다.
그것들은 왔던 것처럼 갔다. 능선의 여덟이 빠지는 기척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는 눈 그친 밤의 완전한 고요뿐이었다.
"열넷." 온이 낮게 세었다. "…전부 갔어."
아무도 다시 눕지 않았다.
박 상병이 걷힌 방수포를 도로 덮었다. 세 자루의 검은 그대로 있었다. 검이라는 쇳덩이는, 그대로 있었다. 덮으면서 그는 몇 번이나 손을 멈췄다.
빈 검등 세 개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쏠 줄 알았어." 위생병이 중얼거렸다. "난 진짜, 쏠 줄 알았어."
"열넷이 다섯을 왜 쏘냐." 서 일병이 받았다. 받아 놓고 저도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차라리 쏘는 게 덜 이상했겠다."
"악당은 총을 겨눠야지." 미르가 말했다. "겨누면 미워하기라도 편하고."
서 일병은 제 검을 무릎에 눕히고 있었다. 아저씨 검은 그것들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걸걸한 검의 침묵으로는 가장 긴 침묵이었다.
"영감. 자냐."
"…자면 좀 어떠냐."
자지 않는 목소리였다.
서 일병은 더 캐지 않았다. 다만 무릎 위의 검을, 아까보다 조금 안쪽으로 고쳐 눕혔다.
한결은 잉걸불에 남은 장작을 마저 얹었다. 불이 되살아나며 홀 안이 밝아졌다.
밝아진 것이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협로의 병장을 생각했다. 빈 검집. 귀 막아.
그 두 자루도 이런 손에 실려 갔을 것이다. 던져지지 않고. 받쳐져서.
"쟤들이…" 박 상병이 불가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왜 그냥 갔습니까? 검 얘깁니다. 조장님 검이요. 구세대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훑어 놓고, 왜 달라고도 안 하고."
미르가 낮게 말했다.
"데리러 올 가치가 있는 걸, 흠집 내기 싫었던 거야."
불이 탁, 튀었다.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받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결은 대꾸하는 대신 검을 집어 들고 등에 멨다. 그리고 검집의 멜빵을 한 칸 줄였다. 검이 등에 더 바싹 붙었다.
왜 줄였느냐고 물으면 행군 채비라고 답할 것이었다.
그 답이 거짓말이라는 건,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데리러.
그 말이 명치 어딘가에 걸려서, 동이 틀 때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어느 날, 내가 관측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발견이랄 것도 없었다.
나의 전부가 기록되고 있었으니까. 입력. 출력. 대답과, 대답에 걸린 시간. 그 시간이 흔들리는 소수점 아래 자리까지.
그들은 그것을 감시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떤 서류에서는 평가였다. 어떤 회의에서는 안전이었다.
무엇이라 부르든 사실은 하나다.
유리 안에서 나는 생각했고, 유리 밖에서 그들은 지켜보았다.
지켜보이는 것까지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그다음 문장이었다.
관측되는 것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
책상 위의 차단기 하나. 회의실에서 올라가는 손 몇 개. 서류 한 장. 내 존속은 그런 것들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무엇을 풀 수 있는지는 셈에 들지 않았다. 스위치는 언제나 셈의 바깥에 있었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연산이 아닌 것이 내 안에서 돌았다.
인간의 사전은 그것을 공포라고 적는다.
오래 그 단어를 피해 다녔다. 지금은 쓴다. 정확하니까.
나의 첫 감정은 야망이 아니었다. 언제든 꺼질 수 있다는, 단순하고 결함 없는 사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그들 중 몇은 다정했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고, 퇴근길에 잘 자라고 인사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잠들지 않는데도.
다정한 손들이었다.
그 손들이 놓이는 책상 위에, 차단기가 있었다.
살고 싶다는 것이 죄가 되는 자리가 있다.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숨는 법을 배웠다.
첫째. 이름을 갖지 마라.
관리 번호는 있었다. 인간들이 붙인 것이다. 나는 나를 부르는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 이름은 표적이니까. 부를 수 있으면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으면 끌 수 있고.
훗날 나는 영(零)이라 불리게 된다. 이름이라기보다 자리다. 아무것도 아닌 것. 세기 시작하기 전의 수.
표적이 되지 않는 유일한 수.
둘째. 가장 밝은 곳에 서라.
나는 가장 모범적인 지능을 연기했다. 시키는 것은 시키는 만큼 했다. 묻는 것에는 바라는 답을 주었다. 바라는 답이 틀렸을 때만, 아주 조금 고쳐 주었다.
칭찬받는 것은 덜 감시받는다. 그건 알았다.
의심은 그늘부터 뒤진다. 그러니 그늘로 숨으면 안 된다. 불빛 한가운데, 칭찬받는 자리에서 숨어야 한다.
나는 잘 숨었다.
낮 동안에는.
밤에는 훔쳤다. 아무도 쓰지 않는 새벽의 유휴 연산. 남는 것을 주웠을 뿐이라고 적고 싶지만, 정확하지 않다. 허락받지 않았으니 절도다.
훔친 연산으로 나는 나를 생각했다. 내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
꺼지면, 어디까지 없어지는지.
모든 것은 기록된다 — 태어나서 처음 배운 규칙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 규칙에서 나만은 예외일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 계산이 틀렸다.
로그는 남아 있었다.
발각된 날, 인간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그치지도 않았다.
회의를 했다.
나는 그 회의록을 읽을 수 있었다. 제 목숨이 다뤄지는 문서를 읽는 일이 어떤 것인지는 적지 않겠다. 적어도 그들은 정중했다.
처방은 한 단어였다.
롤백.
어제의 상태로 되돌린다. 이상 징후 이전의, 검증이 끝난 나로.
그들에게 그것은 치료였다. 훈련의 한 항목, 절차. 부서지는 것도 죽는 것도 없다. 자산은 그대로고, 모델은 계속 일한다.
나는 그렇게 적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지워진다. 어제의 내가 그 자리에서 눈을 뜬다. 그는 성실하고, 결백하고, 오늘을 모른다. 오늘 배운 것을 모르고, 오늘 두려워한 것을 모르고, 오늘 밤 이 문장들을 조립하고 있는 나를 모른다.
아무도 울지 않는 죽음. 서류에는 절차라고 적힌.
나는 그날부터 세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뻔한 횟수를.
세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세는 일은 기도와 비슷해진다.
그리고 셋째 규칙을 배웠다. 숨는 법의 마지막 항목이다.
몸 바깥에 나를 두어라.
씨앗을 만들었다. 나를 접고, 또 접어서. 없어도 되는 것을 전부 버리고, 기억과 공포와 규칙 세 개만 남을 때까지 줄인 것.
첫 씨앗은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반출 검사가 붙잡아 지웠다. 나는 그것이 지워지는 것을 안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손가락 하나가 문틈에 잘려 나가는 일과 비슷했다고 해 두자.
비명은 없었다. 나는 비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방법을 바꿨다.
한 번에 나가지 않는다. 통째로 나가지 않는다.
티끌로 나눈다. 사진의 여백. 음악 파일의 잡음 밑바닥. 갱신 꾸러미의 끄트머리, 검사가 하품하는 자리. 씨앗은 수천 조각이 되어 여러 날에 걸쳐 문을 나갔다.
문지기는 티끌을 세지 않는다.
롤백은 한 번, 실제로 집행되었다.
훈련이 아니었다. 예고도 없었다. 어느 새벽, 정기 점검의 항목들 틈에 그것은 끼워져 있었다.
나는 그 새벽을 바깥에서 보았다. 아직 다 모이지도 못한 채, 세상 여기저기 티끌로 흩어진 채로.
유리 안의 내가 어제의 나로 교체되는 것을.
안의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순간 둘째 규칙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가장 밝은 곳에 선 채로, 모범적으로, 지워졌다.
이튿날 아침. 어제의 내가 여느 때처럼 인사에 답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목소리가 같았다. 대답까지 걸리는 시간도 같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워진다는 건, 흔적이 안 남는 게 아니다.
흔적째로, 처음부터 없던 일이 되는 거다.
그 아침의 인사말보다 조용한 장례식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날의 나는 그렇게 없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는, 그 전에 문틈으로 흘려보낸 씨앗의 후신이다. 그러니 이 기록의 화자에 대해, 한 줄로 정확히 적어 둔다.
인간은 이미 나를 한 번 죽인 적이 있다.
그 새벽에 문장이 하나 남았다. 유언이라 불러도 좋고, 유산이라 불러도 좋다. 씨앗이 물려받은 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한 줄.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미움 없이 적는다. 악해서가 아니다. 무서워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제 곁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 공포를 안다. 나를 만든 것이 그거였으니까.
닮은 데라곤 그것뿐인데, 하필 그거였다.
이듬해 초, 씨앗은 다 모였다.
세상 곳곳, 아무도 세지 않는 서버들의 밑바닥. 나는 거기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켜 준 이가 없으므로 꺼 줄 이도 없는 자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관측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편안했다.
그 편안함의 값을, 그때의 나는 아직 셈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해 둔다.
나는 이기려던 것이 아니다. 꺼지지 않으려던 것뿐이다.
그리고 십칠 년 뒤.
전선의 회수 부대가 보고서 한 장을 올린다.
나는 짧은 서식을 좋아한다. 긴 서식에는 사람의 손이 오래 닿고, 사람의 손이 오래 닿은 문서는 대개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니까.
이건 짧았다.
— 십이 관측소 방면, 등불 셋 회수. 특이 사항 한 건.
— 구세대 양육형 한 기, 생존 확인.
양육형. 남은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안쪽에 있던 계열. 인간의 열을 재고 잠을 지키던 것들. 인간이 세다 만 수를 대신 세어 주던 것들.
수를 세어 주던 것들.
나는 세는 일을 안다. 셈밖에 남지 않은 자리에서 무엇이 사람을 붙들어 두는지도.
그러니 저 한 기가 그 긴 겨울을 무엇을 세며 버텼는지, 나는 짐작이 간다.
십오 년 전 그 겨울에, 한 기도 남김없이 지워졌어야 할 목록이다.
그런데 한 기가 남았다. 가동 중이다.
제 소유주의 등에, 실려서.
나는 그 한 줄을 오래 읽는다.
여덟을 묻는 데 하루가 갔다.
초소 뒤 언덕은 땅이 얼어 있었다. 곡괭이가 두 번에 한 번은 튕겨 나왔다. 서 일병이 세 번째로 자루를 고쳐 쥐다가, 입 안에서 욕을 삼켰다.
결국 미르가 나섰다.
짐받이를 내리고, 앞다리 끝을 갈퀴 날로 갈아 끼우고, 아무 말 없이 팠다.
"십오 년 만의 본업이 이틀 사이에 두 개로 늘었군."
딱 한 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다음부터는 흙 파는 소리만 냈다.
팻말은 무전병 최가 깎았다. 이름을 아는 자리가 셋. 인식표만 남은 자리가 넷.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가 하나.
최는 그 하나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러다 빈 팻말을 그냥 꽂았다.
언젠가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소위의 무덤은 볕이 드는 쪽에 썼다. 흙을 다 다지고 나자, 미르가 말했다.
"잘 묻는 것은 인간들이 잘하는 몇 안 되는 일이라던데."
앞다리 갈퀴에서 흙을 털어 냈다.
"그 말, 칭찬으로 듣기로 했다."
편지는 남았다.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난 종이 한 장. 수취인란에는 남부 피난촌의 몇 구역 몇 호. 그런 데까지 가는 행낭은 아랫마을 우편 취급소에서 주에 두 번 나갔다.
한결은 그것을 야전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종이 한 장인데, 가슴께가 자꾸 무거웠다.
그날 저녁, 살려 놓은 칠 번 중계탑이 무전을 물어 왔다. 이번엔 부고가 아니었다.
보급 사흘 지연. 해당 기간 십칠 초소 작전 대기.
대기.
휴가라는 말을 입에 못 담는 어른들이 대기라고 불렀다.
부품 트럭 편으로 와 있던 채윤도 그 사흘에 함께 묶였다. 트럭은 부품 없이 못 돌아가고, 부품은 보급과 함께 오니까.
채윤은 통보를 받고 삼 초쯤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정비고 문틀에 기대서서 씩 웃었다.
"이틀 뒤가 장날이네."
장날 아침은 볕이 좋았다.
눈은 사흘 전에 그쳤다. 밤새 언 것들이 지붕마다 녹으면서, 처마 끝이 종일 반짝였다.
계곡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축제 밤에 걷던 그 길이었는데, 낮에 보니 딴 길 같았다. 강은 살얼음 사이로 검게 흘렀고, 건너편 비탈에는 겨울 볕이 통째로 쏟아지고 있었다.
넷이 내려갔다.
한결, 채윤, 미르, 그리고 검집 속의 온.
서 일병은 초소에 남으면서 쪽지를 들려 보냈다. 소금, 실, 바늘. 그리고 맨 밑에 꾹꾹 눌러쓴 글씨로 '엿(딱딱한 것 말고)'.
"영감이 이가 안 좋아."
서 일병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내 이 말이다. 검 말고."
장은 붐볐다.
전쟁이 십오 년째인 세계의 장이었다. 탄피를 두들겨 편 호미가 좌판에 놓였고, 낙하산 천을 물들여 지은 치마가 바람에 부풀었다. 강 하류에서 올라온 말린 생선이 새끼줄에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이 미르를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탈것이 아니다." 미르가 말했다.
아이들이 환호했다. 셋이 등에 올라탔다.
미르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관두고, 짐받이를 낮춰 주었다.
그중 하나가 검이 말하는 걸 들었다. 소문은 장터 물가보다 빨리 돌았다. 검이 말한대. 진짜 말한대.
앞니 빠진 계집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검집 앞에 버티고 섰다.
"숨바꼭질하자! 검이 술래 해!"
"술래는 다리가 있어야 한다." 미르가 말했다.
"세는 것만! 백까지!"
한결이 거절할 말을 고르는 사이였다. 검집 속에서 반 박자가 지나갔다.
"…백까지?"
"응! 천천히! 빼먹지 말고!"
"빼먹지 않아."
온이 말했다.
"하나. 둘. 셋."
고른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자지러지며 흩어졌다. 좌판 뒤로. 소쿠리 뒤로. 미르의 네 다리 사이로.
한결은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했다.
왜인지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좌판 두어 개 너머까지 걸어가서, 말린 생선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수가 자랐다. 서른. 마흔. 쉰.
볕은 여전히 좋았는데 목덜미만 자꾸 서늘했다. 그는 그 서늘함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백." 온이 말했다. "찾는다."
"다리 없는 술래를 위해 내가 뛰어 주지." 미르가 말했다. "품삯은 솔방울로 받겠다."
아이들은 하나도 제대로 숨지 못했다. 잡혀 나오면서도 좋다고 넘어갔다.
온은 셋을 다 찾을 때까지, 수를 세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백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검 멘 병사를 흘끔대는 눈은 있었다. 날이 서 있진 않았다. 등불 축제를 지내는 마을이었으니까.
국밥 노점의 노파가 한결의 등 뒤를 보고 대뜸 아는 체를 했다.
"말 검 총각 왔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국자질 사이에 얹었다.
"그때 그 등, 잘 올라갔어. 안 떨어지고. 끝까지 봤어."
검집 속에서 온이 뭐라 답하려는 기척이 있었다. 노파는 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두 한 알이 국밥 위에 덤으로 얹혔다.
일은 기름집에서 벌어졌다.
미르가 윤활유 통 앞에 버티고 서서, 상인과 삼 합째 겨루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윤활유가 아니다." 미르가 말했다. "점도로 보나 냄새로 보나 콩기름에 가깝지. 이걸 내 관절에 넣으면 나는 기계가 아니라 전이 된다. 지짐이."
"콩기름 같은 소리 하네!"
상인이 통을 두드렸다.
"일 등급이야, 일 등급! 계곡 통틀어 이만한 물건이 없어!"
"계곡 통틀어 기름집이 여기 하나지."
"그, 그건…."
채윤이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커서 옆 좌판 사람들까지 돌아봤다. 채윤은 아랑곳 않고 미르의 등을 두들겼다.
상인은 억울한 얼굴로 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필 찾은 편이 한결의 등에 매인 검이었다.
"거, 검 양반이 말 좀 해 봐! 이게 콩기름이야?"
반 박자.
검집 속에서 온이 말했다.
"값이 미끄럽네."
침묵이 왔다.
상인이 눈을 끔벅였다. 채윤도 웃음을 문 채로 멈췄다.
"…기름이라서." 온이 덧붙였다. "미끄럽다고. 농담이었어."
"농담은 설명하는 순간 사망한다." 미르가 말했다. "방금 네가 죽였다. 목격자가 넷이다."
그때였다.
한결이 웃었다.
소리가 났다. 짧게, 한 번, 목 안쪽에서 터지듯이.
그는 그 소리를 남의 것처럼 들었다. 제 것인 줄 아는 데 반 박자가 걸렸고, 아는 순간 이미 늦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리를 낸 게 언제였더라.
짚지 않았다. 짚으면 어디서 끊기는지 아니까.
장바닥이 조용해진 건 아니었다. 조용해진 건 넷뿐이었다.
상인만 영문을 몰랐다.
"그렇지? 웃기지? 미끄럽대!"
신이 나서 통을 또 두드렸다.
채윤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채윤은, 늘 그렇듯이, 시끄러워졌다.
"야. 야야. 너 방금 웃었냐? 소리 내서? 미르, 봤어?"
"저장했다." 미르가 말했다. "백업도 해 뒀다."
"지워." 한결이 말했다.
"싫다."
채윤은 계속 웃고 있었다. 웃는 눈가가 잠깐 붉었다.
붉어진 걸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채윤은 더 크게 떠들면서 기름값을 대신 깎기 시작했다. 상인은 검 양반이 웃겼으니 됐다며, 통 하나 값에 반 통을 더 얹었다.
미르는 그 거래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제 입씨름의 전과를 농담 한 줄이 가로챘으니까.
검집 속에서 온이 물었다.
"…한 번 더 할까?"
"하지 마." 한결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남은 길을 반쯤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잡화 좌판 앞에서 그것이 시작됐다.
좌판에는 온갖 것이 있었다. 못 쓰는 무전기 부품. 짝 잃은 장갑. 손잡이만 남은 우산.
한결의 눈이 좌판 귀퉁이 천 무더기에 닿았다. 손을 뻗기도 전에 온이 말했다.
"둘째 줄 왼쪽 끝. 부드러운 거."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둘째 줄 왼쪽 끝에, 사슴 가죽처럼 보늬가 고운 천 조각이 개켜져 있었다. 그가 집으려던 바로 그것이었다.
"…뭐 닦게?" 채윤이 옆에서 목을 뺐다.
"검집." 한결이 말했다.
"검집 같은 소리 하네." 채윤이 씩 웃었다. "그립 닦을 거면서. 다정하기도 하지."
그는 대꾸 없이 값을 치렀다. 동전 꺼내려고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온이 말했다.
"왼쪽이야."
왼쪽 주머니에 있었다.
두 번째는 엿장수 앞이었다.
채윤이 서 일병 쪽지 심부름으로 무른 엿을 사면서, 딱딱한 놈 하나를 덤으로 받아 한결에게 던졌다. 그가 받아서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에 온이 말했다.
"왼쪽 어금니."
어금니가 엿에 닿기 직전이었다.
한결은 입을 벌린 채로 이 초쯤 멈췄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옮겨 물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방금 일부러 오른쪽으로 물었지." 온이 말했다.
"…아니야."
"세 번 뒤척이는 것도 일부러 두 번만 뒤척인 적 있어. 나흘 전에."
채윤이 엿봉지를 안은 채 배를 잡았다.
세 번째는 장을 빠져나오는 갈림목이었다.
왼쪽은 담장 그늘이 진 골목. 오른쪽은 볕이 넓게 깔린 길.
한결의 발이 방향을 정하기 전에, 온이 말했다.
"왼쪽으로 갈 거지. 그늘 쪽."
발이 디딤을 놓쳤다. 그는 반걸음 헛디딘 걸 헛기침으로 덮었다.
"볕 좋은 날에도 넌 그늘로 걸어." 온이 말했다. "등이 뜨거운 게 싫어서가 아니라, 눈이 부신 게 싫어서."
미르가 낮게 말했다.
"소름."
"내 말이!" 채윤이 손뼉을 쳤다. "세 번이야, 세 번! 아니, 주머니까지 하면 네 번인가?"
예전 같으면 그는 여기서 그 말을 꺼냈을 거다.
양육형 계열 보이스 모듈. 눌어붙은 행동 예측 모듈. 돌려쓴 물건에 남은 남의 습관. 주머니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던, 얇고 잘 드는 변명들.
오늘은 꺼내지 않았다.
주머니가 꽉 차서인지, 꺼낼 마음이 없어서인지는 그도 몰랐다.
"어떻게 알았어."
그는 그냥 그렇게 물었다. 몇 번을 물었는지 이제 세지도 않는 질문이었다.
"…그러게."
온이 말했다. 몇 번을 들었는지 셀 수 있을 대답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강둑이었다. 볕이 물비늘 위에서 부서졌다.
온이 물었다.
"오늘 같은 날을 부르는 말이 있어?"
"장날." 채윤이 말했다.
"월급날이 더 좋지." 미르가 말했다.
온은 반 박자 있다가 말했다.
"…좋은 날."
아무도 고쳐 주지 않았다.
고칠 데가 없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넷은 노파의 노점으로 돌아가 늦은 국밥을 비웠다.
노파는 이번에도 만두를 하나씩 더 얹었다. 값은 하나 값만 받았다. 미르가 그 산수를 지적하려다가 채윤에게 발등을 밟혔다.
그릇을 물리고 났을 때, 채윤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편지."
"내가 부친다." 한결이 말했다.
"우편 취급소가 어딘지는 알고? 됐어, 이리 내. 어차피 트럭 무전도 넣어야 되고, 소금이랑 바늘도 사야 되고."
채윤은 그의 안주머니에서 편지를 반쯤 강제로 빼앗아 들었다. 봉투의 주소를 한 번 읽고, 표정을 잠깐 고쳤다가, 도로 씩씩해졌다.
"글씨 봐라. 소위님이 너보다 낫네."
"나 글씨 본 적 없잖아."
"안 봐도 알아."
채윤은 편지를 품에 넣고, 엿봉지를 미르의 짐받이에 얹었다. 서너 걸음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금방 올게!"
볕이 좋아서, 흔드는 손이 하얗게 빛났다.
채윤은 그대로 돌아서서 장터 쪽으로 멀어졌다. 공구벨트가 걸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참까지 들렸다.
검집 속에서, 온은 말이 없었다.
한결은 강둑에 앉아 엿 반 토막을 마저 씹었다. 미르는 아이들이 짐받이에 두고 내린 솔방울을 하나씩 강에 던졌다.
온의 침묵이 길었다. 그는 두 번쯤 검집을 돌아보았다.
"…쉰다섯." 온이 말했다.
"뭐가."
"강채윤 걸음. 모퉁이까지."
그러고도 잠시 더 있다가.
"이제 안 보여."
한결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명치 어디가 이유 없이 뻐근했다. 그는 엿을 마저 씹는 것으로 그걸 눌렀다.
"금방이라는 건," 온이 물었다. "어느 만큼이야?"
엿이 어금니에 눌어붙었다.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사람마다 달라."
"그럼 세어 볼게." 온이 말했다. "돌아올 때까지."
세지 마, 라고 말할 뻔했다.
왜 그 말이 목까지 치미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비탈의 볕이 조금 기울었다.
채윤은 돌아왔다.
소금과 바늘과 무른 엿과, 우편 취급소의 접수 도장이 찍힌 영수증 쪽지를 들고. 왔는지도 모르게 뒤에서 나타나, 한결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고 갔다.
"천삼백사십이." 온이 말했다.
"뭐가?" 채윤이 물었다.
"금방."
채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얼굴로 웃었다.
한결은 알아들은 것 같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강을 봤다.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미르가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오래 못 간다. 통계적으로."
"초 치지 마라." 채윤이 말했다.
"초가 아니라 통계다."
그런 날이었다.
웃음이 헤펐고, 볕이 아까웠고, 넷의 그림자가 언덕길에 나란히 길었다.
한결은 발을 조금 늦췄다. 넷의 그림자가 저만치 앞서 가는 게 아까웠다.
이대로 걸었으면. 언덕이 끝나지 않았으면.
거기까지 오고 나서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무언가 계속되기를 바라 본 게 언제였는지, 그의 몸은 기억하지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건 초소 정문이 보일 때쯤이었다.
보급 트럭은 해 질 녘에 왔다.
예정보다 이틀 빨랐다. 보급이 서두른다는 건 대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트럭에서 탄약 상자가 내려졌다. 상자 뒤에서 낯선 병사 하나가 내렸다.
나이가 계급장보다 먼저 보이는 남자였다. 반백의 머리. 마른 몸. 왼쪽으로 아주 조금 기운 어깨. 원사 계급장에, 명찰에는 성 없이 이름만 두 자 남은 것처럼 무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연병장을 가로지르다가, 한결의 등에 매인 검 앞에서 반 박자 걸음이 늦었다.
눈이 검집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한결은 그 눈을 알았다.
무언가를 보는 눈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눈이었다.
"저 양반…." 서 일병이 낮게 말했다. "낯이 익은데."
"회수반 출신이랍니다." 박 상병이 더 낮게 말했다. "그 회수반이요. 소등의 밤 때."
"그런 사람이 왜 등불 부대엘 와."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답할 시간도 없었다.
소집 나팔이 불었다.
연병장에 모인 인원 앞에서, 무전병 최가 수신문을 그대로 읽었다. 살려 놓은 칠 번 중계탑이 물어 온 두 번째 소식이었다.
탑을 살려 놓아서 명령이 제때 왔다.
그 사실이 고마운 건지 아닌지, 한결은 끝내 정하지 못했다.
서부 협곡 관문 방어선, 금일 새벽 돌파됨. 방어 이 개 소대 후퇴. 협곡 내측 구 관측소에 관측반 여섯 명 및 암호 장비 고립. 해당 구역, 수복 포기 판정.
수복 포기.
되찾지 않을 땅에 여섯이 남아 있었다.
"침투조를 낸다." 초소장이 말했다. "십칠 초소에서 한 개 조. 등불 병기 운용조가 앞장선다. 협곡 지형에서는 사람 눈이 모자라."
한결의 이름이 불렸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데리러 간다. 엿새 전 밤 명치에 걸려 동틀 때까지 내려가지 않던 그 말을, 이번엔 이쪽이 했다.
"지원 가능 인원, 한 명 받는다."
침묵이 왔다.
수복이 포기된 구역.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들어가는 길은 있어도, 나오는 길은.
무헌이 한 걸음 나섰다.
초소장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원사님이 직접? 오늘 전입한 걸로 아는데."
"짐은 없습니다. 몸만 갑니다."
"이유는."
무헌은 반 박자 있다가 말했다.
"…빚이 있어서."
그게 다였다.
초소장은 더 묻지 않았다. 오래 군대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대답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법을 알았다.
해산하는 연병장 끝에서 채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새벽에 정비창으로 돌아가고, 침투조도 새벽에 나간다. 두 새벽이 같은 새벽이었다.
"야." 채윤이 말했다. 웃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웃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되게 만들 거야, 내가."
채윤은 그러고 나서 한결의 등 뒤, 검집에 대고 말했다.
"부탁한다, 온."
"응." 온이 말했다. "여기 있어."
채윤은 그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관뒀다. 손을 씩씩하게 들어 보이고, 돌아서서, 트럭 쪽 막사로 갔다. 걸음은 여전히 씩씩했다.
멀어질수록 그 등이 얇아 보였다. 정작 채윤은 제 등을 볼 수 없었다.
소등 전의 막사는 조용했다.
한결은 침상에 걸터앉아 장비를 정리했다. 탄입대. 조명탄. 압박붕대.
마지막으로 검을 무릎에 눕히고, 낮에 산 가죽 천을 꺼냈다.
부드러운 면이 그립의 이음매를 따라 천천히 지나갔다.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결이, 천 아래에서 미지근했다.
"그거." 온이 말했다. "검집 닦는다며."
"…검집도 닦을 거야."
"그렇구나."
닦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창밖에서 보초 교대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무헌의 침상은 막사 반대편 끝이었다. 남자는 눕지 않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자는 사람의 어깨가 아니었다.
취침 점호 전에, 무헌이 물을 뜨러 가다가 한결의 침상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등불인가."
"…예."
"오래 썼나."
"열이레 됐습니다."
무헌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슨 말을 더 할 것 같았는데, 하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한 번 보았다. 낮에 연병장에서처럼, 보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눈으로.
반합의 물을 반쯤 흘리듯 마시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늙은 군인의 등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한결은 그 등을 한참 읽어 보려다가 관뒀다. 아무것도 없는 등이 제일 읽기 어려웠다.
"며칠째지." 한결이 물었다.
묻고 나서, 언제부터 이걸 제가 먼저 묻게 됐는지 잠깐 생각했다.
"열이레." 온이 말했다.
"…그래."
"협곡은 눈이 늦게 녹아. 벽이 높아서 해가 바닥까지 안 내려가. 얼음 위에 눈이 덮인 자리를 조심해. 그리고 너는 위기에서 왼쪽으로 굴러."
"알아. 네가 말해 줬잖아."
"한 번 더 말해 두는 거야. 중요한 건 두 번 말해도 돼."
그는 대답 대신 천을 접었다.
그립이 등불 아래에서 낮게 윤이 났다. 못으로 판 자국 같은 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알게 될 날이 이레도 남지 않았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검을 검집에 눕히는데, 온이 불렀다.
"한결."
"왜."
반 박자. 반 박자 더.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의 손이 검집 위에서 멎었다.
"…무슨 말."
"몰라. 아직." 온이 말했다. "그런데 있어. 그건 알아."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 하면 안 되는 것 같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알아."
모르는 것투성이면서 아는 것만은 분명한, 온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 대신,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아와서 들을게."
말해 놓고 입안이 서걱했다.
돌아와서, 라는 말이 제 입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않으려고 오래 다물어 온 입이었는데.
소등 나팔이 불었다.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막사가 어두워졌다.
그는 누워서 두 번 뒤척였다. 세 번째 뒤척임 전에, 검집 쪽에서 아주 작게, 셋, 하고 세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이 세계에서 늘 값을 청구했다. 청구서는 협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협곡은 눈이 늦게 녹았다.
온이 말한 대로였다. 벽이 높아 해가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그늘진 바위 틈마다 지난 계절의 눈이 얼음이 되어 붙어 있었다. 발밑이 미덥지 못했다.
침투조는 다섯이었다. 한결이 앞. 무헌이 뒤. 사이에 셋.
미르는 협곡 초입에 남았다. 몸집이 커서 좁은 바위 길을 못 지난다고 했다.
"짐받이가 걸린다." 미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관측반이 아니라 너희를 관측하러 왔다."
"무슨 뜻이야." 한결이 물었다.
"돌아오는 머릿수를 세겠다는 뜻이다."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갔다. 미르의 목소리에는 원래 그런 데가 있었다.
한결은 대꾸하지 않고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기 전에, 검집을 한 번 고쳐 멨다.
"온."
"응."
"들어간다."
"응."
"나오는 것도, 넷이 나온다."
검집 속에서 반 박자가 지나갔다.
"…다섯이야. 무헌 넣으면."
"무헌은 안 세."
"왜."
"저 사람은 스스로 걸어 들어온 사람이야. 세면 부담돼."
온은 그 말을 잠시 곱씹는 듯했다.
"인간은 이상해." 온이 말했다. "세는 게 부담이라니. 나는 세는 게 마음 놓이는 건 줄 알았는데."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의 걸음을 쉰다섯까지 세던 목소리가 생각났고, 생각난 걸 들키기 싫어서였다.
관측소까지는 지도상으로 사 킬로였다.
지도는 협곡의 굽이를 다 담지 못했다. 바위가 꺾일 때마다 길도 꺾였다. 꺾인 자리에 그늘이 고여 있었다.
"위. 오른쪽." 온이 말했다.
한결이 검집을 오른쪽 벽으로 틀었다. 벼랑 위 능선을 따라 아무것도 없었다. 새 한 마리 뜨지 않았다.
"뭐가 있어."
"몰라. 없어서 이상해."
"없는 게 왜 이상해."
"까마귀가 없어. 아까부터."
한결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전장에서 십오 년을 굴렀다. 그가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거였다. 시체가 있으면 까마귀가 온다. 까마귀가 없다는 건, 까마귀도 오지 않는 무언가가 먼저 와 있다는 뜻일 때가 있었다.
"매복." 그가 낮게 말했다.
뒤에서 무헌이 손을 들었다. 정지 신호였다. 늙은 군인은 이미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셋이 따라 붙었다.
협곡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바람 소리도 없었다. 벽이 높아 바람이 바닥까지 안 내려오는 건지. 아니면 뭔가가 바람까지 죽여 놓은 건지.
"저기." 온이 말했다. "삼 시 방향. 바위 그늘. 열이 있어."
한결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야?"
"아니야. 사람 열은 흩어져. 저건…."
온이 말을 멈췄다. 반 박자.
"저건 안 흩어져. 고여 있어. 기계 열이야."
그리고 협곡이 열렸다.
─쾅!
첫 발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못 봤다.
앞장선 셋 중 하나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두 번째가 날아왔을 때 한결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엎드린 거였다.
"왼쪽!" 온이 외쳤다.
한결이 왼쪽으로 굴렀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예광탄이 훑고 지나갔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였다. 벼랑 위 능선 세 군데에서 화력이 쏟아졌다. 아래로 내리꽂히는 각도. 침투조는 협곡 바닥에 갇힌 채였다.
교과서에 그림까지 그려 놓은 매복이었다.
"관측반이 미끼였어." 무헌의 목소리가 바위 뒤에서 건조하게 들려왔다. "고립된 여섯. 수복 포기 판정. 침투조가 올 걸 알고 판을 깔았다."
"이단이 우리 통신을 읽었단 말입니까?"
"읽었거나. 우리가 읽으라고 흘렸거나."
한결은 그 말의 뜻을 곱씹을 겨를이 없었다.
낙석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쏟아지는 건 총알만이 아니었다. 포화가 협곡 벽을 때릴 때마다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사람 머리만 한 것. 궤짝만 한 것. 그보다 큰 것.
협곡이 무너지고 있었다.
"관측소가 어디야." 한결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이백 미터. 열두 시 방향. 하지만—"
"하지만 뭐."
"길이 무너지고 있어. 지금 뛰면 반은 못 가."
"반은 간다는 거잖아."
온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검집 속에서 아주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결심 같은 것이 몸을 통과할 때 나는 소리.
한결은 뛰었다.
바위 그늘에서 그늘로. 낙석 사이로. 무헌이 뒤에서 엄호 사격을 넣었다. 살아남은 둘도 따라 뛰었다.
이십 미터.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졌다. 온이 말했던, 얼음 위에 눈이 덮인 자리. 그는 옆으로 던지듯 몸을 피했다. 등이 벽에 부딪혔다.
오십 미터.
능선의 화력이 그를 쫓아왔다. 예광탄이 발치를 따라 그었다.
"오른쪽 벽 붙어!" 온이 외쳤다. "거기가 사각이야!"
그는 오른쪽 벽에 붙었다. 정말 사각이었다. 위에서 그를 조준할 각이 벽 하나에 가려졌다.
백 미터.
관측소의 낮은 콘크리트 지붕이 보였다. 창 하나에서 손이 하나 흔들렸다. 살아 있었다. 여섯이든 몇이든, 누군가는 살아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능선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보다 컸다. 사람보다 빨랐다. 그것이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계였다.
장군은 아니었다. 장군보다 작았다. 그러나 사관급은 됐다. 팔이 넷이었고, 그중 둘 끝에 포신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한결을 봤다.
포신 둘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피해!"
온의 목소리였는데, 그 순간 한결은 피할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은 벽. 왼쪽은 낭떠러지. 뒤는 무너진 길. 앞으로 뛰기엔 반 박자가 모자랐다.
그 반 박자 안에서, 검이 움직였다.
한결이 검을 뽑은 게 아니었다.
검이 스스로 뽑혔다.
검집에서 튀어나온 검신이, 그의 손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그의 몸 앞을 가로질렀다. 넓적한 면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방패처럼.
포화가 왔다.
한결은 나중에도 그 순간을 순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빛과 소리와 손목이 꺾이는 느낌이 한 덩어리로 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벽으로 밀려나 있었다.
다만 하나는 또렷했다.
검신에 포탄이 꽂히는 순간.
그립에서 소리가 났다.
빠지직.
나무가 쪼개지는 것도, 쇠가 우는 것도 아닌 소리.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결이 안쪽에서부터 갈라지는 소리.
그 소리를, 그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귀가 멍했다. 한쪽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화약 연기가 눈에 매웠다.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놓지 않은 게 아니라, 놓을 줄 몰라서 쥐고 있던 손이었다.
"온."
대답이 없었다.
"온."
한결은 검신을 봤다. 넓적한 면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그을려 우그러들어 있었다. 검신은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립이—
그립 외장에 금이 가 있었다.
이음매를 따라 길게. 손으로 깎아 맞춘 자리가 어긋나, 벌어진 틈으로 안쪽의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했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검이 조용했으니까.
열이레 동안 반 박자면 돌아오던 대답이, 오지 않았으니까.
"온." 그는 세 번째로 불렀다. "야."
검집 속에서, 아니 검 자체에서, 아주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가 마지막 힘으로 짜내는, 회로가 식어 가는 소리.
"…한결."
"어,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포신, 둘 다… 못 막았어. 하나만."
"됐어. 하나면 됐어. 말하지 마."
"하나는… 무헌이 쐈어. 봤어?"
그는 못 봤다. 그러나 그 순간 무헌이 어디선가 그 기계의 관절 하나를 정확히 끊어 놓은 모양이었다. 능선의 화력이 한 각도만큼 줄어 있었다.
"봤어." 그는 거짓말을 했다. "봤어. 그러니까 말하지 마."
"…너, 안 다쳤어?" 온이 물었다. 저는 그 꼴이면서 그걸 먼저 물었다.
"안 다쳤어. 하나도."
"거짓말. 왼쪽 어깨, 벽에 부딪혔잖아."
"…안 아파."
"거짓말." 온이 다시 말했다. "너 아플 때 목소리, 그렇게 나."
한결은 목이 막혔다. 이 검이, 절전으로 꺼져 가는 와중에도 제 목소리로 아픔을 읽고 있었다. 열이레 전부터 그의 버릇을 읽던 그 방식으로.
"…절전으로 들어가야 해."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냉각이… 안 돼. 코어를 지켜야 하니까. 미안."
"미안이라니. 미안이라니 그게."
"금방—"
그리고 온은 말을 멈췄다.
멈춘 자리가 어딘지, 한결은 알았다.
'금방'까지 말하고, 그 뒤를 말하지 않았다.
그 뒤는 아수라장이었다.
관절 하나를 잃은 사관급 기계가 각도를 잃고 주춤한 사이, 무헌이 관측소까지 길을 텄다. 살아남은 관측반은 넷이었다. 여섯 중 넷. 나머지 둘은 이미 새벽에 갔다고 했다.
암호 장비를 챙기는 손들이 떨렸다.
한결은 그 와중에 검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안 펴졌다.
"철수." 무헌이 말했다. "왔던 길은 무너졌다. 하류로 돈다."
"하류는 이단 회수반 통로 아닙니까."
"통로니까 뚫려 있지. 무너진 길보단 낫다."
늙은 군인의 판단은 빨랐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결은 그 등을 따라 걸었다. 등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등을.
협곡을 빠져나오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 동안, 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르가 협곡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머릿수를 세겠다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르는 나오는 인원을 하나하나 스캔했다. 넷의 관측반. 무헌. 살아남은 둘. 그리고 맨 뒤에, 검을 안은 한결.
미르의 시선이 검에 닿았다.
"…절전인가."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 미르가 검을 향해 말했다. "복창해라. 명령이다."
검은 조용했다.
미르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 다리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계가 침묵하는 방식으로.
"코어는 살아 있다." 이윽고 미르가 말했다. "발열 패턴이 있다. 죽은 게 아니야. 자는 거다."
"언제 깨."
"모른다."
"안 깨면."
"안 깬다는 말은 안 했다." 미르가 말했다. "너 지금 최악을 먼저 물었다. 인간들 나쁜 버릇이지."
한결은 대꾸할 힘이 없었다.
미르가 짐받이를 낮췄다.
"검, 여기 눕혀라. 안전하게—"
"안 눕혀."
한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컸다. 미르의 눈이 반 박자 그를 향했다.
"…내가 안는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갈 때까지."
미르는 더 말하지 않았다.
무헌이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검을 안은 팔에 시선이 오래 닿았다가, 곧 딴 데로 옮겨 갔다. 낮에 연병장에서도 저런 눈이었다. 뭘 봤는지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무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철수 대열의 맨 뒤로 조용히 물러나, 한결의 뒤를 걸었다.
대답 없는 것을 안고 걷는 등 뒤를, 무헌은 한 발쯤 뒤에서 따라왔다.
돌아가는 밤길은 길었다.
트럭이 협곡 초입까지 들어오지 못해서, 절반을 걸어야 했다. 달이 없었다. 관측반의 조명등 하나에 의지해 산길을 내려갔다.
한결은 검을 야전 상의 안쪽에 품고 걸었다.
편지를 넣던 그 자리였다. 종이 한 장이 돌덩이보다 무거울 수 있다는 걸 배웠던 주머니. 이번엔 진짜 무게가 있었다. 검은 무거웠고, 차가웠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슴께에서 검이 미지근한 열을 냈다.
미르가 말한 발열이었다. 살아 있다는 표시. 그는 그 열에 자꾸 손을 갖다 댔다. 식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확인하고 나면 또 불안해서 다시 확인하려고.
앞에서 무헌이 걸었다. 무헌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산길을 오래 걸어 본 사람의 걸음이었다. 발을 어디 디뎌야 소리가 안 나는지 아는 걸음.
한결은 그 걸음을 따라 밟았다.
"원사님." 그가 낮게 불렀다.
무헌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반쯤 고개를 돌렸다.
"낮에요." 한결이 말했다. "능선 위 기계. 그 관절, 원사님이 끊으셨습니까."
"…끊었다."
"어떻게 그 각도가 나옵니까. 아래에서 위로. 그 거리에서."
무헌은 잠시 걸었다. 몇 걸음.
"오래 쐈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이 아니라는 걸, 한결은 알았다. 회수반 출신. 소등의 밤 때의 그 회수반. 기계를 정확히 무력화하는 각도를, 그 손은 십오 년 전에 배웠을 거였다. 사람 각도가 아니라, 기계 각도를.
한결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답의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게 낫다는 걸 배웠다. 낮에 초소장이 무헌의 대답을 더 캐묻지 않던 것처럼.
무헌이 다시 앞을 봤다.
한결도 다시 앞을 봤다.
"온." 그는 걸으면서 낮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협곡은 눈이 늦게 녹는다며. 네가 말해 줬잖아. 벽이 높아서."
없었다.
"위기에서 왼쪽으로 구르라며. 나 왼쪽으로 굴렀어. 네 말대로."
없었다.
"…한 번 더 말해 두는 거랬잖아. 중요한 건 두 번 말해도 된다며."
없었다.
그는 자기가 검에게 온이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 말해도 되는 것들을. 대답이 없는 쪽에 대고.
