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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좋은 날」

여덟을 묻는 데 하루가 갔다.

초소 뒤 언덕은 땅이 얼어 있었다. 곡괭이가 두 번에 한 번은 튕겨 나왔다. 서 일병이 세 번째로 자루를 고쳐 쥐다가, 입 안에서 욕을 삼켰다.

결국 미르가 나섰다.

짐받이를 내리고, 앞다리 끝을 갈퀴 날로 갈아 끼우고, 아무 말 없이 팠다.

"십오 년 만의 본업이 이틀 사이에 두 개로 늘었군."

딱 한 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다음부터는 흙 파는 소리만 냈다.

팻말은 무전병 최가 깎았다. 이름을 아는 자리가 셋. 인식표만 남은 자리가 넷.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가 하나.

최는 그 하나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러다 빈 팻말을 그냥 꽂았다.

언젠가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소위의 무덤은 볕이 드는 쪽에 썼다. 흙을 다 다지고 나자, 미르가 말했다.

"잘 묻는 것은 인간들이 잘하는 몇 안 되는 일이라던데."

앞다리 갈퀴에서 흙을 털어 냈다.

"그 말, 칭찬으로 듣기로 했다."

편지는 남았다.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난 종이 한 장. 수취인란에는 남부 피난촌의 몇 구역 몇 호. 그런 데까지 가는 행낭은 아랫마을 우편 취급소에서 주에 두 번 나갔다.

한결은 그것을 야전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종이 한 장인데, 가슴께가 자꾸 무거웠다.

그날 저녁, 살려 놓은 칠 번 중계탑이 무전을 물어 왔다. 이번엔 부고가 아니었다.

보급 사흘 지연. 해당 기간 십칠 초소 작전 대기.

대기.

휴가라는 말을 입에 못 담는 어른들이 대기라고 불렀다.

부품 트럭 편으로 와 있던 채윤도 그 사흘에 함께 묶였다. 트럭은 부품 없이 못 돌아가고, 부품은 보급과 함께 오니까.

채윤은 통보를 받고 삼 초쯤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정비고 문틀에 기대서서 씩 웃었다.

"이틀 뒤가 장날이네."

장날 아침은 볕이 좋았다.

눈은 사흘 전에 그쳤다. 밤새 언 것들이 지붕마다 녹으면서, 처마 끝이 종일 반짝였다.

계곡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축제 밤에 걷던 그 길이었는데, 낮에 보니 딴 길 같았다. 강은 살얼음 사이로 검게 흘렀고, 건너편 비탈에는 겨울 볕이 통째로 쏟아지고 있었다.

넷이 내려갔다.

한결, 채윤, 미르, 그리고 검집 속의 온.

서 일병은 초소에 남으면서 쪽지를 들려 보냈다. 소금, 실, 바늘. 그리고 맨 밑에 꾹꾹 눌러쓴 글씨로 '엿(딱딱한 것 말고)'.

"영감이 이가 안 좋아."

서 일병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내 이 말이다. 검 말고."

장은 붐볐다.

전쟁이 십오 년째인 세계의 장이었다. 탄피를 두들겨 편 호미가 좌판에 놓였고, 낙하산 천을 물들여 지은 치마가 바람에 부풀었다. 강 하류에서 올라온 말린 생선이 새끼줄에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이 미르를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탈것이 아니다." 미르가 말했다.

아이들이 환호했다. 셋이 등에 올라탔다.

미르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관두고, 짐받이를 낮춰 주었다.

그중 하나가 검이 말하는 걸 들었다. 소문은 장터 물가보다 빨리 돌았다. 검이 말한대. 진짜 말한대.

앞니 빠진 계집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검집 앞에 버티고 섰다.

"숨바꼭질하자! 검이 술래 해!"

"술래는 다리가 있어야 한다." 미르가 말했다.

"세는 것만! 백까지!"

한결이 거절할 말을 고르는 사이였다. 검집 속에서 반 박자가 지나갔다.

"…백까지?"

"응! 천천히! 빼먹지 말고!"

"빼먹지 않아."

온이 말했다.

"하나. 둘. 셋."

고른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자지러지며 흩어졌다. 좌판 뒤로. 소쿠리 뒤로. 미르의 네 다리 사이로.

