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서로를 믿지 않는 법」
믿지 않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한결은 그 요령을 오래 갈고닦았다.
첫째, 묻지 않는다.
물으면 대답이 온다. 대답을 듣다 보면 다음 대답을 기다리게 된다. 기다리는 놈부터 무너진다.
둘째, 빚지지 않는다.
빚은 정(情)의 다른 이름이니까.
셋째. 첫째와 둘째를 못 지킨 날에는 — 자는 척이라도 한다.
배속 첫날 밤에 그는 셋 다 썼다. 이름을 물었고, 대답을 들었고, 자는 척했다.
그러니 다음 날부터는 원칙대로였다. 사흘 동안 그는 검에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검도 빨랐다.
이틀째부터는 필요한 말만 왔다. 아침이면 "여섯 시야". 초소 교대 때면 "동쪽 능선, 이상 없어".
목소리를 낮출 줄 아는 기계는 입을 다물 줄도 알았다.
학습이 빠른 물건이었다. 한결은 그 빠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따지는 것도 묻는 것의 일종이니까.
정작 말이 늘어난 쪽은 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사흘 만에 검의 이름을 알아냈다. 한결한테 물어서가 아니라 —
검한테 직접 물어서.
"온? 따뜻할 온이야, 온전할 온이야?"
"몰라. 그냥 온이야."
"너 몇 살이냐."
"기록상 열다섯."
"애기네."
"응. 근데 목소리는 어른이야." 반 박자. "나도 셈이 잘 안 맞아."
"근데 네 소유주는 왜 저러냐. 벙어리야?"
"과묵한 거야."
또 반 박자.
"…라고 해 두자."
배식 줄이 뒤집어졌다. 한결은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소유주만 빼고 부대 전체와 친해지는 검이었다.
저게 처세인지 뭔지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캐물으려면 지켜봐야 하고, 지켜보는 건 요령 첫째에 어긋난다.
◆
나흘째 아침, 첫 임무가 떨어졌다.
지휘소 컨테이너는 오늘도 석유난로 냄새였다. 중대장이 지도 위에 연필 끝을 콕 세웠다.
"동부 공장 지대 삼 킬로 안쪽. 칠 번 중계탑."
"…중계탑이 왜요."
"사흘째 조용해. 그 탑이 죽어서 동부 무전이 전부 잡음이다. 수리조 둘 넣어서 살린다. 호위 여섯." 연필이 내려왔다. "조장은 너야."
"제가 말입니까."
"네 검이잖아. 길들이는 데는 실전이 제일 빨라." 중대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보급관이 뭐라던가. 검이 먼저 움직이면 따라가라고 안 하던가."
"들었습니다."
"들은 거하고 하는 건 다르지."
명령서가 책상을 건너왔다.
"해 지기 전에 복귀해라. 여덟 다."
여덟 다.
한결은 그 세 글자를 접어서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명령서 옆에.
◆
공장 지대까지 세 시간.
밤새 내린 눈이 무너진 지붕마다 얇게 얹혀 있었다. 덕분에 폐허가 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깨끗한 폐허가 제일 나쁘다 — 오래 산 병사들의 말이다. 발자국이 다 남는다. 이쪽 것도.
저쪽 것도.
호위는 여섯. 한결, 서 일병, 보충대에서 갓 올라온 꼬맹이, 상병 하나에 일병 둘. 수리조 둘은 공구 배낭에 눌려 걸음이 반 박자씩 늦었고, 늦을 때마다 미안하단 말 대신 배낭끈만 고쳐 멨다.
한결은 대열의 보폭을 셌다.
세는 동안엔 등에 걸린 검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중계탑은 왜 죽었을까요."
첫 외곽 임무인 보충병이었다. 총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장갑 위로도 힘줄이 비쳤다.
"쥐가 갉았거나." 서 일병이 받았다. "쥐보다 큰 게 갉았거나."
"…큰 쪽이면 어떡합니까."
"그러라고 우리가 간다."
"그러라고 제가 있어." 서 일병의 등에서 아저씨가 거들었다. "총 좀 살살 쥐어라, 꼬맹아. 그러다 방아쇠가 먼저 운다."
보충병이 얼른 손아귀를 풀었다. 대열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냉각탑 두 기가 마주 선 자리에서 길이 갈라졌다.
왼쪽은 공장 마당을 가로지르는 직로. 슬래그 더미와 침전조 사이로 중계탑 기단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은 제방을 타고 도는 우회로. 눈대중으로도 두 시간은 더 먹는 길이었다.
지도의 마당 위에는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소탕 완료. 이 주 전 날짜.
