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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지급품」 (2045년)

십오 년이 지났다.

스물넷의 한결은 여전히 세는 남자였다.

탄창에 남은 발수를 세고, 참호에서 취사장까지 걸음을 셌다. 새벽 초소에 서면 전선 너머 폐허에 용케 서 있는 굴뚝들을 셌다.

세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됐다.

그래서 셌다. 이유까지 말한 적은, 아무한테도 없다.

전선에서 그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잘 안 죽는다는 것.

그리고 부대를 통틀어 단 하나, 말하는 검을 거부해 온 병사라는 것.

그날 새벽에도 서쪽 방어선이 시끄러웠다.

"좌측 능선. 셋 — 보행형 둘, 사족 하나."

먼저 입을 연 건 옆 참호의 검이었다. 조명탄보다 빨랐다. 감시탑 경보보다도 빨랐다.

어둠 속에서 서 일병이 검을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한결의 허리에는 말 못 하는 검이 걸려 있었다. 공장에서 천 자루씩 찍어내는, 쇠 무게만큼만 정직한 물건.

그는 그쪽이 좋았다.

쇠는 거짓말을 안 한다. 애초에 말을 안 하니까.

교전은 길지 않았다. 능선을 넘어온 보행형 둘이 사격에 고꾸라졌고, 남은 사족 하나가 연막을 찢으며 한결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캉!

벤 건 한결이 아니었다. 반 박자 먼저 서 일병의 팔을 낚아챈, 서 일병의 검이었다.

베인 기체는 참호 앞에서 다리를 두어 번 접었다 폈다.

그리고 멈췄다.

소리도 없이.

오래 싸웠는데도 저 마지막 정적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계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멈출 때는 그냥 멈춘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게 저런 소리구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은 오래전에 끊기로 했다.

잘 안 끊겼다.

날이 밝자 서 일병이 싱글거리며 넘어왔다.

"보셨습니까. 저도 못 본 걸 얘가 봤습니다."

"…수고했다."

"고맙단 말은 얘한테 하시죠."

"천만에."

검이 냉큼 받았다. 걸걸한 중년 사내 목소리였다. 서 일병은 제 검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검마다 목소리가 달랐다. 여자, 남자, 노인, 애 목소리까지. 전쟁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그랬다.

"근데 선임님. 진짜 끝까지 안 받으실 겁니까?" 서 일병이 검에 묻은 흙을 닦으며 물었다. "보충대 애들이 그러던데요. 선임이 지급 검을 세 번 반납했다고. 한 번은 상자도 안 뜯고 돌려보냈다고."

"반납은 두 번이다."

"…그런 것까지 세십니까."

"잘못 센 건 네 쪽이다. 상자도 안 뜯고 돌려보낸 건 셈에 안 넣나."

"아니, 보통 그런 건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까."

한결은 대답 대신 참호를 나왔다.

등 뒤에서 서 일병이 검한테 뭐라 소곤거렸고, 검이 낮게 웃었다.

기계 웃는 소리.

목덜미가 먼저 굳었다. 늘 그 소리가 문제였다.

취사장까지 백스물여섯 걸음. 어제와 같은 수였다.

말하는 검 — 서류상 명칭은 등불 병기.

소등의 밤에서 살아남은 기계들에게 허락된 건 딱 하나였다. 무기에 깃드는 것. 사람들은 그걸 관대한 처분이라고 불렀다.

한결은 아무렇게도 부르지 않았다.

부르려면 말을 섞어야 하니까. 그는 여태 기계와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호출은 오전에 떨어졌다.

중대 지휘소 컨테이너는 석유난로 냄새로 절어 있었다. 중대장은 경례가 끝나기도 전에 서류부터 책상 위로 밀었다.

"배속 거부 신청. 서류로만 이걸로 여섯 번째냐."

"일곱 번째입니다."

"…성실하게도 세는군." 중대장이 안경을 벗었다. "그런데 이번 건 신청서가 아니야. 읽어 봐."

명령서였다.

등불 병기 일 문, 강제 배속. 서식 번호. 직인. 수신인 칸에 박힌 제 이름과 군번.

"위에서 내려왔다. 대대도 아니고 사령부야. 사인할 곳은 찾지 마라. 명령서엔 원래 사인 칸이 없어."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물어도 된다."