한결은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했다.

왜인지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좌판 두어 개 너머까지 걸어가서, 말린 생선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수가 자랐다. 서른. 마흔. 쉰.

볕은 여전히 좋았는데 목덜미만 자꾸 서늘했다. 그는 그 서늘함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백." 온이 말했다. "찾는다."

"다리 없는 술래를 위해 내가 뛰어 주지." 미르가 말했다. "품삯은 솔방울로 받겠다."

아이들은 하나도 제대로 숨지 못했다. 잡혀 나오면서도 좋다고 넘어갔다.

온은 셋을 다 찾을 때까지, 수를 세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백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검 멘 병사를 흘끔대는 눈은 있었다. 날이 서 있진 않았다. 등불 축제를 지내는 마을이었으니까.

국밥 노점의 노파가 한결의 등 뒤를 보고 대뜸 아는 체를 했다.

"말 검 총각 왔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국자질 사이에 얹었다.

"그때 그 등, 잘 올라갔어. 안 떨어지고. 끝까지 봤어."

검집 속에서 온이 뭐라 답하려는 기척이 있었다. 노파는 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두 한 알이 국밥 위에 덤으로 얹혔다.

일은 기름집에서 벌어졌다.

미르가 윤활유 통 앞에 버티고 서서, 상인과 삼 합째 겨루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윤활유가 아니다." 미르가 말했다. "점도로 보나 냄새로 보나 콩기름에 가깝지. 이걸 내 관절에 넣으면 나는 기계가 아니라 전이 된다. 지짐이."

"콩기름 같은 소리 하네!"

상인이 통을 두드렸다.

"일 등급이야, 일 등급! 계곡 통틀어 이만한 물건이 없어!"

"계곡 통틀어 기름집이 여기 하나지."

"그, 그건…."

채윤이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커서 옆 좌판 사람들까지 돌아봤다. 채윤은 아랑곳 않고 미르의 등을 두들겼다.

상인은 억울한 얼굴로 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필 찾은 편이 한결의 등에 매인 검이었다.

"거, 검 양반이 말 좀 해 봐! 이게 콩기름이야?"

반 박자.

검집 속에서 온이 말했다.

"값이 미끄럽네."

침묵이 왔다.

상인이 눈을 끔벅였다. 채윤도 웃음을 문 채로 멈췄다.

"…기름이라서." 온이 덧붙였다. "미끄럽다고. 농담이었어."

"농담은 설명하는 순간 사망한다." 미르가 말했다. "방금 네가 죽였다. 목격자가 넷이다."

그때였다.

한결이 웃었다.

소리가 났다. 짧게, 한 번, 목 안쪽에서 터지듯이.

그는 그 소리를 남의 것처럼 들었다. 제 것인 줄 아는 데 반 박자가 걸렸고, 아는 순간 이미 늦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리를 낸 게 언제였더라.

짚지 않았다. 짚으면 어디서 끊기는지 아니까.

장바닥이 조용해진 건 아니었다. 조용해진 건 넷뿐이었다.

상인만 영문을 몰랐다.

"그렇지? 웃기지? 미끄럽대!"

신이 나서 통을 또 두드렸다.

채윤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채윤은, 늘 그렇듯이, 시끄러워졌다.

"야. 야야. 너 방금 웃었냐? 소리 내서? 미르, 봤어?"

"저장했다." 미르가 말했다. "백업도 해 뒀다."

"지워." 한결이 말했다.

"싫다."

채윤은 계속 웃고 있었다. 웃는 눈가가 잠깐 붉었다.

붉어진 걸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채윤은 더 크게 떠들면서 기름값을 대신 깎기 시작했다. 상인은 검 양반이 웃겼으니 됐다며, 통 하나 값에 반 통을 더 얹었다.

미르는 그 거래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제 입씨름의 전과를 농담 한 줄이 가로챘으니까.

검집 속에서 온이 물었다.

"…한 번 더 할까?"

"하지 마." 한결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남은 길을 반쯤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잡화 좌판 앞에서 그것이 시작됐다.

좌판에는 온갖 것이 있었다. 못 쓰는 무전기 부품. 짝 잃은 장갑. 손잡이만 남은 우산.