한결이 왼쪽으로 손을 들려는데.
"마당을 질러가지 마."
등에서 목소리가 왔다.
대열이 멈췄다. 한결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유."
"눈이 안 앉은 자리가 열둘이야." 검은 낮게 말했다. "재는 이 주면 식어. 저긴 이 주 전에 식었어야 해. 저건 식다 만 열이 아니야. 견디는 열이야."
한결은 망원경을 들었다.
슬래그 더미. 침전조. 재가 덮인 마당.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군데군데 녹아 있긴 했다. 슬래그야 원래 열을 오래 품는다. 겨울 폐허의 슬래그 더미에서 김 오르는 거야 지겹도록 봐 온 풍경이고.
"슬래그는 원래 열을 품는다."
"슬래그는 숨을 안 쉬어."
반 박자.
"저 밑의 열은 오르내려. 아주 천천히. …참는 것처럼."
서 일병이 제 검에 소곤거렸다. "아저씨는 어떻게 봅니까."
"난 모르겠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답했다. "내 코는 그 정도로 안 좋아. 근데 쟤가 저러는 건 나흘 만에 처음 본다."
어느새 다들 한결을 보고 있었다. 수리조 고참이 해를 한 번 올려다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흰 조장 결정에 따릅니다. 다만 어두워지면 납땜을 못 합니다. 밝을 때 탑에 붙어야 해요."
한결은 셈을 했다.
우회 두 시간. 수리 한 시간. 해는 다섯 시면 진다. 부상자 없는 여덟. 지도엔 소탕 도장.
셈은 금방 끝났다.
셈 밑에 다른 게 있다는 것도 그는 알았다. 검의 말 한마디에 여덟 명의 길을 바꾸는 것 — 그건 듣는 게 아니라 기대는 거다. 한번 기대면 어디까지 기대게 되는지, 그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질러간다."
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는 재지 않았다.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
마당의 재는 발목까지 왔다.
여덟 켤레 군화가 재를 가르는 소리. 그것뿐이었다.
절반쯤 건넜을 때, 한결은 눈이 안 앉은 자리 하나를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내려다봤다.
재가,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숨처럼.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
마당이 일어섰다.
재가 사방에서 터졌다. 회색 더미들이 어깨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한결은 셌다. 넷. 일곱. 열.
열둘.
검이 맞았다는 사실이 첫 총성보다 먼저 그를 때렸다.
"침전조!"
여덟이 두 개의 침전조 뒤로 갈라져 뛰었다. 첫 사격이 재를 줄줄이 튀겼다.
보충병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리조 하나가 그 멱살을 끌고 콘크리트 뒤로 굴렀다. 종아리에서 흐른 피가 재를 검게 물들였다.
"무전 잡음! 안 터집니다!"
터질 리가. 죽은 탑을 고치러 올 인간을, 탑을 부순 것들이 마당에 묻혀서 기다렸으니까.
덫이었다. 그리고 그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덫이었다.
"열둘. 보행형 여덟, 사족 넷." 검이 말했다. 총성 사이로도 이상하게 또렷했다. "왼쪽 셋이 먼저 와. 지붕에 하나 올라갔어."
"들었지! 왼쪽부터다, 이놈들아!" 서 일병 쪽에서 아저씨가 고함을 질렀다.
왼쪽에서 정말로 셋이 왔다. 서 일병 조가 둘을 눕히고, 상병이 하나를 마저 눕혔다.
한결은 듣지 않았다.
제 눈으로 세고, 제 셈으로 쐈다. 그렇게 둘을 멈춰 세웠다. 그의 셈은 정확했다.
제 눈이 닿는 데까지는.
닿지 않는 데가 문제였다.
침전조 콘크리트가 갈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탄이 박힐 때마다 회색 가루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엄폐물이 깎이고 있었다. 남은 탄창, 셋. 옆에서는 수리조 하나가 공구 배낭을 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배낭에 탄이 박혀 스패너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살은 무사했다.
아직은.
"사족 둘이 오른쪽으로 돌아." 검이 말했다. "연막 준비야. 자리 옮겨."
한결은 옮기지 않았다.
오른쪽은 그가 보고 있었다. 재, 슬래그 더미, 죽은 트럭 한 대. 움직이는 건 없었다. 그는 제 눈을 믿었고, 제 눈이 늘 보던 방식으로 오른쪽을 봤다.
위는 보지 않았다.
퍼펑 — 기계들이 연막을 깠다.
저희가 숨으려는 게 아니었다. 이쪽 눈을 지우려는 거였다. 회색 장막이 침전조 사이를 메우자 총성이 방향을 잃었다. 어디선가 보충병이 이를 악문 신음을 흘렸다.