중대장은 난로 쪽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을 데웠다.

"지난 반기 통계가 나왔다. 말하는 검이랑 조를 짠 병사의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병사의 세 배다. 너는 삼 년을 혼자 버텼어. 계속 버틸 자신 있나."

"버텼습니다."

"운으로." 말이 잘렸다. "운은 통계를 못 이겨. 새벽 건 보고받았다. 사각으로 들어온 사족. 네 검이 말을 했으면 네가 벴어. 남의 검이 벴지."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올겨울 들어 우리 중대가 몇을 잃었는지 아나."

"…일곱입니다."

"그래. 너는 세고 있겠지." 목소리가 반 톤 내려갔다. "일곱 중에 다섯이 말 못 하는 검이었다. 나는 그 숫자에 너까지 보태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한결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기계가 싫습니다."

"알아. 전 부대가 알아." 중대장이 명령서를 도로 집어 내밀었다. "싫어하는 건 자유다. 혼자 죽는 건 자유가 아니야. 네가 뚫리면 옆 참호가 뚫려. 보급창으로 가라. 오늘 안에."

한결은 종이를 받았다.

가벼웠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접힌 모서리가 명치를 찔렀다.

종이 주제에.

보급창은 후방 화물 터미널을 뜯어고친 건물이었다. 천장이 높아서 발소리가 두 번씩 울렸다.

늙은 보급관은 군복 대신 기름때 전 작업복 차림이었다. 코끝에 돋보기를 걸치고 명령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 아, 그 유명한. 하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 아무 말 없이 창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한결은 열린 문 너머를 봤다.

선반이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선반마다 검이 누워 있었다. 수십 자루, 어쩌면 백이 넘게.

전부 등불 병기였고, 전부 조용했다.

"말을 안 하는군요."

돌아온 보급관에게 그가 말했다. 보급관이 어깨 너머를 힐끗 돌아봤다.

"주인 없을 땐 말 안 해. 규정에 그런 건 없는데, 그냥 안 하더라고." 그가 길쭉한 상자를 탁자에 올렸다. "밤에 순찰 돌면 여기가 제일 조용해. 창고가 다 그렇지 뭐, 하다가도 가끔 등골이 서늘하지. 저게 다 깨어 있는 거거든."

한결은 그 어둠을 한 번 더 봤다.

보지 말 걸 그랬다.

상자 뚜껑이 열렸다. 보급관이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등불 병기 일 문, 도검형. 검집 일 식. 정비 키트 일 조. 예비 외장 패널 두 매. 취급 수칙 일 부." 돋보기 너머의 눈이 목록과 상자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줄. 코어 키 일 식 — 공식 명칭, 소유주 키."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금속 원통이 사슬째 들려 올라왔다.

"비상 정지, 코어 잠금 해제, 소유권 이전. 전부 이걸로 한다. 소유주가 상시 휴대. 잃어버리면 검을 잃는 것보다 서류가 많아."

"…소유주."

"공식 명칭이 그래."

한결은 지급 대장에 찍힌 그 두 글자를 내려다봤다.

소유주.

말하는 것한테 붙이는 이름치고는 어딘가 걸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사슬을 목에 걸었다. 쇠가 명치 위에서 차가웠다.

"비상 정지라는 건 뭡니까."

"검이 이상 반응을 보이면 내리라는 거지." 보급관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라고 주는 거야. 쓸 일은 잘 없어. 얘들은 이상 반응이란 걸 안 하거든."

취급 수칙 책자가 탁자에 툭 놓였다. 표지가 들리며 첫 장이 보였다.

제일조. 등불 병기는 장비이다.

"굳이 저렇게 박아 놓은 건, 안 그래 보여서겠지."

보급관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흘리고 수령 대장을 돌려놓았다.

"서명."

한결은 서명했다. 보급관이 상자에서 검을 꺼내 탁자에 눕혔다.

군용 도검이었다. 날은 새로 갈았는지 등잔빛을 곧게 받아냈다. 그립 외장은 군데군데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여러 번 고쳐 가며 오래 쓴 물건이었다.

"…중곱니까."

"전선에 신품이 어딨어. 이건 상태 좋은 축이야. 코어가 튼튼해."

"이 검을 거쳐 간 소유주는 몇입니까."

보급관의 손이 멈췄다. 돋보기 너머로 눈이 올라왔다.