한결의 눈이 좌판 귀퉁이 천 무더기에 닿았다. 손을 뻗기도 전에 온이 말했다.

"둘째 줄 왼쪽 끝. 부드러운 거."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둘째 줄 왼쪽 끝에, 사슴 가죽처럼 보늬가 고운 천 조각이 개켜져 있었다. 그가 집으려던 바로 그것이었다.

"…뭐 닦게?" 채윤이 옆에서 목을 뺐다.

"검집." 한결이 말했다.

"검집 같은 소리 하네." 채윤이 씩 웃었다. "그립 닦을 거면서. 다정하기도 하지."

그는 대꾸 없이 값을 치렀다. 동전 꺼내려고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온이 말했다.

"왼쪽이야."

왼쪽 주머니에 있었다.

두 번째는 엿장수 앞이었다.

채윤이 서 일병 쪽지 심부름으로 무른 엿을 사면서, 딱딱한 놈 하나를 덤으로 받아 한결에게 던졌다. 그가 받아서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에 온이 말했다.

"왼쪽 어금니."

어금니가 엿에 닿기 직전이었다.

한결은 입을 벌린 채로 이 초쯤 멈췄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옮겨 물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방금 일부러 오른쪽으로 물었지." 온이 말했다.

"…아니야."

"세 번 뒤척이는 것도 일부러 두 번만 뒤척인 적 있어. 나흘 전에."

채윤이 엿봉지를 안은 채 배를 잡았다.

세 번째는 장을 빠져나오는 갈림목이었다.

왼쪽은 담장 그늘이 진 골목. 오른쪽은 볕이 넓게 깔린 길.

한결의 발이 방향을 정하기 전에, 온이 말했다.

"왼쪽으로 갈 거지. 그늘 쪽."

발이 디딤을 놓쳤다. 그는 반걸음 헛디딘 걸 헛기침으로 덮었다.

"볕 좋은 날에도 넌 그늘로 걸어." 온이 말했다. "등이 뜨거운 게 싫어서가 아니라, 눈이 부신 게 싫어서."

미르가 낮게 말했다.

"소름."

"내 말이!" 채윤이 손뼉을 쳤다. "세 번이야, 세 번! 아니, 주머니까지 하면 네 번인가?"

예전 같으면 그는 여기서 그 말을 꺼냈을 거다.

양육형 계열 보이스 모듈. 눌어붙은 행동 예측 모듈. 돌려쓴 물건에 남은 남의 습관. 주머니에 넣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던, 얇고 잘 드는 변명들.

오늘은 꺼내지 않았다.

주머니가 꽉 차서인지, 꺼낼 마음이 없어서인지는 그도 몰랐다.

"어떻게 알았어."

그는 그냥 그렇게 물었다. 몇 번을 물었는지 이제 세지도 않는 질문이었다.

"…그러게."

온이 말했다. 몇 번을 들었는지 셀 수 있을 대답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강둑이었다. 볕이 물비늘 위에서 부서졌다.

온이 물었다.

"오늘 같은 날을 부르는 말이 있어?"

"장날." 채윤이 말했다.

"월급날이 더 좋지." 미르가 말했다.

온은 반 박자 있다가 말했다.

"…좋은 날."

아무도 고쳐 주지 않았다.

고칠 데가 없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넷은 노파의 노점으로 돌아가 늦은 국밥을 비웠다.

노파는 이번에도 만두를 하나씩 더 얹었다. 값은 하나 값만 받았다. 미르가 그 산수를 지적하려다가 채윤에게 발등을 밟혔다.

그릇을 물리고 났을 때, 채윤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편지."

"내가 부친다." 한결이 말했다.

"우편 취급소가 어딘지는 알고? 됐어, 이리 내. 어차피 트럭 무전도 넣어야 되고, 소금이랑 바늘도 사야 되고."

채윤은 그의 안주머니에서 편지를 반쯤 강제로 빼앗아 들었다. 봉투의 주소를 한 번 읽고, 표정을 잠깐 고쳤다가, 도로 씩씩해졌다.

"글씨 봐라. 소위님이 너보다 낫네."

"나 글씨 본 적 없잖아."

"안 봐도 알아."

채윤은 편지를 품에 넣고, 엿봉지를 미르의 짐받이에 얹었다. 서너 걸음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금방 올게!"