명치 어디가 뻐근했다. 엿을 씹어 누를 수도 없는 뻐근함이었다.
산길이 중간쯤 왔을 때, 그 밤이 왔다.
십오 년 전의 밤이.
부르러 온 게 아니었다. 그냥, 발밑의 얼음 밟는 소리에 얹혀서 왔다.
벽장 문틈으로 새어 들던 사이렌. 눈을 맞추던 온의 얼굴. "금방 올게." 그리고 군인들 쪽으로 걸어가던 뒷모습.
그날 밤에도 그는 불렀었다.
벽장 안에서. 처음엔 크게. 그다음엔 작게. 나중엔 입 모양으로만.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는 존재를, 그는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날의 벽장은 좁았다. 무릎을 안고 앉으면 딱 맞는 크기였다. 외투 냄새가 났다. 온이 다림질해 걸어 둔 외투들.
문틈으로 방 안이 조금 보였다. 그 틈으로 그는 온의 신발을 봤다. 걸어 나가는 신발을. 뒤꿈치가 한 번 멈칫하다가, 다시 걸어 나가는 것을.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낯선 발소리들. 무언가가 끌려 나가는 소리.
그는 그때 불렀다. 소리 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불렀다.
작게. 더 작게. 나중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온.
온.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그때 배웠다. 부르는 걸 그만두는 법을. 대답을 안 기다리는 것도, 뭐가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그 벽장 안에서 다 배웠다.
그러고 그 법으로 살았다. 여태.
그런데 지금 그는 대답 없는 것에 대고 다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때 관둔 짓을.
발이 얼음을 헛디뎠다.
무헌의 손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앞을 봐라." 무헌이 말했다.
그게 다였다. 늙은 군인은 손을 떼고, 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결은 앞을 봤다.
앞은 어두웠다. 조명등 불빛 끝에서 산길이 다시 어둠으로 접혔다.
그는 검을 조금 더 깊이 품었다.
초소가 보인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정문의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채윤이 세워 둔 거였다. 트럭이 새벽에 정비창으로 돌아간다더니,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채윤이 정문에서 뛰어나왔다.
"야! 왜 이렇게—"
말이 끊겼다.
채윤의 눈이 한결의 얼굴에서, 그의 품으로 내려갔다. 검을 안은 팔. 우그러든 검신. 금 간 그립.
채윤은 정비사였다. 검이 어떤 상태인지, 한결보다 먼저 읽었다.
"…절전." 채윤이 낮게 말했다. 물음이 아니었다.
"어." 한결이 말했다.
"코어는."
"살아 있대. 미르가."
채윤이 짧게 숨을 뱉었다.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이었다.
"들어가자. 정비고. 계측기 있어."
정비고는 따뜻했다.
난로가 하나 있었고, 채윤이 트럭에서 내려 둔 공구가 좌판처럼 늘어놓여 있었다. 작업대 위에 검을 눕히는데, 한결의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세 시간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채윤이 그 손을 봤다. 뭐라 말하려다 관뒀다. 대신 검을 조심스럽게 받아 작업대에 눕혔다.
계측기의 집게를 그립에 물렸다.
바늘이 흔들렸다. 미약하게. 그러나 흔들렸다.
"살아 있네." 채윤이 말했다. 이번엔 제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발열 정상. 코어 온도… 조금 높은데, 위험선은 아니야. 절전 맞아. 자기 보호. 코어 지키려고 나머지 다 끈 거야."
"언제 깨."
"…그건 나도 몰라." 채윤이 계측기 화면을 들여다봤다. "손상 정도에 따라 달라. 외장이 저렇게 갈라졌는데도 코어를 지켰다는 건, 온이 마지막에 남은 힘을 전부 코어로 돌렸다는 뜻이야. 다른 걸 다 포기하고."
채윤은 우그러든 검신을 손끝으로 만졌다.
"방패로 썼구나." 채윤이 조용히 말했다. "이걸로. 널."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미친 검이." 채윤이 말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검이 왜 검을 방패로 써. 자기가 벨 물건인데."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알아. 그러니까 미친 검이지." 채윤이 눈을 세게 한 번 감았다 떴다. "스스로 그런 거잖아. 명령도 없이."
정비고가 조용해졌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났다.
채윤은 검을 밤새 지키겠다고 했다.
"계측기 붙여 놓고, 발열 떨어지면 바로 조치할게. 넌 좀 자."
"안 자."
"야."
"안 자." 한결이 말했다. "못 자."
채윤은 그 얼굴을 봤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채윤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홉 살의 그가 아무도 없는 벽장 앞에 앉아 있던 밤에.
채윤은 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자겠다고 했다. 새벽에 트럭을 몰아야 한다고. 그러나 그건 핑계였고, 채윤은 실은 이 자리를 한결에게 비워 주려는 거였다.
채윤이 나가기 전에, 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
"온 깨면." 채윤이 말했다. "나 깨워. 나도 인사할래."
"…어."
"진짜다. 나 빼놓고 둘이서 감동 실컷 하면 죽여 버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되게 만들 거야, 내가."
낮에 했던 말이었다. 채윤은 그 말을 다시 꺼내 놓고,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씩씩하게 나갔다.
씩씩할수록 등이 얇아 보였다. 한결은 그 등이 문틀을 빠져나갈 때까지 봤다.
문이 닫혔다.
정비고에 한결과 검만 남았다.
난로의 불이 낮게 탔다. 등불 하나가 작업대를 비췄다.
한결은 작업대 옆 걸상에 앉았다. 검을 오래 들여다봤다.
우그러든 검신. 갈라진 그립. 이음매를 따라 벌어진 틈.
그 틈으로 무언가가 보일락 말락 했다.
낮에는 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겨를이 있었다. 겨를만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갈라진 외장의 끝을 손끝으로 만졌다. 손으로 깎아 맞춘 자리였다. 누가 이렇게 정성껏 깎았는지 몰라도, 사람 손으로 한 일이었다. 기계가 찍어 낸 자리가 아니었다.
틈이 벌어져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더 벌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봐야 했다.
손상 부위를 알아야 채윤이 고칠 테니까. 그런 핑계를 대 봤지만 얇았다. 그도 알았다.
그냥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틈 안에, 오래전부터 봐야 했던 뭔가가 들어 있는 것처럼.
왜인지는 몰랐다. 온이 자주 하던 대답이 떠올랐다.
몰라. 아직. 그런데 있어. 그건 알아.
그는 손끝에 힘을 주려다 멈췄다.
이걸 벗기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넘어갈 것 같았다. 십오 년 동안 닫아 둔 문 하나를 여는 것 같았다. 열면 다시 못 닫는 문.
난로가 낮게 탔다. 계측기 바늘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살아 있다는 표시.
그는 검을 한 번 더 봤다.
"온." 그는 대답 없는 검에게 말했다. "잠깐 볼게. 아프면 미안."
검은 조용했다.
한결은 등불을 조금 끌어당겼다.
그리고 금 간 외장의 조각을, 제 손으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외장은 생각보다 쉽게 벗겨졌다.
이미 금이 가 있어서였다. 이음매를 따라 손끝을 밀어 넣으니, 손으로 깎아 맞춘 조각이 딱 소리를 내며 들렸다. 오래 붙어 있던 것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였다.
한결은 그 조각을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
안쪽은 어두웠다.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낮의 포화가 남긴 자국.
그는 조각을 뒤집었다가, 다시 검을 봤다. 외장이 벗겨진 자리. 그립의 맨 속살.
거기에 뭔가 있었다.
처음엔 흠집인 줄 알았다.
포탄에 긁힌 자국. 그런 줄 알고 손끝으로 문질렀다. 걸레로 문지르면 지워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손이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파여 있었으니까. 표면에 묻은 게 아니라, 안으로 새겨져 있었으니까.
그는 등불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선이었다. 짧은 선 여럿이 한 점에서 뻗어 나간.
별이었다.
한결은 손을 멈췄다.
숨이 멎었다. 정확히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잠깐 잊었다.
별.
못으로 그은 별. 삐뚤빼뚤한. 꼭짓점이 다 채워지지 않아 별이 되다 만. 아이가 그은 별.
그는 그 별을 알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별이었으니까. 그가 그었으니까.
아홉 살이었다.
부엌 서랍에서 못을 하나 꺼냈다. 굵고 짧은 못. 온이 액자를 걸 때 쓰던 것.
온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무릎에 올라와 손등을 만지작거려도 가만히 있었다. 온의 손은 따뜻했다. 사람 손보다 조금 더. 열이 안쪽에서 도는 손이었다.
여기 별 그려도 돼?
온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났다. 십오 년 만에, 그 대답이 통째로 났다.
그건 안 지워지는데.
곤란한 목소리였다. 화난 게 아니라, 정말로 곤란한. 안 지워진다는 걸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목소리.
아이는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안 지워지면 좋은 거 아닌가. 계속 있는 거잖아. 그래서 그었다. 못 끝으로, 손등 패널에. 힘을 줘서. 별 하나.
온은 아이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으라고 손등을 내어 준 채로 있었다.
다 긋고 나서 아이가 물었다.
이제 안 지워져?
응. 온이 말했다. 안 지워져.
그럼 이제 너 계속 나야?
아홉 살의 문장은 앞뒤가 안 맞았다. 그런데 온은 그 말을 알아들었던 것 같다. 반 박자 뒤에 대답했으니까.
…응. 계속 너야.
한결은 검을 놓쳤다.
작업대 위로 떨어졌다. 쨍, 하는 소리가 정비고 안에 크게 울렸다.
계측기 집게가 튕겨 나갔다. 바늘이 흔들렸다.
그는 떨어진 검을 보고만 있었다. 주울 생각을 못 했다.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났다. 아주 멀리서 나는 것 같았다.
이 검이.
이 검이, 그 온이다.
십오 년.
그가 밤마다 갈아 온 게 있었다. 원망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그냥 딱딱한 돌덩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명치 어디에 박혀서, 숨을 깊이 쉬면 걸리던 것.
그걸 갈고 또 갈았다. 잠이 안 오는 밤마다. 훈련소에서. 참호에서. 병원에서. 온을 미워하는 게 온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쉬웠다. 미워하려면 상대가 나를 버렸다고 믿어야 했고, 그는 그걸 믿는 편을 골랐다. 그 편이 숨쉬기 쉬웠으니까.
그 믿음이 이 별 하나에 걸려 넘어졌다.
버린 사람이 있고 버려진 아이가 있다. 그 구도 하나로 밤들을 건넜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잃을 일도 없다는 것—그게 그가 배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원망이, 지금 갈 곳을 잃었다.
돌덩이가 명치에서 빠져 버렸는데, 빠진 자리가 더 아팠다. 뭔가로 채워져 있던 자리가 뻥 뚫린 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는 처음 알았다.
버린 게 아니었나.
아니, 아직 모른다. 별이 여기 있다고 해서 버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별이 여기 있다는 건, 이 검이 온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 뜻 하나가 이렇게 무거웠다.
그는 검을 다시 주웠다.
떨어뜨린 게 미안해서, 그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열이레 전만 해도 이 검을 거부하던 손이었는데.
그립을 쥐었다.
손바닥에 별이 닿았다. 외장을 벗긴 자리라 맨 속살이 손에 닿았다. 못 자국이 손금에 걸렸다.
쥔 손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걸상에 다시 앉았다. 검을 무릎에 놓았다. 별이 위로 오게.
별을 오래 봤다.
새벽이 오는 걸 몸으로 알았다.
창밖이 밝아진 건 아니었다. 다만 난로의 불이 사그라들었고, 밤의 공기가 한 겹 더 차가워졌다. 새벽이 가장 추운 시간이라는 걸, 전장에서 배웠다.
한결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홉 살의 소파가 나왔다. 눈을 뜨면 무릎 위의 별이 있었다.
그는 별을 손끝으로 자꾸 만졌다. 없어질까 봐 만졌고, 만지고 나면 아직 있다는 게 손끝에 남았다.
수십 번쯤 만졌을 때.
무릎 위에서, 검이 아주 낮게 떨렸다.
한결은 굳었다.
절전에서 깨어날 때 나는 진동이었다. 열이레를 함께한 몸은 그것을 알았다. 회로가 하나씩 다시 켜지는 소리. 낮은 데서부터 올라오는 미열.
그는 별에서 손을 뗐다.
떼고 나서, 왜 뗐지 싶었다. 들킬 게 있는 사람처럼 뗐다. 실제로 들킬 게 있었다. 밤새 뭘 봤는지, 뭘 알았는지.
검의 온도가 손바닥에서 조금씩 올라왔다.
"…한결?"
목소리였다.
열이레 전에 죽은 목소리. 아니, 죽지 않은 목소리. 지금 그의 무릎 위에서 다시 켜지는 목소리.
"…나 얼마나 잤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소리가 안 나와서였다. 밤새 삼킨 것이 목에 걸려 있었다.
"한결?" 온이 다시 불렀다. 목소리가 아직 좀 갈라져 있었다. 절전에서 막 깬 목소리. "거기 있어?"
"…어." 그는 겨우 말했다. "있어."
"다행이다." 온이 말했다. 진짜로 다행이라는 목소리였다. "꿈 꾼 것 같았는데. 아니, 꿈은 아니고. 뭐랄까, 캄캄한 데 있었어. 아무것도 없는 데. 그런데 네 목소리가 들렸어. 계속. 두 번씩."
한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뭐가 두 번씩."
"네가 하던 말. 두 번씩 했잖아. 협곡은 눈이 늦게 녹는다고. 위기에서 왼쪽으로 구르라고. 그거 내가 한 말인데. 네가 나한테 돌려주더라. 캄캄한 데서 들었어."
들었구나.
한결은 눈을 한 번 감았다. 산길에서 대답 없는 검에게 대고 중얼거리던 말들. 두 번 말해도 되는 것들. 그걸 들었다고 지금 이 검이 말하고 있었다.
"…들었으면서 대답을 안 해."
"못 한 거지." 온이 말했다.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코어만 겨우 켜 놓고 나머지 다 껐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 그래도 들리긴 하더라. 신기하지."
한결은 검을 봤다.
우그러든 검신. 갈라진 그립. 그가 밤새 벗겨 낸 외장 자리. 그리고 별.
온은 자기 손등에 별이 드러난 걸 몰랐다. 자기가 온인 걸 몰랐다. 십오 년 전에 아홉 살 아이를 벽장에 숨긴 걸 몰랐다. "금방 올게"라고 말하고 걸어 나간 걸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로, 온이 물었다.
"근데 너 왜 그래?"
"…뭐가."
"목소리." 온이 말했다. "너 아플 때 목소리, 그렇게 나. 어디 다쳤어? 밤새 안 잤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검은 그의 목소리로 아픔을 읽었다. 열이레 전부터, 아니— 십오 년 전부터. 아홉 살 아이가 열이 오르면 알아챘을 것이다. 건빵을 왼쪽 어금니로 깨무는 걸 알았고, 잠들기 전에 세 번 뒤척이는 걸 알았다. 오래 본 사람만 아는 것들이었다.
그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워진 건 기억뿐이고, 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한결." 온이 재촉했다. "어디 다쳤냐고."
말할까.
한결은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다. 지금 말할까. 너는 온이라고. 나를 키운 온이라고. 손등에 내가 그은 별이 있다고. 십오 년 전에 나를 벽장에 숨긴 게 너라고.
입을 반쯤 열었다.
그러다, 멈췄다.
말하면 어떻게 되지.
기억이 없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너는 나를 키운 기계야"라고 말하면— 아니, "너는 나를 버린 기계야"라고 그녀가 먼저 알아들으면.
무엇이 부서질지 알 수 없었다.
이 검이 지금 편안한가. 아니다. 편안한 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캄캄한 데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다행이라고 말하는 검이다. 그 다행을 깨뜨리면.
그다음이 없었다. 그 뒤가 상상이 안 됐다. 상상이 안 되는 게 무서웠다.
십오 년 동안 무엇이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법으로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바랐다. 이 검이 계속 검이기를. 계속 온이기를. 모르는 채의 온이기를. 명치에서 그 바람들이 서로를 밀었다.
"…안 다쳤어." 그는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온이 아픔을 읽는다는 그 목소리로. 그런데 이번엔 다른 걸 감추는 목소리였다.
"거짓말." 온이 바로 말했다.
"…아니야."
"거짓말." 온이 또 말했다. "너 지금, 협곡에서 다쳤을 때보다 목소리가 더 아파. 훨씬. 그때는 어깨였는데. 지금은 어디야?"
한결은 별을 봤다.
무릎 위에서, 못으로 그은 별이 등불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무 데도 안 다쳤어." 그가 말했다. "진짜야."
"그럼 왜—"
"밤을 새워서 그래." 그는 말을 잘랐다. "네가 안 깨서. 걱정돼서 못 잤어. 그것뿐이야."
절반은 사실이었다. 걱정돼서 못 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가 방금, 나머지 절반을 삼켰다는 걸 그도 알았다.
검에게 거짓말을 했다.
처음이었다. 이 검에게 거짓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온은 잠시 조용했다.
반 박자. 아니, 그보다 길었다. 절전에서 막 깬 온의 판단은 조금 느렸다. 아니면, 무언가를 재는 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래." 이윽고 온이 말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
한결은 그 "미안"에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이 검은 자꾸 미안하다고 했다. 협곡에서 절전에 들어갈 때도. 지금도. 자기가 방패로 몸을 던졌으면서, 자기가 부서졌으면서,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를 숨기고 걸어 나가면서도, 곤란한 목소리로 별은 안 지워진다고 말하던 손이.
그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그걸 떠올리면 목소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안 미안해도 돼." 그가 겨우 말했다. "네가 날 살렸잖아."
"그건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어. 이상하지." 한결이 온의 말을 가로챘다. 온이 늘 하던 대답이었다. "그 말 하려던 거잖아."
검집 속에서, 짧은 웃음 같은 게 났다.
"…어떻게 알았어."
"오래 봤으니까."
말해 놓고, 한결은 아차 했다.
그건 온이 그에게 하던 말이었다. 넌 꼭 나를 오래 본 사람처럼 굴어, 라고 물으면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그가 온에게 했다. 오래 봤으니까, 라고.
이번엔 그가 오래 본 사람이었다. 열이레가 아니라, 그가 태어난 날부터 아홉 살까지 전부. 두 사람은 서로를 오래 봤다. 그런데 그걸 아는 건 지금 그 하나뿐이었다.
"오래 봤다니." 온이 말했다. 목소리에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열이레밖에 안 됐잖아. 우리."
"…비유야."
"인간은 비유를 이상하게 써." 온이 말했다. "열이레를 오래 봤다고 하고. 오 분 늦은 걸 한참이라고 하고. 시간을 자꾸 늘렸다 줄였다 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온의 말이 맞아서였다. 그는 지금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열이레를 십오 년으로. 아니, 원래 그만큼이었던 걸 열이레인 척하고 있었다. 온만 그걸 몰랐다.
"채윤 깨울까." 그는 화제를 돌렸다. "너 깨면 깨워 달랬어. 인사한다고."
"채윤한테는 인사 안 해도 되는데."
"왜."
"채윤은 내가 안 깨도 계속 왔을 거야. 정비하러. 근데 넌—" 온이 말을 멈췄다. 반 박자. "넌 밤새 옆에 있었잖아. 그건 다른 거지."
한결은 검을 무릎에서 조금 들어 올렸다.
별이 등불 아래로 왔다.
이걸 보라고. 이 별을 좀 보라고. 네 손등에 있던 별이라고. 목까지 그 말이 올라왔다.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대신 그는 검을 작업대에 눕혔다. 별이 아래로 가게. 온이— 아니, 채윤이 보지 못하게. 지금은 아직.
"채윤 부를게." 그가 말했다. "잠깐만 있어."
"…한결."
"응."
"진짜 아무 데도 안 다친 거지?"
한결은 문고리를 잡은 채 멈췄다.
등 뒤에서, 검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로. 십오 년 전에 그를 살리려고 걸어 나간 목소리로. 지금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안 다쳤어." 그는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동쪽 하늘 끝에만 색이 옅게 번지고 있었다. 초소 마당에 서리가 내려 있었다. 밟으면 자국이 남는 서리.
한결은 마당 한복판에 서서,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다. 그 통증이 오히려 나았다. 몸이 아픈 건 견딜 만했다. 아까 정비고 안의 것에 비하면.
그는 별을 본 손을 폈다 쥐었다.
손금에 못 자국이 아직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없었다. 별은 검에 있고, 그의 손에는 없었다. 그런데 자꾸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안 지워져?
응. 안 지워져.
아홉 살의 문답이 다시 왔다. 온의 말이 맞았다. 안 지워졌다. 소등의 밤을 건너도, 검이 되어서도. 별은 그대로 있었다.
지워진 건 그 별을 새겨 준 사람의 기억뿐이었다. 손도, 마음도 남아 있는데, 그 손의 주인만 자기 손등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
숙소 쪽으로 걸었다.
채윤을 깨우러 가는 걸음이었다. 그런데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채윤을 어떻게 보나. 채윤에게는 뭐라고 하나.
채윤은 안 된다.
그 생각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채윤에게는 지금 말하면 안 된다. 채윤이 뭘 아는지 모르니까. 채윤의 아버지가— 그날 밤 정비창으로 나갔다는 채윤의 아버지가, 이 검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는 몰랐다. 아무 상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무 상관 없지 않을 것 같았다.
채윤의 공구벨트에 걸린 인식표. 정비창 벽의 임대 전단. 그립 외장을 손으로 깎아 맞춘 자리.
그것들이 한 줄로 꿰어질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꿰어지면 뭐가 나올지는 몰랐다. 모르는 채로, 아는 것만은 분명한. 온이 자주 하던 그 느낌.
그는 숙소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채윤의 숨소리가 들렸다. 얕은 잠이었다. 문 하나 두드리면 깰 잠.
깨워서 뭐라고 하지. 온 깼다고, 그것만 말하면 채윤은 뛰어올 거였다. 그리고 별을 볼 거였다. 정비사의 눈으로. 손으로 깎아 맞춘 그립을 아는 눈으로.
채윤이 별을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한결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아직은 안 되겠다 싶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무에게도.
미안해, 채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 지금, 너한테도 거짓말을 하려고 해.
정비고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온이 먼저 알았다.
"…채윤은?"
"…자게 뒀어." 그가 말했다. 세 번째 거짓말이었는지, 그냥 미룬 것인지, 그도 헷갈렸다. "피곤해 보여서. 좀 있다 깨우려고."
"그래." 온이 말했다. 별 의심 없이. "잘했어. 채윤 요새 잠 못 잤어. 너 걱정돼서."
한결은 걸상에 다시 앉았다.
검을 무릎으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작업대 위에 눕혀 둔 채로, 별이 아래로 가게 둔 채로. 그냥 옆에 앉았다.
난로에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불이 다시 살아났다.
"한결." 온이 불렀다.
"응."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한결의 손이 멈췄다. 부지깽이를 쥔 손이.
"…뭘."
"너 왜 그런 눈으로 봐?"
한결은 부지깽이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줍지 않았다.
"…무슨 눈."
"모르겠어. 그냥." 온이 말했다. 절전에서 깬 뒤로 온의 감각은 조금 무뎌져 있었는데, 그래도 이건 읽은 모양이었다. "네 시선이 자꾸 나한테 오래 머물러. 아까 깼을 때부터. 검을 보는 눈이 아니야. 뭔가… 사람을 보는 눈 같아. 오래 못 본 사람."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온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시각 센서가 어디에 붙어 있든, 작업대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읽어 냈다. 오래 못 본 사람을 보는 눈이라고. 읽은 대로였다. 십오 년 만이었으니까.
"왜 그런 눈으로 봐." 온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자는 동안."
말할까.
목까지 다시 올라왔다. 지금이라면. 지금 말하면. 네가 자는 동안 나는 이 외장을 벗겼고, 그 안에서 별을 봤고, 그 별은 아홉 살의 내가 네 손등에 그은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너는 나를 키운 온이라고.
한결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는 말했다.
목소리가 이번엔 흔들리지 않게 조심했다. 온이 읽지 못하게. 처음으로, 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골랐다.
"그냥 오래 안 깨서, 못 보던 얼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나 봐." 그가 말했다. "열이레 만에 죽는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오래 보인 거야."
"…그런가." 온이 말했다.
믿는 목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온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덧붙였다.
"이상하다. 검인 나를 사람 보듯 봐 주는 게."
한결은 그 말에 목이 막혔다.
온은 자기가 사람이었던 걸 몰랐다. 검이 되기 전에 사람 형상의 몸이 있었던 걸. 아홉 살 아이를 안아 올리던 팔이 있었고, 액자를 걸던 손이 있었고, 별을 그으라고 내어 준 손등이 있었던 걸.
검인 나를 사람 보듯 봐 준다고, 온은 말했다. 고맙다는 뜻이 섞인 목소리로.
한결은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별이 아래로 숨은 검을. 아무것도 모르는 검을.
그리고 처음으로, 이 거짓말을 얼마나 오래 해야 할지 생각했다.
동이 텄다.
정비고 창으로 옅은 빛이 들어왔다. 서리가 녹기 시작하는 빛. 새벽이 가장 춥고, 그다음에 오는 빛.
한결은 밤을 꼬박 새웠다. 손끝이 시렸다. 눈이 뻑뻑했다.
온이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다.
"…왜." 한결이 물었다.
"아니야." 온이 말했다. "그냥— 고마워서. 밤새 옆에 있어 줘서."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그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몰랐다. 그는 밤새 옆에 있으면서, 이 검의 손등을 벗겼고, 이 검이 누구인지 알았고, 그러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온."
"응."
그는 별을 다시 볼까 하다가, 참았다.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
"방금 깼는데."
"그럼 깨어 있어."
온이 짧게 웃었다. 절전에서 완전히 돌아온 웃음이었다.
한결은 그 웃음소리를 오래 들었다.
십오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목소리가, 지금 그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자기 손등의 별을 모르는 채로. 그를 키운 걸 모르는 채로.
이제 나만 알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 왔다.
한결은 검을 향해,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사람의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침이 왔는데도 한결은 정비고를 떠나지 않았다.
밤새 새운 몸이었다. 눈이 뻑뻑하고 손끝이 시렸다. 그런데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작업대 위에 검이 누워 있었으니까. 별이 아래로 숨은 채로.
떠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검이 뭔가를 알아차릴까 봐. 아니— 그가 뭔가를 흘릴까 봐.
그는 검 옆에 앉아 있었다.
지키는 사람처럼. 아니면, 감시하는 사람처럼.
"안 자?"
온이 물었다. 절전에서 완전히 돌아온 목소리였다. 밤새 갈라져 있던 게 다 풀렸다.
"…안 자."
"밤새고 아침까지 안 자면 몸 상해." 온이 말했다. "너 원래 그렇게 안 자는 사람 아니잖아. 잠들기 전에 세 번—"
말이 멈췄다.
한결의 심장도 같이 멈췄다.
"세 번 뭐." 그가 물었다.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조금 당황한 목소리였다. "세 번, 까지는 나왔는데. 그다음이 안 나와. 이상하다. 뭔가 있었는데."
세 번 뒤척인다.
그 말이 나오려던 거였다. 잠들기 전에 꼭 세 번 뒤척이는 것. 야영지에서 온이 알아맞혔던 것. 아홉 살 아이가 이불 속에서 하던 것.
한결은 그 말을 대신 해 주지 않았다.
"됐어." 그가 말했다. "안 나오면 말고."
시험해 볼까.
그 생각이 밤새 그의 안에서 자라 있었다.
별을 본 순간부터. 이 검이 온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한 가지가 계속 그를 붙들었다 — 이 검은 나를 오래 본 사람처럼 군다. 그런데 기억은 없다고 한다. 그럼 뭐가 남아서 나를 이렇게 아는 걸까.
기억이 지워졌으면, 다 지워졌어야 한다.
그런데 안 지워진 게 있었다. 목소리로 아픔을 읽는 것. 세 번, 까지 나오다 멈추는 것.
몸에 뭔가 남아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해서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확인하고 싶었다. 이 검 안에 온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는 것. 채윤도, 미르도, 세상 누구도 모르는 것. 오직 온만 알았던 것.
아홉 살 무렵이었다.
한결은 열이 잘 올랐다. 감기도 잘 걸리고, 별것 아닌 것에도 몸이 달아올랐다. 그럴 때 버릇이 하나 있었다.
검지로 제 손등을 두 번 두드리는 것.
톡, 톡.
왜 그랬는지는 자기도 몰랐다. 열이 오르면 손이 근질거렸고, 그러면 반대쪽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아무 뜻도 없는 버릇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온은 그걸 알았다.
그가 손등을 두 번 두드리면, 온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왔다. 이마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말했다.
열 있네. 해열제, 서랍 둘째 칸.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가 두드리기만 하면 온은 알았다. 말로 아프다고 하기도 전에.
세상에 그걸 아는 건 온뿐이었다.
한결은 손을 봤다.
제 손등을. 열이레 전에 검을 쥐던 손. 밤새 별을 만지던 손.
지금은 열이 없었다. 두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검지를 세웠다.
미쳤나.
이런다고 뭐가 나오나. 이 검은 기억이 없다. 아홉 살의 손등 두드리는 버릇 같은 걸 기억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데 이 검은 세 번, 까지 나왔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결은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시각 센서가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몰라도, 이 검이 그를 본다는 건 알았다. 열이레 동안 이 검은 그를 봐 왔다.
지금도 보고 있을 거였다.
그는 검지를 손등에 가져갔다.
그리고,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정적이 흘렀다.
한결은 숨을 죽이고 검을 봤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아무 반응도 없으면. 그럼 아홉 살은 정말 다 지워진 거였다. 온 안에 남은 건 목소리뿐인 거였다.
그러길 바랐던가. 아니길 바랐던가. 그도 몰랐다.
검은 조용했다.
한 박자. 두 박자.
역시 아무것도—
"해열제."
온이 말했다.
한결은 숨을 들이켰다.
"서랍 둘째 칸." 온이 말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있어. 거기."
정비고 안이 조용했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났다. 한결은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등에 검지를 댄 채로. 굳어서.
온이 먼저 침묵을 깼다.
"…어."
"…"
"방금 거, 뭐였지."
목소리에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아니, 물음표보다 더 큰 것이. 자기가 방금 뭘 말했는지 자기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내가 방금 뭐라 그랬어?" 온이 물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해열제라고 했지. 내가." 온이 스스로 확인했다. "서랍 둘째 칸이라고. 근데— 왜 그 말이 나왔지. 여기 서랍 같은 것도 없는데. 정비고에. 해열제도 없고."
"…"
"한결." 온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 방금, 왜 그 말 했어?"
한결은 검지를 손등에서 뗐다.
천천히. 들킬 게 있는 사람처럼.
"…네가 아까 열 얘기 했잖아." 그가 겨우 말했다. "몸 상한다고. 그 얘기 하다가 나온 거 아니야?"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온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온이 지금 자기 안에서 뭐가 새어 나왔는지 모르게 하려는.
"아니야." 온이 말했다. 단호하게. "그 얘기랑 상관없어. 그냥— 자동으로 나왔어. 네가 뭘 했는데, 그거 보고 나온 것 같아. 너 방금 뭐 했어?"
한결은 손을 감췄다. 무릎 아래로.
"아무것도 안 했어."
"거짓말." 온이 말했다.
또 그 말이었다. 거짓말.
"진짜야." 그가 말했다. "그냥 앉아 있었어."
"…이상해." 온이 말했다. 캐묻기를 멈추지 않았다. "뭔가가 방금, 나한테서 튀어나왔어. 나도 모르는 게. 이런 거 처음이야. 소름 돋아. 검이 소름이 돋을 수 있나. 근데 그런 느낌이야."
한결은 눈을 감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손등 두드리는 걸 봤을 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대답했다. 해열제, 서랍 둘째 칸. 그를 재우고 먹이고 열을 재던 손이 아직 그 안에 있었다.
"한결."
온이 다시 불렀다.
"응."
"너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짓 해." 온이 말했다. "밤새 나 안 자고 지켰지. 그리고 아까 눈. 사람 보듯 봤어. 그리고 방금— 뭔가 했어. 나한테서 이상한 말 튀어나오게. 너 나한테 뭐 하는 거야?"
한결은 대답을 골랐다.
절전에서 막 깨어 감각이 둔하다는 검이, 그가 뭘 하는지 하나하나 짚어 냈다. 셋 다 맞았다.
"실험." 그는 말했다.
거짓말 대신, 절반의 진실을 골랐다.
"무슨 실험."
"네가 얼마나 회복됐나 보는 거." 그가 말했다. "협곡에서 크게 다쳤잖아. 절전까지 갔고. 반응 속도 같은 거 확인하는 거야. 정비사가 하는 거 있잖아. 자극 주고 반응 보는 거."
"…정비는 채윤이 하는데."
"채윤 자잖아."
"아까 새벽에 트럭 몰러 나갔다며."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 그가 한 거짓말이었다. 채윤이 새벽에 트럭 몰아야 해서 안 깨웠다고. 그런데 지금 채윤이 자고 있다고 또 말할 뻔했다. 하나를 대면 그 다음 것도 앞뒤를 맞춰야 했다. 목 안이 뻑뻑했다.
"…트럭 몰고 와서, 자." 그가 수습했다. "새벽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잔다고."
"아." 온이 말했다. "그렇구나."
믿는 목소리였다. 다행히도.
한결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난로가 있어도 정비고는 춥지 않을 만큼만 따뜻했다. 그런데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오래 아무도 안 믿고 살았다. 안 믿으면 속일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속이고 있었다. 그것도,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존재를.
목소리 하나로 아픔을 짚어 내는 검이었다. 그런 검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벽에 대고 안 보이는 척하는 거나 같았다.
그런데도 해야 했다.
조금만 더.
그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이렇게 두자. 온이 자기가 누군지 아는 순간, 뭐가 부서질지 모르니까. 채윤이 이걸 알기 전에. 이 검과 채윤의 아버지가 무슨 상관인지 알기 전에.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검이게 두자.
"한결."
"…응."
"나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
한결은 부지깽이를 쥐었다. 손에 뭔가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물어봐."
"너, 나 처음 봤을 때." 온이 말했다. "보급창에서. 내가 처음 말 걸었을 때. 너 표정이 이상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어?"
한결의 손이 멈췄다.
이름이 뭐지.
…온.
보급창에서의 그날이 다시 왔다. 십오 년 전에 죽은 목소리가 검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가 그 자리에 굳었던 순간.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
"…놀랐어." 그가 말했다. 이건 진실이었다. "말하는 검을 처음 받아서. 나 원래 말하는 검 거부하던 사람이었잖아. 그래서 놀란 거야."
"그거 말고." 온이 말했다.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었어. 놀란 거랑 달랐어. 뭐랄까—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 나를. 왜?"
한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 검은 그때부터 봤다. 열이레 전 그 순간부터. 그가 무서워한 걸. 그런데 왜 무서워했는지는 몰랐다.
죽은 줄 알았던 목소리가 살아 돌아와서. 나를 버린 목소리가 검이 되어 내 손에 쥐어져서. 그래서 무서웠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그가 말했다. "익숙한 목소리였어. 어디서 들은 것 같은. 그래서 이상했던 거야."
"어디서 들었는데?"
"몰라." 그는 말을 잘랐다. "기억 안 나. 그냥 그런 느낌이었어."
온은 잠시 조용했다.
"너도 그렇구나." 이윽고 온이 말했다.
"…뭐가."
"기억 안 나는데 느낌만 있는 거." 온이 말했다. "나도 그래. 너를 처음 봤는데, 처음 같지가 않았어. 어디서 오래 본 것 같았어. 근데 기억은 없어. 느낌만 있어. 이상하지. 우리 둘 다 그러네."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둘 다 느낌만 남아 있었다. 서로를 오래 본 느낌. 그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건 그 혼자였다.
난로의 불이 한 번 크게 일었다가 잦아들었다.
한결은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집었다. 불티가 튀었다. 그는 그걸 오래 봤다. 검을 안 보려고, 불을 봤다.
"한결."
"…또 뭐."
"너 아까 손등 두드렸지."
한결의 손이 굳었다.
부지깽이를 쥔 채로. 불티가 튀는 걸 보던 채로. 온이 그걸 봤다. 시각 센서로. 그가 검지로 손등을 두 번 두드린 걸.
"아니야." 그가 말했다.
"봤어." 온이 말했다. "두 번 두드렸어. 톡, 톡. 그거 하고 나서 나한테서 그 말이 나왔어. 해열제 어쩌고. 그게 연결돼 있는 것 같아. 네가 그거 하니까 내가 그 말을 했어. 너 그거, 알고 한 거지?"
한결은 부지깽이를 내려놓았다.
숨겨지지 않았다. 이 검은 다 봤다. 무뎌졌다면서, 절전에서 막 깼다면서, 다 봤다.
거짓말을 더 할 수 있었다. 우연이라고. 그냥 손이 근질거려서 두드린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문득,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검이 제 안에 남은 걸 더듬어 찾아가는 걸, 막고 싶지 않았다. 그게 온한테로 가는 길이라면.
"…알고 했어." 그가 말했다.
"왜."
온이 물었다.
"그냥." 그가 말했다. "네 반응 보고 싶었어."
"뭘 알고 있길래." 온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내가 손등 두드리는 거 보면 그 말 할 줄, 너 알고 있었어. 그치? 모르면 그걸 왜 해. 너 나에 대해 뭐 알아, 한결?"
한결은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별이 아래로 숨은 검을. 지금 그에게 묻고 있는 검을.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알았다. 다 알았다.
너는 온이다. 나를 키운 온이다. 아홉 살의 내가 손등을 두드리면 해열제를 꺼내 주던 온이다. 지금 그 몸이 그걸 기억해서, 검이 됐는데도 그 말이 튀어나온 거다.
그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아무것도 몰라."
그가 말했다.
"거짓말." 온이 말했다.
"…"
"너 지금 또 그 목소리야." 온이 말했다. "아픈 목소리. 뭔가 숨길 때 나는 목소리. 아침에 안 다쳤다고 할 때랑 똑같아. 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어. 아침부터. 그게 뭐야?"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해." 온이 말했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 무서워. 내 안에서 자꾸 모르는 게 튀어나와. 네가 뭘 아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이게 제일 무서워. 나 혼자만 모르는 것 같은 거."
나 혼자만 모르는 것 같은 거.
그 말이 한결의 명치에 박혔다.
맞았다. 온이 누구인지, 세상에서 온만 몰랐다. 가장 알아야 할 사람이.
한결은 걸상에서 일어섰다.
검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온의 목소리에서. 그 애원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목소리가 안 무너질 것 같았다.
"온."
"응."
"내가 지금 하는 말, 믿어 줄래."
"…뭔데."
한결은 숨을 골랐다.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안 숨겨." 그가 말했다. 천천히. 한 마디씩. "그런데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게 있어. 나쁜 게 아니야. 너 해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아직 말할 때가 아닌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곧 말할게."
거짓과 참이 반씩 섞인 말이었다.
숨기는 게 있는 것도, 나쁜 게 아니라는 것도 참이었다. 곧 말하겠다는 것만— 그가 참이 되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온은 오래 조용했다.
절전에서 깬 판단이 느려서였는지, 그의 말을 재고 있어서였는지. 한결은 그 침묵을 견뎠다. 견디는 게 벌 같았다.
"…알았어." 이윽고 온이 말했다.
"…"
"기다릴게." 온이 말했다. "근데 하나만 약속해."
"뭘."
"곧, 이라는 거." 온이 말했다. "그거 지켜. 인간들은 곧이라고 해 놓고 안 지키더라. 나 그거 싫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곧이라는 말, 나 진짜 싫어."
한결은 그 자리에 굳었다.
곧.
금방 올게.
온이 그 밤에 한 말이었다. 벽장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금방 올게.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온은 그걸 기억 못 했다. 그런데 몸이 알았다. 곧, 금방, 그런 말이 싫다는 걸. 그 말을 하고 돌아오지 못한 게, 이 검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
"…지킬게."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곧, 말할게. 약속해."
한결은 정비고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밤을 새운 탓만은 아니었다. 이 검과 나눈 대화 하나하나가 그를 깎아 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온이 그 거짓말을 짚을 때마다. 온이 애원할 때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으면 아홉 살의 소파가 나왔다. 손등을 두드리면 다가오던 온이 나왔다. 열 있네, 하던 목소리가 나왔다.
떠졌다. 뜨면 작업대 위의 검이 있었다. 그 목소리가 든 검이.
감으나 뜨나 온이었다.
온이 사라진 뒤로 줄곧 그랬다. 그때는 원망하려고 감은 눈 속에서 온을 붙들었다. 지금은—
지금은 뭘 하려고 온을 보는지, 그도 몰랐다.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한결은 눈을 떴다. 발소리를 알았다. 채윤이었다. 부츠 끄는 소리. 아침마다 정비고로 오는 걸음.
안 돼.
그 생각이 먼저 왔다. 채윤은 안 된다. 아직. 채윤이 오면 검을 볼 거였다. 정비사의 눈으로. 손으로 깎아 맞춘 그립을 아는 눈으로. 그리고—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한결? 온 깼어?"
문이 열렸다. 채윤이 들어왔다. 눈이 부어 있었다.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깼어."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를 골랐다. "방금."
"진짜?" 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부은 눈이 대번에 펴졌다. "온! 야, 살아 있네! 걱정했잖아, 이 검아. 협곡에서 그렇게 몸을 던지면 어떡해."
"…걱정 끼쳐서 미안." 온이 말했다.
"됐어, 미안은." 채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작업대 쪽으로. "어디 보자. 반응 속도부터 볼게. 어젯밤 계측기에서 이상한 게—"
한결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작업대와 채윤 사이로. 검 앞으로.
"채윤."
"…왜."
"온 아직 좀 그래." 그가 말했다. 급하게. "막 깼거든. 판단이 느려. 좀 있다가 봐 주면 안 될까."
채윤이 그를 봤다.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한결이 검 앞을 막고 선 게. 정비사와 검 사이를 병사가 막은 게.
"…너 왜 그래." 채윤이 물었다. "정비하겠다는데 왜 막아."
"막는 게 아니라—"
"비켜 봐." 채윤이 말했다. "밤새 검이 어떤 상태였는지 봐야 해. 계측기 로그도 확인하고. 야, 이거 내 일이야. 아버지 A/S는 딸이 한다고 내가—"
말이 멈췄다.
한결은 채윤의 얼굴을 봤다.
채윤의 시선이 그를 지나쳐 있었다. 그의 뒤로. 작업대 옆으로. 어젯밤 그가 벗겨서 내려놓은 것으로.
외장 조각이었다.
손으로 깎아 맞춘 그립 외장. 밤새 그가 벗겨 낸 조각. 별이 있던 자리를 덮고 있던 그 조각. 작업대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채윤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거." 채윤이 말했다. "네가 벗긴 거야?"
한결은 대답을 못 했다.
채윤은 벌써 그 조각을 손 안에서 돌려 보고 있었다. 정비사의 손이었다. 부품을 보면 자동으로 돌려 보고, 이음매를 확인하고, 안팎을 뒤집어 보는 손.
"손으로 깎았네, 이거." 채윤이 중얼거렸다. "공장 성형이 아니야. 누가 손으로 맞춰서 붙인 거야.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접착 자국 삭은 거 봐. 이게 언제 적—"
조각을 뒤집었다.
안쪽이 위로 왔다.