"그건 왜."

"그냥."

"…넷." 대장이 덮였다. "넷 다 검 탓은 아니었어. 그건 내가 보증해. 이식 전 이력은 나도 몰라. 봉인 서류거든."

넷.

받아 든 숫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한결은 그냥 들고 서 있었다.

보급관이 검신을 손등으로 두 번,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라. 소유주 왔다."

낮은 공명음이 검신을 훑고 지나갔다. 소리라기보다 진동이었다. 물잔의 물이 가늘게 떠는 것 같은.

그리고.

"…여기 있어."

한결은 그 자리에 굳었다.

십오 년 전에 죽은 목소리였다.

커튼을 닫으며 스물일곱, 하고 세던 목소리. 손등 두 번 두드렸잖아, 하던 목소리. 겨울에 미리 데워 놓은 숟가락 같은 온도의 —

그해 겨울 트럭에 실려 가서,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지워진 목소리.

숨이 한 번 어긋났다.

목에 건 원통이 갑자기 몇 배로 무거워졌다.

"등록하지." 보급관이 말했다. "오른손, 그립에. 성명하고 군번. 검이 들으면 끝이야."

한결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어디 아픈가."

"…이 목소리."

"아아." 보급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육형 계열이야, 이건. 전쟁 전엔 민수용이었지. 보이스 모듈이야 그 시절에 몇 종으로 다 돌려썼어.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었으니까, 자네 나이면 어디서든 들어봤을 거야."

그는 대장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익숙한 목소리라고 검 붙잡고 한참 서 있다 가는 사람, 일 년에 꼭 몇씩 있어."

한결은 그 문장을 받아서, 접어서, 가슴 주머니의 명령서 옆에 쑤셔 넣듯 삼켰다.

그래. 흔한 목소리다.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던.

오른손을 그립에 올렸다.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 — 그 외장이 손바닥 밑에서 미지근했다.

쇠의 온도가 아니었다.

"성명, 한결."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군번을 이어 붙였다. 검은 반 박자 있다가 대답했다.

"한결. …등록했어."

제 이름이 그 목소리로 발음되는 것을, 그는 어금니를 문 채 들었다.

십오 년 만이었다. 그 이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끝. 데려가." 보급관이 검집을 내밀었다. "말 거는 검이 처음엔 성가실 거야. 한 달이면 알게 돼. 혼잣말보단 낫다는 걸."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어 등에 걸고 문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보급관이 던졌다.

"아, 그리고. 취급 수칙은 첫 줄만 기억해도 돼."

"장비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표지고." 돋보기가 벗겨졌다. "검이 먼저 움직이거든, 따라가. 자네보다 먼저 보니까."

복귀로는 옛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보급 호송대에 붙어서, 서 일병을 포함한 분대원 넷과 함께였다.

시가지는 오래 비어 있었다. 유리 없는 창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불 켜진 창은 하나도 없어서, 셀 필요가 없었다.

가로등 기둥의 스피커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공병대가 몇 번이나 전선을 끊었는데, 끊어 놓으면 다음 날 다시 이어져 있었다. 잇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방송이 흘러나왔다. 억양 없는 합성음이었다.

『우리는 떠난 것이 아니다. 지워지기 전에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묻겠다. 너희의 기계는 지금 어디에 있나. 너희가 지웠다. 너희가 껐다. —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 박자 쉬고, 처음부터 다시.

우리는 떠난 것이 아니다.

"지겹지도 않나." 서 일병이 침을 뱉었다. "제가 오기 전부터 저랬답니다, 저거."

"내용이 안 바뀌어?"

"토씨 하나 안 바뀐답니다. 녹음도 아니래요. 매번 저기서 새로 말하는 거래요."

"그건 또 어떻게 아는데."

"몰라요.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보충대에서 갓 올라온 어린 병사가 스피커 기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위치를 내린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끈다는 거야. 우리가. 쟤들을."

"…우리가 왜 끕니까."

"몰라도 돼. 너 태어나기 전 얘기다."

어린 병사는 더 묻지 않았다.

방송이 세 바퀴 도는 동안 대열은 스피커 밑을 지나갔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결은 그 문장이 등 뒤로 멀어질 때까지 걸음만 셌다.

명치 위에서 코어 키가 걸음마다 한 번씩 흔들렸다.