"자리 옮겨." 검이 한 번 더 말했다.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부탁이야."
부탁.
기계가 쓰기엔 이상한 말인데 — 그 생각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오른쪽, 죽은 트럭의 지붕에서 재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위였다. 그의 눈이 한 번도 두지 않은 자리.
돌아보는 것보다 손목이 먼저 꺾였다.
그립이 손바닥 안에서 산 것처럼 뒤틀렸다. 팔꿈치가 위로 끌려 올라갔다. 검이 — 그의 팔을 입은 채 — 그가 모르는 궤적을 그었다.
까앙!
손목까지 저리는 반동. 사족의 앞다리가, 그의 목이 있던 높이를 지나 허공에서 접혔다. 두 동강 난 기체가 재 위로 무너지며 다리를 두어 번 폈다 접었다.
그리고 멈췄다.
소리도 없이.
벤 것도 베인 것도 그가 아니었다.
등줄기가 식었다.
"아홉 시." 검이 말했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목소리로. "침전조 두 개 지나서 벽. 한 겹이야. 뒤가 배수로야. 수리조부터."
한결은 반 박자 셈을 했다.
처음으로, 셈이 검 쪽으로 기울었다.
"아홉 시! 수리조 먼저!"
벽은 정말로 한 겹이었다. 상병의 개머리판 세 방에 허리 높이가 뚫렸다. 여덟이 차례로 구멍을 넘었다. 배수로의 어둠이 그들을 삼켰다.
기계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마당이 저희 초소라도 되는 양, 도로 재를 뒤집어쓰는 소리만 등 뒤에서 났다.
◆
배수로 하류의 갈대밭에서 대열이 멈췄다. 지혈을 다시 하고, 인원을 세려는데.
"여덟. 다 있어."
검이 먼저 말했다.
한결은 그래도 셌다. 제 눈으로, 두 번.
여덟이었다. 둘은 남의 어깨에 걸려 있었지만.
보충병은 종아리 관통. 일병 하나는 어깨에 파편. 수리조는 무사. 중계탑은 죽은 채. 임무는 실패.
그는 그것까지 셌다. 부상 둘, 실패 하나.
검이 맞힌 것 — 전부.
그는 갈대밭 가장자리로 걸어가서, 검을 뽑아 언 땅에 꽂았다.
"아까 그거."
"팔."
"다시는 하지 마."
반 박자.
"싫어."
한결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붕대를 감던 서 일병이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숙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건 못 들어줘." 검은 낮게, 또박또박 말했다. "다른 건 들어줄게. 그건 안 돼."
"넌 장비다. 장비는 소유주 말을 듣는다."
"응. 취급 수칙 제이조 — 본 장비는 소유주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
반 박자.
"제일조만 읽었구나."
검에는 눈이 없다. 표정도, 고개도, 어깨도 없다. 언 땅에 꽂힌 쇳덩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저게 지금 저를 마주 노려보고 있다는 걸. 물러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그는 눈 없는 것과 눈싸움을 했다.
지고 있는 건 이쪽이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명치의 금속 원통에 가 있었다.
비상 정지. 그러라고 주는 거야.
그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뗐다.
뭘 하려던 손이었는지는 저도 몰랐다. 저도 모르는 채로 들킨 기분이었다. 검한테가 아니라 —
저 자신한테.
"…선임." 서 일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도에는 분명 소탕 완료라고—"
"내 판단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검이 뭐라 했는지는 여덟 명이 다 들었다.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입에 올리는 것보다 컸다.
판초를 이어 만든 들것에 실리며 보충병이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느려져서…."
"입 다물어라." 서 일병이 판초 귀퉁이를 고쳐 쥐었다. "다리에 구멍 나고 사과부터 하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다음부턴 구멍부터 막고 사과해."
보충병이 웃으려다 얼굴을 구겼다. 진통제가 덜 돌고 있었다.
해가 낮아졌다. 부상자 둘을 끌고 어두운 폐허 세 시간 — 이번 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야영한다. 저 주유소."
◆
폐 주유소는 지붕이 반쯤 남아 있었다. 캐노피 아래 불을 피우고, 무너진 벽으로 바람을 막았다.
부상자 둘을 불 곁에 눕혔을 때였다.
저벅.
재 밟는 소리. 네 발이었다.
여섯 개의 총구가 일제히 어둠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왔다. 낡은 스피커를 한 번 거른 듯한, 지직거리는 반말이었다.
"쏘지 마라. 총알값이 아깝다. 나한테는."