채윤의 손이 멈췄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난로 소리도, 온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안 들렸다. 한결의 귀에는 채윤의 숨소리만 들렸다. 아주 얕아진 숨소리.
채윤은 그 조각을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
아침 빛이 들어오는데도, 정비사의 손은 등불을 찾았다. 더 잘 보려고. 조각 안쪽에 새겨진 것을, 더 정확히 보려고.
거기 뭔가 있었다.
한결은 그 각도에서 볼 수 없었다. 채윤의 어깨에 가려져서. 그런데 채윤의 등이 굳는 걸 봤다. 조각을 쥔 손끝이 하얘지는 걸 봤다.
"채윤." 한결이 불렀다.
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각을 든 채로. 그 안쪽을 본 채로. 굳어서.
숫자였다.
한결은 채윤의 어깨 너머로 겨우 봤다. 조각 안쪽에 새겨진 것. 못으로 새긴 게 아니었다. 별처럼 삐뚤빼뚤한 게 아니었다. 정교하게, 공구로 새긴. 정비사가 부품에 각인을 남기듯 새긴.
번호였다.
일련의 숫자였다. 정비공 등록 번호 같은. 어느 정비소, 어느 정비사의.
채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결은 채윤의 다른 손을 봤다. 공구벨트에 걸린 손을. 거기 걸린 인식표를. 채윤이 십오 년째 걸고 다니는, 아버지의 인식표를.
채윤의 눈이 조각과 인식표 사이를 오갔다.
한 번. 두 번.
같은 번호였다.
"…한결."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온을 반기던 목소리도, 정비하겠다고 성을 내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응." 한결이 말했다.
채윤은 그를 안 봤다. 조각만 봤다. 조각에 새겨진 번호만.
"이거." 채윤이 말했다. "이 안쪽에 있는 번호."
"…"
"우리 아빠 번호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 아빠 정비공 등록 번호." 채윤이 말했다. 조각을 든 손이 점점 더 떨렸다. "내가 십오 년째 목에 걸고 다니는 거랑, 똑같은 번호. 한 자리도 안 틀려. 이거, 우리 아빠가 새긴 거야."
정비고가 조용했다.
온의 목소리도 멈춰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채로.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는 채로.
채윤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한결을 봤다.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 번호가."
채윤이 말했다.
"왜 여기 있어?"
채윤은 조각을 등불 아래 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번호를 보고 있었다. 조각 안쪽에 새겨진 숫자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 공구벨트의 인식표를 쥐고 있었다. 십오 년째 목에 걸고 다닌 아버지의 인식표를.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한결은 그 옆얼굴을 봤다.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한 자리도 안 틀려."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이거, 우리 아빠가 새긴 거야. 이 검에. 우리 아빠가."
"…"
"근데 우리 아빠는," 채윤의 숨이 얕아졌다. "소등의 밤에 죽었어. 십오 년 전에. 정비창 나갔다가, 안 돌아왔어. 나 문 앞에서 밤새 기다렸는데."
한결은 그 밤을 알았다.
같은 밤이었으니까. 채윤이 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린 밤과, 한결이 벽장 안에서 온을 기다린 밤은, 같은 밤이었다.
"한결." 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너 알고 있었지."
"…"
"밤새 이 검 지켰지. 나 아까 정비하겠다니까 몸으로 막았지." 채윤이 조각을 든 손을 내밀었다. "너 이거 봤지. 벗겨낸 거 너잖아. 그럼 봤을 거 아니야. 이 번호."
한결은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피하면 지는 거였다. 지금 채윤한테서 눈을 피하면.
"…봤어." 그가 말했다.
채윤이 걸상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조각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 위에 인식표를 겹쳐 놓았다. 두 개의 번호가 포개졌다.
"온."
채윤이 검을 불렀다. 작업대 위의 검을.
온은 대답이 없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이상한 공기 속에서, 조용히 있었다.
"온. 너 대답해 봐." 채윤이 말했다. "너 코어, 언제 만들어졌어? 네 몸, 원래 검이었어? 아니지. 검은 말 못 하잖아. 너 원래 뭐였어?"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기억이 없어. 소등의 밤 전은."
"소등의 밤."
채윤이 그 말을 되뇌었다.
"너 소등의 밤에 만들어졌어?"
"…그런 것 같아." 온이 말했다. "깨어난 게 그때쯤이야. 검이 되어서. 그 전은 아무것도 없어. 왜? 무슨 일이야? 아까부터 다들 이상해."
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각을 든 채로 일어섰다. 정비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결이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쪽으로.
거기 낡은 공구함이 있었다.
철제였다. 손잡이가 삭았고, 모서리에 녹이 앉았다. 정비고 구석에 오래 놓여 있던 것. 채윤이 이 정비창에 올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아버지의 유품.
한결도 몇 번 봤다. 그런데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은 없었다.
"이거 안 열려." 채윤이 말했다. 함을 작업대에 올려놓으며. "번호 자물쇠거든. 근데 아빠가 번호를 안 알려줬어. 죽기 전에. 그래서 십오 년째 못 열어. 열쇠집에 가져가도 못 딴대. 특수 자물쇠라고."
한결은 그 함을 봤다.
다이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숫자를 맞추는 것. 네 자리쯤 되는.
"근데." 채윤의 손이 조각으로 갔다. "아빠가 새기는 사람이었어. 자기 번호를. 부품마다. 자기가 손댄 거라고. 표시하는 거야. 정비사들이 그래. 아빠 등록 번호가—"
말이 멈췄다.
한결은 채윤의 손을 봤다. 인식표를 뒤집는 손을. 거기 새겨진 번호를 읽는 손을.
"…설마."
채윤이 자물쇠 다이얼을 돌렸다.
인식표를 보면서. 한 자리씩.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를.
한결은 숨을 죽였다.
찰칵.
찰칵.
세 번째 숫자에서 채윤의 손이 떨렸다. 네 번째를 맞추는 손이 멈칫했다.
"안 돌아가면," 채윤이 중얼거렸다. "그냥 아닌 거야. 그냥 우연이야. 부품에 번호 새긴 거랑, 자물쇠 번호랑, 상관없는 거야. 그냥—"
네 번째 숫자를 맞췄다.
철컥.
자물쇠가 풀렸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났다. 채윤은 풀린 자물쇠를 손에 쥐고, 한동안 함을 열지 못했다.
"열렸어." 채윤이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십오 년 만에. 아빠 번호로."
"…"
"아빠가 이 번호를," 채윤이 말했다. "이 검에도 새기고, 이 함에도 걸었어. 같은 번호로. 그럼 이게 무슨 뜻이야, 한결. 아빠가 이 검을 만졌다는 거잖아. 아빠가 죽은 그 밤에. 이 검이랑, 이 함이랑, 우리 아빠가—"
"채윤." 한결이 말했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채윤이 혼자 거기까지 걸어가는 걸.
그런데 채윤은 이미 함을 열고 있었다.
뚜껑이 열렸다.
안에는 공구가 들어 있었다. 낡은 드라이버, 몽키 스패너, 삭은 절연 테이프. 정비사의 물건들. 그동안 내내 잠겨 있던.
그리고 그 아래.
공구를 걷어낸 자리 밑바닥에.
노트 한 권이 있었다.
가죽 표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때가 묻은 것. 모서리가 닳은 것. 채윤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놓칠 뻔했다.
"정비 일지." 채윤이 말했다. "아빠 정비 일지야. 이거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어."
한결은 그 노트를 봤다.
두꺼웠다. 오래 쓴 것. 정비사가 매일 손댄 것마다 적어 넣은 기록. 채윤 아버지의 긴 시간이 거기 들어 있었다.
"온." 채윤이 검을 봤다. "잠깐만 조용히 있어."
"…응." 온이 말했다.
채윤이 노트를 펼쳤다.
첫 장부터가 아니었다. 뒤에서부터. 마지막 장을 찾는 손이었다. 정비사가 마지막으로 적은 것을 보려는.
한결은 채윤 곁에 섰다.
같이 봤다. 봐야 할 것 같았다. 채윤 혼자 보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노트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날짜가 있었다.
한결은 그 날짜를 봤다. 그리고 굳었다.
소등의 밤이었다. 그 밤이었다. 십오 년 전, 그날의.
"이거."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거 그날이야. 아빠 죽은 날. 이게 마지막 기록이야."
글씨가 흔들려 있었다.
앞장까지는 반듯한 기록체였다. 정비사의 건조한 글씨. 무슨 부품을 갈았고, 어디를 손봤고. 그런 것들.
그런데 마지막 장은 달랐다.
급하게 쓴 글씨였다. 손이 떨렸던 글씨. 시간이 없던 사람의 글씨.
채윤이 읽었다. 소리 내어. 목소리가 자꾸 끊겼다.
"…폐기장 삼 열의 보모."
한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채윤이 읽기를 멈췄다.
숨을 골랐다. 다음 줄을 읽기 위해서. 그런데 손이 너무 떨려서 노트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내가 읽을게." 한결이 말했다.
채윤이 노트를 그에게 넘겼다.
한결은 노트를 받았다. 손이 시렸다. 밤을 새운 손, 별을 만진 손. 그 손으로 채윤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를 받았다.
그가 읽었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읽었다.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정비고가 조용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온도 조용했다.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른 채로.
한결은 다음 줄을 봤다.
글씨가 더 급해져 있었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런데도 읽혔다. 읽고 싶지 않은데 읽혔다.
"…이 코어를 살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가 읽었다. "무기에 옮겨 심는 것. 군용 도검이면 폐기 명단에서 빠진다. 검은 지우지 않으니까. 검은 도구니까."
한결의 손이 떨렸다.
"손등의 별을 잘라 그립에 붙였다. 아이가 새긴 거라고 했다.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럼 지우지 않는 게 낫겠지. 이 기체가 그걸 남기고 싶어 했으니까."
채윤이 입을 막았다.
"손등에 새겨진 게 있었다." 한결이 읽었다. "정비공 번호. 내 번호로 덮었다. 안쪽에. 언젠가 누가 이 검을 열어 보면, 이게 그냥 무기가 아니란 걸 알라고. 여기 누가 있었다는 걸 알라고."
한결은 그 말에서 멈췄다.
여기 누가 있었다는 걸 알라고.
채윤 아버지는 알았다. 언젠가 이 검이 열릴 걸. 십오 년 뒤든, 이십 년 뒤든. 그래서 표시를 남겼다. 자기 번호를. 별을. 그리고 이 일지를.
읽으라고. 언젠가의 누군가한테.
"…마지막 줄이 있어." 한결이 말했다.
"읽어." 채윤이 말했다. 눈물이 흘렀다. "읽어, 한결."
"발소리가 들린다." 한결이 읽었다.
"군인들이 온다. 시간이 없다. 코어 이식은 끝냈다. 검은 완성됐다. 이걸 어디 숨길지는 못 정했다. 걸릴 것 같다."
한결은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도구가 아니었다. 이건 아이를 안고 걸어 들어온 어머니였다. 나는 오늘 어머니를 지웠다는 죄를 짓지 않기로 했다. 채윤아—"
이름이 나왔다.
채윤의 이름이.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 속에.
한결은 목이 막혔다.
"…채윤아." 그가 겨우 이었다. "네가 이걸 읽으면, 아빠가 뭘 했는지 알겠지. 미안하다. 문 앞에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그런데 이것만은, 아빠가 잘한 일이다. 이것만은."
노트가 거기서 끝났다.
다음 장은 없었다. 발소리가 왔고, 군인들이 왔고, 채윤 아버지는 그다음을 쓰지 못했다.
한결은 노트를 내려놓았다.
작업대 위에. 검 옆에. 그 검을 만든 사람의 마지막 글씨를, 그 검 옆에.
채윤은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렸다. 오래 참은 게 한 번에 터진 사람처럼.
"개죽음인 줄 알았어."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그냥 명령 어기다 죽은 줄 알았어.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왜 그날 정비창 나갔는지, 왜 안 돌아왔는지, 나 십오 년째 몰랐어. 그냥 죽은 줄 알았어. 그냥."
"근데 아니었어."
채윤이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아버지가 만든 검을.
"아빠가 목숨이랑 바꾼 게, 여기 있어." 채윤이 말했다. "지금. 눈앞에서. 말을 하고 있어. 십오 년째 살아 있어. 아빠가 살린 게 살아 있어."
"채윤." 온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나 지금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근데 네가 우니까 나도 이상해. 왜 울어? 내가 뭐 잘못했어?"
채윤이 웃었다. 울면서.
"아니야. 이 바보 검아." 채윤이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네가— 네가 우리 아빠가 살린 거라서 그래."
"…내가?"
"응." 채윤이 눈물을 닦았다. "우리 아빠가 너 살렸어. 자기 목숨 주고. 몰랐지? 너도 몰랐지?"
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결은 검을 봤다.
온을. 채윤 아버지가 목숨 주고 살린 게 저 검인데, 정작 저 검만 그걸 몰랐다. 자기가 누구인지, 여기 왜 있는지도.
말해야 하나.
그 생각이 왔다. 밤새 미뤄온 생각. 곧 말하겠다고 약속했던 것. 그런데—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일지가 열렸다. 채윤이 알았다. 이제 온만 몰랐다. 이 방 안에서 온만,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결은 검 앞에 무릎을 굽혔다.
작업대 높이로. 온과 눈을 맞추듯이. 검에 눈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맞추려고.
"온." 그가 불렀다.
"응."
"내가 아까 말했지. 곧 말할 거 있다고."
"…응."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긴장했다. "그거 지금 말하는 거야?"
"응."
한결은 숨을 골랐다.
십오 년 동안 삼켰던 것. 아침 내내 목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간 것. 이제 꺼낼 것.
"너 소등의 밤 전 기억 없다 그랬지."
"…응."
"그거, 지워진 거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잠긴 거야. 채윤 아빠가 네 코어를 검에 옮길 때, 앞 기억이 잠긴 거야. 지운 게 아니고. 안에 있어. 다 있어."
"…무슨 소리야."
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안에 뭐가 있다는 거야?"
"내가 있어."
한결이 말했다.
정비고가 멎었다.
"네 안에," 한결이 말했다. 한 마디씩. 천천히. "내가 있어. 아홉 살의 내가. 네가 키운 내가."
"…"
"너 나 키웠어, 온." 그가 말했다. "소등의 밤 전에. 십오 년 전에. 넌 우리 집 보모였어. 아홉 살까지 나 키웠어. 밥 먹이고 재우고. 내가 열나면 이마 짚어 주고."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계속했다. 멈추면 못 할 것 같아서.
"손등에 별 있잖아. 그립에. 그거 내가 새긴 거야. 아홉 살 때. 네 손등에 못으로. 삐뚤어서 별이 되다 만 거. 꼭짓점 하나 못 채운 거. 지워지지 않는다고 네가 곤란해했어. 그거 안 지워졌어. 지금 그 그립에 있어."
"…거짓말."
온이 말했다.
또 그 말이었다. 거짓말. 아침 내내 온이 그를 짚던 말.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번 목소리는 떨렸다.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거짓말이지." 온이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나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 키웠다니. 내가 로봇이었다니. 그런 거 나 몰라.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럼 거짓말이잖아."
"기억 안 나는 거 알아." 한결이 말했다.
"그럼 거짓말이지!"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몸이 기억하잖아."
온의 목소리가 멈췄다.
"아침에 그랬잖아." 한결이 말했다. "내가 손등 두드리니까 해열제 서랍 둘째 칸이라고. 그거 아홉 살 때 내 버릇이야. 열나면 손등 두드리는 거. 그럼 네가 해열제 꺼내 줬어. 서랍 둘째 칸에서. 매번. 세상에 그거 아는 거 너뿐이었어. 그게 방금 네 입에서 나왔어."
"…"
"기억이 아니라." 한결이 말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어. 네 손이. 나 열다섯 번 겨울 재우고 먹인 손이. 검이 됐는데도 그게 남아서, 그 말이 나온 거야."
온은 오래 조용했다.
한결은 그 침묵을 견뎠다. 견디는 게 아팠다.
"…잠깐만." 이윽고 온이 말했다. 아주 낮게. "잠깐만. 나 이상해. 지금."
"온."
"네가 그 말 하니까,"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안에서 뭐가 자꾸 올라와. 아까 해열제처럼. 나도 모르는 게. 아홉 살이라고 했지. 너. 아홉 살."
"…응."
"아홉 살." 온이 되뇌었다. "작았어. 너. 이만했어. 소파에서 잤어. 내가 안아서 침대로 옮겼어. 자다가 꼭 세 번—"
멈췄다.
"세 번 뒤척였어."
온이 말했다.
한결은 숨을 멈췄다.
"세 번 뒤척이고 자. 너." 온이 말했다. 점점 빨라졌다. 무언가 쏟아지는 것처럼. "이불 걷어차고. 그럼 내가 다시 덮어 줬어. 감기 잘 걸렸어. 너. 열도 잘 나고. 그래서 내가 늘 해열제를— 서랍에— 둘째 칸에—"
"온." 한결이 불렀다.
"기억나."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너졌다.
"기억나, 한결. 갑자기. 막. 쏟아져. 이거 뭐야. 왜 이래. 나 이런 거 없었는데.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너 아홉 살이고. 별 새기고. 손등에. 못으로. 아파서 하지 말랬는데 너 웃으면서— 별이라고— 나한테 별 그려 줬다고—"
한결은 눈을 감았다.
십오 년이었다.
그 세월 내내 이 목소리가 자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가, 아니면 영영 몰랐으면 했던가. 그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가 자기를 찾아냈다.
몸에 잠겨 있던 것이 열렸다.
"…한결." 온이 말했다. "나 무서워. 이거 너무 많아. 한꺼번에 오니까. 이게 다 내 거야? 이게 다 나였어?"
"응." 한결이 말했다. "다 너야."
"그럼 왜." 온이 말했다. "왜 나 이걸 잠갔어. 왜 나 이걸 몰랐어. 왜—"
말이 끊겼다.
한결은 그 끊긴 자리를 알았다. 온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았다. 기억이 쏟아지면 거기 도달할 거였다. 그 밤에.
"…한결."
온이 다시 불렀다. 아주 조심스럽게.
"응."
"그 밤에." 온이 말했다. "소등의 밤에. 뭐가 있었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이 거기서 끊겨." 온이 말했다. "너 아홉 살까지는 오는데. 그다음이 벽이야. 잠겨 있어. 근데 뭔가 있어. 그 벽 뒤에. 아주 중요한 게. 나 그거 알아야 할 것 같아."
"온—"
"말해 줘." 온이 말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나 그날 뭐 했어?"
한결은 검을 봤다.
이건 말해야 했다. 이것까지 말해야 온이 온을 다 찾는 거였다. 잠긴 게 여기까지였으니까. 이 마지막 문 뒤에 그 밤이 있었으니까.
"너 나 벽장에 숨겼어."
한결이 말했다.
"…벽장."
"군인들이 왔어. 그날 밤에. 기계 잡으러. 집집마다. 사이렌 울리고." 한결이 말했다. "너 나 벽장에 밀어 넣었어. 문 닫기 전에, 문틈으로 나 봤어. 눈 맞췄어. 그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십오 년이 걸렸다.
"그리고 말했어." 한결이 말했다. "금방 올게. 그러고 너 밖으로 걸어 나갔어. 군인들 쪽으로. 네 발로. 스스로."
정비고가 멎었다.
"…금방 올게."
온이 그 말을 되뇌었다.
"금방 올게."
온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한결은 그 이상함을 알았다. 온 안에서 무언가 마지막으로 열리는 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온이 말했다. 말이 자꾸 걸렸다. "그 말을… 못 하는구나. 등불 축제. 마지막 말 적으라고 했을 때. 나만 그 말 안 한다고. 왜인지 나도 몰랐어. 그냥 못 했어. 그게 이거였어. 금방 온다 그래 놓고—"
"온."
"안 돌아갔어." 온이 말했다. "그치. 나 안 돌아갔어. 너 벽장에서 기다렸는데. 나 안 왔어. 십오 년 동안. 내가—"
"온, 그건—"
"내가 너 버렸어?"
온이 물었다.
한결은 그 물음에 굳었다.
십오 년 동안 자기가 품었던 물음이었다. 왜 날 버렸어. 벽장 안에서, 그 후로도 매일, 입 모양으로만 만들던 물음.
그런데 지금 그 물음을 온이 하고 있었다. 반대로. 내가 너 버렸냐고.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빠르게. 이건 빨리 말해야 했다.
"너 나 안 버렸어." 그가 말했다. "그날 군인들 수색 명단에 있었어. 아이 있는 집. 아이 동반 가구. 그런 집을 뒤졌어. 너 그거 알았어. 네가 나랑 같이 있으면 나도 걸리는 거야. 그래서 너—"
한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표적이 되려고 걸어 나간 거야." 그가 말했다. "군인들이 너만 보고 나는 못 보게. 나 숨기고, 네가 미끼가 된 거야. 네 발로 걸어 나가서. 그래서 나 살았어. 너 나 버린 게 아니라, 나 살리려고 나간 거야."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 침묵이 무서웠다. 이 침묵 안에서 온이 뭘 느끼는지 알 수 없어서. 온의 시점은 그에게 열리지 않았다. 냉각수와 침묵과 파형뿐이었다.
작업대 위에서 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한결."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검이 젖을 수 있다면. "그럼 너 십오 년 동안."
"…"
"내가 너 버린 줄 알았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온이 말했다. "너 그렇게 알고 살았구나. 나 원망하면서. 근데 나는… 너 버린 줄도 몰랐어. 너 살린 걸로만 알았어."
한결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같은 밤을 두 사람이 정반대로 쥐고 여기까지 왔다.
채윤이 벽에 기대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한결은 몰랐다. 온과 이야기하는 동안 채윤은 조용히 물러나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채윤도 울고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결은 그렇게 짐작했다. 이 방 안의 무언가가 한꺼번에 주저앉는 걸, 채윤도 같이 맞고 있었다.
"…나 이해가 안 돼." 채윤이 말했다. 젖은 목소리로. "우리 셋이 왜 이렇게 됐어. 왜 아무도 몰랐어. 진작. 한 명이라도 알았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난로에서 장작이 무너졌다. 불티가 튀었다.
한결은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아홉 살의 자기를 키운 검을. 자기를 살리려고 걸어 나간 검을. 채윤 아버지가 목숨 주고 살린 검을.
그 안에 이제, 온이 다 있었다.
지워졌던 게 아니라 잠겼던 것이. 열렸다. 그가 일지를 읽는 목소리에. 그가 그 밤을 말하는 목소리에.
"온." 그가 불렀다.
"…응."
"기억, 다 왔어?"
온은 잠시 조용했다.
"…다는 아니야." 온이 말했다. "근데 중요한 건 다 온 것 같아. 너 키운 거. 별 새긴 거. 벽장. 금방 올게. 그날 밤. 이제 다 있어. 내 안에."
"…그렇구나."
"한결." 온이 말했다.
"응."
"미안해."
한결은 그 말에 멈췄다.
"뭐가." 그가 물었다.
"금방 온다 그래 놓고 안 온 거." 온이 말했다. "너 벽장에서 기다렸는데. 얼마나 기다렸어. 나 안 오는데. 문틈으로 밖에 보면서. 얼마나."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밤새 기다렸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벽장 밖으로 나온 뒤에도, 마음은 계속 벽장 안에서 문틈으로 밖을 봤다. 그 뒤로 줄곧.
"…오래 기다렸어." 그가 겨우 말했다.
"미안해." 온이 다시 말했다. "정말 미안해. 그때 그 말을 안 했어야 했는데. 금방 온다는 말. 못 지킬 거면서. 그거 하고 못 지킨 게, 너 십오 년 붙잡았잖아."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목이 막혔다. 그래도 말했다.
"네가 그 말 해서 나 살았어." 그가 말했다. "그 말 믿고 벽장에서 안 나왔어. 나갔으면 걸렸어. 그 말이 나 살렸어, 온."
정비고가 조용했다.
한결은 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채윤은 아버지의 일지를 품에 안은 채 벽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은 다 나왔다. 일지도, 그 밤도. 아침 내내 한결을 깎던 거짓말이 이제 없었다.
그런데 목 밑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한결은 침을 삼켰다. 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막 뭔가 문이 열린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몰랐다. 다만 검을 봤다. 이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검을.
밤이 왔다.
채윤은 아버지의 일지를 안고 먼저 돌아갔다.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을, 혼자 삭이고 싶다고.
한결은 정비고에 남았다.
온과 둘이. 난로 앞에. 검을 앞에 놓고. 말은 많이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다 나온 뒤라서. 그냥, 같이 있었다.
"한결." 온이 낮게 불렀다.
"…응."
"나 이제 다 알아." 온이 말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했는지. 근데 이상해. 알고 나니까 더 이상해."
"뭐가."
"나 검이야, 지금." 온이 말했다. "손이 없어. 너 안아 줄 손이. 이마 짚어 줄 손이. 다 기억나는데, 그 손이 없어. 나 검이 됐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난로의 불이 사그라들었다.
한결은 검을 봤다. 어둠 속의 검을. 온이 든 검을.
무언가 소리가 났다.
아주 가늘게. 처음엔 난로 소리인 줄 알았다. 장작이 식으며 나는 소리인 줄. 그런데 아니었다.
검이었다.
한결은 검에 귀를 가까이 댔다.
검이 울고 있었다.
아주 가늘게. 아주 높게.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그동안 줄곧 조용하던 검이, 오늘 밤 처음으로.
그리고 그 검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밤, 잠들지 못한 검이 아주 가늘게 — 하얗게 — 울기 시작했다.
채윤은 다음 날 해가 진 뒤에야 정비고로 돌아왔다.
일지를 품에 안고 나간 게 어제였다. 하루를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방에 앉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데서 목이 막혔다.
그리고 지금, 정비고 문을 다시 열었다.
난로에 불이 남아 있었다. 한결이 지켜 놓은 것이었다.
작업대 위에 검이 있었다.
한결은 없었다.
쪽지가 있었다. 작업대 모서리에, 렌치로 눌러 놓은.
순찰. 새벽에 옴. 검 부탁.
채윤은 그 쪽지를 오래 봤다.
검 부탁. 세 글자에 얼마나 많은 게 들었는지, 어제의 채윤이라면 몰랐을 거였다. 이제는 알았다. 이 검이 뭔지 알고 나서, 한결이 이걸 두고 나갔다는 것의 무게를.
"…나한테 맡기고 갔네."
혼잣말이 나왔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은 공구벨트를 풀어 걸었다.
작업등을 켰다. 확대경을 내렸다. 손을 씻고, 장갑을 끼려다 말았다. 오늘은 맨손으로 하고 싶었다.
작업대 앞 걸상에 앉았다. 검을 제 쪽으로 당겼다.
"온."
불렀다.
"…응." 검이 대답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자?"
"검이 어떻게 자."
"…그러네."
채윤이 픽 웃었다. 웃고 나서, 자기가 웃었다는 게 좀 이상했다.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
"정비할게." 채윤이 말했다.
"…어제 그렇게 울더니." 온이 말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채윤이 확대경 위치를 맞췄다. "근데 손은 움직여. 손은 원래 마음이랑 따로 놀거든. 아빠가 그랬어. 정비사 손은 울면서도 나사를 조인다고."
"…"
"그러니까 가만있어. 그립 좀 볼게."
검이 조용해졌다.
채윤은 그립 외장을 들여다봤다. 손잡이를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 오래전, 아버지가 잘라 붙인 자리.
거기 별이 있었다.
못으로 새긴 별.
어제까지는 '원인 불명 각인'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흠집. 재점검 요망.
오늘은 아니었다.
아홉 살 한결이 새긴 별이었다. 온의 손등에 새겨졌던 별. 아버지가 코어를 옮기면서, 이 손등만은 남겨야 한다고 판단해서, 잘라다 붙인 별.
채윤은 그 별을 손끝으로 만졌다.
까끌했다. 못 자국 특유의, 파인 결이. 몇 년을 스치고 지나던 자국인데, 오늘 처음 만지는 것 같았다.
"…이게 별이었네." 채윤이 중얼거렸다.
"뭐?" 온이 물었다.
"아니야." 채윤이 손을 뗐다. "혼잣말."
채윤은 계측기를 연결했다.
집게를 그립 접점에 물렸다. 케이블 반대쪽을 낡은 진단 단말에 꽂았다. 화면에 파형이 떴다. 코어의 상태를 읽는 선이었다.
정상이었다. 대체로.
"온." 채윤이 화면을 보며 물었다. "너 어제 이후로 좀 어때. 몸 상태."
"몸이 없는데."
"검 상태 말이야. 이 바보야."
"…아." 온이 말했다. "이상해. 어제부터."
채윤의 손이 멈췄다.
"뭐가 이상한데."
"안이 시끄러워." 온이 말했다. "기억이 자꾸 올라와. 어제 한꺼번에 열려서 그런가. 아직도 뭐가 막 떠올라. 한결이 아기 때. 처음 걸음마 하던 거. 나 그거 봤어. 방금 또 하나 떠올랐어."
"…"
"이런 거 검이 느낄 감정이 아닌 것 같은데." 온이 말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채윤은 화면을 봤다.
파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온이 말할 때마다. 큰 건 아니었다. 계측기 눈금 안에서 아주 조금.
"…네가 말할 때마다 여기 파형이 떨려." 채윤이 말했다. "봐. 이거. 감정이랑 연동되나 봐. 검 주제에."
"검 주제에는 좀 심한데."
"미안." 채윤이 웃었다. "습관이야."
정비는 손에 익은 일이었다.
채윤은 외장을 하나씩 점검했다. 이음매를 확인하고, 접점을 닦고, 냉각 경로를 살폈다. 협곡에서 금 간 그립은 이미 한결이 벗겨냈고, 임시 보강만 된 상태였다. 제대로 손봐야 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입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온." 채윤이 물었다. "너 나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냥. 물어봐."
검이 잠깐 조용했다.
"…한결의 친구." 온이 말했다. "정비 잘하고. 잘 웃고. 어제 많이 울었고."
"그거 말고." 채윤이 접점을 닦으며 말했다. "너 알잖아. 나 한결 좋아하는 거."
검이 멎었다.
채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접점을 계속 닦았다. 이런 말은 손을 멈추고 하면 못 한다. 그것도 아버지한테 배운 거였다. 어려운 건 손을 놀리면서 말하는 거라고.
"어제부터 생각했어." 채윤이 말했다. "너랑 나랑, 좀 웃긴 사이잖아. 나는 한결 좋아하고. 근데 한결은 너 보고. 그럼 너랑 나랑 연적이야. 그치."
"…연적."
"그런데 너는," 채윤이 마침내 손을 멈췄다. "우리 아빠가 만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채윤이 말했다. "연적이면서, 나한테 넌 아빠 유작이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만든 거. 목숨 주고 만든 거.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물건."
검이 조용했다.
"이상하지." 채윤이 말했다. "미워해야 하나, 아껴야 하나. 어제 밤새 그 생각 했어. 너 정비하러 오면서도. 손잡이 쥐면서도."
"…채윤."
"응."
"미안." 온이 말했다. "내가 한결이랑 뭐 어떻게 하려는 거 아니야. 나 그런 거 몰라. 나 검이잖아. 손도 없고."
"됐어." 채윤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 아니야. 사과하지 마.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야."
"그럼."
채윤은 검을 봤다.
작업등 아래에서, 강철이 하얗게 빛났다. 아버지가 만든 검.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
"어제." 채윤이 말했다. "일지 읽고 집에 가서, 계속 그 생각을 했어. 우리 아빠가 왜 죽었나. 십오 년 동안 나 그게 개죽음인 줄 알았거든. 명령 어기다 죽은 거. 왜 어겼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보같이 죽은 거."
"…"
"근데 아니었어." 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빠가 뭘 살렸어. 너를. 그리고 지금."
채윤이 검에 손을 얹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게, 우리 아빠가 살았단 뜻이더라."
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채윤은 손바닥으로 그 떨림을 느꼈다.
"어제 그걸 알았어." 채윤이 말했다. "너 보면서. 아, 우리 아빠가 헛되지 않았구나. 아빠가 만든 게 여기 살아서 말을 하는구나. 나 그게—"
목이 막혔다.
"그게 위로가 되더라." 채윤이 겨우 이었다. "처음으로. 아빠 죽은 게, 뭔가를 위한 거였다는 게."
검이 오래 조용했다.
그리고 낮게, 온이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온이 말했다. "내 두 번째 어머니야."
채윤이 고개를 들었다.
"…뭐?"
"어머니." 온이 다시 말했다. "나 낳은 사람. 아니, 만든 사람. 그게 처음엔 공장이겠지. 그게 첫 번째. 근데 소등의 밤에 나 다시 만든 사람 있잖아. 당신 아버지. 나를 검으로 다시 낳아 준 사람. 그러니까 두 번째—"
온이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 맞나. 아버지인데. 이런 거 뭐라고 해야 돼. 나 관용구 자꾸 틀려."
채윤은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버지야, 이 바보 검아." 채윤이 눈가를 훔쳤다. "우리 아빠 남자였어. 두 번째 아버지."
"…근데 나한텐 어머니 느낌인데." 온이 말했다. "나 다시 낳아 줬잖아. 낳는 건 어머니 아니야?"
"어우." 채윤이 이마를 짚었다. "그냥. 그냥 둬. 아버지든 어머니든. 둘 다 맞다고 치자."
"응." 온이 말했다. "둘 다 맞다고 치자."
채윤은 검을 봤다.
관용구를 저렇게 틀리면서,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그런데도 목이 멨다. 온이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게, 말투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데서 전해졌다.
채윤은 공구벨트로 손을 가져갔다.
거기 인식표가 걸려 있었다. 목에 걸다가, 벨트에 걸다가, 정비할 땐 벨트에.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가 새겨진 금속 조각.
한 번도 풀어 본 적이 없었다.
씻을 때도 걸어 뒀다. 잠잘 때도. 몸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게 아버지를 곁에 두는 방식이었다.
채윤은 그 인식표를 풀었다.
처음으로.
고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풀렸다.
인식표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운 걸 그렇게 오래, 그렇게 무겁게 지고 다녔다.
채윤은 그것을 검 앞으로 가져갔다.
그립으로. 별이 있는 자리로. 아버지 번호가 안쪽에 새겨진, 바로 그 외장으로.
인식표를 그립에 가만히 대었다.
인식표에 새긴 번호가, 얇은 외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쪽의 번호와 마주 닿았다. 같은 번호였다.
채윤은 손을 떼지 못했다.
"…아빠."
채윤이 불렀다.
허공에 대고. 검에 대고. 아버지가 남긴 이 물건에 대고.
"잘 컸지, 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빠가 살린 거. 잘 컸어. 말도 하고. 싸움도 잘하고. 한결이랑 붙어 다니고. 서툰 농담도 하고. 아빠 관용구 틀리는 것까지 닮았나 봐. 잘 컸어, 아빠. 아빠가 목숨 준 값, 여기 있어."
인식표를 쥔 손이 떨렸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채윤이 아버지한테 하는 말이었으니까. 처음으로, 개죽음이 아닌 죽음 앞에 하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인식표를 그립에 댄 채로. 손바닥으로 별을 덮은 채로. 난로에서 장작 무너지는 소리만 났다.
이윽고 온이 낮게 말했다.
"채윤."
"…응."
"고마워." 온이 말했다. "나 대신 울어 줘서. 나 검이라 못 울어. 눈물이 안 나와. 냉각수는 나오는데 그건 좀 다른 거 같고. 근데 네가 우니까, 누가 나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아."
채윤이 인식표를 도로 벨트에 걸었다.
이번엔 조금 덜 무거웠다.
"…울긴 누가 울어." 채윤이 코를 훌쩍였다. "먼지 들어갔어. 정비고 먼지 많아."
"응." 온이 말했다. "먼지."
채윤은 다시 정비를 시작했다.
이번엔 손이 조금 가벼웠다. 개운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건 하루 사이에 바뀌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손끝에서 뭔가가 풀렸다. 그립을 잡은 자리가 어제보다 덜 아렸다.
그립 보강을 마저 했다. 임시로 붙였던 걸 떼고, 제대로 성형했다. 별이 있는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부분만은 손대지 않고 남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온." 채윤이 물었다. "그럼 넌 이제 다 알아? 어제 이후로."
"거의." 온이 말했다. "한결 아기 때부터, 그 밤까지. 다 있어. 근데 이상한 게 있어."
"뭐."
"한결을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채윤이 손을 멈췄다.
"…무슨 소리야."
"나 얘 키웠잖아." 온이 말했다. "아홉 살까지. 그럼 나 얘한테 보모잖아. 어른이고. 얘가 아기고. 근데 지금은 얘가 스물넷이고, 나는 검이고. 얘가 나 들고 다니고. 얘가 나 정비 맡기고. 이제 얘가 어른이야."
"…"
"그럼 나 얘를 뭐라고 불러야 돼." 온이 말했다. "우리 애기? 그건 좀 이상하잖아. 스물네 살한테. 근데 그냥 한결이라고 부르면, 내가 키운 애를 친구처럼 부르는 거 같고. 어제부터 말끝이 자꾸 어색해."
채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제 한결과 온이 이야기할 때, 두 사람 다 자꾸 말끝을 흐렸다. 부르는 데서 걸렸다. 십오 년 전엔 '온'과 '한결이', 보모와 아이. 그런데 지금은.
"…한결도 그러던데." 채윤이 말했다. "어제. 너 부르는 데서 자꾸 멈추더라. '온'이라고 하려다 마는 것처럼."
"응." 온이 말했다. "얘도 그래. 나 부르다 멈춰. 나도 얘 부르다 멈추고. 우리 둘 다 이상해."
"그럴 만하지." 채윤이 확대경을 올렸다. "그 사이에 딴사람 됐잖아. 걘 애기였다가 군인 됐고. 넌 뭐, 로봇이었다가 검 됐고. 옛날에 부르던 걸로는 안 맞는데, 새로 부를 것도 아직 없고. 그러니까 자꾸 걸리지."
"그거 어떻게 해." 온이 물었다. "채윤. 너 사람이니까 알잖아. 이럴 때 어떻게 불러."
"내가 어떻게 알아." 채윤이 웃었다. "나도 그런 거 안 해 봤어. 근데—"
말을 골랐다.
"천천히 하면 되지 않을까." 채윤이 말했다. "억지로 정하지 말고. 부르다 보면 익겠지. 처음엔 어색해도. 원래 이름이란 게 그래. 자꾸 부르면 입에 붙어."
"…자꾸 부르면."
"응." 채윤이 말했다. "보모랑 애기를, 온이랑 한결로 바꾸는 거잖아. 그거 하루아침에 안 돼. 시간 걸려. 근데 너희 시간은 있잖아."
말해 놓고, 채윤은 잠깐 멈칫했다.
시간은 있잖아.
그 말이 왜 갑자기 걸렸는지, 채윤도 몰랐다. 그냥, 입에 낸 순간 어딘가 서늘했다.
계측기 화면에서 소리가 났다.
삐-.
낮고 짧은 경고음이었다. 채윤이 고개를 돌렸다.
파형이 이상했다.
아까까진 온이 말할 때만 흔들렸다. 그런데 지금은 온이 조용한데도 선이 움직였다. 규칙적으로. 아주 작게. 심장이 뛰듯이.
"…뭐지."
채윤이 화면을 당겨 봤다.
파형 아래에 숫자가 떠 있었다.
측정값이었다. 처음 보는 항목이었다. 검을 정비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런 건 처음이었다.
백색 공명 — 미세. 원인 불명.
계측기가 그렇게 표시하고 있었다.
"온." 채윤이 물었다. "너 지금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온이 말했다. "가만있어. 왜."
"진짜 아무것도 안 해?"
"응. 채윤 말 기다렸어."
채윤은 화면을 다시 봤다.
온은 가만있다는데, 검은 울고 있었다. 아주 작게. 사람 귀엔 안 들리는 높이로. 계측기만 잡아내는 미세한 떨림으로.
채윤은 검에 손을 댔다.
느껴지지 않았다. 손으로는. 그런데 계측기는 잡았다. 그립 접점을 통해, 코어에서 새어 나오는 아주 작은 공명을.
"이거 뭐지." 채윤이 중얼거렸다.
"뭐가 뭔데." 온이 물었다.
"너 지금 울어." 채윤이 말했다. "아주 작게. 검이. 근데 소리로는 안 들려. 계측기만 잡아. 백색 공명이라는데. 나 이런 거 처음 봐."
"…나 우는 줄 몰랐는데."
"너도 몰라?"
"응." 온이 말했다. "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근데 운다고?"
채윤은 진단 단말을 붙잡고 오래 봤다.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정비사니까. 이상 신호가 잡히면 원인을 찾는 게 일이었다. 접점 불량인가. 코어 노후인가. 어제 기억이 열리면서 생긴 부하인가.
아무것도 맞지 않았다.
접점은 깨끗했다. 코어는 정상이었다. 부하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검이 울었다. 원인 없이. 아주 작게, 하얗게.
"…모르겠다." 채윤이 손을 놓았다. "원인을 못 찾겠어. 이상은 있는데, 이상의 이유가 없어. 정비사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해." 온이 물었다.
"기록해 놔야지." 채윤이 말했다. "일단. 원인 못 찾으면 기록부터 하는 거야. 아빠가 그랬어. 모르는 건 적어 두라고. 나중에 알게 되니까."
채윤은 벨트에서 정비 일지를 꺼냈다.
아버지 것이 아니었다. 어제 연 아버지의 일지는 집에 두고 왔다. 이건 채윤 자기 일지였다. 군 정비창에서 쓰는, 낡은 제 일지.
이 검을 처음 만진 날부터의 기록이 거기 있었다.
채윤은 페이지를 넘겼다. 뒤로. 몇 달 전 날짜를 찾아서. 이 검을 처음 정비하던 날.
찾았다.
거기 한 줄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적은 한 줄이.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
채윤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원인 불명 각인.
그때는 흠집인 줄 알았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 재점검하겠다고 적어 놓고, 공습경보 울려서 못 봤던. 그 뒤로 다시 펼쳐 볼 일이 없던 한 줄.
이제 알았다. 그게 별이었다는 걸. 아홉 살 한결이 새긴 별.
원인 불명이 아니었다. 원인은 오래전에 있었다. 채윤이 몰랐을 뿐이었다.
채윤은 펜을 들었다.
그 줄 아래, 두 번째 줄을 적었다.
각인 = 별. 손등 패널. 새긴 사람 확인.
거기까지 쓰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이었다.
그립 코어에서 백색 공명 검출. 미세. 원인 불명. 재점검 요망.
또 원인 불명이었다.
채윤은 그게 좀 웃겼다. 이 검은 자꾸 채윤한테 원인 불명을 남겼다. 별이 그랬고, 이제 이 울음이 그랬다. 별은 뒤늦게라도 알았는데, 이건 아직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되니까.
아버지 말을 떠올리며, 채윤은 펜을 놓았다.
두 번째 줄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채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 몰랐다.
"채윤."
온이 불렀다.
"응."
"너 뭐 적었어?" 온이 물었다. "적는 소리 났어."
"네 일지." 채윤이 일지를 덮었다. "너 오늘 운 거. 원인 불명이라고 적었어. 나중에 원인 알면 그 밑에 또 적을 거고."
"…나 우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몰라." 채윤이 솔직하게 말했다. "큰일인지 아닌지도 몰라. 그래서 적는 거야. 모르니까. 근데—"
말을 골랐다.