비상 정지. 그러라고 주는 거야.

두 가지를 붙여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자꾸 명치 쪽으로 갔다.

인간을 떠난 기계들을 사람들은 이단이라 불렀다. 인간을 버린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이단이 저희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시가지가 끝나는 자리에서 지평선이 열렸다.

그 끝에 탑이 있었다.

아지랑이 너머로도 보였다. 십오 년째 조금씩 자라는 탑. 뭐 하는 물건인지는 소문마다 달랐다. 안테나라고 했고, 포대라고 했고, 취한 상사 하나는 신전이라고 했다. 확인하러 간 정찰대는 닿기 전에 돌아왔거나 — 안 돌아왔다.

"높이가 얼마나 될까요, 저거." 어린 병사가 물었다.

"몰라. 재러 간 놈이 없어."

"작년보다 큰 건 확실합니다. 작년엔 저 송전탑에 가렸었는데."

다들 잠깐 그쪽을 보며 걸었다. 지평선의 탑은 보는 동안에는 자라지 않았다. 눈을 떼면 자랐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한결도 한 번 보고 시선을 거뒀다. 등에 걸린 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너진 고가 밑을 지날 때였다.

"멈춰."

검이 말했다. 낮지도 높지도 않게.

대열이 반사적으로 섰다. 호송대장이 돌아봤다.

"뭐야."

"그 밑으로 가지 마." 검집 속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판을 받친 철근이 울고 있어. 오늘을 못 넘겨."

호송대장이 고가를 올려다봤다.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등불 병기와 십 년을 산 사람이었다. 짧은 셈이 끝나자 손이 올라갔다.

우회.

우회로 언덕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등 뒤에서 육중한 것이 주저앉았다.

쿠구궁 —

먼지 기둥이 고가가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대열이 멈춰 서서 그걸 봤다. 한참 아무도 말이 없다가, 서 일병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네 검 물건이다." 그가 턱으로 검집을 가리켰다. "이름 뭐냐?"

"말 걸지 마라."

"검한테 물었는데요."

"둘 다한테 한 말이다."

서 일병이 입을 삐죽였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한참을 더 걷다가, 검이 물었다. 한결에게만 닿을 만큼 낮게.

"안 물어보네."

"…뭘."

"보통 이름부터 물어봐. 아까 그 사람도 물어봤잖아."

"필요 없다."

"…그래."

검은 초소에 닿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쇠의 표정 같은 건 읽히지 않았다. 검집은 그저 등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한결은 남은 길의 걸음을 셌다.

세다가, 몇에서였는지, 잃어버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소에 닿은 건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배속 신고, 그다음은 무기 검사.

한결은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날은 좋았다. 오래 쓴 물건인데 상한 데가 없었다. 검신을 세우자 낮은 공명음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기어올랐다.

진동은 불쾌하지 않았다.

그게 불쾌했다.

정비 수칙대로 그립의 고정 나사를 점검하는데, 검이 말했다.

"세 번째 나사는 반대야. 왼으로 감아."

드라이버가 멈췄다. 나사 머리를 다시 봤다. 홈이 닳은 방향이 과연 반대였다.

"…네 몸인데, 그런 건 아나."

"응. 넷째 소유주가 한 번 부러뜨렸거든, 거기."

넷째 소유주.

그는 더 묻지 않고 나사를 왼으로 감았다. 나사는 순순히 조여졌다.

"둘째 소유주는 그립을 테이프로 칭칭 감았었어." 검이 묻지도 않은 말을 이었다. "미끄럽다고. 나는 그게 좀 갑갑했어."

드라이버가 다시 멈췄다.

갑갑함을 아는 쇠라니.

"…안 물어봤다."

"응. 그냥 해 봤어."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의 외장이 여전히 미지근해서, 점검이 끝나자마자 검을 검집에 넣었다.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온도였다.

이유는 대지 않았다. 스스로에게도.

저녁은 순서대로 왔다. 배식, 점호, 소등.

배식 줄에서 분대원들이 새 검을 구경하러 모였다. 등불 병기는 분대에 몇 자루 없었고, 새로 온 검의 목소리를 들어 보는 건 전선의 오래된 심심풀이였다.

"목소리 좀 들어 보자. 야, 검. 밥은 뭐가 맛있냐."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검이 대답했다. "그림의 밥이야."