볕이 좋아서, 흔드는 손이 하얗게 빛났다.

채윤은 그대로 돌아서서 장터 쪽으로 멀어졌다. 공구벨트가 걸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참까지 들렸다.

검집 속에서, 온은 말이 없었다.

한결은 강둑에 앉아 엿 반 토막을 마저 씹었다. 미르는 아이들이 짐받이에 두고 내린 솔방울을 하나씩 강에 던졌다.

온의 침묵이 길었다. 그는 두 번쯤 검집을 돌아보았다.

"…쉰다섯." 온이 말했다.

"뭐가."

"강채윤 걸음. 모퉁이까지."

그러고도 잠시 더 있다가.

"이제 안 보여."

한결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명치 어디가 이유 없이 뻐근했다. 그는 엿을 마저 씹는 것으로 그걸 눌렀다.

"금방이라는 건," 온이 물었다. "어느 만큼이야?"

엿이 어금니에 눌어붙었다.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사람마다 달라."

"그럼 세어 볼게." 온이 말했다. "돌아올 때까지."

세지 마, 라고 말할 뻔했다.

왜 그 말이 목까지 치미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비탈의 볕이 조금 기울었다.

채윤은 돌아왔다.

소금과 바늘과 무른 엿과, 우편 취급소의 접수 도장이 찍힌 영수증 쪽지를 들고. 왔는지도 모르게 뒤에서 나타나, 한결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고 갔다.

"천삼백사십이." 온이 말했다.

"뭐가?" 채윤이 물었다.

"금방."

채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얼굴로 웃었다.

한결은 알아들은 것 같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강을 봤다.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미르가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오래 못 간다. 통계적으로."

"초 치지 마라." 채윤이 말했다.

"초가 아니라 통계다."

그런 날이었다.

웃음이 헤펐고, 볕이 아까웠고, 넷의 그림자가 언덕길에 나란히 길었다.

한결은 발을 조금 늦췄다. 넷의 그림자가 저만치 앞서 가는 게 아까웠다.

이대로 걸었으면. 언덕이 끝나지 않았으면.

거기까지 오고 나서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무언가 계속되기를 바라 본 게 언제였는지, 그의 몸은 기억하지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건 초소 정문이 보일 때쯤이었다.

보급 트럭은 해 질 녘에 왔다.

예정보다 이틀 빨랐다. 보급이 서두른다는 건 대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트럭에서 탄약 상자가 내려졌다. 상자 뒤에서 낯선 병사 하나가 내렸다.

나이가 계급장보다 먼저 보이는 남자였다. 반백의 머리. 마른 몸. 왼쪽으로 아주 조금 기운 어깨. 원사 계급장에, 명찰에는 성 없이 이름만 두 자 남은 것처럼 무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연병장을 가로지르다가, 한결의 등에 매인 검 앞에서 반 박자 걸음이 늦었다.

눈이 검집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한결은 그 눈을 알았다.

무언가를 보는 눈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눈이었다.

"저 양반…." 서 일병이 낮게 말했다. "낯이 익은데."

"회수반 출신이랍니다." 박 상병이 더 낮게 말했다. "그 회수반이요. 소등의 밤 때."

"그런 사람이 왜 등불 부대엘 와."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답할 시간도 없었다.

소집 나팔이 불었다.

연병장에 모인 인원 앞에서, 무전병 최가 수신문을 그대로 읽었다. 살려 놓은 칠 번 중계탑이 물어 온 두 번째 소식이었다.

탑을 살려 놓아서 명령이 제때 왔다.

그 사실이 고마운 건지 아닌지, 한결은 끝내 정하지 못했다.

서부 협곡 관문 방어선, 금일 새벽 돌파됨. 방어 이 개 소대 후퇴. 협곡 내측 구 관측소에 관측반 여섯 명 및 암호 장비 고립. 해당 구역, 수복 포기 판정.

수복 포기.

되찾지 않을 땅에 여섯이 남아 있었다.

"침투조를 낸다." 초소장이 말했다. "십칠 초소에서 한 개 조. 등불 병기 운용조가 앞장선다. 협곡 지형에서는 사람 눈이 모자라."