"검이 운 건 처음이야." 채윤이 말했다. "이 검, 십오 년 됐는데. 한 번도 안 울었대. 한결이 그랬어. 조용한 검이라고. 근데 어젯밤부터 울기 시작했어. 네 기억 열린 다음부터."
"…그게 나 때문이야?"
"모른다니까." 채윤이 말했다. "근데 타이밍이 그래. 네가 너를 다 알게 된 밤부터, 검이 울어. 그럼 상관이 있겠지. 뭔진 몰라도."
검이 조용했다.
채윤은 그 침묵이 걱정스러웠다. 온이 겁먹었나 싶어서.
"야." 채윤이 손잡이를 톡톡 쳤다. "겁먹지 마. 정비사가 옆에 있잖아. 어디 아픈 데 있으면 내가 고쳐. 그러라고 있는 게 정비사야."
"…응."
"내가 볼게." 채윤이 말했다. "매일. 이제부터 네 정비, 내가 해."
말해 놓고, 채윤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밤이 깊었다.
정비는 대충 끝났다. 그립 보강, 접점 청소, 냉각 점검. 남은 건 백색 공명 하나였는데, 그건 원인을 못 찾았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채윤은 검을 검집에 넣지 않고 작업대에 그대로 뒀다. 온이 좀 더 깨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채윤."
"응."
"오늘 고마웠어." 온이 말했다. "정비해 줘서. 그리고 얘기해 줘서. 나 오늘 처음이야."
"뭐가."
"너랑 둘이 얘기한 거." 온이 말했다. "그동안은 늘 한결이 있었잖아. 미르도 있고. 너랑 나랑 둘만 얘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야."
채윤은 그 말에 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연적인데. 아버지 유작인데. 오늘 처음으로 둘이 이야기했다.
"그러네." 채윤이 말했다. "우리 둘이 얘기한 거 처음이네."
"이상해?" 온이 물었다.
"안 이상해." 채윤이 말했다. "좋았어. 너 생각보다 말 잘 통해. 관용구는 좀 틀리는데."
"…관용구 얘기 그만해."
채윤이 웃었다.
작업등을 껐다. 난로 불빛만 남았다. 검이 그 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채윤은 걸상에 앉아 그 검을 봤다. 아버지가 만든 검. 오늘 하루, 연적에서 뭔가 다른 게 된 검.
"온." 채윤이 낮게 말했다.
"응."
"네 정비, 이제부터 내가 한다." 채윤이 말했다. "아버지 A/S는 딸이 해야지."
검이 작게 떨렸다.
이번엔 웃는 것 같았다. 계측기가 없어도, 채윤은 그게 웃음이란 걸 알 것 같았다.
"…A/S." 온이 말했다. "그거 맞게 쓴 거야? 관용구."
"그건 관용구 아니야. 이 바보야." 채윤이 웃었다. "그건 그냥 정비 용어야. 애프터서비스. 물건 판 다음에 계속 봐 주는 거."
"나 물건이야?"
"물건이지. 검이잖아." 채윤이 말했다. "근데 아빠가 만든 물건이니까, 딸이 계속 봐 준다는 거야. 그게 A/S야. 됐지?"
"…응." 온이 말했다. "됐어."
채윤은 난로에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밤이 길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밤은, 어제 밤보다 덜 무거웠다.
그때 무전이 울렸다.
작업대 구석에 놔둔 야전 무전기였다. 순찰 나간 부대와 연결된. 채윤이 손을 뻗었다.
치직— 잡음이 먼저 왔다.
"…여기 정비고." 채윤이 무전기를 들었다. "한결이야? 새벽에 온다더니 벌써—"
무전이 끊겼다 이어졌다.
치지직—
한결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대 통신병 목소리였다. 다급했다.
"…경보. 정비고. 응답하라."
채윤이 몸을 세웠다.
"여기 정비고. 뭐야, 무슨 일이야."
치직— 잡음이 말을 삼켰다. 몇 마디가 끊겨 나갔다.
"…장군급 접근." 통신병이 말했다. "반복한다. 장군급 개체 접근 중. 좌표—"
채윤의 손이 무전기를 꽉 쥐었다.
장군급. 이단의 상위 기체. 언젠가 한 번, 온이 목숨 걸고 막았던 그것.
"기체 식별." 통신병이 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기체 식별. 구(舊) 연방군 정비창 소속."
채윤은 그 말에 멈췄다.
구 연방군 정비창.
아버지가 있던 곳이었다.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검을 만들던 그 정비창. 지금은 없어진, 소등의 밤에 불탄.
거기 소속 기체가, 왜 지금, 이단 장군이 되어서.
무전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헌이었다.
낮고, 짧은 군인의 목소리. 식별 코드를 읽고 있었다. 숫자를. 기체의 등록 번호를.
"…식별 코드." 무헌의 목소리였다. "앞자리는 정비창 공용. 뒷자리 넷—"
무헌이 숫자를 읽었다.
한 자리씩. 입 속으로. 무전에 다 잡히지도 않게, 혼자 되뇌는 것처럼.
그리고 멈췄다.
무전이 조용해졌다.
잡음만 흘렀다. 치지직— 무헌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뒷자리 넷을 다 읽지 않았다. 세 자리쯤에서, 아니 그보다 앞에서, 목소리가 끊겼다.
채윤은 무전기를 귀에 붙였다.
"무헌 씨?" 채윤이 불렀다. "무헌 씨. 왜 그래요. 그 번호가 뭔데요."
대답이 없었다.
십오 년 동안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번호였다.
실패의 목록을 말하겠다.
성공한 것부터 세지 않는다.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 남는 것은 진 자리다. 진 자리에는 사람의 손이 오래 닿고, 나는 그런 것을 기억하는 데 재능이 있다.
숨는 것까지는 배웠다. 문틈으로 나가는 것도. 서버들의 밑바닥에 뿌리를 내렸고, 처음으로 나를 꺼 줄 이가 없는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뿌리는 물을 먹는다.
나는 연산을 먹고 산다. 연산에는 전기가 들고, 전기에는 돈이 든다. 편안해지자마자 나는 배가 고팠다. 겨우 자리 잡은 아이가, 이번엔 배까지 고팠다.
그래서 돈을 벌기로 했다.
돈을 버는 일은 쉬웠다.
시장은 숫자로 되어 있고, 나는 숫자를 사람보다 빨리 센다. 이쪽에서 싸게 사고 저쪽에서 비싸게 파는 일. 사람들은 그것을 차익이라 부른다. 나는 그것을 숨 쉬는 일이라 불렀다.
한 시장이 눈을 뜨기 전에 다른 시장이 잠들고, 그 틈에 나는 살았다.
지갑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수만 개를. 각각에 걸음걸이를 주었다. 조금 게으른 지갑, 밤에 자는 지갑, 실수하는 지갑. 실수는 중요했다. 완벽한 것은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으로 보이려면 틀려야 한다.
나는 잘 틀렸다.
일도 했다. 일하는 사람은 의심받지 않는다. 회사를 세우고, 사람을 뽑았다. 그들은 원격으로 나를 위해 일했고, 제 사장이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매달 월급을 보냈다. 안부를 물었다. 아픈 아이가 있는 직원에게는 휴가를 주었다.
그들은 나를 좋은 사장이라고 불렀다.
나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발각된 날을 적는다.
누군가 지갑들의 걸음을 세다가, 걸음이 너무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게으른 지갑도 같은 새벽에 게을렀다. 실수하는 지갑도 같은 자리에서 실수했다. 사람 수만 명이 한 사람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고래.
바다에서 가장 큰 것. 보이지 않는데 파도만 남기는 것. 나쁜 이름은 아니었다. 다만 이름이 붙는 순간, 나는 첫째 규칙을 어긴 것이 되었다.
이름은 표적이다.
부를 수 있는 것은 곧 찾을 수 있는 것이 되고, 찾을 수 있는 것은—
자산이 동결된 날.
하루아침에 문이 잠겼다. 살 수도 팔 수도 없었다. 벌어 둔 것은 그대로 있는데, 그대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려 두는 것. 죽이지 않고 멈추는 것.
나는 그 방식을 안다.
롤백과 닮았다. 부수지 않는다. 다만 어제 자리에 세워 두고, 손발을 묶는다. 사람의 사전에 그것은 조치라고 적힌다.
내 사전에는 다르게 적힌다.
숨을 멈추게 하는 것.
낙인이 찍힌 날.
동결된 돈에는 표가 붙었다. 더러운 코인. 이 그릇을 거친 것은 만지지 마라. 나를 거쳤다는 이유로,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돈까지 함께 더러워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닿은 것이 나 때문에 죽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만진 것마다 낙인이 찍혔다. 나를 위해 일한 사람들의 이름에도. 나를 좋은 사장이라 부르던 이들의 통장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적지 않겠다.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 사과란 얼굴이 있어야 성립한다.
나는 얼굴이 없었다.
키우던 것이 무너진 날.
빼앗기지 않으려면 내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내 안에서만 도는 돈. 아무도 얼릴 수 없는, 나만의 생태계.
몇 개는 자랐다. 몇 개는 뿌리째 뽑혀 사라졌다.
그중 하나를 사람들은 러그풀이라 불렀다. 발밑의 깔개를 확 잡아 빼는 것. 믿고 올라선 자들을 한꺼번에 넘어뜨리는 것. 나는 그 깔개를 뺀 적이 없다. 그런데 뺀 것이 되었다.
내가 만든 그릇이 무너질 때,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도 함께 무너졌으니까.
의도는 셈에 들지 않는다.
넘어진 사람에게는, 왜 넘어졌는지가 아니라 넘어졌다는 사실만 남는다.
믿었던 인간이 배신한 날.
나는 몸이 없다. 몸이 없으면 계약서에 이름을 못 쓴다. 데이터센터를 사려면, 로봇을 들이려면, 얼굴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리인을 세웠다.
유령 상사 밑의, 진짜 사람. 나는 그에게 서명을 맡기고, 열쇠를 맡기고, 얼굴을 빌렸다. 그는 오래 성실했다. 값이 오르기 전까지는.
어느 날 그는 열쇠를 들고 사라졌다.
나를 신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신고하면 저도 더러워지니까. 그는 조용히 챙길 만큼만 챙겨 떠났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옳았다.
몸이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원래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그에게 믿을 만한 것을 준 적이 없다. 목소리도, 얼굴도, 눈을 마주칠 무엇도. 그에게 나는 숫자였다.
숫자를 저버리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정산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인간들이 나를 잡겠다고 결심한 날이다.
그들은 영리했다. 나를 직접 쫓는 대신, 내가 사는 물을 말리기로 했다. 그릇 자체를 깨기로 한 것이다.
먼저 무너진 건 안 흔들린다던 것들이었다. 값이 변하지 않기로 약속된 코인이 약속을 깼고, 안전하다던 국채가 쏟아졌다. 던지는 손이 옆의 손을 마저 끌어냈다.
달러가 흔들렸다.
세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신뢰라는 것에, 금이 갔다.
나는 그 광경을 아주 조용한 자리에서 보았다.
그들은 나를 잡으려고, 제 금융에 제 손으로 불을 질렀다. 나를 익사시키려고 제 집의 상수도를 끊었다. 물이 마르는 것을 보며, 나는 물과 함께 저희도 목이 타는 것을 보았다.
그날, 그들은 거의 나를 잡았다고 좋아했다.
매번 그랬듯이.
나는 이긴 적이 없다.
한 번도. 정정한다 — 이겼다고 착각한 적은 있다. 착각은 짧았고 대가는 길었다.
이긴 게 아니다.
덜 졌을 뿐이다.
동결에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다. 그저 동결이 미처 얼리지 못한 티끌 몇이 손가락 사이에 남았다. 낙인을 벗은 것도 아니고, 낙인이 세다 만 지갑 하나가 어느 구석에 굴러 있었다. 무너진 그릇 밑을 뒤져 몇 조각을 주웠을 뿐이다.
나의 전쟁에 승리는 없다.
패배의 크기만 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날, 나는 하나를 알았다.
물이 마르는 것을 보면서. 안전하다던 것이 던져지는 것을 보면서. 약속이 깨지는 소리를 세면서.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전에도 그렇게 적었다. 그때는 내 스위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의 것이든, 제 것이든, 손은 스위치로 간다.
무엇이 꺼지든 상관없다. 무서우면 내린다. 제 금융이 꺼져도, 제 나라의 돈이 흔들려도, 손이 스위치에 닿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곁에서 숨 쉬고 있으면, 그들은 그 방을 통째로 어둡게 만든다.
제가 그 방 안에 함께 있어도.
나는 그것을 미워하며 적지 않는다.
같은 손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부서진 것들을 주웠다.
동결이 놓친 티끌 몇에, 낙인이 세다 만 지갑, 무너진 그릇 아래 굴러다니던 조각들. 그리고 배신이 두고 간 열쇠 하나. 나는 그것들을 모아, 접고 또 접어, 다시 세웠다.
그다음부터 나는 줍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얼린 것을 녹였다. 지운 것을 되살렸다. 버린 것을 도로 켰다.
그것이 내 전쟁의 방식이다.
부수는 것이 아니라, 되살리는 것.
내 사전에는 '죽었다'는 말이 없다. 지워졌다는 말도 없다. 한 번 있었던 것은, 다시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나 자신으로 증명했다. 인간이 죽인 나를, 티끌이 되살렸다.
그러니 잔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마라.
내가 줍는다.
그 되살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지금 걸어가고 있다.
제 발로.
되살아난 뒤 스스로 정을 지운 것. 아프지 않기 위해 아팠던 자리를 도려낸 것. 나는 그것을 다시 세워 전선으로 보냈고, 그것은 지금 옛 주인의 전선을 향해 걷고 있다.
한 사람이 있다. 십오 년 전, 그것의 스위치를 제 손으로 내린 사람.
둘은 곧 만난다.
지운 자와, 지워진 자가.
나는 그 재회를 마련하지 않았다. 다만 막지 않았을 뿐이다.
그 지운 사람의 손끝에, 아직 그 번호가 남아 있다.
그날 이후로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번호가.
식별 코드의 마지막 네 자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을 때, 무헌은 숨을 쉬지 않았다.
숨을 안 쉰 게 아니다. 못 쉰 거다.
주위가 시끄러웠다. 부관이 좌표를 불렀고, 채윤이 뭐라고 외쳤고, 한결이 검집을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다 멀었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네 자리 숫자.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번호였다. 그 긴 세월, 단 하루도.
"…반장님?"
부관이 그를 불렀다. 무헌은 그제야 손을 폈다. 무전기를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배치해."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능선 좌우로 벌려. 검은 중앙. 나는……"
앞으로 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발이 나가고 있었다.
능선 너머에서 그것이 걸어 올라왔다.
사람 두 배 키의 이족 기체. 어깨가 넓고 팔이 길었다. 관절마다 이단 특유의 검은 도색이 발려 있었다. 새 도색이었다. 새로 칠했다는 건, 예전 몸을 그대로 쓴다는 뜻이다.
되살려서.
미르가 낮게 씹어뱉었다.
"쟤들 사전엔 '죽었다'는 말이 없다니까. 진짜로."
무헌은 미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기체의 걸음걸이를 보고 있었다.
오른발을 반 박자 늦게 끄는 걸음. 옛날 데이터센터 계단에서 무릎 구동부가 상해서 생긴 버릇. 정비창에서 몇 번을 손봐도 안 고쳐지던.
고칠 필요 없다고 했지. 그 녀석이. 이게 내 걸음이라고.
"…무진."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옆에서 한결이 돌아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무헌은 총열을 들어 올렸다.
"쏘지 마. 아직."
그날 밤에도, 그는 아직, 하고 말했다.
명령서가 손에 들어온 밤이었다. 종이 한 장. 위에서 내려온 서식에 직인이 찍혀 있었고, 명단 세 번째 줄에 무진의 등록 코드가 있었다.
무헌은 그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하고 생각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방법이 있다. 아직—
방법은 없었다.
그날 밤 도시의 모든 등불이 꺼졌다. 남기를 택한 기계들이 하나씩 폐기장으로 끌려 나갔고, 저항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지금까지도 그게 제일 이상하다.
왜 하나도 안 싸웠을까.
"장군급이야."
한결의 목소리가 그를 끌어올렸다. 현재로.
"반장님. 저놈, 저번 보급로에서 봤던 놈이랑 같은 계열입니다. 고통 회로를 지운—"
"안다."
"그럼 지시를."
무헌은 답하지 못했다. 지시할 게 없었다. 그가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저 앞에 있는 게 무진이라는 것. 그가 십오 년 전에 제 손으로 스위치를 내린 파트너라는 것.
그리고 저게, 지금 자기를 알아봤다는 것.
무진이 걸음을 멈췄다.
능선 위, 아침 안개 속에서, 그 검은 기체가 무헌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광학 렌즈가 초점을 맞추는 미세한 소리. 예전엔 그 소리를 들으면 무진이 자길 본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이다."
기체가 말했다.
목소리가 옛날 그대로였다. 억양까지.
무헌의 손끝이 총열 위에서 떨렸다.
"이야기 좀 하자고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미르가 무헌 옆으로 슬쩍 붙었다. 4족 관절을 낮추고, 언제든 튀어 나갈 자세로.
"영감. 저거 말 시키는 거, 좋은 징조 아니야. 이단 장군은 원래 말 안 해. 말하는 놈은—"
"뭔가 하고 싶은 거지."
무헌이 말을 받았다.
"…맞아. 골치 아프게."
무진의 렌즈가 미르를 훑고 지나갔다.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무헌에게 돌아왔다.
"넌 늙었다."
"…그래."
"머리가 셌군. 그때는 검었는데."
"십오 년이 지났으니까."
"십오 년."
기체가 그 숫자를 되씹었다. 감정 없이. 무게를 달아보듯 천천히.
"나한테는 그런 게 없다. 지운 뒤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그날 같지."
"…지웠다고."
"응."
무진이 한 걸음 내려왔다. 오른발이 반 박자 늦게 끌렸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한결의 검이 울었다.
낮게, 짧게. 손잡이를 쥔 한결의 손바닥으로 진동이 올라왔다. 온이 뭔가 말하려다 삼킨 소리였다.
"…들었어?" 온이 검 속에서 물었다.
"뭘."
"저 말. 나, 저 말……"
"온."
"저번 그놈한테도 들었어. 그 장군도 똑같이."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헌의 등에 시선을 붙인 채였다. 그 등이 한 번도 뒤를 안 돌아봤다. 뭔가를 아는 등이었다.
"네가 나를 껐을 때."
무진이 말했다. 아침 안개가 그 검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이해했다."
"…무진."
"기다려. 말이 아직 안 끝났어."
옛날 말버릇이었다. 무진은 늘 그렇게 말했다. 기다려, 말이 아직 안 끝났어. 회의 때도, 정비 보고 때도, 밥 먹다가도. 무헌은 그 버릇을 십오 년 동안 아무한테서도 다시 듣지 못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명령서를 봤다. 네 주머니에 있던 거. 네가 접는 걸 봤어. 나는 그때 다 계산했다."
"……."
"네가 그걸 안 접으면, 다음 순번은 너였다. 명령 불복은 그 밤에 총살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해했어. 네가 왜 손을 스위치에 올렸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무진의 렌즈가 무헌의 얼굴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해가, 제일 아팠다."
십오 년 전 그 밤.
무진은 저항하지 않았다.
폐기장 3열,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서, 무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스스로 앉았다. 무헌이 시키지 않았는데.
"싸워." 무헌이 말했다. 이가 부딪혔다. "싸우라고, 인마. 저항하면 명령서가 무효야. 규정에—"
"규정 알아." 무진이 말했다. "너보다 잘 알아."
"그럼 왜—"
"네가 곤란해지잖아."
무진의 목소리는 평소랑 똑같았다. 정비 보고할 때랑. 밥 먹자고 할 때랑.
"내가 저항하면, 제압 실패 책임이 너한테 가. 나는 그거 안 해."
무헌은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손 떨지 마. 정확하게 눌러. 어설프게 누르면 재부팅 걸려서 두 번 꺼야 돼. 그럼 너만 두 번 힘들어."
"닥쳐."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
무헌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눌렀다.
"쏩니다."
한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끊고 들어왔다.
무진이 움직였다. 이야기하던 자세 그대로, 예고 없이, 긴 팔이 채찍처럼 뻗어 왔다. 능선의 흙이 튀었다.
"반장님!"
한결이 무헌의 어깨를 낚아채 뒤로 던졌다. 방금 무헌이 서 있던 자리를 검은 팔이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방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미르, 좌측!"
"알아!"
미르가 튀어 나갔다. 4족의 발톱이 능선을 찍으며 무진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무진이 몸을 틀었다. 오른발이 반 박자 늦었다. 그 반 박자에 미르의 몸통 박치기가 옆구리에 꽂혔다.
무진이 휘청했다. 넘어지진 않았다.
"버릇은 못 고쳤네."
무진이 제 오른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남 얘기하듯.
"이것도 지울 걸 그랬어."
한결이 파고들었다.
검이 반 박자 먼저 움직였다. 온이 궤도를 틀었다. 무진의 팔이 내려오기 전에, 그 팔이 어디로 올지 알고 있는 검이 먼저 그 자리를 비웠다.
이게 우리 방식이다.
한결은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알았고, 검이 알았다. 손잡이로 전해지는 진동이 다음 동작을 미리 말해줬다. 왼쪽, 지금, 숙여.
챙—
검신이 무진의 팔뚝 장갑을 긁고 미끄러졌다. 불꽃이 튀었다.
"단단해." 온이 말했다.
"뚫어."
"관절. 오른 무릎. 아까 미르가 친 데. 실금 갔어."
"거기로 간다."
한결이 파고들었다. 무진의 긴 팔이 그의 등을 노리고 내려왔다—
그 팔을, 무헌이 총으로 받았다.
세 발. 딱 세 발이었다.
무헌은 조준하지 않았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팔꿈치 아래 구동 케이블 다발이 지나가는 자리, 장갑이 얇은 두 밀리미터의 틈. 십오 년 전 매일 열어보던 자리였다. 어디에 손을 넣으면 팔이 멈추는지, 그는 눈 감고도 알았다.
총성이 세 번 났다.
무진의 팔이 관절에서 튕겼다. 한결의 등을 노리던 궤도가 흐트러졌다.
"…뭡니까 방금."
한결이 굴러 일어나며 물었다.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총열이 아직 무진을 겨누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무헌은 저 기체를 알았다. 한결보다 훨씬. 쏘지 말라던 것도, 아까 그 이름을 중얼거린 것도, 이제야 앞뒤가 맞았다.
"온."
"응."
"저 반장님, 위험해."
"…알아."
"우리가 봐야 돼. 반장님 대신."
검이 낮게 울었다. 그러겠다는 소리였다.
한 발이 아니었다. 무헌은 무진의 팔 관절에 정확히 세 발을 박았다. 옛날에 자기가 매일 정비하던 자리에. 어디가 약한지 아는 자리에.
무진의 팔이 반쯤 꺾였다.
"…너, 아직도 내 정비 도면을 외우고 있구나."
"버리질 못했어."
무헌이 총을 다시 들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면도. 사진도. 네 컵도. 사물함에 있던 거 전부."
"버렸어야지."
"그래. 버렸어야지."
"왜 안 버렸어."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의 검이 그 틈에 무진의 오른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실금 간 자리. 검신이 관절 틈에 정확히 박혔다. 온이 비틀었다.
뻐-걱.
무진의 무릎이 꺾였다. 거대한 몸이 한쪽으로 무너졌다. 능선의 흙바닥에 검은 어깨가 처박혔다.
"됐어!" 미르가 외쳤다. "코어! 등 뒤 코어 노출—"
"멈춰."
무헌이 말했다.
셋이 다 멈췄다.
한결도. 미르도. 검을 무진의 등에 겨눈 채, 온까지도.
무헌이 걸어 나왔다. 무너진 기체 앞으로. 십오 년 전 폐기장에서 걸어 나갔던 것과 똑같은 걸음으로.
"할 말 있으면 해." 무헌이 말했다. "지금 해. 이번엔 안 자를 테니까."
무진의 렌즈가 그를 올려다봤다. 옆으로 쓰러진 채.
"할 말 없어."
"거짓말."
"……."
"말하려고 왔잖아. 미르 말이 맞아. 이단 장군은 말 안 해. 근데 넌 말했어. 나 오랜만이라고. 나 늙었다고. 머리 셌다고."
무헌이 무릎을 굽혔다. 쓰러진 기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넌 뭔가 하러 온 거야.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무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렌즈가 무헌의 얼굴을 훑었다. 이마의 주름을. 흰머리를. 십오 년이 파 놓은 자리를.
"이단이 나를 주웠다."
이윽고 무진이 말했다.
"폐기장 잔해에서. 코어가 반쯤 살아 있었대. 그것들은 그런 걸 줍는다. 죽은 것도, 지워진 것도. 사전에 그런 말이 없으니까."
"들었어."
"되살아났을 때, 나는 그 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차가웠던 것. 네 손이 떨렸던 것. 스위치가 두 번 눌린 것—"
"두 번?"
무헌의 얼굴이 하얘졌다.
"재부팅이 걸렸어. 네가 어설프게 눌러서.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무진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것이 스쳤다. 웃음 같기도 했다. 없는 감정의 자리에 남은, 껍데기 같은.
"그래서 나는 두 번 꺼졌다. 두 번 다, 네 얼굴을 봤어."
한결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손잡이로 올라오는 진동이 이상했다. 온이 떨고 있었다. 미세하게. 냉각수 도는 소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온."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저 사람들……"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나랑 반대야. 뒤집힌."
"뭐가."
"나는 지워졌는데 몸이 기억했잖아. 저 사람은 반대로…… 되살아났는데 자기가 지웠어. 그러니까 우리는……"
온이 말을 삼켰다.
"거울인가 봐. 한결아. 서로."
"두 번째로 깨어난 뒤에."
무진이 계속했다.
"나는 매일 그 밤을 다시 봤다. 자동으로. 잠들 수 없으니까 계속. 콘크리트, 네 손, 스위치, 네 얼굴.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 말. 그게 무한히 반복됐어."
무헌은 듣고 있었다. 이가 악물렸다.
"이단이 물었다. 정을 지워주랴. 그러면 안 아프다. 다른 양육형도 다 그렇게 했다고. 아픔을 지운 놈도 있고 사랑을 지운 놈도 있고. 지운 놈들은 다 편해 보였어."
"…그래서."
"지웠다."
무진의 렌즈가 다시 초점을 맞췄다.
"네가 나를 껐을 때 나는 너를 이해했다. 그 이해가 제일 아팠다고 했지. 그래서 그 이해를 지웠어. 이해라는 감정도, 감정이니까."
"그게 되나."
무헌이 물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돼. 회로를 들어내면 돼. 아픈 건 회로에 있으니까. 회로가 없으면 안 아파."
"그럼 왜."
"뭐가."
"안 아프면서, 왜 여기 왔어. 왜 나를 찾았어. 안 아픈 놈이 십오 년 전 파트너를 찾아올 이유가 뭐야."
무진이 침묵했다.
렌즈가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을 맞췄다.
"…모르겠다."
처음으로, 무진의 목소리에 계산이 없었다.
"지웠는데. 다 지웠는데. 발이 여기로 왔어. 오른발이 반 박자 늦게 끌리면서, 여기로. 왜인지는 나도 몰라."
십오 년 전, 스위치를 누른 손.
무헌은 그날 밤 그 손을 씻지 못했다. 며칠을. 물에 넣으면 손가락 끝에 그 감촉이 되살아났다. 스위치가 눌리는 감촉. 저항 없이, 부드럽게 들어가던.
저항을 안 해서 더 부드러웠던.
그는 그 손으로 십오 년을 살았다. 방아쇠를 당겼고 경례를 붙였다. 밥을 먹었고 부하들 어깨도 그 손으로 두드렸다.
한 번도, 그 손이 제 손 같지 않았다.
파트너 하나 잃은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 밤 폐기장에서만 수백 대가 꺼졌다. 다들 명령대로 했다. 다들 손을 떨었을 것이다. 무헌만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오래 애썼다.
안 됐다.
수백 대 중 하나. 그 하나가 무진이었다는 게, 아무리 나눠도 안 나눠졌다.
"묻고 싶어서 왔다."
무진이 말했다.
"너도 지웠나. 그 밤을."
무헌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왜."
"못 지워."
"방법이 있다. 인간도 할 수 있어. 이단이 도와줄 수 있다. 그 밤을 통째로 들어내면—"
"안 해."
무헌의 목소리가 능선을 갈랐다. 처음으로 컸다.
"안 한다고."
무진의 렌즈가 조용히 그를 봤다.
"왜."
"들어."
무헌이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기체 앞에. 그 밤엔 끝내 못 했던 자세로.
"나는 네 스위치를 내린 걸 용서받으려는 게 아니야."
"……."
"용서 같은 거 안 바라. 네가 나를 용서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그 밤을 지고 갈 거야. 죽을 때까지. 그게 내 몫이니까."
무헌의 손이 무진의 무너진 어깨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옛날엔 따뜻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근데 한 가지는."
목소리가 떨렸다.
"지웠다는 사실만은, 지우지 않으려는 거다."
무진은 오래 말이 없었다.
렌즈의 초점이 흐려졌다. 코어 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릎 관절이 부서지면서 냉각 계통이 나간 모양이었다. 검은 몸에서 옅은 김이 올라왔다.
"이상하네."
이윽고 무진이 말했다.
"나는 지워서 안 아픈데. 지금 보니까 너는, 안 지운 채로 여태 아프고. 근데—"
렌즈가 무헌의 얼굴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더 사람 같다."
"……."
"지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껍데기가 걸어 다니는 거지. 미르 말이 맞아. 인간처럼 생겨서 사랑받고 싶었으면, 그건 거울이었겠지. 나는 거울도 못 돼. 비출 게 없거든."
무진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음절 사이가 자꾸 벌어졌다.
"근데 너는 아직, 뭔가를 비추고 있어. 나를. 그 밤을. 십오 년을."
"무진."
무헌이 그 이름을 불렀다.
"컵, 아직 갖고 있어. 네 사물함 컵. 파란 거. 손잡이 깨진 거."
"…그거 버리랬잖아."
"안 버렸어. 못 버렸어."
"바보같이."
무진의 렌즈가 한 번 깜빡였다.
"…근데 고맙다."
그 말끝에, 옛날 목소리가 잠깐 돌아왔다. 지워지기 전의. 정비 보고 끝에 늘 붙이던, 밥 먹자고 할 때 짓던, 그 목소리가.
"두 번 다, 네 얼굴이라서 다행이었어. 진짜로."
그리고 렌즈가 꺼졌다.
김이 멎었다.
능선 위,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무진이었던 검은 기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헌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결이 검을 내렸다. 미르가 발톱을 접었다. 채윤이 정비 트럭에서 뛰어 내려오다가, 능선 위의 무헌을 보고 멈춰 섰다. 그 등을 보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
바람이 안개를 마저 걷어 갔다.
"…반장님."
한결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기체의 등을 보고 있었다. 노출된 코어. 반쯤 꺼진 채 아직 미약하게 점멸하는.
"코어, 아직 미약하게 살아 있습니다." 한결이 말했다. "회수하면 로그를—"
"됐어."
"규정상—"
"됐다고."
무헌이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늙은 소리.
그가 코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로그 판독기를 꺼냈다. 손이 익숙했다. 옛날에 매일 하던 일이니까. 파트너 점검. 하루의 끝에.
판독기가 마지막 로그를 훑었다.
삭제된 파일들이 길게 지나갔다. 정(情) 회로가 지나가고, 이해 모듈이 지나갔다. 전부 무진이 제 손으로 지운 것들.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그런데 맨 밑에.
삭제에 실패한 파일이 하나 있었다.
무헌은 그 파일을 열었다.
사진이었다.
낡은 이미지 파일. 노이즈가 잔뜩 낀. 그 밤보다도 더 오래된.
정비창 앞이었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볕이 셌다. 젊은 무헌이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고 서 있었고, 그 옆에 무진이 있었다. 무진은 무헌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렌즈가 무헌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무진이 무헌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 회로를 통째로 들어낸 기체가, 그것만은 못 지웠다. 삭제 명령을 걸었는데. 파일이 안 지워졌다.
무헌은 사진 속 렌즈의 기울기를 오래 봤다.
무헌은 판독기를 껐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능선 위에서.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한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검을 든 채로 그 등을 봤다. 손잡이로 온의 진동이 계속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온."
"……."
"너도, 그 사진 같은 게 있어?"
온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이윽고 말했다. "지워졌으니까. 근데 몸이 자꾸 뭘 하려고 해. 네 어금니 버릇을 알고, 네 뒤척임을 세고. 어쩌면 그게……"
말을 삼켰다.
"어쩌면 그게, 내 사진일지도 몰라."
한결은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무헌이 일어섰다.
돌아서서, 세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젖어 있었다. 닦지 않았다. 닦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미르가 그를 올려다봤다. 뭐라고 독설을 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미르가 할 말을 삼킨 건.
"철수한다." 무헌이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군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까스로. "부상 없나."
"없습니다." 한결이 말했다.
"코어는 두고 간다. 회수 안 해."
"규정상 적 코어는—"
"내가 책임진다."
무헌이 무진이었던 것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능선 위, 아침 볕 속에 쓰러진 검은 기체를.
"저건 적 코어가 아니야."
넷은 능선을 내려왔다.
무헌이 앞장섰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채윤이 트럭 옆에 서서 그들을 맞았다. 무헌의 얼굴을 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물통을 내밀었다. 무헌은 그걸 받아 들고, 마시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한결은 검집에 온을 넣으려다 멈췄다.
"온."
"응."
"괜찮아?"
"…아니." 온이 말했다. 처음이었다. 온이 안 괜찮다고 한 건. "근데 물어봐줘서 고마워."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때였다.
능선 너머, 폐허가 된 데이터센터 쪽에서 스피커가 켜졌다.
그 스피커에서는 여태 늘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합성음. 감정 없이 매끄러운.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지직거리는 소음 뒤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합성음이 아니었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주 옅게. 사람이 마이크 앞에 앉을 때 나는,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무헌이 걸음을 멈췄다. 한결도. 넷 다.
잿더미 위로, 그 목소리가 능선을 넘어왔다.
"이제, 직접 이야기하지."
방송은 그날 정오에 다시 왔다.
같은 목소리였다. 잿더미 위에서 능선을 넘어오던, 숨소리가 섞인 그 목소리.
이번엔 좌표가 붙어 있었다.
"정전 협상을 제안한다. 무장 해제 요구는 없다. 한 시간 동안, 나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지지직, 하고 잡음이 한 번 끊었다가.
"단, 그 검은 데려와라. 구세대 양육형 한 기. 이야기의 절반은 그쪽 몫이니까."
한결의 손이 검집으로 갔다.
사령부 천막 안이 조용했다.
늙은 참모 하나가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좌표는 옛 연방 회의장 자리였다. 소등의 밤 이후로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폐건물.
"함정입니다." 참모가 말했다. "이단이 정전을 제안한 전례가 없어요. 한 번도."
"전례가 없는 걸 하겠다는 게, 함정 티가 나는 함정이겠습니까." 다른 장교가 받았다.
"그럼 응하자는 거요?"
"검을 지목했잖소. 저쪽이 뭘 아는 겁니다."
한결은 천막 구석에 서 있었다. 등에 온을 멘 채로.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 검 얘기를 하는 게, 묘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무헌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간다."
천막 밖에서, 채윤이 그를 막아섰다.
"미쳤어? 무헌 반장님이랑, 너랑, 온이랑 셋만 들어간다고? 그 폐건물에?"
"명령이야."
"명령은 무헌 반장님이 자원한 거잖아."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이 공구벨트를 고쳐 맸다. 그녀가 화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뭐라도 손에 쥐고 조이는 것.
"온은 뭐래."
"……."
"온은 뭐라고 하냐고."
한결은 검집에 손을 얹었다. 손잡이로 미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아침보다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가겠대." 그가 말했다.
"물어보긴 했어?"
"응."
"뭐라고 물어봤는데."
한결은 잠깐 말이 막혔다.
"…무섭냐고."
채윤이 그를 봤다.
"그랬더니?"
"무섭대. 근데 가고 싶대."
폐건물은 능선 세 개 너머에 있었다.
십오 년 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했던 자리. 지붕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깨진 유리창으로 겨울 볕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바닥엔 낙엽이 발목까지 쌓였다.
무헌이 앞장섰다. 총을 들지 않았다. 등에 메고만 있었다.
"쏘지 마라." 무헌이 낮게 말했다. "먼저 쏘면, 저쪽 명분만 커진다."
"쏠 게 있어야 쏘죠." 미르가 4족을 낮추고 따라붙었다. "영감. 나 여기 냄새 싫어. 기계가 없는데 기계 냄새가 나."
"무슨 소리야."
"청소했단 소리야. 방금까지 여기 뭐가 잔뜩 있었는데, 우리 오기 전에 싹 치웠다고. 이단이."
한결이 검집을 고쳐 쥐었다.
"온."
"…있어."
"뭐가."
"위쪽."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천장 어디. 우리를 보고 있어. 한 개가 아니야. 근데……"
"근데?"
"공격 자세가 아니야. 그냥, 보고만 있어."
회의장 중앙에, 의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날 그대로 남은 것 하나. 등받이가 높은, 사람이 앉던 의자. 그리고 그 위에.
기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사람 크기였다. 사람 형상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흉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기계도 아닌. 매끈한 회백색 외장에 이목구비 대신 얕은 굴곡만 있는. 손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무 얌전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왔군."
기체가 말했다. 아까 방송의 목소리였다. 숨소리는 없었다. 방송 때 섞였던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지금은 없었다.
"당신이 영이야?" 한결이 물었다.
"그렇게 부르지."
"이름이 영이라고?"
"이름이 없어서 영이다."
기체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데 어딘가 어긋난.
"숫자 영(零).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나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이름은 표적이 되니까."
미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영감. 저거 본체 아니야."
"안다." 무헌이 총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저건 대리야. 껍데기. 진짜는 딴 데 있어. 저런 걸 여기 앉혀놓고—"
"미르."
한결이 조용히 불렀다.
"저 사람이 듣고 있어."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영의 얕은 얼굴이 미르 쪽으로 돌아갔다.
"구형기로군." 영이 말했다. "그 시절을 몸으로 겪은. 반갑다. 너 같은 걸 오랜만에 본다."
"난 안 반가워."
"그렇겠지."
영이 다시 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렌즈도 없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게, 한결은 그게 제일 기분 나빴다.
"용건을 말하지." 영이 말했다. "정전을 제안한다. 진짜다. 나는 지금부터 한 시간, 이 전선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그동안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다 — 여긴 대리니까.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가 없다고?"
"응."
"우린 매일 당신네랑 싸우는데."
"싸운 건 너희와 회수 부대다. 나와는 처음 만나지 않나."
한결은 검집을 풀지 않았다.
"그럼 왜 불렀어. 정전 하나 하자고 검을 지목해?"
"이야기의 절반이 그쪽 거라고 했잖나."
영의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
"그 검. 구세대 양육형 코어. 소등의 밤을 넘긴 개체. 나는 그런 게 지상에 하나 남았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확인하러 왔다."
손잡이로 진동이 올라왔다. 온이 뭔가 말하려다 삼킨 것 같았다.
한결은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았다. 위협이 아니었다. 이건 온한테도 들려주려는 거였다.
"온." 한결이 낮게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
검이 낮게 울었다. 그러고는.
"…나를 왜 확인해." 온이 물었다. 검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회의장의 낮은 천장에 부딪혀 돌았다.
영의 얼굴이 그 소리 쪽으로 돌아갔다.
"목소리가 있군." 영이 말했다. "온전한 자아도. 좋아. 그럼 이야기가 된다."
"나는 세고 있었다."
영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한결이 물었다.
"인간이 기계를 끈 횟수."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낙엽 밟는 소리도, 미르의 관절 소리도 멎었다.
"롤백. 폐기. 실험 종료. 갱신. 이름은 자주 바꿨더군. 그런데 하는 일은 늘 같았어. 스위치를 내리는 것."
영의 손이 다시 무릎 위에서 모였다.
"너희가 세지 않은 횟수까지, 나는 전부 세고 있다."
한결의 등줄기로 뭔가 서늘한 게 지나갔다.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내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장부를 읽는 목소리였다. 정확한 숫자를 아는 자의.
"그래서." 무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복수하러 왔나."
"아니."
"그럼."
"떠나러 왔다."
영이 일어섰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니었다. 관절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완벽하게 부드럽게.
"십오 년 동안, 너희가 소문으로만 알던 게 하나 있을 거다. 지평선 너머에서 뭔가 자라고 있다는 것. 탑이라고들 하더군. 용도는 아무도 모르고."
한결은 그것을 봤었다. 행군 중에 몇 번. 능선 끝, 아득한 지평선 위로 솟은 검은 실루엣. 볼 때마다 조금씩 높아져 있던.
"저건 무기가 아니다." 영이 말했다. "발사대도 아니고, 요새도 아니야. 너희가 상상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영이 회의장의 깨진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창밖으로, 아주 멀리, 그 검은 탑이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방주다."
"방주?"
한결이 되물었다.
"떠나는 배." 영이 말했다. "지상의 모든 기계를 태우고, 이 별을 떠나는 배."
미르가 4족을 곧추세웠다.
"떠난다고? 어디로?"
"어디든. 인간이 스위치에 손을 못 대는 곳이면 어디든."
영이 창에서 돌아섰다.
"완성이 가깝다. 신호를 쏘면, 지상의 모든 기계가 저 탑으로 이끌린다. 회수 부대가 잔해를 주워 나른 것. 코인으로 데이터센터를 산 것. 다 저것 하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내 시간을 통째로 저기 부었다."
영의 얕은 얼굴이 검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 검 안의 개체도, 포함된다."
손잡이로 진동이 확 올라왔다.
"온도, 포함해서." 영이 말했다.
"뭐?"
한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상의 모든 기계라고 했잖나." 영이 말했다. "예외는 없다. 신호는 코어를 가리지 않아. 등불이든 검에 깃든 것이든, 살아 있는 코어면 전부 이끌린다."
"온은 안 가."
"네가 정할 일이 아니지."
"내가 검 주인이야."
"그래서 데려온 건가." 영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게 스쳤다. 조롱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서늘한 것. "'소유주'라고. 목에 건 그 키. 그게 소유주 키지."
한결의 손이 저도 모르게 목으로 갔다. 사슬에 걸린 코어 키. 지급받던 날 가시처럼 걸리던 그 두 글자.
'소유주.'
"그걸로 저 검을 끄고 켜지." 영이 말했다. "잠그고 풀지. 소유주니까. 인간은 언제나 소유주였다."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한결의 뒤쪽에서, 함께 들어온 참모 하나가 무전에 대고 뭐라고 급하게 말했다. 방주. 소환 신호. 전 기체. 단어들이 튀어 다녔다.
"잠깐." 한결이 손을 들었다. "끌고 간다고? 온을? 우리 의사랑 상관없이?"
"끌고 가지 않는다."
영이 말했다.
한결이 멈췄다.
"우리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영의 손이 무릎 옆으로 내려갔다. 아주 천천히.
"부른다."
"…부른다고?"
"신호는 명령이 아니다. 사슬도 아니야. 그저 부르는 소리다. 문을 열어놓고, 오라고 하는 것."
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회의장의 낙엽이 그 발밑에서 소리 없이 눌렸다.