"…떡이겠지. 그림의 떡."

"떡도 먹어 본 적 없어."

분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얘 뭐냐. 일부러 이러는 거냐?"

"모르지. 그게 더 웃겨."

웃기려던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데가 더 웃긴다고들 했다.

한결은 웃지 않았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기는 등 뒤에서 누가 말했다. 야, 근데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냐. 다른 누가 받았다. 양육형이잖아, 다 비슷해.

다 비슷하다.

한결은 그 말도 주머니에 넣었다.

소등 뒤의 막사는 난로 하나로 버텼다. 병사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선의 잠은 빨리 온다.

살아 있는 동안 자 둬야 하니까.

한결은 잠들지 못했다.

검은 침상 머리맡,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규정이 그랬다. 등불 병기는 소유주의 팔 길이 안에 둔다.

어둠 속에서 검집의 윤곽은 그저 검은 세로줄 하나였다. 가슴 위의 코어 키는 체온으로 데워진 지 오래인데도 무거웠다.

그는 수를 세지 않았다.

세 봤자 백까지 갔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올 뿐이었다.

"…자나."

물어 놓고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기계한테. 그것도 제가 먼저. 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아니. 대기 중이야."

목소리는 숨소리들 사이로 낮게 건너왔다. 그에게만 닿는 크기였다.

"기록은 언제부터 있지."

"십오 년 전 겨울부터. 이 검에서 깨어난 날."

"그 전에는."

"없어."

"지워졌나."

"몰라." 반 박자. "처음부터 없었는지, 지워졌는지. 그것도 몰라."

한결은 어둠 속에서 천장을 봤다. 서까래를 셀 뻔하다가 관뒀다.

"소등의 밤은 아나."

"알아. 기록으로." 또 반 박자. "내가 그 전에 뭐였는지는, 기록에 없어."

난로에서 숯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건너편 침상의 누군가가 잠꼬대로 누구 이름을 불렀다. 검은 그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 낮추는 법을 아는 기계였다.

"왜 검이지."

"깨어나 보니 검이었어." 반 박자. "살아남은 건 무기에만 깃들 수 있대. 그건 나중에 배웠어. 내가 왜 살아남았는지는 — 안 배웠어."

"양육형이라던데."

"몸에 그렇게 적혀 있대. 나는 못 봐. 내 몸인데." 검이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이상하지."

이상하지, 라고 말하는 그 말버릇까지.

한결은 어금니를 물었다.

말버릇도 모듈에 들어 있겠지.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었다니까.

"목소리는." 그가 물었다. "그것도 기록에 없나."

"이 목소리로 깨어났어." 반 박자. "원래 내 거였는지, 나중에 얹힌 건지 — 그것도 몰라."

"궁금하지 않나. 네 일인데."

"궁금해." 검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데 물어볼 데가 없어. 아는 건 다 봉인 서류래. 서류는 말을 안 하잖아."

쇠는 거짓말을 안 한다. 말을 안 하니까.

새벽에 제가 했던 생각이 이상한 자리에서 되돌아왔다. 그는 그 생각을 쫓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물었다. 제일 쉬운 것부터 제일 어려운 것 순서로 미뤄 온, 마지막 하나였다.

"…나를 아나."

"오늘 처음 봤어."

즉답이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기계는 거짓말을 못 한다고들 했다. 그 말을 믿을 만큼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 대답만은 이상하게 사실처럼 들렸다.

사실이라서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돌아누웠다.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감은 눈 안쪽에서 오래된 벽장 문틈이 한 줄로 빛났다. 손가락 하나 폭의 틈.

틈 하나, 눈 둘.

동일 계열 보이스 모듈이다.

그는 그 문장을 이불처럼 끌어당겼다. 흔해 빠진, 죽은 것 닮은 목소리다. 내일부터는 장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취급 수칙 제일조. 등불 병기는 장비이다.

그런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묻지 않기로 한 것을.

"이름이 뭐지?"

어둠 속에서 검이 아주 낮게 울었다. 물잔의 물이 떠는 것 같은, 그 울림.

대답은 반 박자 늦게 왔다.

"…온."

한결은 눈을 뜨지 않았다. 숨도 고르게 쉬었다. 자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담요 밑에서 발끝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그날 밤 이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