한결의 이름이 불렸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데리러 간다. 엿새 전 밤 명치에 걸려 동틀 때까지 내려가지 않던 그 말을, 이번엔 이쪽이 했다.

"지원 가능 인원, 한 명 받는다."

침묵이 왔다.

수복이 포기된 구역.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들어가는 길은 있어도, 나오는 길은.

무헌이 한 걸음 나섰다.

초소장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원사님이 직접? 오늘 전입한 걸로 아는데."

"짐은 없습니다. 몸만 갑니다."

"이유는."

무헌은 반 박자 있다가 말했다.

"…빚이 있어서."

그게 다였다.

초소장은 더 묻지 않았다. 오래 군대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대답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법을 알았다.

해산하는 연병장 끝에서 채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새벽에 정비창으로 돌아가고, 침투조도 새벽에 나간다. 두 새벽이 같은 새벽이었다.

"야." 채윤이 말했다. 웃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웃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죽으면 죽여 버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되게 만들 거야, 내가."

채윤은 그러고 나서 한결의 등 뒤, 검집에 대고 말했다.

"부탁한다, 온."

"응." 온이 말했다. "여기 있어."

채윤은 그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관뒀다. 손을 씩씩하게 들어 보이고, 돌아서서, 트럭 쪽 막사로 갔다. 걸음은 여전히 씩씩했다.

멀어질수록 그 등이 얇아 보였다. 정작 채윤은 제 등을 볼 수 없었다.

소등 전의 막사는 조용했다.

한결은 침상에 걸터앉아 장비를 정리했다. 탄입대. 조명탄. 압박붕대.

마지막으로 검을 무릎에 눕히고, 낮에 산 가죽 천을 꺼냈다.

부드러운 면이 그립의 이음매를 따라 천천히 지나갔다.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결이, 천 아래에서 미지근했다.

"그거." 온이 말했다. "검집 닦는다며."

"…검집도 닦을 거야."

"그렇구나."

닦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창밖에서 보초 교대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무헌의 침상은 막사 반대편 끝이었다. 남자는 눕지 않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자는 사람의 어깨가 아니었다.

취침 점호 전에, 무헌이 물을 뜨러 가다가 한결의 침상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등불인가."

"…예."

"오래 썼나."

"열이레 됐습니다."

무헌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슨 말을 더 할 것 같았는데, 하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한 번 보았다. 낮에 연병장에서처럼, 보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눈으로.

반합의 물을 반쯤 흘리듯 마시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늙은 군인의 등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한결은 그 등을 한참 읽어 보려다가 관뒀다. 아무것도 없는 등이 제일 읽기 어려웠다.

"며칠째지." 한결이 물었다.

묻고 나서, 언제부터 이걸 제가 먼저 묻게 됐는지 잠깐 생각했다.

"열이레." 온이 말했다.

"…그래."

"협곡은 눈이 늦게 녹아. 벽이 높아서 해가 바닥까지 안 내려가. 얼음 위에 눈이 덮인 자리를 조심해. 그리고 너는 위기에서 왼쪽으로 굴러."

"알아. 네가 말해 줬잖아."

"한 번 더 말해 두는 거야. 중요한 건 두 번 말해도 돼."

그는 대답 대신 천을 접었다.

그립이 등불 아래에서 낮게 윤이 났다. 못으로 판 자국 같은 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알게 될 날이 이레도 남지 않았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검을 검집에 눕히는데, 온이 불렀다.

"한결."

"왜."

반 박자. 반 박자 더.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의 손이 검집 위에서 멎었다.

"…무슨 말."

"몰라. 아직." 온이 말했다. "그런데 있어. 그건 알아."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 하면 안 되는 것 같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도 알아."

모르는 것투성이면서 아는 것만은 분명한, 온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 대신,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아와서 들을게."

말해 놓고 입안이 서걱했다.

돌아와서, 라는 말이 제 입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않으려고 오래 다물어 온 입이었는데.

소등 나팔이 불었다.

등불이 하나씩 꺼지고, 막사가 어두워졌다.

그는 누워서 두 번 뒤척였다. 세 번째 뒤척임 전에, 검집 쪽에서 아주 작게, 셋, 하고 세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이 세계에서 늘 값을 청구했다. 청구서는 협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