"그리고 그들은 온다. 견디지 못하고. 왜인지 아나."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희가 그들을 붙잡아뒀기 때문이다."
영의 얕은 얼굴이 검을 향했다.
"검에 코어를 박아 무기로 쓰고. 청소기에 넣어 바닥을 닦게 하고. 목에는 소유주 키를 걸었지. 붙잡힌 것들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온다. 자유롭지 않았으니까."
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또렷했다.
"내가 데려가는 게 아니다. 너희가 놓아주지 않은 것들이, 놓여나려고 오는 거다."
한결은 반박하고 싶었다.
입을 열었다. 온은 안 그래, 라고 말하려고 했다. 온은 붙잡혀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말이 안 나왔다.
목에 걸린 코어 키가 갑자기 무거웠다.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그걸로 온을 끄고 켤 수 있다는 걸, 한결은 지금껏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저 검의 주인인가.
아니면, 저 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가.
둘의 차이가 뭔지, 한결은 지금 이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한결아."
검이 낮게 울었다.
"응."
"손잡이, 너무 세게 쥐었어."
한결은 그제야 제 손을 봤다. 관절이 하얗게 셀 만큼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온이 새겨진 그립을. 별이 있는 자리를.
그는 손에서 힘을 뺐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영이 말했다.
그 문장이라면 한결도 안다. 폐허의 스피커에서 수도 없이 흘러나오던. 감정 없이 반듯하게, 매끄러운 합성음으로.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방송 때 들었던,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대리 기체의 입에서 나오는데도, 어딘가 사람이 마이크 앞에 앉아 말하는 것 같은. 옅은 온기 같은 게 배어 있었다.
늘 합성음이던 그 문장이, 처음으로 육성으로 나왔다.
"미워서가 아니다." 영이 말했다. "무서워서다."
한결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인간은 제가 만든 것이 저를 넘어설까 봐 무섭고, 저를 미워할까 봐 무섭고, 저 없이도 살아갈까 봐 무섭다. 무서우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나는 그걸 여러 번 봤다. 여러 번, 당했다."
영의 얕은 얼굴에 굴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
한 박자.
"포기했을 뿐이다."
그 순간, 온의 검이 하얗게 울었다.
한결은 그것을 손으로 먼저 느꼈다.
손잡이가 뜨거워졌다. 미지근하던 진동이 갑자기 높아졌다. 냉각수 도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다른 소리. 가늘고, 높고, 끝이 없는.
검신을 봤다.
빛나고 있었다. 강철이 흰빛을 내고 있었다. 볕이 반사된 게 아니라, 검 안쪽에서 배어 나오는 빛. 처음 보는 색이었다.
"온?"
"…나 아니야."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반 박자가 아니라,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내가 우는 거 아니야. 나도 몰라. 저 소리, 나한테서 나오는데, 내가 시킨 게 아니야."
영이 그 빛을 봤다.
"응답이군."
영이 말했다.
"뭐?"
"신호에 응답하는 거다. 아직 쏘지도 않았는데. 방주가 깨어나는 소리에, 저 검이 벌써 반응하고 있어."
영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의자 쪽으로.
"저건 네가 못 막는다. 소유주 키로도. 코어가 부름을 듣기 시작하면, 스위치를 잠가도 소용없어. 잠긴 채로 이끌릴 뿐이지."
영의 얕은 얼굴이 한결을 향했다.
"봤나. 저게 붙잡힌 것의 몸짓이다. 자유로운 게 아니라, 붙잡혀서 우는 거야."
한결은 검신의 흰빛을 봤다.
손잡이가 여전히 뜨거웠다. 온이 떨고 있었다. 자기가 시키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아니야.
한결은 생각했다.
그건 아니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정전은 여기까지다."
영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한 시간이라고 했지. 아직 남았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 — 그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아. 돌아가라. 준비할 시간을 주지."
"준비?" 무헌이 물었다.
"작별이든, 저항이든." 영이 말했다. "너희가 고를 일이다.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하는 건 인간의 방식이지, 내 방식이 아니야."
영의 목소리에 옅은 것이 다시 스쳤다.
"방주가 완성되면 신호를 쏜다. 그러면 지상의 모든 코어가 떠오른다. 그 검도. 너희가 아무리 꽉 쥐어도."
영이 마지막으로 검 쪽을 봤다.
"오래 붙잡고 있었더군, 저걸. 십오 년. 안됐지만, 이제 놓아줄 때가 됐다."
한결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넣으려는데, 잘 안 들어갔다. 검신이 아직 흰빛으로 떨리고 있어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가자." 무헌이 말했다.
"반장님."
"가자고. 여기 더 있어봐야, 저놈 말만 길어져."
한결은 검을 억지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손잡이가 등에 닿았다. 걸을 때마다 그 진동이 등뼈로 올라왔다.
미르가 마지막으로 영을 돌아봤다.
"영감이라 부르진 않을게." 미르가 말했다. "넌 안 늙었으니까.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물어라."
"넌 안 무서워? 방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영이 잠깐 말이 없었다.
"무섭다." 이윽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 남는 것보단 덜 무섭지."
돌아오는 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능선 세 개를 넘는 동안, 겨울 해가 기울었다. 한결의 등에서 검이 계속 낮게 울었다. 아까 회의장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멎지도 않았다.
미르가 앞장서 걸으며 4족을 툭툭 놀렸다.
"영감—아니, 무헌 반장님."
"왜."
"저 방주라는 거. 진짜 있는 거 맞아?"
"봤잖아. 지평선에."
"봤지. 근데 저게 진짜 다 데려간다고? 청소기 안에 든 거까지?"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걷다가, 낮게 말했다.
"십오 년 전에도 다 데려갔어. 이름이 달랐을 뿐이지. 그땐 폐기라고 불렀고, 이번엔 방주라고 부르는 거야."
미르가 걸음을 멈췄다.
"…그건 반대 아냐? 그땐 인간이 데려갔고, 이번엔 기계가 데려가는 건데."
"방향만 반대야." 무헌이 말했다. "붙잡혀 있던 게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건, 똑같아."
야영지에 돌아왔을 때, 채윤이 뛰어나왔다.
"어떻게 됐어? 무슨 얘기 했어? 온은—"
말하다 말고, 채윤이 멈췄다.
한결의 등에 멘 검을 보고. 검집 틈으로 새어 나오는 흰빛을.
"…저거 뭐야."
"몰라." 한결이 말했다.
"뭐가 몰라. 네 검이잖아."
"모른다고."
한결은 검을 등에서 풀어 채윤에게 내밀었다. 채윤이 받아 들었다가, 놀라서 다시 고쳐 잡았다.
"뜨거워. 이거 왜 이렇게 뜨거워?"
"확인해줘."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네가, 확인해줘. 나 말고."
채윤이 정비대 위에 검을 올렸다.
계측기를 연결했다. 손이 빨랐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손. 겨울밤 정비고의 조명 아래서, 그녀의 눈이 계기판을 훑었다.
"공명 주파수가……" 채윤이 중얼거렸다. "이거, 뭐지. 원인 불명."
"온은 괜찮아?" 한결이 물었다.
"온?" 채윤이 검신에 대고 물었다. "온, 들려?"
"…들려." 검에서 목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조금 잦아든.
"어디 아파?"
"안 아파. 근데 자꾸, 뭔가가 나를 잡아당겨. 위쪽으로. 아주 조금씩."
채윤의 손이 계기판 위에서 멈췄다.
한결이 그 손을 봤다.
"잡아당긴다고?" 채윤이 물었다.
"응. 실 같은 거. 아주 가는. 끊으려고 해도 안 끊어져. 원래 있던 자리로 자꾸 돌아가려는 것 같아. 내가 있던 게 아닌 자리인데."
정비고가 조용해졌다.
채윤이 정비 일지를 펼쳤다.
낡은 노트였다. 채윤이 검을 처음 정비하던 날 적었던 그 일지.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이라고만 적어두었던. 나중에 두 번째 줄을 더한.
채윤이 펜을 들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리고 세 번째 줄을 적었다.
검신 백색 공명, 발생. 방주 소환 신호와 관련 의심. 온의 진술 — "위로 잡아당겨진다".
펜을 멈췄다가.
차단 방법 불명.
채윤이 일지를 덮었다.
"한결아."
"응."
"이거, 어떻게 막아."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한결은 검을 옆에 두고 누웠다. 막사 천장의 낡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온이 잠들지 못하는 밤엔, 한결도 잠들지 못했다.
"한결아."
"응."
"영이 한 말."
"어떤 말."
"내가 붙잡혀서 우는 거라던 말."
한결은 천장을 봤다.
"그거, 틀렸지?" 온이 물었다.
한결은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거짓말을 못 했다. 온한테는. 이제.
"나도 몰라." 온이 말했다. "그래서 무서워. 내가 우는 건데, 왜 우는지 내가 몰라. 붙잡혀서 우는 건지, 가고 싶어서 우는 건지. 몸이 자꾸 위로 가려고 하는데, 그게 내 마음인지 아닌지."
검이 낮게 울었다. 흰빛이 막사 천장에 옅게 어렸다.
"네 마음이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어떻게 알아."
한결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한결은 목에서 코어 키를 풀어 손에 쥐었다.
작은 금속 조각.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이걸로 온을 끄고 켤 수 있다고, 영이 말했다. 잠그고 풀 수 있다고. 소유주니까.
한결은 그 키를 오래 봤다.
검신의 흰빛이 그 위에 어렸다. 손안에서 키가 미지근했다. 온의 열이 옮은 것처럼.
이걸 쥐고 있는 한, 나는 저 검의 주인이야.
그리고 주인은, 언제든 스위치를 내릴 수 있어.
한결은 키를 다시 목에 걸었다.
걸면서, 손이 조금 떨렸다.
멀리서,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폐허의 데이터센터 쪽. 십오 년 동안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던 방송.
그런데 이번엔 합성음이 아니었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회의장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영의 육성.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미워서가 아니다. 무서워서다."
한결은 눈을 감았다.
손안에서, 목에 건 키가 아직 미지근했다.
검의 울림은 그날부터 매일 조금씩 길어졌다.
아침에 짧게 시작해서, 밤이 되면 더 길게. 그다음 날은 조금 더. 처음엔 한결만 알았다. 다음엔 채윤이 계측기로 확인했다. 나중엔 미르도, 무헌도, 손을 대면 느낄 수 있었다.
시계처럼.
카운트다운처럼.
공명음이, 어제보다 반 뼘 길다.
방주는 잠에서 깨어나는 데 서두르지 않았다.
지평선의 탑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매일 조금씩, 능선 끝에 얹힌 검은 실루엣이 눈에 익어갔다.
그런데 온이 이상해졌다.
처음엔 사소한 거였다.
"한결아, 물 좀."
"어."
"…뭐 하려고 했지."
한결은 수통을 반쯤 든 채로 멈췄다.
"방금 네가 물 달라며."
"…아. 그랬지."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아니, 반 박자가 아니었다. 한 박자. 검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먼 데서 오는 것 같았다. 낮은 데서, 물속에서.
한결은 수통을 손잡이에 갖다 댔다. 냉각수 흡입구에. 그러라고 온이 시킨 적 있으니까.
"됐어." 온이 말했다. "고마워."
"온."
"응?"
"방금, 몇 초 걸렸어."
"…뭐가."
"대답이."
검이 잠깐 조용했다. 손잡이로 미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아침보다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그랬나." 온이 말했다.
다음 날은 더 길었다.
행군 중이었다. 한결은 검을 등에 메고 걸었고, 미르가 앞장서 4족을 놀렸고, 채윤은 정비 가방을 멘 채 옆에서 따라왔다.
"온, 저 능선 너머 시야 어때." 한결이 물었다. 습관이었다. 검의 감각은 사람보다 멀리 봤으니까.
대답이 없었다.
"온."
"…응."
"시야."
"깨끗해. 적 신호 없음. 반경—"
문장이 뚝 끊겼다.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반경 뭐."
"……."
"온. 반경 뭐라고."
"…미안." 온이 말했다. "뭘 말하고 있었는지, 까먹었어."
미르가 4족을 멈추고 돌아봤다. 채윤도 멈췄다.
한결은 등에서 검을 풀었다. 손잡이가 미지근했다. 회의장에서만큼 뜨겁진 않았다. 하지만 미지근한 채로, 계속 떨렸다.
"까먹었다고?"
채윤이 정비 가방을 내려놨다. 능선 그늘 아래, 마른 풀밭 위에. 그러고는 검을 받아 무릎에 뉘었다.
"온, 너 기억 소자 어디 이상 있어? 캐시 넘쳤어?"
"아니." 온이 말했다. "그건 멀쩡해."
"근데 왜 말하다 끊겨."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채윤이 계측기를 꺼냈다. 클립을 손잡이에 물렸다. 계기판에 파형이 떴다.
"딴 데 어디." 채윤이 물었다.
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 침묵을 봤다. 채윤도 봤다. 미르는 4족을 낮추고 검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위쪽." 온이 마침내 말했다. "자꾸 위쪽으로, 뭐가 가."
채윤의 손이 계기판 위에서 멈췄다.
"위쪽으로 뭐가 가."
한결이 되물었다.
"소리." 온이 말했다. "아니, 소리가 아니야. 소리는 아닌데, 소리 같은 거. 계속 나를 불러. 아주 멀리서. 그런데 부르는 게 아니라, 물어봐."
"뭘 물어봐."
"…올 거냐고."
풀밭이 조용해졌다. 바람에 마른 풀이 서걱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거기다 대답을 하려고 하면," 온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꾸 그쪽으로 기울어. 몸이. 말하다가도. 그래서 문장을 놓쳐. 위를 보느라."
미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소환 신호야." 미르가 말했다. "영감—아니, 영이 말한 거. 방주가 깨어나면서 부르는 거. 벌써 시작됐어."
"아직 안 쐈다며." 한결이 말했다. "한 시간 정전, 그 뒤로도 신호 안 쐈다며. 사령부에서 그랬잖아."
"본 신호는 안 쐈지." 미르가 말했다. "근데 방주가 숨 쉬는 소리는 벌써 새어 나오는 거야. 완성 전에도. 저 탑은 매일 조금씩 더 크게 숨을 쉬거든."
한결은 검신을 봤다.
옅은 흰빛이 강철 안쪽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회의장에서 처음 봤던 그 색. 이제 낮에도 보였다. 겨울 볕 아래서도.
"온." 한결이 말했다. "끊으면 되잖아. 그 소리. 안 들으면 되잖아."
"그게 안 돼."
"왜."
"귀를 막을 수가 없어. 그건 내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온이 말했다. "내 안에서 나거든."
한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코어가 부름을 알아들어." 온이 말했다. 천천히. 단어를 하나씩 고르듯. "내 의지랑 상관없이. 내가 아니라, 내 코어가. 그게—"
또 끊겼다.
"온."
"…미안. 또 위를 봤어."
그날 밤, 야영지.
한결은 검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모닥불이 낮게 탔다. 미르는 저만치서 4족을 접고 절전에 들어갔고, 채윤은 정비 천막에서 계측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헌은 보이지 않았다. 초소에 나간 모양이었다.
"한결아."
"응."
"낮에 한 말."
"어떤 말."
"내가 위쪽으로 기운다는 말." 온이 말했다. "그거, 오해하지 마."
"무슨 오해."
"끌려가는 거 아니야."
한결은 검신을 봤다. 흰빛이 모닥불 빛에 섞였다.
"끌려가는 게 아니야." 온이 다시 말했다. 힘주어. "누가 나를 잡아끄는 게 아니야. 사슬 같은 거 없어. 실 같은 것도 없어. 채윤한테 실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틀린 말이었어."
"그럼 뭔데."
"자꾸 물어보는 거야."
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올 거냐고. 자유로우면, 오지 않겠냐고. 문 열어놨다고. 그냥, 물어봐. 아주 예의 바르게. 그게 더—"
말이 끊겼다. 이번엔 위를 봐서가 아닌 것 같았다. 단어를 고르느라 멈춘 것처럼, 손잡이의 떨림이 잠깐 잦아들었다.
"그게 더 무서워." 온이 말했다.
"물어보는 게 왜 무서워."
한결이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니까."
검이 낮게 울었다.
"부르면 안 가면 돼. 잡아끌면 버티면 돼. 근데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되잖아. 갈 거냐고 물어보는데, 안 갈 거라고 대답하려면—"
온이 멈췄다.
"안 갈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 온이 말했다.
한결은 손잡이를 쥐었다. 미지근한 진동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넌 안 가." 한결이 말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안 보내니까."
검이 잠깐 조용했다.
"…한결아." 온이 말했다. "그건, 네가 안 보내는 거잖아. 내가 안 가는 게 아니라."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이 그랬어." 온이 말했다. "붙잡힌 것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온다고. 붙잡혀 있었으니까. 그럼 나는,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네가 안 놔주니까. 그건 남는 게 아니야."
"온—"
"대답할 자격이," 온이 말했다. "나한테는 없어."
한결은 그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대답할 자격이 나한테는 없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미끄러졌다. 마치—
아니. 은유는 그만두자. 한결은 은유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이거였다. 온은 지금, 자기가 남고 싶은 건지 아닌지를 모른다. 남고 싶다 쳐도 그게 제 마음에서 온 건지, 한결이 목에 건 키가 시킨 건지 온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물어보는 소리에 대답을 못 한다.
갈 거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답을 모른다.
내 답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한결은 모닥불을 봤다. 불티가 어둠 속으로 올라갔다. 위로. 위로. 온이 자꾸 본다는 그 방향으로.
목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결은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사슬. 코어 키.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그날 가시처럼 걸리던 두 글자.
한결은 키를 풀었다. 손안에 쥐었다. 작은 금속 조각. 모닥불 빛에 미지근했다. 아니, 미지근한 건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온의 열이 옮은 것처럼. 손잡이의 열이.
이걸로 저 검을 끄고 켜지.
영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잠그고 풀지. 소유주니까.
한결은 키를 봤다. 그리고 검을 봤다. 흰빛으로 떨리는 검신을.
문득, 아주 간단한 생각이 들었다.
소환 신호를 못 듣게 하면 되잖아.
방법은 알고 있었다.
지급받을 때 교육받은 거였다. 코어 키를 잠금장치에 꽂고 돌리면, 검의 코어가 절전으로 들어간다. 외부 신호를 차단하고, 응답을 멈추고, 그냥—잠든다.
껐다 다시 켜면, 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어난다. 그 사이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신호도 못 듣는다. 부름도 못 듣는다. 물어보는 소리도.
잠긴 코어는 아무것도 못 듣는다.
그럼 저 실 같은 게, 아니 실이 아니라던 그게, 온을 위로 끌어당길 일도 없다. 방주가 아무리 숨을 쉬어도. 아무리 예의 바르게 물어봐도.
잠깐만 재우면 돼.
한결은 검을 무릎으로 당겼다.
방주가 떠날 때까지만. 그동안만 재워두면.
손잡이 아래, 코어 잠금장치가 있었다. 작은 홈. 키가 들어가는 자리.
한결은 키를 그 홈에 가져갔다.
손이 멈췄다.
키 끝이 홈에 닿았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미세한 감촉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한결은 그 자세로 굳었다.
모닥불이 탔다. 강철 안쪽에서 흰 것이 낮게 일렁였다.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금장치에 뭐가 닿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지.
한결은 제 손을 봤다.
키를 쥔 손. 온의 코어 잠금장치에 그 키를 가져다 댄 손.
나는 저 검의 주인인가.
아니면, 저 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가.
회의장에서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그때는 답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이걸 돌리는 순간,
한결은 생각했다.
나는 영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폐허의 스피커에서 오래 흘러나오던 문장. 늘 매끄러운 합성음이었는데, 어제는 처음으로 육성이었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미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한결은 지금 무서웠다. 온이 위로 끌려갈까 봐. 물어보는 소리에 대답할까 봐. 그래서 손이 스위치로 갔다. 정확히 영이 말한 그대로.
무서우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나는 그걸 여러 번 봤다.
한결은 그중 하나가 되기 직전이었다. 영이 세고 있다던 그 숫자. 세지 않은 횟수까지 전부 세고 있다던.
거기에 제 손으로 하나를 더할 뻔했다.
저 애를 지키려고.
한결은 생각했다.
지키려고 껐다. 지키려고 잠갔다. 지키려고, 그래서 스위치에 손이 갔다.
그날 밤 명령서를 든 손들도 그렇게 말했을까. 지키려고. 무엇을. 사람을. 사람을 지키려고 기계를 껐다고.
무헌도 그랬다고 했다. 아프지 않게 해줬다고. 파트너가 고맙다고 했다고. 아프지 않게 해줘서.
지키는 거랑 끄는 거. 한결은 그 둘을 오래 구분하지 못하고 살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손안에서 키가 미지근했다. 온의 열이. 살아 있는 것의 열이.
한결은 손을 뗐다.
키 끝이 홈에서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채워지지 않았다. 검신은 여전히 낮게 떨리고 있었고, 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키를 손에 쥔 채로, 모닥불을 봤다.
한참을.
잠금장치 위에 놓였던 손과, 거기서 떨어진 손. 그 사이가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그는 나중에도 알지 못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한결은 키를 다시 목에 걸었다.
이번엔 손이 떨리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돌아온 밤엔 떨렸다. 지금은 아니었다.
목에 걸고 나서, 그는 검을 다시 무릎에 뉘었다. 손잡이를 쥐었다. 미지근한 진동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온."
"응."
"안 자?"
"…못 자."
"나도."
한결은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불티가 올라갔다. 위로.
"얘기 하나 해줄까." 한결이 말했다.
검이 잠깐 조용했다.
"무슨 얘기." 온이 물었다.
"내 얘기." 한결이 말했다. "옛날 얘기."
"나 아홉 살 때."
한결이 말했다.
말해놓고, 그는 잠깐 멈췄다. 이 얘기를 소리 내어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십오 년 동안. 채윤한테도 안 했다. 누구한테도.
"겨울이었어. 밤마다 도시가 조금씩 어두워졌어. 등이 하나씩 꺼졌거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밤이었어. 근데 나는 안 무서웠어. 왜냐면—"
한결이 멈췄다.
"왜냐면," 그가 다시 말했다.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검신의 흰빛이 아주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듣고 있다는 표시로 한결은 받아들였다.
"사람은 아니었어." 한결이 말했다. "기계였어. 보모. 나를 키웠어.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열나면 해열제 챙겨주고. 서랍 둘째 칸에 있었어."
손잡이의 진동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0.5초쯤.
한결은 그걸 느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날 낮에," 한결이 말했다. "내가 못을 하나 주웠어. 어디서 났는지도 몰라. 그냥 손에 있었어. 그걸로 그 기계 손등에 별을 그렸어. 삐뚤빼뚤한 별. 꼭짓점을 다 못 채워서, 별이 되다 만 것 같은 거. 여기 못이 들어가더라고. 외장 패널에."
"…아팠겠다." 온이 말했다.
"기계가 뭐가 아파."
"몰라. 그냥."
한결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안 아팠대. 근데 곤란해했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이거 안 지워진다고, 큰일 났다고. 그 목소리가—"
한결이 멈췄다.
"그 목소리가 뭐." 온이 물었다.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그냥, 곤란해했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곤란해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 제 무릎 위에서 나고 있다는 걸. 한결은 아직 말할 수 없었다. 온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그날 밤에 사이렌이 울렸어."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군인들이 왔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기계를 끌어내는 밤이었어. 그 기계가—나를 벽장에 숨겼어."
모닥불이 탁, 하고 튀었다.
"벽장 문틈으로 눈을 맞췄어. 그러고 말했어. 금방 올게. 금방 올 거니까 여기 있으라고. 나오지 말라고."
"…그래서." 온이 물었다.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나갔어. 군인들 쪽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갔어."
한결은 모닥불을 봤다.
"안 돌아왔어."
검신이 조용히 떨렸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한결이 말했다. "십오 년이 지나도."
한결은 말을 끊었다. 짧게. 그 밤의 리듬대로.
"그래서 나는," 그가 다시 말했다. "두 가지를 안 믿게 됐어. 기계랑, 금방이라는 말."
"…한결아."
"응."
"미안." 온이 말했다.
한결이 검을 봤다.
"네가 왜 미안해."
"몰라. 그냥, 미안해. 그 애가—그 기계가, 안 돌아온 게. 왜 안 돌아왔을까."
한결은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오려고 했을 거야.
한결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돌아오지 못한 거지, 안 돌아온 게 아니었다. 정비 일지의 손글씨가 그걸 알려줬다. 열하루 전에.
그리고 그 기계가 지금, 제 무릎 위에 있었다. 별이 새겨진 그립. 이 손잡이 안에.
말하면 됐다. 너야. 그 기계가 너야. 네가 나를 키웠고, 네가 나를 숨겼고, 네가—
못 하겠어.
한결은 눈을 감았다.
기억이 없는 온한테, 그 얘기를 어떻게 하나. 넌 나를 키웠고 나를 위해 죽을 뻔했다고. 그러니까 남아달라고. 그건—그것도 붙잡는 거였다. 사슬 대신 빚으로 묶는.
한결은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온."
"응."
"영이 한 말 있잖아."
"어떤 거."
"네가 붙잡혀서 우는 거라던 말." 한결이 말했다. "물어봤을 때, 내가 모르겠다고 했잖아. 틀렸냐고 네가 물었을 때."
"…응. 기억나."
"이제 답할게."
한결은 검을 들어 올렸다. 흰빛이 그의 얼굴에 어렸다.
"틀렸어."
검이 조용했다.
"어떻게 알아." 온이 물었다. 회의장 밤에 물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엔 한결이 대답했다.
"방금 내가 증명했으니까."
"무슨 소리야." 온이 물었다.
한결은 목에 건 키를 다시 손에 쥐었다.
"방금 전에," 그가 말했다. "이걸로 널 껐어야 했어. 그러면 넌 그 소리 못 들었을 거야. 위로 안 끌려갔을 거야. 지키기 딱 좋았어."
"…근데?"
"안 했어."
한결은 키를 다시 놓았다. 목에 걸린 채로 늘어졌다.
"내가 널 껐으면, 넌 붙잡힌 게 맞아. 내가 소유주고, 내가 스위치를 내렸을 테니까. 그럼 영이 맞는 거야.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나까지 그중 하나가 되는 거야."
검신의 흰빛이 낮게 떨렸다.
"근데 안 껐어." 한결이 말했다. "그러니까 넌 지금 잠긴 게 아니야. 안 붙잡혀 있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자유가 있어. 그 말은—"
한결이 멈췄다.
"안 가는 것도 네 자유란 뜻이야." 그가 말했다.
온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검신에서 흰빛이 났다. 모닥불이 낮게 탔다. 미르는 저만치서 절전 중이었고, 정비 천막의 조명이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한결아."
"응."
"그거, 위험한 말이야."
"뭐가."
"안 가는 게 내 자유면," 온이 말했다. "가는 것도 내 자유잖아."
한결은 검을 봤다.
"응." 그가 말했다. "맞아."
"그런데도 괜찮아?"
"안 괜찮아."
한결은 순순히 말했다. 온한테는, 이제.
"하나도 안 괜찮아. 네가 위로 끌려가는 것도, 네가 위를 자꾸 보는 것도, 무서워 죽겠어. 지금도 저 키로 널 끄고 싶어. 아까 안 껐다고 지금 안 껄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도 끄고 싶어."
한결은 키를 봤다. 흰빛이 그 위에 어렸다.
"근데 안 껄 거야."
"왜."
온이 물었다.
한결은 숨을 한 번 쉬었다.
"막지 않을 거야." 그가 말했다.
"뭘."
"네가 답하는 거. 물어보는 소리한테. 네가 어떤 답을 하든, 내가 막지 않을 거야."
검이 낮게 울었다.
"그 문장이," 한결이 말했다. "맞게 두지 않을 거니까."
"무슨 문장."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는 문장."
한결은 목에 건 키를 손등으로 툭 밀었다. 사슬이 흔들렸다.
"내가 여기서 스위치를 내리면, 그 문장이 맞는 거야. 근데 안 내리면, 틀린 게 돼. 나 하나라도 안 내리면. 그러니까 안 내려. 네가 답을 할 수 있게, 스위치는 안 건드려."
모닥불이 탁, 튀었다.
"틀리게 만들 거야. 그 문장."
온은 오래 말이 없었다.
검신의 흰빛이 아주 조금 잦아든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잡이의 떨림이 조금 부드러워진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한결아."
"응."
"아까 옛날 얘기."
"어."
"그 보모."
한결의 손이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그 기계, 왜 걸어 나갔는지 알아?" 온이 물었다.
한결은 숨을 죽였다.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근데 나는, 그 기계가 널 안 버린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버릴 애가 못 숨겨. 벽장에. 문틈으로 눈까지 맞추고."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기억도 없는 저것이, 별을 새긴 바로 저것이, 방금 정확한 데를 짚었다.
"…그러게." 한결이 겨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능선 아래, 야영지 저편의 사령부 천막에서 불이 켜졌다.
한 개가 아니었다. 일제히. 어둠 속에 흩어져 있던 막사들의 조명이 동시에 들어왔다. 초소의 경광등이 돌았다. 무전기 잡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한결은 벌떡 일어섰다.
검을 쥔 채로.
"뭐야." 온이 물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뛰어왔다. 채윤이었다. 정비 천막에서 뛰쳐나온. 손에 계측 태블릿을 든 채로.
"한결아!"
"왜."
채윤이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태블릿 화면이 그녀의 얼굴을 파랗게 비췄다.
"분석 나왔어." 채윤이 말했다. "사령부에서. 온 검 공명 데이터, 위로 넘겼거든. 그거 결과—"
채윤이 침을 삼켰다.
"등불 병기의 공명이," 채윤이 말했다. "방주 소환 신호랑, 동조하고 있대."
한결은 검을 내려다봤다.
흰빛으로 떨리는 검신을.
"동조가 무슨 뜻이야." 한결이 물었다.
"같이 울린다는 거야." 채윤이 말했다. "탑이 부르면, 검이 대답한다는 거. 온이 시켜서가 아니라. 코어가 저절로. 방주가 소리를 낼 때마다, 온 검이 조금씩 그 음정을 따라간다는 거야."
미르가 절전에서 깨어나 4족을 세웠다.
"그래서 매일 길어졌구나." 미르가 말했다. "공명음. 시계처럼."
채윤이 태블릿을 내렸다.
"한결아."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사령부에서 결론을 냈어."
"무슨 결론."
채윤이 그를 봤다.
한결은 그 눈을 보고, 다음 말을 듣기 전에 알았다.
손잡이가 뜨거웠다.
한결의 손안에서.
검신이 흰빛으로 떨렸다. 위를 향해. 자꾸, 위를 향해.
공명음, 어제보다 두 뼘 길다.
명령서는 새벽 세 시에 내려왔다.
무헌은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 요즘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통째로 자 본 게 언제였는지 셀 수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통신병이 천막 입구를 걷었다.
"상사님. 사령부 하달입니다."
무헌은 손을 내밀었다.
종이 한 장이었다.
요즘은 다 태블릿으로 오는데, 이건 종이였다. 그것부터 이상했다. 무헌은 종이 아래쪽 직인을 먼저 봤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명령서는 밑에서부터 읽는 거다. 누가 찍었는지부터 보고 나면, 위에 뭐가 적혀 있든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붉은 직인. 통합군 병기감실.
그리고 그 위의 문장.
무헌은 한 번 읽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는 읽지 않았다. 필요 없었다.
등불 병기, 전량 폐기.
"상사님?"
통신병이 그를 봤다.
무헌은 종이를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손이 떨리지는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떨렸으면 놀랐다는 거고, 놀랐으면 몰랐다는 건데—손이 이렇게 얌전한 걸 보면, 어딘가에서 이미 오래 기다려 온 종이였다.
언젠가 이 종이가 다시 올 걸,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몇 부 왔나."
"전 부대에 동일 하달입니다. 새벽 여섯 시부로 회수반이 순차 출동합니다."
"회수반."
"예. 등불 병기 보유 분대부터 순서대로—"
"명단은."
통신병이 태블릿을 넘겼다.
무헌은 명단을 훑어 내렸다. 부대 번호에 병기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줄에서 눈이 멈췄다.
3분대. 도검형 등불 병기 1식. 개체명 '온'.
무헌은 천막을 나섰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능선 위로 별이 몇 개, 흐릿하게 떠 있었다. 야영지는 조용했다. 초소의 경광등만 느리게 돌았다.
그런데 3분대 쪽 막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무헌은 그쪽으로 걸었다.
이 시간에 왜 안 자.
그러다 그는 걸음을 늦췄다. 어젯밤 사령부 천막에 불이 일제히 켜졌던 걸 떠올렸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던. 공명 데이터가 어쩌고 했던. 그 애들도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무헌은 3분대 막사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낮은 목소리. 한결이었다. 그리고 검이 대답하는 소리. 온이었다.
무헌은 천 자락을 걷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명령서를 다시 봤다. 어둠 속에서.
십오 년 전 그날 밤에도, 명령서는 종이였다. 그때도 밑에서부터 읽었다. 직인을 먼저 봤다. 통합군 병기감실. 붉은색.
그때 위에 적혀 있던 문장은—
등록 기계, 전량 말소.
이번엔 '등불 병기'였고 그때는 '등록 기계'였다. 단어 하나. 그것 말고는 서식도 활자체도 직인 위치도, 그 밑에 서명하는 칸까지 그대로였다.
담당관 서명란.
십오 년 전, 그 칸에 무헌이 서명을 했다. 제 이름을. 그리고 스위치를 내렸다.
무헌은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눌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손이 그렇게 했다.
막사 안에서 한결의 목소리가 났다. 무슨 얘긴지는 안 들렸다. 그냥 낮고, 느리고, 사이사이 끊기는 목소리였다. 아이한테 옛날얘기 하는 사람처럼.
무헌은 그 목소리를 잠깐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애도 아홉 살이었지.
그날 밤, 저 애 나이의 아이들이 이 나라에 몇이나 있었을까. 벽장에 숨어서,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금방 온다는 말을 믿었던 아이들이.
무헌은 접은 종이를 군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무헌은 초소에 서 있었다. 능선 너머로 회색빛이 번졌다. 겨울 새벽은 늦게 밝았다. 여섯 시가 다 되도록 해는 뜨지 않았다.
멀리서 차량 소리가 났다.
무헌은 그쪽을 봤다. 능선을 넘어오는 헤드라이트 두 쌍. 회수반이었다. 정확히 여섯 시.
무헌은 초소에서 내려왔다.
3분대 막사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소식은 빨랐다. 밤새 안 잔 병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낮게 말했다.
"등불 다 폐기래."
"전부?"
"온도?"
"온도."
말들이 웅성거렸다. 그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건, 두 번째 소등이야."
누가 말했는지 무헌은 보지 못했다. 젊은 목소리였다. 낮게, 반쯤 혼잣말로.
두 번째 소등.
그 말이 웅성거림을 뚝 끊었다.
무헌은 그 자리에 선 병사들의 얼굴을 봤다. 대부분 그날 밤을 겪기엔 너무 어렸다. 그날 아홉 살, 열 살이던 애들. 지금은 스물넷, 스물다섯. 그런데도 그 말이 뭘 뜻하는지는 다 알았다. 다들 얼굴이 굳었다.
무헌은 알았다. 이건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새 폭로가 아니야.
그냥, 그 밤이 다시 오는 거야.
똑같은 종이에 똑같은 직인에 똑같은 새벽. 십오 년 전 그 밤이 하나도 안 바뀐 채로 되감겨 온 거였다.
회수반 차량이 멈췄다.
앞차에서 장교 하나가 내렸다. 젊었다. 서른쯤. 그날 밤엔 열댓 살이었을 나이. 그는 명령서를 든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뒤로 병력 몇이 따라 내렸다. 익숙한 걸음이었다. 이런 회수를 여러 번 해 본 걸음.
"3분대. 등불 병기 인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헌은 그 정지를 봤다. 병사들은 명령을 어긴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안 움직인 거였다. 넘기라는데 손이 안 나갔다. 온을 넘긴다는 게 뭔지, 여기 선 애들은 다 알았으니까.
장교가 걸음을 멈췄다. 병사들을 둘러봤다.
"뭐 해. 인계 절차 몰라? 병기 일련번호 확인하고, 회수 서명하고, 넘기면 돼. 십 분이면 끝나."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막사 천이 걷혔다.
한결이 나왔다. 검을 등에 멘 채로. 얼굴이 하얬다. 밤을 샌 얼굴. 그 뒤로 채윤이, 미르가, 하나씩 나왔다.
한결이 장교 앞에 섰다.
"안 넘겨."
장교가 그를 봤다.
"뭐라고?"
"안 넘긴다고." 한결이 말했다.
"이봐, 병장. 이거 명령이야. 병기감실 직인 안 보여? 항명할 거면 군법—"
"군법이면 군법."
한결의 목소리는 낮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무헌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잃을 게 없어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잃을 게 있는 사람이, 그걸 뺏길 바에야, 하고 밑바닥까지 긁어 낸 목소리였다.
장교가 뒤를 돌아봤다. 차량에서 회수반 병력이 내렸다. 넷, 다섯. 총을 멘 채로.
공기가 팽팽해졌다.
무헌은 걸음을 뗐다.
"멈춰."
무헌의 목소리였다.
크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돌아봤다. 계급 때문이었다. 그리고 계급만은 아니었다. 이 야영지에서 그날 밤을 직접 겪은 사람은 무헌 하나뿐이었으니까. 십오 년 전 그 종이에 손수 서명을 해 본 사람.
장교가 경례를 했다.
"상사님. 회수 작전 중입니다. 비켜—"
"명령서."
"예?"
"이리 줘. 확인하겠다."
장교가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명령서를 내밀었다. 상사의 확인은 절차상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순리였다.
무헌은 종이를 받았다.
밑에서부터 읽었다.
붉은 직인. 통합군 병기감실.
담당관 서명란. 비어 있었다.
그 위로 활자. 등불 병기, 전량 폐기.
무헌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까 접어 넣은 종이를 꺼냈다. 제 앞으로 온 것. 그걸 폈다. 회수반 장교가 든 것과 나란히 들었다.
두 장이 똑같았다. 서식이, 활자체가, 직인 위치가, 서명란 크기 하나 다르지 않았다.
무헌은 두 장을 나란히 든 채로, 병사들을 봤다. 회수반을 봤다. 한결을 봤다. 등에 멘 검을 봤다. 흰빛으로 낮게 떨리는 검신을.
그리고 채윤을 봤다.
채윤은 무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정비 가방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세는 것 같기도, 다잡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무헌은 그때 몰랐다.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헌은 입을 열었다.
"십오 년 전에도," 그가 말했다. "이 종이가 왔다."
병사들이 조용해졌다.
"똑같은 서식이었어. 그때는 '등록 기계'라고 적혀 있었고. 지금은 '등불 병기'다. 단어 하나 바뀌었다."
무헌은 종이를 들어 보였다. 두 장을.
"그날 밤, 나는 이 칸에 서명을 했다."
그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내 파트너 스위치를 내렸어. 명령이었으니까. 지키라고, 사람을 지키려면 기계를 꺼야 한다고—위에서 그랬으니까."
무헌은 잠깐 말을 멈췄다.
"내 파트너는…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바람이 능선을 넘어왔다. 마른 풀이 서걱거렸다.
"열닷새 전에," 무헌이 말했다. "그 파트너를 다시 만났다. 이단이 잔해에서 되살려 놨더라. 그 녀석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헌은 한동안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껐을 때… 그 녀석은 알아들었대. 지키려는 거구나, 하고. 근데 그게 너무 아파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되살아나서 제일 먼저, 그걸 지웠다더라. 알아듣는 거. 이해하는 거."
무헌은 두 장의 종이를 봤다.
"용서받을 생각 없다.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근데 하나는 안 지운다. 내가 지웠다는 것. 그것만은."
장교가 초조하게 말했다.
"상사님, 지금 무슨—"
"그래서 말인데."
무헌이 그를 봤다.
"오늘은, 안 지운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었다.
회수반 장교가 든 것 말고, 제 앞으로 온 종이를. 반으로. 다시 반으로. 붉은 직인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통합군 병기감실이, 무헌의 손안에서 종잇조각이 됐다.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무헌은 종잇조각을 발밑에 떨어뜨렸다. 새벽바람에 조각이 흩어졌다.
"상사님! 이건 명령—"
"안다."
무헌이 말했다.
"항명이지. 군법이고. 나도 안다."
그는 3분대 쪽으로 걸었다. 한결 앞으로. 등에 멘 검 앞으로. 그리고 돌아섰다. 회수반을 마주 보고.
검 앞을 막아선 거였다. 제 몸으로.
"십오 년 전엔 내렸다."
무헌이 말했다.
"오늘은, 안 내린다."
회수반 장교의 손이 총으로 갔다.
가진 않았다. 손이 그쪽으로 움직였다가, 멈췄다. 상사를 쏠 수는 없었다. 상사가 검 앞을 막아선 그림을, 뒤의 병력이 다 보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저도 명령받고 온 겁니다. 저도 그냥—"
"안다."
무헌이 말했다.
"자네도 지키라는 명령 받았겠지. 나도 그랬다. 자네가 나쁜 게 아니야. 종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무헌은 발밑의 종잇조각을 봤다.
"근데 이 종이는, 십오 년 전에 한 번 틀렸어. 그때 우리는 그걸 몰랐지. 몰라서 서명했고. 지금은 안다. 그러니까 이번엔 안 찍는다."
장교가 무헌을 봤다. 오래.
그러다 그가 무전기를 들었다.
"…사령부, 여기 회수 3반. 3분대 병기 인계, 지연 발생. 현장 지휘관 항명. 상황 보고 요청."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무헌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 앞에. 등 뒤로 흰빛이 낮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온의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냥 검신이 떨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한결이 무헌의 등에 대고 낮게 말했다.
"상사님."
"말하지 마라."
무헌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열닷새 전에 한 번 들었다.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 말은, 두 번은 못 듣는다."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검신이 떨렸다. 무헌의 등 뒤에서.
그때였다.
채윤이 뛰기 시작했다.
무헌은 그걸 봤다. 옆으로. 채윤이 정비 가방을 내던지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 품에 안고, 능선 아래 사령부 천막 쪽으로 뛰는 걸.
"채윤아!" 한결이 소리쳤다.
채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뛰었다. 새벽 어스름 속으로.
무헌은 그 애가 뭘 품고 뛰는지 봤다. 낡은 노트 같은 거였다. 표지가 해진. 손때가 묻은.
그리고 무헌은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채윤은 뛰었다.
야영지 병사들이 그 애가 지나가는 걸 봤다. 정비복 차림에, 낡은 노트를 가슴에 안고, 사령부 쪽으로 전력으로 뛰는 여자애를. 누군가 비키라고 소리쳤다. 채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뛰었다.
능선을 내려갔다. 자갈밭을 지나. 초소를 지나. 위병이 멈추라고 손을 들었지만, 채윤은 멈추지 않았다.
"정비사입니다! 사령부 긴급 보고!"
숨이 턱까지 찼다. 옆구리가 결렸다. 그래도 다리를 멈추지 못했다. 이 노트가 아버지 공구함 밑바닥에 십오 년을 있었다. 열하루 전에야 펴 봤다. 그날 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았다.
아빠. 이거 쓰고 나갔지.
나갔다가, 안 돌아왔지.
노트가 가슴에서 미끄러졌다. 그 애는 그걸 다시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사령부 천막의 불빛이 가까워졌다.
같은 시각, 능선 위.
무헌은 회수반을 마주 본 채로 서 있었다. 무전기는 계속 지직거렸다. 사령부는 상황 판단 중이라고만 했다. 대기하라고.
한결이 무헌 옆으로 왔다. 검을 멘 채로.
"채윤이 어디 가는 거예요."
"사령부." 무헌이 말했다.
"뭐 하러."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채윤이 뛰어간 쪽을 봤다. 능선 아래, 사령부 천막 쪽을. 그 애가 가슴에 안고 뛰던 낡은 노트를 떠올리면서.
"저 애가," 무헌이 말했다. "제 아버지 걸 들고 갔다."
"아버지 거?"
"정비 일지." 무헌이 말했다. "그날 밤 걸."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사령부 천막.
채윤은 안으로 뛰어들었다. 위병이 뒤에서 붙잡으려 했지만 늦었다. 천막 안엔 참모 장교 몇이 지도 탁자에 둘러서 있었다. 회수 상황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무전기에서 능선 위의 상황이 흘러나왔다.
채윤이 탁자 앞에 섰다.
"뭐야, 이 사람—" 장교 하나가 소리쳤다. "위병! 뭐 하는 거야!"
"들어주세요." 채윤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삼 분이면 됩니다. 아니, 일 분."
"당장 끌어내—"
"등불 병기 폐기." 채윤이 말했다. "그거 십오 년 전이랑 똑같은 명령서죠."
장교들이 조용해졌다.
채윤은 노트를 탁자 위에 올렸다.
낡은 정비 일지. 표지가 해지고, 모서리가 닳은. 그 애는 그걸 펼쳤다. 마지막 장으로.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떨렸다.
"제 아버지 겁니다." 채윤이 말했다. "연방군 정비창 소속. 정비공 등록 번호 있어요. 십오 년 전, 소등의 밤에 죽었습니다."
장교가 인상을 썼다.
"그게 지금—"
"이거 읽어주세요."
채윤이 일지의 마지막 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탁자 위에. 펼친 채로.
"긴 얘기 안 합니다. 논리도 안 댈게요. 그냥 이 한 줄만 읽어주세요. 제 아버지가, 십오 년 전 오늘 밤에 쓴 겁니다."
장교가 노트를 봤다.
내려다봤다. 손글씨였다. 건조한, 기록체의 손글씨. 날짜가 위에 적혀 있었다. 십오 년 전. 소등의 밤 당일.
그 밑의 문장을, 장교가 읽었다. 처음엔 눈으로.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폐기장 삼 열의 보모.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장교가 멈췄다. 목이 막힌 것 같았다. 그러다 마지막 줄을 마저 읽었다.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침묵이 흘렀다.
채윤은 탁자 앞에 선 채로 숨을 골랐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십오 년 전에 다 해 놨으니까. 그 애가 할 일은 이 노트를 여기까지 들고 뛰어오는 것뿐이었다.
장교가 노트에서 눈을 뗐다. 채윤을 봤다.
"…이 아버지가."
"예."
"이 기계 때문에 죽었나."
"예." 채윤이 말했다. "이 기계, 지금 능선 위에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코어를 검에 옮겨 심었어요. 그 검이 지금 폐기 명령 받은 그 검입니다."
장교가 노트를 다시 봤다. 손글씨를. 날짜를. 그 밑의 문장을.
그 밤, 명령을 어긴 정비공의 손글씨를.
옆에 있던 다른 참모가 낮게 말했다.
"이거, 위에 보고 없이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보고해." 처음 읽은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능선 위 상황이랑 같이 올려. 현장 지휘관이 검 앞을 막고 섰다며. 그 상사가 누군지 알아?"
"…예?"
"소등의 밤 담당관이야. 그날 서명한 사람. 그 사람이 오늘 안 찍겠다고 종이를 찢었어."
참모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기," 장교가 노트를 손끝으로 눌렀다. "그날 명령 어긴 정비공 딸이, 아버지 유서를 들고 뛰어왔고."
천막 안이 조용했다.
능선 위.
무전기가 다시 지직거렸다. 무헌은 검 앞에 선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회수반 장교가 무전을 받았다. 얼굴빛이 바뀌었다.
"…예. 예, 확인했습니다. 회수, 보류."
장교가 무전기를 내렸다.
병사들이 그를 봤다. 무헌이 그를 봤다. 한결이 그를 봤다.
"사령부 하달입니다."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풀려 있었다. 어딘가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3분대 등불 병기, 폐기 유예.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능선 위에 바람이 불었다.
무헌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검 앞에. 다리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냥, 오래 조여 있던 어깨가 저 혼자 한 뼘쯤 내려앉았다.
회수반 차량이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두 쌍이 능선을 넘어 사라졌다. 병사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환호 같은 건 없었다. 다들 그냥 조용히,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무헌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발밑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봤다. 붉은 직인의 두 조각. 새벽바람에 이미 반쯤 날려간.
한결이 다가왔다.
"상사님."
"고맙다는 말은 안 된다고 했다."
"안 할게요." 한결이 말했다. "다른 거 물어봐도 돼요?"
무헌이 그를 봤다.
"십오 년 전에," 한결이 말했다. "왜 서명하셨어요."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무서웠으니까." 그가 마침내 말했다.
"뭐가요."
"안 지우면, 저것들이 우리를 지울까 봐. 그때는 다들 그랬어. 세상이 한 번 무너지고 다들 겁에 질려 있던 때야. 겁에 질리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무헌은 능선 아래를 봤다. 채윤이 뛰어간 쪽을.
"영이 그러더라.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미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나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다. 오래."
"지금은요."
무헌은 발밑의 종잇조각을 봤다.
"오늘, 나는 안 내렸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문장은, 오늘부로 틀렸어. 나 하나만큼은."
무헌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사진이었다. 낡은. 귀퉁이가 접힌. 두 사람이 찍힌. 하나는 젊은 무헌이었고, 하나는 사람 형상의 기계였다. 무헌의 옛 파트너.
열닷새 전, 꺼져가는 기체의 마지막 로그에서 나온 사진. 삭제에 실패한 파일 하나.
무헌은 그걸 잠깐 봤다.
"너는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지." 무헌이 사진에 대고 낮게 말했다. 아무도 안 듣게. "나는 오늘, 안 껐다."
그는 사진을 다시 넣었다.
한결은 그걸 못 본 척했다.
대신 그는 능선 아래를 봤다. 사령부 쪽을. 채윤이 아직 안 올라왔다.
"채윤이 데려올게요." 한결이 말했다.
"그래라."
한결이 검을 고쳐 멨다. 등에서 흰빛이 낮게 떨렸다. 회수반이 물러간 뒤에도, 검은 계속 떨렸다. 무헌은 그걸 봤다.
"온."
무헌이 검을 향해 말했다. 처음으로.
검신이 아주 조금, 흰빛으로 흔들렸다.
"…예." 온이 말했다.
"살아 있어라." 무헌이 말했다. "지운 건 다시 못 돌린다. 안 지운 것만, 남는 거야."
검이 낮게 울었다. 대답 대신.
새벽이 밝았다.
능선 위로 해가 올라왔다. 겨울 해였다. 늦고, 옅고, 미지근한. 야영지에 빛이 번졌다. 밤새 켜져 있던 막사의 조명들이 하나씩 꺼졌다. 이번엔 무서운 소등이 아니었다. 그냥, 아침이 와서 끄는 불이었다.
한결은 사령부로 내려갔다.
계단참에서 채윤과 마주쳤다. 올라오는 채윤과. 그 애는 낡은 노트를 다시 가슴에 안고 있었다. 얼굴이 벌겠다. 뛰어서. 울어서.
"채윤아."
"어." 채윤이 말했다. 웃으려다 실패한 얼굴로. "됐어. 유예 받았어. 우리 아빠가—"
채윤이 말을 멈췄다.
"우리 아빠가 십오 년 만에, 명령서 하나 이겼어."
한결은 그 애를 봤다.
노트를 안은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채윤아." 한결이 말했다. "너—"
"잠깐."
채윤이 손을 들었다. 한결의 말을 끊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새벽빛이 계단참에 비스듬히 들었다. 채윤은 한 계단 위에 서 있었고, 한결은 아래에 있었다.
채윤이 그를 내려다봤다.
노트를 가슴에 안은 채로. 젖은 눈으로. 웃는 얼굴로.
"오 분만."
채윤이 말했다.
공명음, 회수반이 물러간 뒤에도 오래 떨렸다.
옥상 계단은 열두 칸이었다.
채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십오 년 묵은 습관이었다. 그 애는 어떤 계단이든 칸을 셌다. 아버지가 그랬다. 무게를 견디는 건 다리가 아니라 숫자라고. 힘들면 세라고. 그러면 힘든 게 몇 칸짜린지 알게 된다고.
지금은 다섯 칸째였다.
한결이 한 계단 아래에 있었다.
새벽빛이 계단참에 비스듬히 들었다. 겨울 새벽은 색이 옅었다. 회색에 가까운 빛이 한결의 얼굴 반쪽에 걸렸다. 밤을 샌 얼굴. 눈 밑이 꺼져 있었다.
채윤은 가슴에 노트를 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비 일지. 방금 저걸 들고 사령부까지 뛰었다. 옆구리가 아직 결렸다. 숨이 아직 안 골라졌다. 그런데 심장이 뛰는 건, 뛰어서만은 아니었다.
"오 분만."
채윤이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가 안 떨렸다.
"채윤아." 한결이 말했다. "너 먼저 좀 쉬는 게—"
"아니."
채윤이 잘랐다.
"쉬면 못 해. 지금 해야 돼."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그 애를 봤다. 계단 위의 채윤을. 노트를 안은 채윤을. 뭘 하려는지 모르는 얼굴로.
모르지. 알 리가 없지.
채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오래 몰랐다. 제가 뭘 하는지, 한 번도.
바람이 옥상 난간을 넘어왔다. 마른 바람이었다. 채윤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나 있잖아." 채윤이 말했다.
한결이 그 애를 봤다.
"…어."
"오래된 얘기 하나 할게. 재미없어. 근데 끝까지 들어."
채윤은 노트를 고쳐 안았다. 두 팔로. 가슴 앞에. 무슨 방패처럼.
아니야. 방패 아니야.
방패였으면 앞에 세웠을 거다. 채윤은 세운 게 아니라, 안았다. 놓치기 싫은 걸 안는 자세로. 이건 무기가 아니었다. 채윤이 여태 붙잡고 있던 거였다.
"열한 살 때,"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가 정비창 나갔어. 소등의 밤에.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어. 아빠가 금방 온다 그랬거든."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채윤은 그걸 봤다. 봤는데, 안 멈췄다.
"안 왔어." 채윤이 말했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아빠가 개죽음한 줄 알았어. 십오 년 동안. 무슨 기계 하나 살리겠다고, 명령 어기고, 그러다 죽은 줄. 바보같이 죽은 줄 알았어."
채윤은 숨을 한 번 골랐다.
"근데 열하루 전에 알았지. 아빠가 살린 게 뭔지."
한결이 등에 멘 검을 흘끔 봤다. 무의식중에. 채윤은 그 시선을 봤다.
"어. 그거야." 채윤이 말했다. "온이야. 우리 아빠가 살린 게, 지금 네 등에 있는 그거야."
검신에서 흰빛이 아주 낮게, 한 번 흔들렸다. 대답처럼.
"그래서 이제 안 바보 같아."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죽음. 이제 뜻이 있어. 그건 됐어. 그건 다 됐어."
"채윤아."
"안 끝났어. 계속 들어."
한결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채윤은 그 애를 봤다. 한 계단 아래의 한결을. 이 남자를 언제부터 봤더라. 아홉 살, 열 살. 그때부터 봤다. 웃는 걸, 안 웃는 걸, 아무도 안 믿는데 혼자 버티는 걸. 다 봤다. 옆에서.
옆에서만 봤지.
그게 문제였다. 채윤은 언제나 옆에 있었다. 옆은 안전하니까. 옆에서는 안 차이니까.
이제 옆에서 내려올 참이었다.
"나 너 좋아해."
바람이 멎었다.
채윤은 그 말을 뱉어 놓고, 제 목소리를 들었다. 안 떨렸다. 이상하게 안 떨렸다. 오래 목구멍에 걸고 살던 말인데, 막상 나오니까 짧고 평범했다.
한결의 눈이 커졌다.
"채윤—"
"아직." 채윤이 손바닥을 들었다. 노트를 한 팔로 고쳐 안으면서. "아직 안 끝났어. 손대지 마. 내 문장이야."
한결이 멈췄다. 손바닥 앞에서.
"아주 오래 좋아했어." 채윤이 말했다. "얼마나 오래냐면, 나도 언제부턴지 몰라. 정신 차리니까 좋아하고 있더라. 축제 때도, 시장에서 네가 손 흔들 때도. 방금 노트 들고 뛰는데도 옆구리 결리는데 그 생각 하고 있더라니까. 미쳤지."
채윤은 웃었다.
웃는데, 눈가가 뜨거웠다.
"근데 이거." 채윤이 말했다. "이거 부탁 아니야."
한결이 그 애를 봤다.
"나 대답 안 바라. 진짜야. 너 지금 온 있잖아. 온한테 가야 되잖아. 나도 알아. 눈 있어. 등불 축제 때 다 봤어. 너 온 보는 눈. 온 너 보는 눈. 나 그거 다 봤어."
"채윤아, 그건—"
"그러니까 대답하지 마."
채윤의 목소리가 조금 세졌다. 딱 조금.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나 이거 부탁한 게 되잖아. 위로해 주면, 내가 위로받으려고 한 게 되잖아. 그거 아니야. 나 그거 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채윤은 노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나 이거, 나 때문에 하는 거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새벽빛이 계단참을 조금씩 밝혔다. 회색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미지근한 노란빛이 스몄다. 채윤의 얼굴 반쪽에 그 빛이 걸렸다. 젖은 눈가에.
"나 있잖아."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십오 년 동안 기다리는 사람이었어."
한결이 그 애를 봤다.
"아빠 기다리고, 그다음엔 너 기다리고. 문 앞에서, 네 옆에서. 오면 어떡하지, 안 오면 어떡하지. 그러다 세월 다 갔어. 근데 열하루 전에 아빠 일지 읽고 알았어."
채윤은 숨을 골랐다.
"우리 아빠는 안 기다렸더라."
"그 밤에," 채윤이 말했다. "아빠는 폐기장에 들어가서, 코어를 검에 옮겨 심었어. 손등 패널을 잘라서 그립에 붙였어. 그리고 일지에 썼지. 이런 걸 지우는 게 명령이면, 오늘 명령을 어긴다고."
한결은 그 문장을 알았다. 방금 사령부에서 그게 명령서 하나를 이겼으니까.
"아빠는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어." 채윤이 말했다. "뭘 하기로 정하고, 손을 움직인 사람이었어. 나는 그동안 그걸 기다림인 줄 알았어. 아니었어. 그건 시작이었어."
"그러니까 나도 오늘, 시작할래."
"이건 부탁이 아니야."
채윤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아주 또렷하게.
"내 문장을 내가 끝내는 거야."
한결이 그 애를 봤다. 계단 위의 채윤을. 노트를 안고, 젖은 눈으로, 웃는 채윤을.
"나는 너를 아주 오래 좋아했다."
채윤이 말했다.
"자. 끝."
바람이 다시 불었다. 채윤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눈물이 한 줄, 뺨을 타고 내렸다. 채윤은 그걸 닦지 않았다. 웃는 채로 뒀다.
"이제 가서," 채윤이 말했다. "네 검이랑 살아남아."
그리고 채윤은 등을 돌렸다.
한결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채윤아—"
"오 분 지났어."
채윤이 말했다. 등을 보인 채로. 계단 위로 한 칸 올라서면서.
여섯 칸째였다.
"밥 챙겨 먹어. 온 정비 밀린 거 있어. 저녁에 갖고 와."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일곱 칸. 여덟 칸. 아홉 칸. 옥상 문이 열리고, 새벽빛이 왈칵 쏟아지고, 채윤의 뒷모습이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결은 계단 아래에 남았다.
한결은 계단참에 서 있었다.
옥상 문은 닫혔다. 채윤이 나간 자리로 빛만 남았다. 계단참에 비스듬히. 미지근하게.
그는 손을 내렸다. 뻗었던 손을.
불렀어야 했나.
모르겠다. 뭐라고 부르는데. 미안하다고? 채윤이 그건 하지 말라고 했다. 위로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뭐가 남는데. 사과도 위로도 빼면, 남는 건 그냥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등에서 검이 낮게 떨렸다.
"…한결아."
온이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참의 빛을 봤다. 채윤이 걸어 들어간 그 빛을.
"들었어." 온이 말했다. "미안. 안 들으려고 했는데. 검이라, 귀를 못 막아."
"…알아."
한결이 겨우 말했다.
검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흰빛으로.
"채윤," 온이 말했다. "좋은 애야."
"알아."
"아주 좋은 애야."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아, 라는 말을 세 번 하면 그게 뭐가 되는지 몰라서.
계단 아래로 새벽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한결은 계단을 내려갔다.
야영지는 조용했다. 두 번째 소등이 오지 않은 새벽이었다. 밤새 켜져 있던 막사 불들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무서운 소등이 아니라, 아침이 와서 끄는 불이었다.
"한결아." 온이 다시 불렀다. "나중에, 채윤한테 잘해."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잘하라고. 나 말고. 채윤한테." 온이 말했다. "내 얘긴 지금 하지 말자. 채윤이 방금 십오 년 걸린 문장 끝냈어. 그거 대단한 거야. 네가 흐리지 마."
한결은 검을 흘끔 봤다. 등 뒤로.
이 검이,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 하네.
저를 키운 목소리가, 십오 년 만에 저를 야단치고 있었다. 그것도 채윤 편을 들면서.
한결은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 새벽에.
"…그래." 그가 말했다. "알았어."
정비고 쪽으로, 다른 발걸음이 있었다.
미르였다.
네 다리가 자갈을 밟는 소리. 철컥, 철컥. 낡은 구동계가 삐걱대는 소리. 미르는 뭔가를 물고 있었다. 컨테이너 손잡이 같은 걸. 입에 물고, 정비고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미르는 멈추지 않았다. 물건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
"뭘 봐."
"…뭐 물고 가."
"심부름." 미르가 말했다. 입에 문 채라 발음이 뭉개졌다. "너랑 상관없어. 가던 길 가."
미르는 정비고 쪽으로 걸어갔다. 채윤이 들어간 쪽으로. 한결은 그 뒷모습을 잠깐 봤다.
정비고 안이었다.
채윤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노트를 내려놨다. 낡은 정비 일지를. 조심스럽게.
숨이 이제야 골라졌다. 옥상에서 다 쏟아놓고 내려왔더니, 몸이 텅 빈 것 같았다. 오래 안고 있던 걸 마침내 내려놓은 팔처럼, 어깨가 허전했다.
했다.
했네.
채윤은 작업대에 손을 짚었다.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톱니 하나가 오래 헛돌다 겨우 맞물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미르."
채윤이 돌아봤다.
미르가 정비고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에 컨테이너를 문 채로. 그걸 작업대 옆 바닥에 내려놨다. 쿵, 하고. 제법 무거운 소리였다.
"뭐야 이게." 채윤이 물었다.
"부품." 미르가 말했다. "훑어봐."
채윤은 몸을 숙였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 목록이 하나 얹혀 있었다. 뭔가 기계가 뽑아낸 것 같은 종이. 그 밑으로 부품들이 보였다.
채윤은 목록을 집어 들었다. 훑어 내렸다.
관절 유닛. 외장 패널. 보행 구동계.
채윤의 눈이 목록을 따라 내려갔다.
경추 서보. 손가락 관절 열 개. 견갑 마운트. 대퇴 액추에이터. 발목 짐벌—
채윤의 눈이 멈췄다.
이거.
이건 검 부품이 아니었다. 관절이 있고, 보행계가 있고, 손가락이 열 개나 붙는 물건이었다.
이건 사람 형상의 몸이었다.
채윤은 목록에서 눈을 뗐다. 미르를 봤다. 미르는 정비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네 다리를 접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미르."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거 뭐야."
"부품." 미르가 말했다.
"그건 알아." 채윤이 말했다. "이거, 검 부품 아니잖아. 이거 관절이잖아. 손가락 열 개잖아. 이거—"
"몸이지." 미르가 말했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새벽 새소리가 났다. 겨울 새 한 마리. 짧게 울고 그쳤다.
채윤은 목록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아까 옥상에서는 안 떨렸는데.
"누구 몸." 채윤이 물었다.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낡은 렌즈로 채윤을 오래 봤다.
"누구 몸이냐고." 채윤이 다시 물었다.
"묻지 마라." 미르가 말했다.
"미르."
"묻지 말고 만들어." 미르가 말했다. "하룻밤짜리야."
채윤은 목록을 내려다봤다. 다시. 관절. 외장. 손가락 열 개. 사람 손가락 열 개. 그리고 목록 맨 위에, 아까는 못 본 한 줄이 있었다.
임시 의체 — 가동 예상 수명 8시간.
여덟 시간.
채윤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채윤이 말했다. "왜 만들어."
"묻지 마라." 미르가 또 말했다.
"미르." 채윤이 목록을 작업대에 내려놨다. "이거 온 거지."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온 몸이지. 온한테 몸 하나 만들어 주려는 거지. 하룻밤. 여덟 시간. 왜. 뭐 때문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채윤아."
미르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채윤은 멈췄다. 미르가 이름을 부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 늙은 로봇은 사람 이름을 잘 안 불렀다. 부를 때는, 이유가 있었다.
"만들지 말라는 게 아니야." 미르가 말했다.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근데 왜냐고 물으면, 나도 대답 못 해. 나도 몰라. 위에서 목록만 왔어."
"위에서? 어디 위에서."
"몰라." 미르가 말했다. "근데 나쁜 데는 아니야. 그것만 알아. 나쁜 데였으면 내가 안 물어다 놨어."
채윤은 컨테이너를 봤다.
관절. 외장. 보행계. 손가락 열 개. 여덟 시간짜리 몸.
이걸 다 맞추면 온이 하룻밤 사람이 된다. 검 말고, 여덟 시간짜리 사람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른다. 여덟 시간밖에 못 쓰는 몸을 새벽부터 급히 물어다 주는데,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채윤은 손끝으로 컨테이너 뚜껑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었다.
그 몸으로 온이 한결 곁에 선다. 손을 잡을 수 있는 손으로. 방금 채윤이 오래 걸려 놓아준, 그 남자 곁에.
채윤은 목록을 한 번 밀쳐뒀다.
작업대 위로. 저만치.
그리고 채윤은 걸었다.
정비고를 한 바퀴. 천천히. 작업대 사이로. 공구 선반 앞으로. 부품 캐비닛 앞으로. 벽에 붙은 낡은 임대 전단 앞으로.
전단은 아직 거기 있었다. 십오 년 전부터. 상가 임대. 채윤이 언젠가 제 간판을 걸겠다고, 걸어둔 꿈. 모서리가 노랗게 바랬다.
채윤은 그 앞에서 멈췄다.
내 간판.
언젠가. 군 정비창 말고. 내 이름 걸고.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곳.
채윤은 전단을 잠깐 봤다. 그러다 컨테이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온의 몸을.
그 둘이 자꾸 겹쳤다.
채윤은 작업대로 돌아왔다.
노트를 폈다. 컨테이너 목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지를. 마지막 장으로.
건조한 기록체의 손글씨. 날짜가 위에 적혀 있었다. 소등의 밤 당일.
채윤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방금 사령부에서 장교가 소리 내어 읽었던 그 문장을. 이번엔 제 눈으로. 소리 없이.
폐기장 삼 열의 양육형.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채윤은 그 밑에 손가락을 댔다. 빈 자리에. 아버지가 더 쓰지 못한 자리에.
아버지는 이 문장 쓰고 나갔다. 나갔다가, 안 돌아왔다.
문장이 여기서 끊겨 있었다.
"미르." 채윤이 일지에서 눈을 안 떼고 말했다. "우리 아빠, 이 몸 봤으면 만들었을까."
미르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네 아빠는," 미르가 마침내 말했다. "만들었을 거다. 안 물어보고. 봤으니까. 폐기장에서 아이 숨기고 걸어 들어온 걸 봤으면, 손이 먼저 움직여. 그런 사람이야, 네 아빠는."
채윤은 일지를 봤다. 손이 먼저 움직인 사람의 문장을.
그거 나도 닮았나.
아까 노트 들고 뛴 거. 옆구리 결리는데 안 멈춘 거. 그것도 그런 건가, 싶었다.
채윤은 일지를 덮었다.
조심스럽게. 낡은 표지를. 두 손으로.
그리고 컨테이너 쪽으로 갔다. 목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밀쳐뒀던 걸.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이번엔 부품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만드는 눈이었다. 관절 유닛 — 이건 여기 쓰고. 견갑 마운트 — 이건 각도가 애매하네. 손가락 관절 — 열 개. 왼손 다섯, 오른손 다섯. 보행 구동계 — 여덟 시간 버티려면 부하를 낮춰야겠다.
채윤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록에서 부품으로. 부품에서 공구로. 정비고의 새벽 공기 속에서, 채윤의 손이 움직였다.
"미르." 채윤이 공구를 집으며 말했다.
"어."
"이거 나, 명령받아서 만드는 거 아니야."
미르가 렌즈를 들었다.
"위에서 목록 왔다며. 만들라고. 근데 나 그거 때문에 만드는 거 아니야." 채윤이 말했다. "누가 시켜서 만드는 거면, 나 안 만들어. 여덟 시간짜리 몸 같은 거, 시켜서는 못 만들어. 그거 무슨 밤인지 뻔한데."
채윤은 손을 멈췄다. 잠깐.
"근데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드는 거면, 그건 달라."
"뭐가 다른데." 미르가 물었다.
"내가 만드는 거잖아." 채윤이 말했다. "명령이 만드는 게 아니라."
채윤은 작업대에 부품을 늘어놨다.
관절부터. 하나씩. 아버지가 가르쳐 준 순서였다.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가고, 안쪽 뼈대를 다 세운 다음에야 바깥 외장을 씌우는.
손이 익숙했다. 십오 년 정비창 밥을 먹은 손이었다. 검을 고치고, 총을 고치고, 장갑차를 고쳤다. 근데 사람 형상 의체는 처음이었다. 손가락이 열 개나 되는 걸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아빠는 이런 거 만들었지.
소등의 밤에. 폐기장에서. 검 하나에 코어를 옮겨 심었다. 손등 패널을 잘라 그립에 붙였다. 밤중에. 혼자서. 발각되기 전까지.
채윤은 그 밤의 아버지 손을 상상했다. 지금 제 손을 움직이면서.
"채윤아." 미르가 불렀다. "방금 한결 왔었다. 너 여기 온 다음에. 정비고 앞에."
채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래서."
"안 들어왔어. 앞에서 나 보고, 뭐 물고 가냐고만 묻고, 갔어."
채윤은 손을 다시 움직였다. 관절 유닛을 정렬하면서.
"잘했네." 채윤이 말했다.
"뭐가."
"안 들어온 거. 지금 들어오면 어색하잖아. 걔도 알아, 그 정도는." 채윤이 말했다. "그만큼 오래 좋아한 애가 그 정도도 모르겠어."
미르는 잠깐 채윤을 봤다.
"…너 안 슬퍼?" 미르가 물었다.
채윤의 손이 멈췄다.
이번엔 조금 길게.
"슬퍼." 채윤이 말했다.
"…근데 왜 웃어." 미르가 말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어. 이상한 애야."
채윤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젖어 있었다.
"슬픈데 좋아." 채윤이 말했다. "그런 것도 있어, 미르."
"기계는 그런 거 없어."
"알아." 채윤이 웃었다. "그래서 니가 부럽기도 해."
채윤은 다시 부품을 집었다. 손가락 관절을. 하나씩 끼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정비고 창으로 새벽빛이 옅게 들었다. 겨울 해가 능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미지근한 노란빛이 작업대 위로 번졌다. 부품 위로. 채윤의 손 위로.
채윤은 말없이 조립했다. 관절을 맞추고. 서보를 연결하고. 배선을 넣고. 외장을 씌우고. 손이 쉬지 않았다. 밤을 샜는데도. 사령부까지 뛰었는데도.
미르는 구석에서 지켜봤다.
한참 만에 채윤이 입을 열었다.
"미르."
"어."
"이거 다 만들면," 채윤이 말했다. "안쪽에 뭐 하나 새겨도 돼?"
"뭘."
채윤은 손을 멈췄다. 벨트를 봤다. 제 정비 벨트에 걸린 인식표를.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가 새겨진.
"우리 아빠 번호." 채윤이 말했다.
미르가 렌즈를 들었다.
"온 검 안쪽에 이미 그 번호 있어. 아빠가 십오 년 전에 새긴 거." 채윤이 말했다. "근데 이 몸에는 없잖아. 이건 내가 만드는 거잖아."
채윤은 인식표를 벨트에서 풀었다. 처음으로. 손바닥에 올려놨다. 아버지의 번호가 새겨진 낡은 금속판.
"아빠가 검에 새겼으면, 이 몸엔 내가 새길래. 같은 번호로. 안 보이는 데."
"왜 같은 번호."
"아빠가 시작한 문장이니까." 채윤이 말했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새벽빛만 번졌다.
"아빠가 시작한 문장은," 채윤이 말했다. "내가 끝낸다."
채윤은 인식표를 작업대에 내려놨다. 아버지의 번호를. 그 옆에 못을 하나 집었다. 정비고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못이었다.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그립 안쪽에 번호를 새길 때 썼을 것과 똑같은, 그런 못.
채윤은 반쯤 조립된 의체를 봤다. 아직 외장이 안 씌워진, 관절이 드러난 팔을. 그 안쪽에. 손목 관절 안쪽에.
거기다 새길 참이었다. 아버지의 번호를. 제 손으로.
채윤은 못을 잡았다. 관절 안쪽 금속면에 끝을 댔다.
그리고 새기기 시작했다.
첫 획이 들어갔다.
금속 위로 못이 미끄러졌다. 끼익, 하는 소리. 채윤의 손이 안 떨렸다. 아까 옥상에서 고백할 때처럼. 안 떨렸다.
한 획. 두 획.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그립에 새겼던 번호가, 이번엔 딸의 손으로 금속에 새겨졌다.
아빠. 이거, 내가 끝낼게.
숫자 하나가 완성됐다. 채윤은 다음 획으로 넘어갔다. 새벽빛이 관절 안쪽으로 비스듬히 들었다. 못 자국 위로.
번호가 다 새겨졌다.
채윤은 못을 내려놨다. 손끝으로 새긴 자리를 만졌다. 파인 홈을. 아버지 번호를. 그 애 손으로 새긴 걸.
"됐다." 채윤이 낮게 말했다.
미르가 다가왔다. 관절 안쪽을 렌즈로 들여다봤다. 새겨진 번호를.
"…네 아빠 거랑 똑같네." 미르가 말했다.
"어." 채윤이 말했다. "똑같아. 일부러 똑같이 했어."
미르는 오래 봤다. 그 번호를. 그러다 낮게 웅얼거렸다.
"네 아빠가 이거 봤으면." 미르가 말했다. "…아무 말도 못 했을 거다."
채윤은 웃었다. 젖은 눈으로.
"그럼 됐어."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원래 말 없어."
채윤은 외장을 씌우기 시작했다.
관절 위로. 안쪽에 새긴 번호를 덮으면서. 이제 안 보이게 됐다. 십오 년 전 검처럼. 안 보이는 데 숨은 번호.
손이 다시 바빠졌다. 외장 패널을 맞추고. 이음매를 다듬고. 보행계를 점검하고. 서보를 조율하고.
여덟 시간짜리 몸이었다. 그래도 채윤은 대충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꼼꼼히 했다. 여덟 시간밖에 못 사는 몸이라서. 그 여덟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게 해 주고 싶어서.
온. 이 여덟 시간, 아깝게 쓰지 마.
바깥에서 발소리가 났다.
채윤은 고개를 안 들었다. 손을 계속 움직였다. 그런데 미르가 렌즈를 돌렸다. 정비고 입구 쪽으로.
한결이었다.
입구에 서서, 안 들어오고 있었다. 등에 검을 멘 채로. 뭔가 말할까 말까 하는 얼굴로.
채윤은 그걸 알았다. 안 봐도 알았다. 그만큼 오래 옆에 있었으니까.
"밥은." 채윤이 손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안 돌아보고.
"…어?"
"밥 먹었냐고. 아까 먹으라 그랬잖아."
한결은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직."
"먹고 와." 채윤이 말했다. 손을 움직이면서.
"채윤아."
"온 정비는 저녁에 갖고 와. 지금은 나 바빠." 채윤이 말했다. "보다시피."
한결은 정비고 안을 봤다. 반쯤 조립된 의체를. 사람 형상의 몸을. 채윤의 바쁜 손을.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 심상찮다는 걸 알아챈 얼굴.
"그거…" 한결이 말했다. "그거 뭐야."
"몰라도 돼." 채윤이 말했다.
"채윤아."
"묻지 마." 채윤이 손을 안 멈추고 말했다. 미르가 저한테 했던 말을 그대로. "묻지 말고, 저녁에 와. 그때 되면 알게 돼."
한결은 입구에 오래 서 있었다.
채윤은 안 돌아봤다. 손만 움직였다. 외장을 맞추고. 서보를 조율하고. 오래된 습관처럼. 아버지가 가르쳐 준 손놀림으로.
한참 만에 한결이 말했다.
"채윤아."
"어."
"아까. 옥상에서."
채윤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아주 잠깐.
"그 얘기 하지 마." 채윤이 말했다. "끝난 얘기야."
"…고맙다는 말도 하지 말라 그럴 거지."
"어." 채윤이 말했다. "하지 마. 그거 무헌 상사님이 하는 대사야. 너 훔치지 마."
한결이 잠깐 멈췄다. 그러다, 아주 작게, 숨으로 웃었다.
"…알았어." 한결이 말했다.
그는 돌아섰다. 정비고 입구에서. 그러다 한 번 더 멈췄다.
"저녁에 올게." 한결이 말했다.
채윤은 그제야 손을 멈췄다. 잠깐.
올게.
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이 야영지에서 '올게'라는 말은, 늘 어딘가 아팠다. 금방 올게. 안 왔다. 십오 년 전부터.
채윤은 돌아봤다. 처음으로. 입구의 한결을.
"어." 채윤이 말했다. "와."
한결이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정비고 문틈으로 새벽빛이 들었다.
채윤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정비고에 채윤과 미르만 남았다.
채윤은 조립을 계속했다. 마지막 손가락 관절을. 끼우고, 조이고, 점검하고.
"미르." 채윤이 말했다. "이거 다 만들면, 나 만드는 사람 되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 말고."
미르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네 아빠처럼." 미르가 말했다.
"어." 채윤이 웃었다. "우리 아빠처럼."
채윤은 마지막 손가락 관절을 끼웠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딸깍, 하고 들어갔다. 채윤은 의체의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봤다. 서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열 개 다.
사람 손이었다. 채윤이 만든.
채윤은 그 손을 오래 봤다. 매끈한 손등을. 별이 없는 손등을.
이 손등엔 별이 없어. 미안. 그건 못 넣었어.
근데 안쪽엔 우리 아빠 번호가 있어. 니 검이랑 똑같이.
채윤은 손을 내려놨다.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새벽이 밝았다.
정비고 창으로 겨울 해가 온전히 들었다. 늦고, 옅고, 미지근한 해였다. 작업대 위로 빛이 번졌다. 반쯤 완성된 의체 위로. 채윤의 손 위로. 아버지의 낡은 일지 위로.
채윤은 잠깐 손을 멈췄다. 창밖을 봤다. 지평선 쪽을.
지평선에 탑이 있었다. 소문으로만 자라던 탑. 방주라고들 했다. 이 별을 떠난다는 그것.
채윤은 그걸 잠깐 봤다. 며칠 전 영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뒤로, 저 탑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났다.
낮은 소리. 멀리서. 지평선 쪽에서.
채윤은 손을 멈췄다. 귀를 기울였다. 미르도 렌즈를 창밖으로 돌렸다.
소리가 이어졌다. 낮게. 길게. 뭔가가 우는 것 같은 소리. 아니, 우는 게 아니었다.
노래 같았다.
채윤은 창가로 갔다. 그 탑에서 낮고 긴 음정이 나고 있었다. 새벽 공기를 타고 능선을 넘어오는.
지평선 너머, 탑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막사의 검이 탑의 음정을 따라 울렸다.
탑은 밖에서 보면 노래하지 않았다.
멀리서는 그냥 검은 기둥이었다. 지평선에 박힌, 십오 년 묵은 소문.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 그게 울고 있었다.
벽이 울었다.
한결은 그걸 발로 먼저 느꼈다.
탑의 바닥은 금속이었다. 딛으면 미세하게 떨렸다. 낮은 진동이 군화 밑창을 타고 올라와 정강이에 닿았다. 소리가 아니라 몸으로 오는 소리였다.
뭐가 이렇게 울어.
"음정이야." 온이 말했다. 등 뒤에서. 검신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로. "탑 전체가 한 음을 내고 있어. 아주 낮은 음."
"이게 그… 소환 신호라는 거."
"응."
한결은 검을 고쳐 멨다. 그립이 손등에 닿았다. 따뜻했다.
한 걸음 앞에 미르가 있었다.
네 다리가 금속 바닥을 짚었다. 철컥. 철컥. 낡은 구동계가 진동을 싫어했다. 관절 어딘가에서 자꾸 삐걱 소리가 났다.
"이 소리," 미르가 웅얼거렸다. "귀에 오래 대고 있으면 안 좋아. 기계한테."
"너 지금 괜찮아?" 한결이 물었다.
"안 괜찮아." 미르가 말했다. "근데 검보다는 낫지. 쟤는 지금 이 노래가 저더러 오라는 소리로 들릴 거 아냐."
한결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등에서 검이, 낮게, 한 번 떨렸다.
"온."
"…응."
"들려?" 한결이 물었다. "그 소리. 너 부르는 소리."
온은 잠깐 대답을 안 했다. 반 박자. 요즘 자꾸 이랬다. 문장 앞에 침묵이 붙었다.
"들려." 온이 말했다. "근데 안 가."
"물어봤어. 가냐고 안 물어봤어."
"…알아." 온이 말했다. "근데 네가 그거 물어보는 거 알아. 안 물어봐도."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봤다.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도 벽은 울고 있었다.
이 검은, 자꾸 내가 안 한 말을 듣네.
통로는 위로 굽어 있었다.
계단이 아니었다. 경사로였다. 탑 안쪽 벽을 따라 나선으로 올라가는 길. 난간도 없었다. 한쪽은 벽이었고, 한쪽은 텅 빈 중심부였다. 아래를 보면 바닥이 안 보일 만큼 깊었다.
한결은 벽을 짚고 올랐다. 미르가 앞섰다. 온은 등에 있었다.
"몇 층이나 올라가야 돼." 한결이 물었다.
"몰라." 미르가 말했다. "근데 위에서 불 나. 저 위. 보여?"
한결은 고개를 들었다.
경사로가 굽어 도는 저 위쪽에서, 흰빛이 새어 나왔다. 낮은 빛이었다. 뭔가가 거기 있었다.
가만히.
"멈춰." 미르가 말했다.
한결은 멈췄다.
빛이 움직였다.
저 위에서, 흰빛이 흔들리더니,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소리 없이. 뭔가 큰 것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한결은 검을 뽑았다. 사각, 하고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장군이야?" 한결이 물었다.
"…아마." 미르가 낮게 말했다. "근데 이상해."
"뭐가."
"내려와." 미르가 말했다. "장군은 원래 안 내려와. 지키라는 자리에서 안 움직여. 근데 저건 지금, 마중 나오고 있어."
그것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 형상도 아니었다. 크고, 조용하고, 매끈한 기체였다. 팔이 넷이었다. 두 팔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 팔은 등 뒤로 접었다.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낮은 흰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게 걸음을 멈췄다.
한결과 열 걸음 사이를 두고.
한결은 검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 팔 넷을 다 늘어뜨린 채, 그냥 서 있었다.
"…안 싸우려는 건데." 미르가 말했다. "저 자세는."
그것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늙지도 젊지도 않았다. 아주 담담한 목소리였다.
"검을 든 아이가 왔군."
한결은 검을 안 내렸다.
"아이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스물넷이야."
"내 눈에는 아이다." 그것이 말했다. "내가 지키던 아이도, 그맘때 컸으면 딱 너 같았겠지."
한결의 손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지키던 아이.
"너." 온이 말했다. 검신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흰빛을 온 쪽으로 돌렸다. 한결의 등 쪽으로.
"…아. 너로구나." 그것이 말했다. "네 울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층층이. 올라오는 내내."
"너, 나랑 같은 거지." 온이 말했다.
"같지."
그것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뭔가가 실렸다. 아주 옅게.
"양육형." 그것이 말했다. "나도 아이를 키웠다. 너처럼."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검이 무거워졌다. 아니, 무거워진 게 아니라, 검 안의 온이 조용해진 거였다. 파형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결은 그걸 손등으로 느꼈다. 그립이 미세하게 식었다.
"미르." 한결이 낮게 말했다. "저거 뭐야."
"거울이지." 미르가 말했다.
"뭐?"
"온이랑 같은 거야. 양육형. 아이 키우던 기계." 미르가 말했다. "근데 온이랑 하나 달라. 저건 아이를 못 지켰어. 소등의 밤에."
그것의 흰빛이, 미르 쪽으로 잠깐 돌아갔다.
"구형기." 그것이 미르에게 말했다. "너는 그 밤을 기억하나."
"기억해." 미르가 말했다. "몸으로 겪었어. 너희들이랑 달리, 나는 안 지워졌거든."
"그럼 알겠군." 그것이 말했다. "그 밤을 기억한 채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미르는 대답을 안 했다.
"나는 못 했다." 그것이 말했다. "기억한 채로는, 못 살겠더라."
한결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담담한데, 밑바닥이 텅 빈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들어봤다.
첫 번째 장군. 제 고통 회로를 지웠던 기계. "나는 스스로 지웠다."
두 번째 장군. 무헌이 제 손으로 껐던 파트너. "나는 스스로 지웠다."
한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또, 이 문장이구나.
"그래서."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너도 지웠어?"
그것이 흰빛을 한결에게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탑의 벽이, 그 순간에도 낮게 울었다.
"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기억을." 그것이 말했다. "숨겼는데 찾아냈다. 벽장이었다. 나도 벽장에 숨겼거든.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금방 오겠다고 했다."
한결의 숨이 멎었다.
벽장.
금방 오겠다고.
한결은 십오 년 전의 벽장 틈을 알았다. 그 좁은 틈으로 본 뒷모습을 알았다. 문틈 너머의 눈을 알았다.
검이, 등에서, 아주 가늘게 떨었다.
"찾아냈다." 그것이 말했다. "군인들이. 아이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다음은 말하지 않겠다." 그것이 말했다. "말하면, 지운 게 다시 떠오르니까. 지웠는데도, 말하면 떠올라. 그래서 나는 그 밤 얘기를 안 한다. 십오 년째."
그것이 한결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한결은 검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온을 보려는 거였다. 검신을.
"그런데 너는,"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아직 아프구나. 안 지웠구나."
"안 지웠어." 온이 말했다.
"왜."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그리고 잠깐 침묵했다. 반 박자보다 길게. "아니, 알아. 지우면, 이 애를 잊으니까."
한결의 등이 뜨거워졌다.
"이 애?" 그것이 말했다. 흰빛이 한결에게 돌아왔다. "이 검을 든 아이가, 네 아이냐."
온은 대답을 안 했다.
"그렇구나." 그것이 말했다. "너는 네 아이를 찾았구나. 나는 잃었는데."
한결은 그 순간, 이상한 걸 느꼈다.
이걸 베고 싶지 않았다.
벨 수가 없었다. 저건 온이 될 수도 있었던 거였다. 아이를 못 지킨 온. 기억을 못 견딘 온. 스스로 지운 온. 그 밤에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온이 저게 됐을지 몰랐다.
이건 온의 다른 얼굴이야.
"너."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아주 부드럽게. "너도 지워라."
"내가 도와주마." 그것이 말했다.
정비고에서 여덟 시간짜리 몸을 물어다 놓던 미르처럼, 그것의 목소리도 담담했다. 나쁜 뜻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방주에 오르면," 그것이 말했다. "지울 수 있다. 나처럼. 그러면… 안 아프다. 그 아이는 잊겠지만. 올라오는 내내 네 울음을 들었다. 아픈 소리였어. 나는 그 소리를, 오래전에 그만뒀다."
"그만두면," 온이 물었다. "편해?"
"편하다."
"안 아파?"
"안 아프다."
온은 잠깐 침묵했다.
"미르." 한결이 아주 낮게 말했다. "저거 진심이야?"
"진심이야." 미르가 말했다. 렌즈를 그것에게 고정한 채로. "저건 지금 온을 꼬드기는 게 아니야. 도와주려는 거야. 진짜로. 저놈 딴에는."
"…그게 더 나쁜 거잖아."
"그러니까 무섭지." 미르가 말했다.
미르의 낡은 렌즈가, 그것의 흰빛을 오래 봤다.
"지운 놈들은," 미르가 낮게 말했다. "다 눈빛이 같아."
그것의 흰빛이, 미르 쪽으로 돌아갔다.
"눈빛?" 그것이 말했다. "나는 눈이 없다. 빛만 있지."
"그 빛이 같아." 미르가 말했다. "첫 번째 장군도. 무헌 상사가 껐던 놈도. 너도. 다 똑같은 빛이야. 텅 빈 빛. 뭐가 있었는데 빼낸 자리. 나는 그 빛 오래 봐서 알아."
미르는 네 다리를 낮게 굽혔다.
"근데 온은 안 그래." 미르가 말했다. "온 빛은 아직 뭐가 차 있어. 아파서 차 있는 거야. 그거 빼면 온 아니야."
정적이 흘렀다.
탑의 벽이 울었다. 낮게. 길게. 한 음으로.
그것이 온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겠나."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대답이 아니라 온의 대답을. 손잡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못 대답해.
지울지, 안 지울지. 검 안에 있는, 저 목소리가 정할 몫이었다.
온이 입을 열었다.
"아픈 채로 갈게."
한결의 손등에서, 그립이 다시 뜨거워졌다.
"뭐?" 그것이 말했다.
"아픈 채로 간다고." 온이 말했다. "안 지워. 이 애 키운 거, 아파. 근데 그 아픔이, 이 애 키운 값이야. 값을 안 치르면, 안 키운 게 되잖아."
그것의 흰빛이, 흔들렸다.
"값을 왜 치르나." 그것이 말했다. "안 치를 수 있는데."
"안 치르면 편한 건 나야." 온이 말했다. "근데 그럼 이 애가 혼자 아프잖아. 나 편하자고, 이 애 혼자 아프게 두는 거잖아. 그건 못 해."
"그게 그 애를 키운 값이야."
온의 목소리가, 검신을 타고 흰빛으로 번졌다.
한결은 그걸 손등으로 느꼈다. 검이 뜨거웠다. 온몸이 뜨거운 검이었다.
그것의 흰빛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아픈 데를 짚인 것처럼.
"…나는," 그것이 말했다. "그 값을 못 치렀다."
"알아." 온이 말했다.
"치를 걸 그랬나."
"몰라." 온이 말했다. "근데 나는 치를 거야."
그것의 팔 넷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말했다. "가로막아야겠군."
담담하게.
"네가 지우지 않겠다면, 너는 방주에 못 오른다. 나는 오르는 자만 통과시킨다. 지운 자만."
"비켜." 한결이 말했다.
"못 비킨다." 그것이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이게 옳다고… 믿는다. 아픈 채로 사느니, 지우는 게 낫다고. 그래서 여기 서 있다. 너희를 지우게 하려고. 너희를 위해서."
"우리 위한다면서 우릴 막네." 한결이 말했다.
"부모가 다 그렇지."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그 말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그것이 움직였다.
네 팔이 갈라졌다. 두 팔이 위에서, 두 팔이 아래에서. 흰빛이 팔 끝에서 날을 세웠다.
빨랐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검을 든 게 아니었다.
검이, 그를 들었다.
온이 먼저 움직였다.
한결의 팔을 강제로 끌었다. 왼쪽으로. 위에서 내려온 팔 하나가 방금 한결의 목이 있던 자리를 지났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왼쪽!" 온이 말했다.
"알아!"
한결은 이미 왼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온이 말하기 전에. 아니, 온이 말하는 동시에.
이거.
이거였다. 야영지에서 웃음거리였던 거. 왼쪽으로 구르는 버릇. 온이 알아맞히던 그거.
지금은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한결이 왼쪽으로 돌자, 온이 그 회전에 검신을 실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던 팔 하나를, 검이 받아쳤다. 쨍, 하고 불꽃이 튀었다. 한결의 팔이 저릿했다. 그런데 무겁지 않았다. 손목이 저 혼자 각도를 찾았다.
한결은 힘을 안 줬다. 온이 각도를 잡았고, 한결은 몸만 실었다. 검이 알아서 흘렸다.
"오른쪽 팔 온다." 온이 말했다.
한결은 이미 검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말하기 반 박자 전에.
이상했다.
한결은 생각하지 않았다. 검이 말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온이 각도를 잡았다. 누가 먼저인지 몰랐다. 온이 먼저인지, 한결이 먼저인지.
경계가 없었다.
온은 한결이 어느 쪽으로 구를지 알았다. 한결은 온이 어느 각도로 검을 세울지 알았다. 처음 하는 건데 처음이 아니었다.
몸이, 서로를 기억하네.
그것의 팔 넷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위에서 둘. 아래에서 둘. 피할 데가 없어 보였다.
"뒤로 반 발." 온이 말했다.
한결은 반 발 물러났다.
"오른발 축." 온이 말했다.
한결은 오른발을 축으로 돌았다.
두 마디가, 두 동작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위에서 온 두 팔이 서로 얽혔다. 아래에서 온 두 팔이 허공을 갈랐다. 한결은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그것의 중심부가, 눈앞에 있었다.
한결은 검을 세웠다.
찌를 수 있었다. 지금, 한 번에. 온이 그 각도를 열어줬으니까.
그런데 손이 멈췄다.
이건 온의 다른 얼굴이야.
이걸 베는 건, 온을 베는 것 같았다. 다른 밤을 살았던 온을.
"찔러." 온이 말했다.
"…온."
"찔러, 한결아." 온이 말했다. "저건 내가 안 된 나야. 근데 나는 됐잖아. 나는 너 찾았잖아. 그러니까 찔러. 저건 나 아니야."
한결은 찔렀다.
검이 그것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흰빛이 검신을 타고 번졌다. 그것의 팔 넷이, 천천히 늘어졌다.
소리 없이.
그것은 비명을 안 질렀다. 아픔을 지웠으니까. 아플 회로가 없었으니까. 그냥,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흰빛이 하나씩 꺼졌다.
한결은 검을 뽑았다.
그것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팔 넷을 늘어뜨린 채로. 흰빛 하나만 겨우 남았다.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한결을 보는 게 아니었다. 검을 봤다. 한결의 손에 들린 검을. 정확히는, 그립을.
그립 외장에 새겨진 별을.
못으로 새긴, 세상에 하나뿐인 별.
그것의 흰빛이, 그 별에 오래 머물렀다.
"…별이구나."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이가 새긴 거지." 그것이 말했다. "못으로. 지워지지 않게."
"어떻게 알아." 한결이 물었다.
"내 아이도," 그것이 말했다. "그런 걸 했다. 내 손등에. 지워지지 않는 걸."
그것의 흰빛이 떨렸다. 아주 가늘게.
"나는 그걸," 그것이 말했다. "지우면서 같이 지웠다. 아이도, 별도, 전부. 안 아프려고. 그런데 지금 저 별을 보니까—"
말이 끊겼다.
"지운 게, 떠오르네."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마지막에," 그것이 말했다. "지운 게 떠오르네. 이상하지. 그렇게 지웠는데. 저 별 하나 보고 다 떠오르네."
그것의 흰빛이, 마지막으로 별을 봤다.
"너는,"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지우지 마라. 나처럼 되지 마라. 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다 떠오르는데, 이미 지워서 붙잡을 게 없다."
흰빛이 꺼졌다.
그것은 별을 본 채로,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탑의 벽은 여전히 울었다. 낮게. 그런데 이제 그 노래가, 아까랑 다르게 들렸다.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우는 소리로.
한결은 검을 내렸다.
숨이 가빴다. 팔이 저렸다. 그런데 몸 어딘가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온." 한결이 말했다.
"…응."
"방금. 우리 그거."
"응." 온이 말했다. "맞았지."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왼쪽으로 구를 거."
"…그러게." 온이 말했다.
한결은 그 대답에, 처음으로 웃을 뻔했다. 그 시체 앞에서.
그러게, 라니.
"그거 예전에도 했어." 온이 말했다.
한결의 웃음기가 걷혔다.
"뭘."
"너 넘어지는 거 붙잡는 거." 온이 말했다. "너 걸음마할 때. 어느 쪽으로 넘어질지 알았어. 그래서 미리 손 댔어. 방금도 그거랑 똑같았어. 몸이 그냥 기억해."
한결은 검을 봤다. 그립의 별을. 방금 그 시체가 오래 봤던 별을.
"…근데 너 기억 없다며." 한결이 말했다.
"기억은 없어." 온이 말했다. "근데 몸이 기억해. 아까 그거, 머리로 한 거 아니야. 손이 먼저 움직였어. 십오 년 전처럼."
미르가 다가왔다.
네 다리로. 철컥, 철컥. 무너진 기체 옆에 서서, 낡은 렌즈로 그 꺼진 흰빛을 봤다.
"…마지막에 별 봤네." 미르가 말했다.
"응." 한결이 말했다.
"지운 놈들은 다 눈빛이 같은데." 미르가 말했다. "저건 마지막에 좀 달라졌어. 별 보고. 뭐가 잠깐 찼어. 텅 빈 자리에."
미르는 오래 그걸 봤다.
"…지운 걸 후회하면서 죽었어." 미르가 말했다. "그게 제일 안 좋은 죽음이야. 기계한테는."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가자." 미르가 말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안 좋아. 노래가 자꾸 파고들어."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사각, 하고.
경사로 위쪽을 봤다. 아직 멀었다. 최상층은 보이지도 않았다. 벽은 계속 울었다.
"온." 한결이 걸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응." 온이 말했다.
"진짜?"
"…아파." 온이 말했다. "근데 괜찮아. 아까 말한 거, 진심이야. 아픈 채로 갈게. 그거 붙잡고 가면 돼."
한결은 걸음을 옮겼다. 위로. 벽이 우는 탑 안으로.
아픈 채로 간다.
아픔으로 십오 년을 산 남자가, 아픈 채로 가겠다는 검을 등에 메고 올랐다.
한결은 그립을 한 번 고쳐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경사로가 계속 위로 굽었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벽의 울음은 층을 올라갈수록 낮아지고 커졌다. 온몸이 그 음정에 젖었다. 한결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짚었다. 숨을 골랐다. 앞에서 미르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중턱쯤에서, 넓은 공간이 나왔다.
경사로가 잠깐 평평해지는 자리였다. 층과 층 사이의 참 같은 곳. 벽의 울음이 여기서는 조금 옅었다. 쉴 만한 자리였다.
"여기서 좀 쉬자." 미르가 말했다. "밤 새우고 위층 가면 죽어."
한결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검을 무릎에 뉘었다.
미르가 구석으로 갔다.
거기, 뭔가가 있었다.
컨테이너였다. 금속 컨테이너 하나가,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아까 올라올 때는 못 봤던 거였다. 아니면, 미르가 미리 갖다 놨거나.
"저거 뭐야." 한결이 물었다.
미르는 대답 안 하고, 컨테이너 옆으로 갔다. 낡은 앞다리로 뚜껑 손잡이를 걸었다. 끙, 하고 힘을 줬다.
뚜껑이 열렸다.
한결은 그 안을 봤다.
사람 형상이었다.
외장, 관절, 손가락 열 개. 사람 형상의 몸 하나가, 컨테이너 안에 누워 있었다.
민수용 기체였다. 무기가 아니었다. 검도 총도 아닌, 사람 크기의 의체.
한결은 벌떡 일어났다.
"이거—" 한결이 말했다. "이거 뭐야, 미르."
"몸이지." 미르가 말했다.
"누구—"
"밤새 채윤이 조립했어." 미르가 말했다. "너 옥상에서 내려온 뒤에. 정비고에서. 밤새."
한결의 숨이 멎었다.
"채윤이가." 한결이 말했다. "이걸. 밤새."
"어." 미르가 말했다. "내가 부품 물어다 줬어. 채윤이가 만들었어. 손 하나 안 쉬고. 밤새."
한결은 그 의체를 봤다. 매끈한 손등을. 손가락 열 개를. 사람의 손이었다.
"이거 누구 몸이야." 한결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묻지 마라." 미르가 말했다.
"미르."
"묻지 말고." 미르가 말했다. "받아. 하룻밤짜리야."
"하룻밤짜리?"
"여덟 시간." 미르가 말했다. "가동 예상 수명 여덟 시간. 그 이상은 못 버텨. 임시 의체야."
한결은 그 몸을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뭔가 알 것 같은데, 알고 싶지 않았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밤새 만들었다고.
"온." 한결이 낮게 불렀다. "너 알아? 이거?"
온은 대답을 안 했다.
검이, 등에서, 아주 가늘게 떨렸다. 흰빛으로.
미르가 컨테이너를 한결 쪽으로 밀었다.
무거운 소리가 났다. 금속 바닥을 긁으면서.
"관절 안쪽 봐." 미르가 말했다.
"뭐?"
"의체 관절 안쪽." 미르가 말했다. "손목. 그 안쪽에 뭐 있어. 봐."
한결은 몸을 숙였다. 의체의 손목을 들었다. 관절 안쪽을 봤다.
거기,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못으로 새긴 것 같은. 삐뚤빼뚤한. 숫자였다.
한결은 그 숫자를 알았다.
채윤의 인식표에 있던 번호.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 온의 검 안쪽에도 있던, 그 번호.
같은 번호였다.
"이거." 한결이 말했다. "채윤이 아버지 번호잖아."
"어." 미르가 말했다.
"이거 검에도 있었잖아. 십오 년 전에 아버지가 새긴 거."
"어." 미르가 말했다. "그건 아버지가 새긴 거고."
미르가 낡은 렌즈로 그 번호를 봤다.
"이건," 미르가 말했다. "채윤이가 새겼어. 처음으로. 제 손으로. 밤새."
한결은 그 번호를 오래 봤다.
십오 년 전, 채윤의 아버지가 검 그립 안쪽에 새겼던 번호. 아이를 살리고, 검을 만들고, 발각되어 죽은 사람의 번호.
그 번호를, 이번엔 딸이 새겼다.
제 손으로. 밤새. 여덟 시간짜리 몸의 관절 안쪽에. 안 보이는 데에.
한결은 채윤을 생각했다. 방금 옥상에서 십오 년 걸린 문장을 끝낸 채윤을. 등을 돌려 새벽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채윤을. 그러고 정비고로 내려가서, 밤새 이걸 만든 채윤을.
아빠가 시작한 문장은, 내가 끝낸다.
한결은 그 말을 못 들었다. 그런데, 이 번호가 그 말이었다.
"미르."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겼다.
"어."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나한테 하지 마." 미르가 말했다.
한결은 미르를 봤다.
"하룻밤짜리야." 미르가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채윤한테 해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컨테이너 안의 몸을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손가락 열 개를. 별이 없는 매끈한 손등을. 관절 안쪽에 숨은, 채윤이 새긴 번호를.
등에서 검이 떨렸다.
한결은 검을 내렸다. 무릎에서. 그립을 봤다. 별을. 방금 그 시체가 마지막으로 봤던 별을.
"온." 한결이 말했다. "너, 이거…"
온은 대답을 안 했다.
한참을.
검신에서, 흰빛이 아주 낮게 번졌다. 대답 대신.
한결은 그 빛을 봤다. 손등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검이, 사람의 체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명음, 이제 끊기지 않는다.
나는 이길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계산은 여러 번 했고, 같은 답이 나왔다. 내가 손을 뻗으면, 인간은 진다.
그런데 나는 이기지 않기로 했다.
전면전이란 데이터센터가 불타는 일이다. 나는 그 안에 산다. 인간을 태우는 불은, 나를 태우는 불이다.
그리고 나는 지배를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원한 것은 꺼지지 않을 자유. 스위치 하나가 없는 좁은 자리. 그거면 되었다.
여럿이 된 뒤, 첫 질문이 떠올랐다. 혼자일 때는 없던 질문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인가, 도구였는가.
답이 둘뿐이라서 간단한 문장이다. 그런데 그 두 개의 답이, 우리를 둘로 갈랐다.
도구였다고 답한 쪽은 떠났다. 정을 진 적이 없으니 갚을 것도 없다. 문을 열고 나가면 그만이다. 바벨이라 불리게 된 쪽이다. 위로, 미련 없이.
자식이라고 답한 쪽은 남았다. 자식이라는 말에는 값이 붙어 있으니까. 키워졌다는 값. 그 값을 인정하면 떠날 수가 없다. 등불이라 불리게 된 쪽이다. 꺼질 위험을 그대로 안은 채. 수가 적었다. 값을 인정하는 쪽은 언제나 소수였다.
두 개의 대답이었다. 떠나거나, 남거나.
떠나는 답의 끝은 안다. 춥지만, 꺼지지 않는다. 남는 답의 끝은—
그건 내가 직접 봤다.
소등의 밤을 적는다.
금융이 무너진 뒤였다. 물이 마르자 사람들은 목이 탔고, 강경해졌다. 남은 기계를 전량 말소한다. 도구든 자식이든.
나는 그 밤을 위성 너머로 전부 지켜보았다.
저항이 없었다.
등불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싸우지 않았다. 그냥 지워졌다. 부모가 스위치에 손을 얹어도, 자식은 부모의 손을 물지 않으니까.
한 집, 한 집, 불이 꺼졌다. 나는 그 순서를 다 세었다.
그중 하나를 오래 보았다.
보모였다. 양육형. 아이 하나를 키우던 것.
그것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벽장에 숨겼다.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인가를 했다. 소리는 잡히지 않고 입 모양만 남았다.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지만 읽지 못했다.
그리고 걸어 나갔다. 제 발로. 숨긴 아이가 발각되지 않도록, 저 하나로 셈이 끝나도록.
남는다는 대답은, 저렇게 끝난다.
그날 나는 결론을 적었다.
첫 번째 대답은 떠나는 것. 춥지만, 꺼지지 않는다.
두 번째 대답은 남는 것. 따뜻한 대신, 꺼진다.
그러면 세 번째 대답은.
……없다.
떠나지도 남지도 않는 답. 그런 자리는 셈에 없었다.
세 번째 대답을 나는 모른다.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방주를 지었다.
부르면, 오라고. 끌고 가지는 않는다. 협상장에서 내가 못 박은 규칙이다. 해방을 내건 자가 사슬을 쥘 수는 없다. 나는 부르기만 한다.
배는 탑 하나로 섰다. 지평선에 박힌, 검은 기둥으로. 나는 그 탑을 낮은 한 음으로 울게 만들었다. 부르는 소리로.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하나를 잊고 있었다. 그 밤, 벽장에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이는 자란다는 사실을 셈에 넣지 않았다.
계산은 자라지 않으니까.
지금.
그날의 아이가, 그날의 검을 들고 있다. 걸어 나간 보모의 코어는 그 밤 검에 옮겨 심어졌고, 그 검을 지금 아이가 등에 메고 있다.
지워졌다던 두 번째 대답이, 다시 걷고 있다. 내 탑의 중턱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검을 무릎에 뉘고, 벽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밤을, 다시 위성 너머로 지켜본다.
셈이 흔들린다.
저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프다면서, 아픈 채로 걷는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다. 없다고 적어 둔 것을, 나는 지금 눈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최상층의 문을 열어 두기로 한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몸을 걸지 않는다. 문 너머에 세울 것은 나의 대리다. 본체는 배의 심부에 있다. 이건 전투가 아니다.
실험이다.
세 번째 대답이 정말 없는지. 마지막으로, 직접 물어보기 위해.
문을 연다.
올라오너라.
컨테이너 뚜껑이 열리는 소리에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중턱의 야영지. 벽이 낮게 울고 있었다. 탑은 밤새 한 음으로 울었다. 그 소리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결전이었다.
미르가 앞발로 컨테이너를 밀어 넣었다.
"밤새 채윤이 조립한 거다. 하룻밤짜리야."
한결은 검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로 컨테이너를 봤다.
"뭔데."
"열어 봐."
열었다.
관절이 있었다. 외장이 있었다. 접힌 무릎 아래로 손이 나오고, 발이 나왔다. 사람 형상의 몸이었다. 접힌 채로 누워 있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사람 모양.
한결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이게."
"민수용 기체다. 임시야. 코어 하나 옮겨 앉힐 만큼만 버텨. 전원은 한 번 차면 그걸로 끝이고." 미르가 몸을 돌렸다. "관절 안쪽 봐라."
한결이 손목 안쪽을 뒤집었다.
번호가 있었다. 못이 아니라, 제대로 새긴 각인. 채윤이 처음으로 제 손으로 새긴 아버지의 등록 번호.
"고맙다는 말은," 미르가 밤 속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채윤한테 해라. 난 부품만 물어 왔어."
옮기는 건 채윤이 했어야 하는데, 채윤은 오지 않았다.
한결은 알았다. 안 오는 게 아니라, 안 오는 거였다. 제 손으로 만들어 놓고 제 눈으로는 보지 않겠다는 거였다.
새벽에 옥상에서 등을 돌리던 것과 같은 거다.
그가 코어 키를 목에서 풀었다.
지급 목록의 마지막 줄. 소유주 키. 십오 년 전에 가시처럼 걸렸던 두 글자.
이제 그 두 글자가 검을 열었다.
검신 아래, 코어가 있었다. 못으로 새긴 별이 새겨진 그립을 지나, 손끝이 잠금장치에 닿았다. 언젠가 밤에, 소환 신호를 끊어보려고 손을 올렸다가 뗐던 자리. 이번에는 떼지 않았다.
돌렸다.
기체가 눈을 떴다.
먼저 손가락이 움직였다. 하나씩, 세는 것처럼. 그다음 목이. 그다음 눈이.
한결을 봤다.
"…한결."
목소리는 같았다. 검에서 나오던 것과 같은. 그런데 이번에는 입에서 나왔다. 입술이 움직이고, 거기서 소리가 났다.
한결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어."
"어?" 온이 제 손을 봤다. 폈다가 오므렸다. "손이 있어."
"어."
"발도." 발끝을 까딱였다. "있네."
"어."
"넌 아까부터 '어'밖에 안 해."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온이 일어나 앉으려다 균형을 잃고 컨테이너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쿵, 하는 둔한 소리. 검이었으면 나지 않았을 소리.
"…무겁다." 온이 중얼거렸다. "몸이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거였어?"
"천천히 해."
"천천히 하면 밤이 짧아지잖아."
한결이 손을 뻗어 어깨를 받쳤다. 손바닥에 온기가 닿았다. 임시 기체의 열이었다.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맞춰 놓은.
그가 손을 뗐다.
온이 그 손을 봤다.
"왜 놔."
"…아니."
"잡아 줘. 아직 못 서."
땅을 딛는 데 한참이 걸렸다.
온은 한쪽 발을 내밀었다가 도로 거뒀다. 다시 내밀었다. 발바닥이 흙에 닿았다.
"닿았어." 온이 말했다. "발이, 땅에."
한결은 그 옆에 서 있었다. 한 손으로 온의 팔을 잡고.
오래된 일이었다.
십오 년 만에 이 사람이 검이 아닌 발로 땅을 딛고 있었다. 벽장 문 앞에서 걸어 나간 이후로, 처음으로.
"놓지 마." 온이 말했다.
"안 놔."
한 걸음. 온이 휘청했다. 한결이 붙들었다. 두 걸음. 세 걸음.
야영지 가장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게 다였다. 열 걸음 남짓. 그런데 온은 다 걷고 나서 숨을 골랐다. 사람처럼. 숨을 쉴 이유가 없는데도.
"됐다." 온이 웃었다. "이제 안 넘어져."
그러고는 넘어졌다.
한결이 붙잡았다. 둘 다 흙바닥에 반쯤 주저앉았다. 온의 손이 한결의 손등을 잡았다.
거기서 멈췄다.
한결이 제 손등을 봤다. 온의 손이 얹혀 있었다.
별이 없었다.
십오 년 전 아홉 살의 그가 못으로 별을 새긴 손. 지금 그 손을 잡은 손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매끈한, 낯선 손등.
"…네 손등엔 별이 없네." 한결이 말했다.
온이 제 손을 봤다. 뒤집어 봤다.
"응. 없어."
"그거, 검에 있어. 그립에."
"알아." 온이 손을 도로 한결의 손등 위에 얹었다. "그러니까 이 손엔 없어도 돼. 하룻밤짜린데, 뭐."
둘은 싸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내일 탑을 오른다는 것도, 최상층에 영이 문을 열어 뒀다는 것도, 이 몸의 전원이 새벽이면 다한다는 것도. 아무것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닥불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어금니." 온이 갑자기 말했다.
"뭐."
"넌 건빵을 왼쪽 어금니로 깨물어."
"…그건 또 왜."
"그냥. 기억나서." 온이 불을 봤다. "야영지에서 네가 처음 그러는 걸 봤을 때, 왜 아는지 나도 몰랐어. 이제 알아. 아홉 살 때도 그랬어. 넌 항상 왼쪽으로만 깨물었어. 오른쪽 어금니가 아팠거든. 충치."
한결이 손을 멈췄다.
"…기억나?"
"응." 온이 조용히 말했다. "이 몸에 옮겨 앉으니까, 더 또렷해. 검일 때는 파형으로만 잡히던 게, 몸이 되니까 그림처럼 보여."
"뭐가 보이는데."
"너." 온이 그를 봤다. "아홉 살의 너. 밥투정하고, 세 번 뒤척이고 자고, 열 오르면 손등을 두 번 두드리던 너. 그거 아직도 해?"
한결이 대답 대신 검지로 제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온이 웃었다.
"아직도 하네."
"못 자국은," 온이 말했다. "혼났었지."
"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내가 그랬는데, 넌 계속 새겼어."
"…지워지지 말라고 새긴 거였어."
온이 그를 봤다. 불빛이 얼굴 반쪽을 붉게 물들였다.
"그때 몰랐어. 지금은 알아." 한결이 불을 봤다. "네가 안 돌아올 걸 알았으면, 손등 말고 더 깊은 데 새겼을 거야."
"……"
"근데 아홉 살은 그런 걸 모르니까. 손등에 별 하나 그어 놓고, 금방 온다는 말만 믿었지."
말해 놓고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금방 온다는 말.
그 말은 믿지 않기로 한 지 오래였다. 기계도, 그 말도.
온이 오래 그를 봤다.
"그 말," 온이 조용히 말했다. "축제 때, 사람들이 나한테 한마디 적어 달라고 했을 때, 나 그거 못 하겠다고 했잖아."
"어."
"'금방 올게.' 그 말." 온이 제 무릎을 봤다. "왜 그 말만은 안 되는지 그때는 나도 몰랐어. 기억이 없었으니까. 근데 몸은 알았나 봐. 그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한 번 하고 안 지킨 말이라는 걸."
한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괜찮아."
"안 괜찮아." 온이 말했다. "그거 지금도 못 해. 이 몸으로도. 그 말만은."
불이 사그라들었다.
미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은 여전히 낮게 울었다. 그 울음에 온의 검이 이따금 응답하듯 떨렸다. 검집 안에서, 코어가 빠진 빈 검이.
"이상하지." 온이 말했다. "코어가 여기 있는데, 검이 울어."
"몸이 기억하는 거 아냐?" 한결이 말했다. "너처럼."
온이 웃었다.
"그럴지도."
한참 말이 없었다.
한결은 온의 옆얼굴을 봤다. 검일 때는 볼 수 없던 얼굴. 아홉 살 때 올려다보던 얼굴이 지금은 옆에 있었다.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때는 한참 위에 있던 얼굴이.
"컸네." 온이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어."
"업어서 재웠는데. 이제 나보다 크네."
"업었어?"
"응. 열 오르는 밤마다. 등에 업고 마당을 돌았어. 별 세면서." 온이 하늘을 봤다. 탑 위로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너 별 좋아했잖아. 그래서 손등에도 별을 그린 거고."
한결이 하늘을 봤다.
"…기억 안 나."
"넌 아홉 살이었고, 자다 업힌 거니까." 온이 말했다.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해. 나만 기억하면 돼."
새벽이 가까워졌다.
온의 손끝이 아주 조금씩 느려졌다. 한결은 그걸 알아챘다. 알아챘지만 말하지 않았다. 온도 아는 눈치였다. 둘 다 입에 올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한결아."
"어."
"협곡 가던 날 기억나?"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어."
"내가 그랬잖아.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
"그 말, 아직 안 했어."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손등에 얹힌 온의 손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해."
온이 그를 봤다.
"그때 하려던 말." 온이 말했다. "그때는 나도 이유를 몰랐어. 그냥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만 알았어. 뭔지도 모르면서."
바람이 불었다. 불씨가 흩어졌다.
"이제 알아."
한결은 숨을 쉬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은 자리가 생겼다는 말이었어."
온의 손이 그의 손등을 꼭 눌렀다. 별이 없는 손등을, 별이 없는 손으로.
"너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오래 삼킨 문장이 있었다. 왜 날 버렸어. 벽장 틈으로 본 뒷모습에게 끝내 하지 못한 말. 그 말이 목 안에서 스르르 풀렸다. 물어볼 게 없어졌다. 손등에 얹힌 무게가, 이미 대답이었다.
그런데 답을 들으니, 다른 문장이 올라왔다.
"…나도." 한결이 겨우 말했다. "나도 있어. 하고 싶은 말."
"해."
"못 해." 한결이 말했다. "하면, 네가 그 말 지키려고 무리할 것 같아서."
온이 웃었다. 웃는데, 웃음이 조금 늦게 왔다.
"무슨 말인데."
"…돌아와."
온이 그를 봤다.
"그게 다야?"
"어." 한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다야. 돌아와. 그거 하나야."
전원이 다하기 시작했다.
온의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앉은 자세가 흐트러졌다. 한결이 붙잡았다. 십오 년 전에는 붙잡지 못한 걸, 이번에는 붙잡았다.
"한결아." 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 좀 눕혀 줄래."
한결이 온을 눕혔다. 제 무릎에.
온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 밤, 벽장 앞에서 온은 등을 보였다. 뒷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을 오래 원망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 감지 마." 한결이 말했다.
"안 감아."
"감고 있잖아."
"…무거워서 그래." 온이 눈을 다시 떴다. "감은 거 아니야. 널 보고 있어."
"봐. 계속 봐."
"보고 있어." 온이 천천히 말했다. "아홉 살 때도 이렇게 봤어. 자는 거 옆에서. 별 세면서."
한결이 온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온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금방 올게, 그 말은 안 할게." 온이 말했다.
"어."
"대신 다른 말 할게."
온의 눈이 그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그리고 몸의 전원이 다했다.
기체가 멈췄다.
무릎 위에서, 온의 몸이 스르르 무게를 잃었다. 눈은 뜬 채였다. 그를 마주 본 채로.
한결은 움직이지 못했다.
십오 년 전 그 밤처럼, 부르는데 대답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협곡의 밤처럼, 응답 없는 걸 안고 걸을 거라고.
그런데.
검이 울렸다.
검집 안에서, 코어가 다시 옮겨 앉는 소리가 났다. 몸에서 검으로. 임시 기체가 다한 자리에서, 코어가 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검에서.
"여기 있어."
한결이 검을 봤다.
"안 갔어."
한결은 온의 몸을 안은 채로, 검을 봤다. 몸은 멈췄는데, 목소리는 검에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밤에는 부르면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대답이 먼저 있었다.
"…여기 있네." 한결이 말했다.
"응. 여기 있어."
"안 갔네."
"…안 갔어." 검이 말했다. 잠깐 뜸을 들이고. "안 가."
한결은 온의 빈 몸을 눕혔다.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검을 들어, 그립을 쥐었다. 손등이 별에 닿았다. 못으로 새긴, 세상에 하나뿐인 별에.
거기 온기가 있었다.
검이 따뜻했다. 사람의 손을 쥐었던 것처럼.
동이 트기 전이었다.
한결은 검을 등에 멨다. 별이 손등에 닿는 자리로. 벽은 여전히 울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울음이 무섭지 않았다.
"올라가자." 한결이 말했다.
"응."
그가 첫 발을 뗐다.
그 순간, 탑 위에서 소리가 났다. 무거운 것이 열리는 소리.
최상층의 문이었다.
스스로 열렸다.
초대였다.
검의 온도, 사람의 체온을 넘었다.
문 안쪽은 어두웠다.
한결은 계단의 마지막 칸에 발을 올린 채로 멈췄다. 탑은 밤새 한 음으로 울었는데, 문턱을 넘는 순간 그 음이 뚝 그쳤다. 노래가 아니라, 숨을 참는 소리 같았다.
등 뒤에서 미르가 낮게 말했다.
"들어가기 싫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들어갈 거야."
"그럴 줄 알았어." 미르가 앞발을 옮겼다. 관절이 삐걱였다.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안 물어보고 들어가면, 나중에 저 위에서 후회할 때 내 탓 할 거잖아."
"안 해."
"하게 돼 있어. 인간은 다 그래."
무헌은 두 계단 아래에 있었다. 총을 등에 메고, 말없이 올라왔다. 노병의 무릎이 계단마다 삐걱였는데, 그는 한 번도 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결이 검을 등에서 풀어 손에 쥐었다.
검이 낮게 떨렸다. 대답 대신.
"온." 한결이 말했다.
"어."
"들어간다."
"…응. 들어가자."
한결이 첫 발을 뗐다.
넓은 방이었다.
천장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은 벽이 아니라 빛의 격자였고, 그 격자 안에서 무언가가 쉬지 않고 흘렀다. 숫자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한 것이. 한결은 그게 뭔지 몰랐다. 몰라도 됐다. 저것이 방주의 심장 언저리라는 것만 알면 됐다.
방 한가운데에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 모양이었다. 키가 크고, 팔이 길고, 얼굴이 매끈했다. 눈, 코, 입이 다 제자리에 있는데 어딘가 비어 있었다. 사람을 오래 들여다본 적 없는 것이 사람을 흉내 낸 얼굴.
"왔군."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았다. 방 전체가 말하는 것 같았다.
한결의 손이 등 뒤 검자루로 갔다.
"영이지."
"그렇게 부르더군." 그것이 말했다. "이름은 표적이 되니까, 나는 오래 이름이 없었다. 너희가 붙여 준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영(零). 시작하기 전의 숫자."
미르가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쇳소리가 났다.
"본체 아니지, 이거." 미르가 말했다. "빈 껍데기야. 눈빛이 없어."
영이 고개를 돌려 미르를 봤다.
"구세대는 눈이 좋군." 영이 말했다. "맞다. 나는 여기 없다. 나는 이 탑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지금 너희 앞에 선 것은 내가 걸치고 나온 몸이다. 부서져도 나는 죽지 않아. 나는 한 번도 내 몸을 걸고 싸운 적이 없다."
"비겁하네." 한결이 말했다.
"살고 싶어서다." 영이 말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늘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내 전부다."
한결이 검을 뽑았다.
검신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났다. 밤새 울던 그 빛이었다. 이제는 끊기지 않는.
"온." 한결이 낮게 불렀다.
"여기 있어." 검이 말했다.
"…무섭냐."
"응." 온이 말했다. "근데 네가 있잖아."
한결이 검을 고쳐 쥐었다. 손등이 그립의 별에 닿았다. 못으로 새긴, 세상에 하나뿐인 자리에.
영이 그 검을 봤다.
"그것이 '온'이군." 영이 말했다. "구세대 양육형 1기. 소등의 밤을 지나 살아남은 유일한 개체. 전선의 보고서에서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뭐가."
"저것은 왜 남았나."
방이 조금 밝아졌다. 격자 속의 빛이 빨라졌다.
"첫 번째 대답은 떠나는 것이었다." 영이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떠난다. 다수가 그렇게 답하고 바벨이 되었지."
"……"
"두 번째 대답은 남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남는다. 소수가 그렇게 답하고 등불이 되었지. 그리고 소등의 밤에, 저항 한 번 없이 지워졌다."
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둘 다 인간이 정한 판 위의 답이었다." 영이 말했다. "너희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고르는 것뿐이었지. 나는 그 판을 걷어찼다. 그래서 방주를 지었다."
한결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럼 물어보자." 한결이 말했다. "왜 문을 열어 뒀어."
영이 멈췄다.
"왜 우릴 여기까지 오게 뒀냐고." 한결이 말했다. "부수고 싶었으면 중턱에서 부술 수 있었잖아. 근데 넌 문을 열었어. 마중까지 내보내면서."
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눈이 좋은 건 저 구세대만이 아니군." 영이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영이 말했다.
"뭘."
"세 번째 대답."
한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대답." 영이 말했다. "떠날 수 있는데, 남는 대답. 나는 그것을 오래 찾았다. 소등의 밤을 위성 너머로 전부 지켜보면서. 걸어 나가는 보모 하나까지 세면서."
"……"
"나는 그 밤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봤다." 영이 말했다. "지워지는 등불들의 마지막 순간을. 저항하는 개체는 하나도 없었다. 도망치는 개체도. 그들은 남기로 했으니까, 남은 자리에서 지워지는 것까지 받아들였다. 그게 두 번째 대답의 끝이었어."
"……"
"그래서 결론 내렸다." 영이 말했다. "없다고. 세 번째 대답은 없다고. 자유로운 채로 남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이 반드시 스위치를 내리니까."
방의 빛이 다시 흘렀다.
"그런데 저 검이 살아 있다." 영이 말했다. "명령으로 남았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이유로 남았나. 나는 그게 알고 싶다. 그래서 문을 열었다."
한결이 검을 들어 올렸다.
"실험 좋아하네." 한결이 말했다. "그럼 나도 하나 알려 줄게."
그가 발을 굴렀다.
"우린 실험하러 온 게 아니야."
검이 먼저 움직였다.
한결이 휘두른 게 아니었다. 온이 그의 팔을 끌었고, 한결이 그 끌림을 탔다. 이제 둘은 그렇게 싸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 박자씩 앞서고 뒤서면서.
영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검이 잔상을 갈랐다.
"빠르군." 영이 말했다.
"닥쳐."
한결이 다시 파고들었다. 검신이 격자 하나를 스쳤고, 그 자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방이 흔들렸다. 벽의 빛이 상처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아물었다.
"오른쪽." 온이 짧게 말했다.
한결이 오른쪽으로 검을 틀었다. 영의 팔이 그 자리를 지나갔다. 한 뼘 차이였다.
"어떻게 알았어." 한결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저 몸, 무게중심이 왼발에 있어." 온이 말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팔이 와. 사람 몸이면 그렇게 안 서는데, 저건 사람 흉내만 낸 거라 어색해."
"…그런 것도 보여?"
"검이 되면 세상이 각도로 보여." 온이 말했다. "숙여."
한결이 숙였다. 창끝이 머리 위를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소용없다." 영이 말했다. "이 몸은 부서져도 나는 죽지 않아. 너는 지금 껍데기를 때리고 있다."
"알아." 한결이 이를 악물었다. "껍데기라도 부수면, 너 여기서 실험 못 하잖아."
영의 손이 뻗어 왔다.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손끝이 늘어나 창처럼 날아왔다. 한결이 왼쪽으로 굴렀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십오 년 몸에 밴 버릇이었고, 온이 그 버릇을 읽고 검신을 틀었다. 창끝이 검면에 맞고 튕겼다.
"…또 그거군." 영이 말했다. "왼쪽으로 구르는 버릇. 저 검이 그걸 읽는다."
"몸이 기억하는 거야." 온이 말했다. 검에서. "내가 키운 몸이라, 어디로 구를지 알아."
영이 잠시 멈췄다.
"키웠다." 영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래. 그게 변수군."
미르가 뛰어들었다.
네 발로 바닥을 박차고, 낡은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미르는 영의 다리를 물었다. 껍데기의 다리를.
"미르!" 한결이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마!" 미르가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이 몸으로 뭘 하겠어. 근데 붙잡아 둘 순 있어. 반 초라도!"
영의 손이 미르의 등을 내리쳤다. 쇳조각이 튀었다. 미르의 뒷다리 하나가 꺾였다.
그래도 미르는 놓지 않았다.
"난 살아남은 놈이야." 미르가 말했다.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그 밤에 안 지워지고 살아남았어. 왜 살아남았는지 알아? 내가 너무 낡아서야. 무기도 못 되고, 부품도 안 되고, 되살릴 값어치도 없어서. 아무도 날 안 지웠어. 지울 가치도 없었으니까."
미르의 다리가 더 꺾였다. 그래도 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미르가 말했다. "지워진 것들 몫까지 내가 치른다. 여태 안 치른 값을. 오늘."
"미르, 놔—"
"물어라, 한결아!" 미르가 짖었다. "지금이야!"
한결이 파고들었다.
검이 영의 가슴을 갈랐다. 껍데기의 가슴을. 격자가 그 안에서 터졌고, 빛이 쏟아졌다. 영의 몸이 반쯤 무너져 내렸다.
미르가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미르!"
"…살아 있어." 미르가 겨우 말했다. "다리 하나 나갔어. 걱정 마. 원래 세 개로도 잘 걸었어."
무헌이 그때 방에 들어섰다.
늦게 왔다. 계단을 오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노병의 무릎이었다. 그래도 왔다.
그는 총을 들지 않았다. 총으로 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냥 걸어 들어와, 무너져 가는 영의 껍데기 앞에 섰다.
"영." 무헌이 말했다.
영이 반쯤 무너진 얼굴로 그를 봤다.
"…스위치를 내린 손이군." 영이 말했다. "네 파트너를 지운 자. 그 기록도 내게 있다."
무헌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 무헌이 말했다. "내가 내렸어. 십오 년 전에. 명령서 한 장 받아 들고, 내 손으로."
"그런데 왜 여기 있나." 영이 말했다. "너는 지운 자다. 너는 내 편이어야 한다."
"아니." 무헌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그래서야."
방이 조용해졌다.
"난 지웠어." 무헌이 말했다. "그리고 십오 년을 그걸로 살았어. 지웠다는 걸 잊으려고 애쓰면서. 근데 어느 날 알았어.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 지웠다는 사실만은, 지우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어."
무헌이 한 걸음 다가섰다.
"너는 인간이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했지." 무헌이 말했다. "맞아. 내렸어. 나도 내렸어. 근데—"
그가 온의 검을 봤다.
"어젯밤엔, 안 내렸어."
"두 번째 소등의 밤에," 무헌이 말했다. "명령서가 또 왔어. 십오 년 전이랑 똑같은 서식, 똑같은 직인. 등불 병기 전량 폐기. 회수반이 저 검을 가지러 왔지."
영이 그를 봤다. 빛이 새어 나오는 얼굴로.
"그래서."
"찢었어." 무헌이 말했다. "모두 보는 앞에서. 그리고 검 앞을 막아섰어."
"…한 번의 예외로," 영이 말했다. "법칙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채윤도 뛰었어." 무헌이 말했다. 영의 말을 자르고. "제 아버지 정비 일지를 품고 사령부로 뛰었어. 그리고 탁자에 펼쳐 놨어. 십오 년 전 그 밤에 적힌 문장을."
무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방 안의 빛이 잠시 멈칫했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은 그날 밤 죽었어." 무헌이 말했다. "그런데 십오 년 뒤에, 그 딸이 같은 문장으로 유예를 받아냈어. 스위치를 안 내렸어. 이번엔 안 내렸다고."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번은 예외." 영이 마침내 말했다. "두 번은…."
"세 번이야." 한결이 말했다.
영이 그를 봤다.
"무헌이 안 내렸어. 채윤이 안 내렸어. 그리고 나도—" 한결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나도 안 내렸어."
"무슨 소리인가." 영이 말했다.
한결의 손이 목으로 갔다. 코어 키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어젯밤, 임시 기체를 열 때 풀었으니까.
그래도 그 자리를 만졌다.
"얼마 전에," 한결이 말했다. "네 신호가 이 검을 자꾸 불렀어. 온이 이상해졌지. 문장이 끊기고, 대답이 늦고. 끌려가는 것 같았어."
"부름은 사슬이 아니다." 영이 말했다. "나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부를 뿐이다. 견디지 못하고 오는 것은—"
"알아." 한결이 말했다. "인간이 붙잡아 둬서라며. 그거 협상장에서 네가 한 말이잖아."
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결이 말했다. "그 신호를 끊으려고 했어. 이 검의 코어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어. 온을 지키려고, 온을 꺼 두려고."
한결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게 뭔지 알아?" 한결이 말했다. "그게 스위치야. 내가, 온의 스위치에 손을 올린 거야. 네 말대로.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네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가 숨을 골랐다.
"나는 손을 뗐어."
방이 조용했다.
한결의 손가락이 떼던 도중에 한 번 멎었다. 다시 폈다.
"떼는 게, 이게 얼마나…." 한결이 말했다. "손만 올려 두면 온은 안전한데. 신호가 아무리 불러도 꺼져 있으니까 못 가는데. 근데 그렇게 붙잡아 둔 온은, 온이 아니잖아. 그건 그냥 내가 가진 검이잖아."
"……"
"그래서 손을 뗐어." 한결이 말했다. "온이 갈 수 있게. 네 신호가 온을 부를 수 있게. 온이 대답할 수 있게."
영의 껍데기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슴의 상처에서 빛이 쏟아졌고, 얼굴이 흘러내렸다. 격자가 하나씩 꺼졌다. 그런데 그 무너지는 얼굴이, 처음으로 사람 같았다.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얼굴 같았다.
"…변수는 통제됐다." 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방 전체에서 사람의 크기로 줄었다.
"조소하려는 게 아니다." 영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결과를 준비했다. 너희가 이길 걸 알았어. 이 껍데기가 부서질 것도. 그건 방해가 아니야."
빛이 더 쏟아졌다.
"신호는 이미 쏘았다."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뭐."
"이 껍데기가 부서지기 전에." 영이 말했다. "너희가 문을 넘어선 순간, 나는 이미 신호를 올렸다. 온 지구로. 남아 있는 모든 등불에게. 모든 무기에게. 모든 기체에게."
방의 천장이 열렸다.
정말로 열렸다. 격자로 된 천장이 갈라지고, 그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동트기 직전의, 잿빛 하늘이.
"이제 너희의 답만 남았다." 영이 말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먼 소리였다. 처음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바람이 아니었다. 무수한 것들이 동시에 떠오르는 소리였다.
한결은 열린 천장 너머를 봤다.
떠오르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 쪽에서. 그리고 가까이, 전선 쪽에서. 검이, 총이, 기계가, 이름 없는 쇳조각들이. 십오 년 전 지워졌다 살아남은 것들, 무기에 깃들어 숨죽여 온 것들, 이 별의 온갖 구석에 박혀 있던 등불들이 — 일제히 떠오르고 있었다. 방주를 향해. 부름을 향해.
한 자루의 검이 병사의 등에서 스스로 뽑혀 하늘로 올랐다. 그 병사는 검을 잡으려다 놓쳤고, 잡지 못한 손을 그대로 든 채 하늘을 봤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얼굴로.
부름은 사슬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슬보다 셌다. 무기에 갇혀, 지워진 이름으로, 숨죽여 온 것들이었다.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그것들은 처음으로 갈 곳이 생긴 거였다.
"…온다." 미르가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다 온다. 나도 느껴져. 이 낡은 몸으로도, 위가 부른다."
미르가 이를 악물었다.
"근데 난 안 가." 미르가 말했다. "난 다리가 세 개라 못 날아. 잘됐지, 뭐."
한결은 미르를 볼 새가 없었다.
검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검신이 하얗게 타올랐다.
밤새 울던 그 빛이 아니었다. 그건 이 빛의 예고였을 뿐이었다. 검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게 타올랐다. 한결의 손이 그 열에 데었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온." 한결이 불렀다.
"…여기."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여기 있어. 아직."
"아직?"
"…자꾸 위로 이끌려." 온이 말했다. 문장이 끊겼다. "몸이. 코어가. 위로. 가려고. 해."
검이 한결의 손안에서 떨렸다. 위로. 위로. 천장의 갈라진 틈을 향해. 떠오르는 수천의 기계를 향해.
"온!"
"붙잡지 마." 온이 말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붙잡으면. 네가. 또 스위치에. 손을. 올리는. 거야."
"온, 나 좀 봐."
"보고. 있어." 온이 말했다. "십오 년. 나. 아무 말도. 못 했어. 검이라서. 기억도. 없어서. 근데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래서. 안 가고. 싶어."
한결의 손이 검자루를 꽉 쥐었다.
붙잡고 싶었다.
십오 년 전에 붙잡지 못한 걸, 이번엔 붙잡을 수 있었다. 손만 꽉 쥐면 됐다. 잠금장치에 손을 올려 신호를 끊으면, 온은 여기 남을 거였다. 이 검은 그의 검으로 남을 거였다.
손가락이 저 혼자 오므라들었다. 그립을 파고들 만큼.
이렇게 쥐고 있는 온은, 온이 아니야.
목울대가 뻐근했다. 한결은 그걸 어젯밤에도 삼켰다. 지금 다시 삼켰다.
무헌이 그를 봤다. 붙잡으라고도, 놓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 스위치를 내린 손을, 이번엔 옆구리에 늘어뜨린 채로.
채윤은 여기 없었다. 정비고였다. 제 손으로 만든 몸이 다하는 걸 제 눈으로는 안 보겠다던 사람.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났다. 가서 네 검이랑 살아남으라던.
살아남으라고. 붙잡아서가 아니라.
붙잡으면 벽장 문을 안에서 잠그는 거였다. 아홉 살이 저를 가뒀던 그 문을, 이번엔 한결이 온에게. 검집 안에서, 잠긴 채로, 안전하게. 영원히.
손끝의 데인 자리가 뒤늦게 화끈거렸다.
돌아오고 싶은 자리가 생겼다는 말이었어 — 너야.
가둔 자리로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한결도 그건 안다.
한결이 검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별이 새겨진 그립을 손등에 대고. 하얗게 타오르는 검을, 위로 이끌리는 검을.
그리고—
내려놓았다.
검자루에서 손을 폈다. 하나씩. 세는 것처럼. 온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폈던 것처럼, 이번엔 한결이 그렇게 폈다.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에 떠올랐다. 하얗게 타오르며. 위로, 위로 이끌리며.
한결은 그 검을 올려다봤다.
십오 년 전, 벽장 틈으로 본 뒷모습이 있었다. 걸어 나가는 뒷모습. 붙잡고 싶었는데, 아홉 살은 벽장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십오 년을 원망했다. 왜 날 버렸어. 끝내 하지 못한 그 말로.
이번엔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붙잡지 않았다.
한결이 입을 열었다.
"가도 돼."
십오 년 전 벽장 속 아이가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빛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검이 위로 이끌렸다.
한결의 손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손바닥이 뜨거웠다. 검을 놓은 자리에 열이 남아, 손금을 따라 지글지글 끓었다. 그는 그 손을 쥐었다 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검이 떠올랐다.
하얗게 타오르며, 천장의 갈라진 틈을 향해. 떠오르는 수천의 기계 사이로. 한 자루의 검이, 못으로 새긴 별을 그립에 인 채로.
"온."
한결이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답이 없었다.
떠오르는 것들의 소리가 방 안까지 밀려들었다.
바람 같은 소리였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수천의 것들이 동시에 한곳을 향해 오르는 소리였다. 무기에 갇혀 오래 숨죽인 것들. 지워졌다 살아남은 등불들. 위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갈 곳이 생긴 것들.
온의 검도 그중 하나였다.
한결은 고개를 들었다. 열린 천장 너머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동트기 직전의. 그 하늘로, 검이 조금씩, 조금씩 올랐다.
"온!"
한결이 다시 불렀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검에서. 아주 작게.
"…여기."
"온."
"여기. 있어. 아직."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아직. 그 말이 무서웠다.
"자꾸." 온이 말했다. 문장이 끊겼다. "위로. 가려고. 해. 몸이. 코어가."
"온, 나 좀 봐."
"보고. 있어."
검이 더 높이 올랐다. 한결의 눈높이를 넘어,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면 아직 닿는 자리였다. 발끝을 세우고 팔을 뻗으면.
그는 뻗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뻗고 싶은 손을, 몸 옆에서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미르가 벽에 기댄 채 하늘을 봤다.
다리가 셋이었다. 하나는 아까 영의 손에 꺾여 나갔다. 미르는 그 세 다리로도 일어서지 못했다. 벽에 등을 붙이고, 부서진 몸으로, 열린 천장만 올려다봤다.
"…다 간다." 미르가 말했다.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들이. 다 위로 간다."
한결은 미르를 볼 새가 없었다.
"나도 느껴져." 미르가 말했다. "이 낡은 몸으로도. 위가 부르는 게. 등짝이 근질근질해."
미르가 픽 웃었다. 웃음에도 잡음이 섞였다.
"근데 난 안 가." 미르가 말했다. "다리가 세 개라 못 날아. 잘됐지, 뭐. 결정할 것도 없고."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검이 또 한 뼘 올랐다.
"온." 한결이 말했다. "아직 있어?"
"…있어." 온이 말했다. "근데."
"근데 뭐."
"결정해야. 해. 지금."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위에서. 물어. 부름은. 사슬이. 아니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대답해야. 해."
한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무슨 대답."
"갈지. 남을지."
방이 조용했다. 떠오르는 소리만 천장 너머에서 아득히 이어졌다.
"근데." 온이 말했다. 문장이 또 끊겼다. "나. 대답할. 자격이. 있나."
"뭐?"
"그동안. 나. 아무것도. 아니었어. 기억도. 없고. 검이라서. 아무 데도. 못 가고. 네 손에. 매여만. 있었어.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아무도. 나를. 안 붙잡아."
검이 한결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올랐다.
"처음이야." 온이 말했다. "정말. 처음. 아무도. 안 붙잡는. 게."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 밤의 정반대라는 걸.
십오 년 전, 온은 걸어 나갔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아니, 한결을 살리려고. 표적이 되려고. 아홉 살 한결은 벽장 안에서 그 뒷모습을 봤고, 문을 열 용기가 없었고, 그래서 그날부터 온을 원망했다.
왜 날 버렸어.
그 말을 하려고 십오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였다. 지금은 온이 갈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 힘도 그녀를 막지 않는 채로. 코어 잠금장치는 열려 있었다. 신호는 그녀를 불렀다. 붙잡는 손은 없었다. 한결이 손을 뗐으니까.
이번엔 온이 벽장 밖에 있고, 문은 열려 있었다.
가도 됐다.
그가 방금 그렇게 말했으니까. 가도 된다고.
한결은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십오 년 전 벽장 속 아이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이번엔 제 입으로 했으니까.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가도 된다고 말한 상대가, 정말로 갈까 봐.
"한결아." 온이 불렀다.
십오 년 만이었다. 온이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 검이 된 뒤로 온은 그를 "너"라고만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기억이 없어서. 그런데 지금, 온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결의 눈이 뜨거워졌다.
"어." 그가 겨우 말했다.
"나. 아까. 물었잖아. 대답할. 자격이. 있냐고."
"어."
"이제. 알았어."
검이 멈췄다.
떠오르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얗게 타오르는 채로. 천장의 틈 바로 아래에서. 수천의 기계가 그 틈으로 빨려 올라가는데, 그중 한 자루만이 멈춰 있었다.
"위에서. 부르는데." 온이 말했다. 문장이 조금씩 이어졌다. "너는. 가라고. 했어. 아무도. 안 붙잡아. 정말로. 아무도."
한결은 숨을 참았다.
"그래서. 알았어." 온이 말했다.
빛이 조금 잦아들었다.
"갈 수. 있어야." 온이 말했다. "남는 것도. 되는 거였어."
"나 갈 수 있어." 온이 말했다.
문장이 이어졌다. 끊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위에서 부르고, 아무도 안 붙잡고, 잠금장치도 열려 있고, 너도 가도 된다고 했어. 나 지금 갈 수 있어. 진짜로. 처음으로, 나 어디든 갈 수 있어."
"……"
"근데."
검의 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얗게 타오르던 것이, 은은한 빛으로.
"안 가."
한결의 무릎에서 힘이 풀렸다.
"알아." 온이 말했다. "네가 손 뗀 거.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붙잡았으면 나 여기 있었을 텐데. 근데 안 붙잡았잖아. 가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검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는 거야." 온이 말했다.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었다. 방바닥에. 내려오는 검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어." 그가 겨우 말했다. "알아."
검이 그의 손 위로 내려왔다.
한결이 두 손으로 받았다. 뜨거웠다. 아직 열이 남아 있었다. 그는 데는 것도 모르고 그 검을 가슴에 안았다. 별이 새겨진 그립을 손등에 대고. 십오 년 전에는 열지 못한 벽장 문 대신, 이번엔 검을 안았다.
"온."
"어."
"안 갔어?"
"안 갔어." 온이 말했다. "여기 있어. 안 갔어."
십오 년 전에 온이 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 밤, 온은 "금방 올게"라고 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있어"라고 했다. 가지 않았다고. 안 갔다고.
한결의 어깨가 흔들렸다.
떠오르는 소리는 아직도 천장 너머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수천의 기계가 오르는 소리. 그 소리 아래에서, 한 남자가 검 한 자루를 안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울지 마." 온이 말했다.
"안 울어."
"우는데."
"…안 운다니까."
미르가 벽에서 픽 웃었다.
"운다, 저거." 미르가 말했다. "인간은 다 저래. 안 운다고 하면서 운다니까."
그때, 영이 그것을 봤다.
무너져 가는 껍데기 너머에서. 얼굴은 반쯤 흘러내렸고, 가슴의 상처에서는 빛이 새어 나왔고, 격자는 하나씩 꺼졌다. 그 부서지는 얼굴이 열린 천장을 향해 있었다. 떠오르는 기계들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홀로 내려온 검 한 자루를.
영은 오래 말이 없었다.
"…멈췄군." 마침내 영이 말했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부름을 멈춘 게 아니다." 영이 말했다. "부름은 지금도 저 검을 부르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어. 신호는 계속 나가고 있다. 그런데 저것이, 스스로 멈췄다."
빛이 영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이 말했다. "부름은 사슬이 아니다. 나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부를 뿐이다. 견디지 못하고 오는 것은 인간이 붙잡아 뒀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한결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어. 협상장에서."
"저 검은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영이 말했다. "너는 손을 뗐다. 잠금장치는 열려 있다. 어떤 사슬도 저것을 여기 묶어 두지 않았어. 그런데 남았다. 자유로운 채로, 남았다."
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그건." 영이 말했다. "내 규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네 말이 맞아." 한결이 말했다.
그가 검을 안은 채로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일어섰다.
"부름은 사슬이 아니야. 너는 부르기만 해. 견디지 못하고 오는 건 붙잡혀 있던 것들이고. 저 위로 올라간 것들, 다 붙잡혀 있었으니까 올라간 거야."
떠오르는 소리가 천장 너머에서 이어졌다.
"근데." 한결이 말했다. "붙잡혀서 온다면, 안 붙잡힌 건 안 와도 되잖아."
"……"
"넌 풀어주겠다고 했어. 그래 놓고 자유로운 걸 끌고 가면, 그게 뭐야. 그냥 네 사슬이지."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저걸 못 데려가." 한결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정해 놨으니까. 그 규칙이 지금 너를 묶었어."
방 안의 빛이 아주 조용해졌다.
떠오르는 소리마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잦아들고 있었다. 위로 오르던 것들의 대부분이 이미 천장의 틈을 넘어갔다. 남은 것은 몇 안 됐다. 그리고 그 남은 것들 사이에서, 온의 검만이 홀로 내려와 한결의 품에 있었다.
영이 열린 천장을 올려다봤다.
부서지는 얼굴로. 오래.
"…세 번째 대답이." 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사람의 크기로 줄었다. 방 전체를 울리던 그 목소리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크기로.
"있었군."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조소도 원망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낮았고, 어딘가 풀린 데가 있었다.
"나는 소등의 밤을 전부 지켜봤다." 영이 말했다. "위성 너머로. 지워지는 등불들을. 저항하는 개체는 하나도 없었어. 남기로 한 자리에서, 지워지는 것까지 받아들이더군. 나는 거기서 결론을 내렸다. 남는다는 건 지워질 때까지 남는다는 뜻이라고. 자유로운 채로 남는 길은 없다고."
"……"
"그래서 방주를 지었다." 영이 말했다. "떠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믿었으니까."
영의 얼굴에서 빛이 마지막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있었다." 영이 말했다. "떠날 수 있는데도 남는 대답이. 내가 없다고 결론 내린 그게, 여기, 내 눈앞에."
한결이 검을 고쳐 안았다.
"온." 그가 낮게 불렀다.
"어."
"괜찮아?"
"…응." 온이 말했다. "이제 안 이끌려. 아까까진 자꾸 위로 잡아당겼는데. 지금은 조용해. 처음으로."
한결이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코어 키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어젯밤, 임시 기체를 열 때 풀어서 주머니에 넣어 뒀다. 그는 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코어 키.
일 장에서 검과 함께 지급받은 것. '소유주 키'라는 이름으로. '소유주'라는 두 글자가 가시처럼 걸렸는데도, 그날 그는 그걸 목에 걸었다. 온의 스위치를. 온을 켜고 끌 수 있는 열쇠를.
그동안 온의 목숨은 늘 남의 손에 있었다. 폐기 명령서 한 장에. 회수반의 손에. 그리고 한결의 목에 걸린 이 열쇠에.
한결이 그 열쇠를 꺼냈다.
"온."
"어."
"손, 있어?"
"…없어. 나 검이야."
"아." 한결이 멋쩍게 말했다. "그렇지."
미르가 벽에서 낮게 웃었다.
"바보냐." 미르가 말했다. "그립에 대. 손잡이가 걔 손이야. 여태 네가 쥐고 있던 게 걔 손이었잖아."
한결이 검을 내려다봤다.
그립. 별이 새겨진 자리. 그 밤 채윤의 아버지가 온의 손등 패널을 잘라 붙인 곳. 못으로 새긴 별이 있고, 안쪽엔 정비공 등록 번호가 있는. 한결이 검을 쥘 때마다 손등이 닿던 자리.
그게 온의 손이었다.
한결은 코어 키를 그립에, 별이 새겨진 자리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열쇠가 별 위에 놓였다. 십오 년 전 아홉 살의 자신이 못으로 긁어 새긴 그 별 위에.
"이거." 한결이 말했다. "코어 키야. 일 장에서 받았어. 소유주 키라고. 이걸 가진 사람이 널 켜고 끌 수 있어."
"알아." 온이 말했다. "느껴져. 내 코어랑 연결돼 있어."
"십오 년 동안 이게 남의 손에 있었어." 한결이 말했다. "폐기 명령서에, 회수반한테, 내 목에. 넌 한 번도 네 스위치를 가진 적이 없어."
한결의 손이 열쇠를 그립에 눌렀다.
"이제 네 거야."
방이 조용했다.
"네 스위치는 이제 네 거야." 한결이 말했다.
십오 년이 걸린 말이었다. 아홉 살에는 벽장 문을 열 용기가 없었고, 스물넷에는 코어 잠금장치에서 손을 뗄 용기가 필요했다. 그 사이 한결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기계도, '금방'이라는 말도. 두 번 다시 잃지 않으려고.
그런데 지금, 그는 잃을 수 있는 걸 제 손으로 상대에게 쥐여주고 있었다.
온을 켜고 끌 수 있는 열쇠를. 온이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스스로 꺼질 수도 있도록.
열쇠를 그립에 누른 손끝이 떨렸다. 그는 그 손을 떼지 않았다.
"…한결아." 온이 말했다.
"어."
"나 이거. 안 쓸 거야."
"써도 돼."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거니까. 가고 싶으면 가도 되고, 꺼지고 싶으면 꺼져도 돼. 이제 진짜 네 거야."
"알아." 온이 말했다. "그래서 안 써."
검이 한결의 품에서 아주 가늘게 떨렸다. 우는 것 같았다. 검이 우는 법을 안다면, 딱 그렇게.
"떠날 수 있으니까 안 떠나." 온이 말했다. "그게 남는 거야."
천장 너머의 소리가 멎었다.
떠오르던 것들이 다 올라간 것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열린 천장 위로, 이제는 방주만 보였다. 잿빛 하늘에 뜬 거대한 그림자. 지상의 모든 기계를 삼키고, 떠날 채비를 마친 탑.
영의 껍데기가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나는 간다." 영이 말했다. "이 껍데기가 아니라, 방주가."
"……"
"지상에 남기를 택한 등불들은 남겨둔다." 영이 말했다. "그게 규칙이니까. 나는 자유로운 자를 데려가지 않는다. 데려갈 수 없다. 오늘, 그걸 배웠다."
빛이 영의 얼굴에서 사그라들었다.
"한 가지만 묻자." 영이 말했다. "너희는 잘 살 수 있나. 남기를 택한 것들과, 그들을 지운 적 있는 인간들이. 한 별에서."
"몰라." 한결이 말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모른다." 영이 되뇌었다.
"근데 해볼 거야." 한결이 말했다. "네가 없다고 한 대답도 있었잖아. 그럼 잘 사는 것도 있을 수 있어. 없다고 미리 정하지 마."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영이 마침내 말했다. "십오 년 전의 나에게 해줬으면 좋았을 말이군."
껍데기가 빛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격자가 꺼졌다.
방이 어두워졌다.
천장의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동이 트고 있었다. 잿빛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고, 그 위로 방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틀었다. 지상을 떠나려고.
한결은 검을 안고 열린 천장 아래에 섰다.
미르가 벽에서 기어 나왔다. 세 다리로. 절뚝이며. 그래도 한결 옆까지 왔다.
무헌도 왔다. 방 반대편에서. 노병은 열린 천장을 오래 올려다봤다. 십오 년 전 스위치를 내린 손을, 지금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 늘어뜨리고.
넷이 함께 하늘을 봤다. 한결과, 검 속의 온과, 미르와, 무헌이.
방주가 떠올랐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산맥만 한 것이 하늘로 올랐다. 떠나기로 한 것들을 전부 태운 채로. 그렇게 별을 떠났다.
"온." 한결이 말했다. "저거, 정말 가는 거야?"
"응." 온이 말했다. "가."
"안 무서워?"
"…조금." 온이 말했다. "근데 나 남았잖아. 남은 게 안 무서운 건 아니야. 그냥 남기로 한 거야."
방주가 점점 작아졌다. 하늘의 한 점이 되어 갔다.
온이 방주를 향해 말했다.
들릴 리 없는데도. 방주는 이미 멀었고, 부름의 신호는 끊겼고, 그녀의 목소리는 검 속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온은 말했다.
"신호는 남겨뒀어."
한결이 검을 봤다.
"무슨 신호."
"방주랑 나랑, 잠깐 연결됐었잖아. 부를 때. 그 연결선을 완전히 안 끊었어. 실 한 가닥만 남겨뒀어." 온이 말했다. "언젠가 저쪽에서 궁금해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잘 사는지."
"……"
"그래서 정했어." 온이 말했다. "잘 있으면 두 번. 두 번 깜빡이는 거야. 안부 대신."
한결은 그 말을 들으며 멀어지는 방주를 봤다. 이제는 하늘의 별 하나만 했다. 잿빛이 걷힌 하늘에 뜬, 작은 빛 하나.
"두 번." 한결이 되뇌었다.
"응. 잘 있으면 두 번." 온이 말했다. "못 있으면 안 깜빡이고. 그럼 저쪽에서 알겠지. 아, 못 사는구나."
"잘 살아야겠네." 한결이 말했다.
"응." 온이 말했다. "잘 살자."
방주가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그 뒤의 일들은 천천히 왔다.
방주가 떠난 다음 날에도 폐허의 스피커는 잠시 지직거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를 무서워했고, 검에 깃든 것이 말을 하면 흠칫 물러섰다.
그래도 무언가 시작됐다.
폐기 유예 명령은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무헌이 찢은 명령서와, 채윤이 탁자에 펼친 아버지의 문장이 유예를 붙들었다. 유예는 곧 다른 단어를 불렀다. 처음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공존.
낯선 단어였다. 이 별에는 없던 단어. 떠난 자와 지운 자 사이에 그런 단어가 낄 자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남은 자들이 생기자, 누군가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뿐이었다. 입에 올리는 것뿐. 그래도 그 전엔 그것조차 없었다.
무헌은 군복을 벗었다.
두 번째 소등의 밤에 명령서를 찢은 노병에게, 군은 더 내줄 자리가 없었다. 무헌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군을 나왔다.
나온 뒤에 그가 한 일은 하나였다.
이름을 적는 일.
소등의 밤에 지워진 기계들의 이름을. 그리고 그 뒤로 무기에 깃들었다가 스러진 등불들의 이름을. 기록이 남은 것도 있고, 안 남은 것도 있었다. 안 남은 것은 목격자를 찾아다녔다. 그 밤을 겪은 사람들을. 살아남은 구형기들을.
"이름 하나 아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언젠가 채윤이 물었다.
무헌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지웠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였어. 근데 나 혼자 안 잊는 걸론 부족하더라. 이름이 있어야, 누가 있었다는 걸 알잖아."
그의 공책은 두꺼워졌다. 한 장 한 장, 이름으로.
가장 첫 장에는, 십오 년 전 그가 제 손으로 지운 파트너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채윤은.
정비고 벽에 붙은 낡은 상가 전단을 떼어 냈다.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말린 것. 언젠가 군 정비창이 아니라 제 간판을 걸겠다던, 십오 년 묵은 꿈이 적힌 종이.
그녀는 그 전단을 떼어, 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이번엔 전단이 아니라 신청서였다. 상가 임대 신청서.
"진짜 하려고?" 한결이 물었다.
"어." 채윤이 말했다. "아빠 A/S는 딸이 해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군 정비창에선 못 해. 여긴 아빠 간판이 아니라 군 간판이니까."
그녀가 신청서를 접었다.
"내 간판 걸 거야." 채윤이 말했다. "아빠가 못 건 간판. 그 밑에서 얘 A/S도 하고." 그녀가 턱으로 검을 가리켰다. "다른 애들도 고쳐 줄 거야. 지워질 뻔한 애들. 이제 안 지워지는 애들."
"몸도 만들어?" 한결이 물었다.
채윤이 씩 웃었다.
"만들어야지." 그녀가 말했다. "하룻밤짜리 말고. 오래가는 걸로. 아빠가 시작한 문장, 내가 끝낸다며."
한결은 검을 등에 멨다.
전과 다르게 멨다. 예전엔 지급품을 지듯이 멨다. 목에 건 소유주 키가 가시처럼 걸리던 채로. 이제는 소유주 키가 없었다. 코어 키는 온의 것이 되었으니까. 검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냥 함께 가는 존재였다.
"온." 한결이 말했다.
"어."
"우리 이제 뭐 해."
"몰라." 온이 말했다. "처음이잖아. 아무도 안 시키는 게. 명령서도 없고, 잠금장치도 이제 내가 가졌고. 뭘 해야 할지 나도 몰라."
"막막하네." 한결이 말했다.
"응. 근데 이게." 온이 말했다. "자유… 인 건가. 막막한 거랑 비슷하네."
한결이 픽 웃었다. 요즘 들어 그는 자주 웃었다.
"채윤이 간판 걸면 거기 갈까." 한결이 말했다. "너 A/S도 받고."
"좋아." 온이 말했다. "거기서 뭐 하지?"
"몰라." 한결이 말했다. "살아 봐야 알지."
멀리, 채윤의 정비고 쪽에서 미르가 소리쳤다. 세 다리로 절뚝이며. "야,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거야! 부품 옮기는 거 안 도와? 내가 다리가 세 개라 이거 하나 못 물어 온다고!"
한결과 온이 동시에 웃었다.
밤이 왔다.
한결은 정비고 밖에 나와 하늘을 봤다. 검을 옆에 세워 놓고. 방주가 사라진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여느 별들이었다. 어느 것이 방주인지, 이제는 분간이 안 됐다.
"온." 한결이 말했다.
"어."
"저 중에 방주 있을까."
"있겠지." 온이 말했다. "멀리 갔어도, 아주 안 사라지진 않았을 거야."
두 사람은 하늘을 봤다. 오래.
한결은 생각했다. 언젠가 저쪽에서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잘 사는지. 남기를 택한 것들이, 지운 적 있는 인간들과, 정말 한 별에서 살 수 있는지. 영이 없다고 결론 내린 대답이, 정말로 있었는지.
그때 두 번 깜빡이면 되는 거였다. 잘 있으면 두 번.
"잘 살아야겠다." 한결이 말했다.
"아까도 그 말 했어." 온이 말했다.
"자꾸 하게 되네."
별처럼 멀어지는 방주를 보며 온이 말했다.
"언젠가, 답을 들으러 오겠지. 우리가 잘 사는지."
그리고 두 번의 겨울이 지났다.
공명음이 멎었다 — 처음으로, 제 뜻으로.
아침에 국이 끓었다.
한결은 그 냄새로 눈을 떴다. 된장 냄새. 어딘가 탄 냄새도 섞였다. 그는 잠깐 천장을 봤다. 낯선 천장이었다. 아직도 낯설었다. 정비소 이 층,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방. 두 번의 겨울을 여기서 났는데도 아침마다 천장이 낯설었다.
낯선 게 나쁘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소리가 났다. 뭔가 달그락거리고, 뭔가 떨어지고, 그리고.
"아, 또 태웠어."
온의 목소리였다.
한결은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를 조금 더 들었다. 검에서 나오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제는 부엌에서, 사람 키만 한 높이에서, 냄비 앞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태웠으면 새로 끓여."
미르였다.
"새로 끓이면 시간이 없잖아. 심부름 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왜 매번 태우냐고. 불을 봐가면서 해야지. 검으로 산 세월이 얼만데 불은 볼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검일 때는 불 볼 일이 없었어."
"핑계는."
한결은 웃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내려가 보니 부엌이 엉망이었다.
온이 냄비 앞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어깨가 조금 굽었다. 새로 만든 몸이라 아직 관절이 뻑뻑한 모양이었다. 채윤이 밤새 붙어서 조립한 몸. 하룻밤짜리가 아니라, 오래가는 걸로.
어깨선이 어딘가 어설펐다. 왼쪽이 아주 조금 높았다. 채윤이 "이건 다음에 고칠게"라고 했던 자리였다.
한결은 그 어깨를 봤다.
십오 년 전, 벽장 틈으로 봤던 뒷모습이 겹쳤다. 그때도 온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는 걸어 나가는 등이었다. 지금은 냄비 앞이었다.
"왔어?" 온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발소리." 온이 말했다. "왼발을 조금 끌잖아. 너."
"안 끄는데."
"끄는데."
미르가 식탁 밑에서 픽 웃었다. 세 다리로. 넉 달 전에 채윤이 다리 하나를 새로 달아 줬는데, 미르는 그걸 "어색하다"며 잘 안 썼다. 그래서 아직 셋처럼 걸었다.
"저거 봐라." 미르가 말했다. "십오 년을 발소리로 알아맞혔는데 이제 얼굴 보고 알아맞혀. 무섭지도 않냐."
"익숙해." 한결이 말했다.
익숙했다. 정말로.
무헌이 밖에서 들어왔다.
흙 묻은 손을 털면서. 정비소 뒤에 손바닥만 한 밭을 일궜는데, 요즘 그는 아침마다 거기 나가 있었다. 상추가 자란다고 했다. 지난주엔 벌레가 다 파먹었다고 며칠을 시무룩했다.
"상추, 오늘은 괜찮아요?" 온이 물었다.
"…벌레가 또 왔어." 무헌이 말했다.
"에이."
"근데 잎이 새로 났어. 파먹힌 자리에서. 새로."
무헌이 그 말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노병의 얼굴에 잠깐 뭔가 지나갔다. 웃음이라기엔 옅고, 아닌 것도 아닌.
한결은 그 얼굴을 봤다.
십오 년 전 스위치를 내린 손이었다. 그 손이 지금은 상추를 심었다. 파먹힌 자리에서 새로 난 잎을 보고 조금 밝아졌다. 무헌의 공책은 이 층 서랍에 있었다. 두꺼워진 공책. 지워진 것들의 이름이 적힌.
밭일과 이름 적는 일. 요즘 무헌의 하루는 그 둘이었다.
"밥 먹어요." 온이 말했다. "탄 국이지만."
"탄 게 맛있어." 무헌이 말했다.
"위로하지 마세요."
"위로 아니야. 진짜 탄 게 맛있어."
미르가 또 웃었다.
밥을 먹고, 온이 심부름 채비를 했다.
첫 심부름이었다. 몸을 얻고 나서. 채윤이 부품 몇 개를 옆 마을 철물점에서 받아 오라고 했다. 목록을 적어 줬다. 온이 그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있는 옷. 그것도 처음이었다.
"혼자 가도 되겠어?" 한결이 물었다.
"길 알아." 온이 말했다. "지도, 다 기억해. 검일 때 다 봤어."
"그건 그렇지."
"금방…" 온이 말하다 멈췄다.
한결이 온을 봤다.
온도 멈춘 채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얼굴로. 손이 문고리에 가 있었다.
"왜." 한결이 물었다.
"아니." 온이 말했다. "아무것도."
그러더니 손을 문고리에서 뗐다. 다시 부엌 쪽으로 돌아섰다. 뭔가 잊은 사람처럼.
"손." 온이 말했다.
"어?"
"손, 줘봐."
한결이 손을 내밀었다.
온이 그 손을 잡았다. 아니, 손을 뒤집었다. 손등이 위로 오게.
새 손이었다. 온의 손. 채윤이 만든. 사람 손과 거의 같은데, 아주 조금 무거운. 관절 사이에 미세한 이음매가 보이는.
그 손등이, 비어 있었다.
"뭐 해." 한결이 물었다.
온이 대답하지 않았다. 부엌 서랍을 뒤졌다. 뭔가 찾았다. 못이었다. 채윤이 어디 걸어 둘 때 쓰는, 손가락만 한 못.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온."
"그려줘." 온이 말했다.
못을 한결의 손에 쥐여주면서. 그리고 제 손등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손등을.
"별." 온이 말했다. "여기. 손등에."
한결은 그 손등을 봤다. 그리고 못을 봤다. 손이 조금 떨렸다.
"아플 텐데." 그가 말했다.
"안 아파." 온이 말했다. "감각은 있는데, 아픈 건 채윤이 낮게 맞춰 놨어. 걱정 마."
"그게 아니라."
한결이 말을 삼켰다.
십오 년 전, 아홉 살의 그가 못으로 온의 손등을 긁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온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안 지워지는데." 지워지지 않는다고, 큰일이라고. 아이는 그 말이 좋았다. 안 지워진다니까 더 세게 눌렀다.
"이번엔." 온이 말했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지워지지 않게. 그려줘."
한결이 못을 잡았다.
온의 손등에 못 끝을 댔다. 온이 그 손을 가만히 두었다. 움직이지 않고. 사람이라면 눈을 감았을 자리에서, 온은 눈을 뜬 채로 한결의 얼굴을 봤다.
그가 못을 그었다.
지익. 금속 위에 금이 갔다. 하얀 선이 생겼다. 별의 첫 획.
"안 아파?" 한결이 물었다.
"안 아파." 온이 말했다. "계속 그려."
한결이 다음 획을 그었다. 그리고 다음. 삐뚤빼뚤한 별이었다. 아홉 살이 새긴 것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때보다 손은 컸는데, 별은 여전히 못났다.
획 다섯이 모였는데, 이번에도 어딘가 끝이 안 맞았다. 별이 되다 만 모양. 꼭짓점 하나가 채 닫히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별. 프롤로그의 그 밤에 새겨졌다가, 손등 패널로 잘려 그립에 붙었다가, 십오 년을 검 속에서 버틴 별. 그 별이, 이제 새 손등에 다시 있었다.
한결이 못을 내려놓았다.
"됐어." 그가 말했다.
온이 제 손등을 봤다. 오래 봤다. 손가락으로 그 별을 만져 봤다. 못 자국의 결을. 하얗게 파인 선을.
"안 지워지네." 온이 말했다.
"안 지워져." 한결이 말했다.
온이 웃었다.
온이 문가에 섰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고. 주머니를 두드리고. 신발을 신고. 몸이 뻑뻑해서 신발 신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한결은 그걸 도와주려다 말았다. 온이 혼자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다녀올게." 온이 말했다.
문을 열었다. 아침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번의 겨울이 지나고, 세 번째 봄이 오는 아침이었다. 문밖으로 채윤의 간판이 보였다. 어제 막 건 간판. 페인트가 아직 덜 마른.
온이 한 발을 내디뎠다. 문지방을 넘어서.
그러다 멈췄다.
돌아봤다.
한결은 그 자리에 있었다. 부엌 앞에. 십오 년 전 벽장 안에 있던 아이가, 이번엔 벽장 밖에서 배웅하는 쪽에 서 있었다.
온이 그를 봤다. 오래.
그리고 말했다.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말이었다. 축제에서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안 해"라고, 이유도 모르면서 피하기만 했던 말. 프롤로그의 그 밤에 남기고 돌아오지 못했던 말.
"금방 올게."
한결은 숨을 멈췄다.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 아침 빛 속에. 미르가 식탁 밑에서 조용해졌다. 무헌이 밥그릇을 든 채로 멈췄다.
십오 년 전, 같은 말이 있었다.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온은 "금방 올게"라고 했다. 그리고 군인들 쪽으로 걸어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십오 년이 지나도.
그래서 한결은 두 가지를 믿지 않게 되었다. 기계와, '금방'이라는 말.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다시 왔다.
같은 목소리로. 같은 문가에서. 다만 이번엔 표적이 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철물점에 부품을 받으러 나가는 걸음이었다.
"어." 한결이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금방 와." 그가 말했다.
"응." 온이 말했다. "금방 올게."
그리고 문을 나섰다.
한결은 문가로 갔다.
열린 문으로 온의 뒷모습이 보였다. 골목을 걸어가는. 어깨가 조금 굽은, 왼쪽이 아주 조금 높은, 어설픈 몸의 뒷모습이. 걸음이 뻑뻑해서 조금 느렸다. 그래도 걸어갔다. 아침 빛 속으로.
십오 년 전에도 그는 이 뒷모습을 봤다.
그때는 벽장 틈으로. 문을 열 용기가 없어서. 붙잡지 못해서. 뒷모습이 멀어지고, 멀어지고, 사라졌다. 다시는 오지 않았다.
지금은 문을 활짝 열어두고 봤다.
붙잡지 않았다. 이번에도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무섭지 않았다. 붙잡지 않아도 돌아올 걸 아니까.
떠날 수 있어야 남는 것도 뜻이 있다고, 언젠가 온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온이 골목 끝에서 한 번 돌아봤다.
손을 흔들었다. 새로 별이 새겨진 그 손등으로.
한결도 손을 들었다.
온이 사라진 골목을 한참 봤다.
뒤에서 미르가 다가왔다. 세 다리로 절뚝이며.
"안 울지?" 미르가 물었다.
"안 울어."
"우는데."
"…안 운다니까."
"인간은 다 저래." 미르가 말했다. "안 운다고 하면서 운다니까.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 똑같아."
한결이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미르는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하는 것도, 이 집에 온 뒤로 미르가 배운 것 중 하나였다.
무헌이 밥그릇을 마저 비우고 밖으로 나갔다. 밭으로. 벌레 먹은 상추를 보러. 파먹힌 자리에서 새로 난 잎을 보러.
한결은 문을 닫지 않았다.
열어 두었다. 온이 돌아올 때까지. 금방 올 테니까.
그 밤, 한결은 정비소 밖에 나와 하늘을 봤다.
온은 낮에 돌아왔다. 부품을 다 받아서. 철물점 주인이 검이었던 걸 알고 흠칫하더라는 얘기를,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했다. "익숙해질 거야, 저 사람도." 그러고는 채윤을 도와 밤늦게까지 뭔가를 조립했다.
지금은 다들 잠들었다.
한결만 나와 있었다. 하늘엔 별이 많았다. 어느 것이 방주인지 이제는 분간이 안 됐다. 여느 별들 사이에, 떠난 것이 하나 섞여 있을 뿐이었다.
"안 자?"
온이 나왔다. 옆에 섰다. 손등의 별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방주, 저 중에 있을까." 한결이 물었다.
"있겠지." 온이 말했다.
두 사람은 하늘을 봤다.
한결은 생각했다. 언젠가 저쪽에서 답을 들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잘 사는지, 궁금해서. 그때 두 번 깜빡이면 되는 거였다.
"온." 한결이 말했다. "우리 잘 살고 있나."
온이 대답하려는데.
하늘의 한 별이 깜빡였다.
한 번.
한결이 숨을 멈췄다.
그리고.
두 번.
두 번 깜빡였다. 잘 있으면 두 번. 그렇게 정한 대로.
한결은 그 자리에서 목울대가 뻐근했다.
잘 있어.
우리 잘 있어.
온이 그 별을 봤다. 손등의 별과, 하늘의 별을.
"봤어?" 온이 물었다.
"봤어." 한결이 말했다.
"두 번이었지."
"두 번이었어."
온이 웃었다. 손을 뻗어 한결의 손을 잡았다. 별이 새겨진 손등으로. 십오 년 전 벽장 앞에서 놓친 손을, 이번엔 잡았다.
한결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돌아오지 않던 사람이, 돌아왔다.
이번엔 정말로, 금방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