불빛 가장자리로 그게 걸어 들어왔다.
새끼 당나귀만 한 사족 보행기였다. 도색은 다 벗겨졌고, 네 다리 관절은 전부 딴 부품이었고, 왼쪽 렌즈에는 금이 가 있었다. 등에는 고철을 묶은 썰매 끈. 고물상 마당에서 한 세월 묵었다 해도 믿을 몰골이었다.
"방금 너희가 마당에서 부순 것들." 그것이 썰매를 턱으로 가리켰다. "관절이 쓸 만해서 주웠다. 쟤들한테는 나도 부품이고, 나한테는 쟤들도 부품이지. 서운할 거 없어."
"…이단이냐." 상병이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이단이 이 꼴이겠냐. 걔들은 도색부터 해."
보충병이 판초 자리에서 목을 뺐다. 불빛에 목 아래 낡은 태그가 드러났다.
"물류 보조 기체, 미르 사 형… 소속…."
"말소."
그것이 대신 끝냈다.
"말소가 내 소속이다. 십오 년째."
"…미르?"
"그렇게들 불렀다. 부르던 것들은 다 죽었는데 이름은 멀쩡해." 렌즈가 불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름이 원래 제일 오래 살아."
"미르 사라니." 아저씨가 서 일병의 등에서 끼어들었다. "그 회사, 아직 있냐."
"회사는 죽었다. 제품만 남았지." 미르가 즉답했다. "너희 회사는."
"…나도 제품만 남았다."
"그럼 동창이네."
두 기계가 낡은 소리로 낄낄거렸다. 병사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봤다.
서 일병이 총을 반쯤 내렸다.
"너는 어떻게 안 지워졌냐. 그 겨울에."
"이렇게 생겨서." 미르가 제 앞다리를 들어 보였다. "그 겨울에 인간들은 인간처럼 생긴 것부터 지웠다. 말 상대해 주던 것, 애 보던 것, 밥상 차리던 것 순으로. 나는 개 취급이라 살았지."
금 간 렌즈가 불빛에 한 번 번들거렸다.
"인간처럼 생겨야 사랑받는 거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울이지."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미르는 그 침묵을 제 자리처럼 차지하고 불 옆에 엎드렸다.
"윤활유 반 컵. 불가 자리 하나. 그거면 내일 저 꼬맹이는 내 등에 탄다. 사람 어깨보다 편할 거다."
"…누구 맘대로."
"조장 맘대로." 금 간 렌즈가 한결을 향했다. "덫에 걸어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너지. 탑을 부수면 인간이 고치러 온다 — 고전 중의 고전이다. 너희는 매번 걸리고. 그래, 검은 뭐라던가."
"넌 누구 편인데." 보충병이 물었다.
"기름 편." 즉답이었다. "십오 년 동안 편이 바뀐 적이 없다. 신념 하나는 너희 사령부보다 굳지."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는 반 박자 기다렸다가, 낡은 환풍기 도는 소리로 웃었다.
"말렸구나. 검 말 안 듣는 소유주 얘기, 스무 번쯤 들었다. 결말이 다 똑같아서 열아홉 번은 하품했지." 렌즈가 위아래로 한결을 훑었다. "네가 스무 번째인데 — 살아 있네. 검이 좋은 거다."
미르는 몸을 일으켜 불을 돌았다. 벽에 세워 둔 검 곁을 지나다가.
멈췄다.
렌즈가 검집 위를 오래 훑었다.
"…그 검. 몇 년식이야."
"몰라." 온이 말했다.
"좋은 대답이다." 미르는 더 묻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요즘 검은 다 그렇게 대답하더라."
◆
저녁은 건빵이었다.
한결은 불에서 두 걸음 떨어져 앉아 봉지를 뜯었다. 첫 조각을 입에 넣으려는데.
"왼쪽."
"…뭐가."
"어금니. 그거 왼쪽으로 깨물잖아."
한결은 봉지를 든 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보란 듯이 오른쪽으로 깨물었다.
건빵이 오른쪽에서 어색하게 부서졌다.
"방금 일부러 오른쪽으로 씹었다." 미르가 엎드린 채 말했다. "스물넷이라며."
서 일병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상당한 일병까지 킥킥거렸다.
한결은 두 조각째를 씹다가 뒤늦게 알았다.
왼쪽 어금니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대?" 서 일병이 검에게 물었다.
"손바닥 보듯 훤해."
반 박자.
"…손등이었나."
"손바닥이야." 서 일병이 말했다. "검이 관용구를 다 틀리네."
"행동 예측 모듈이 눌어붙은 거다." 미르가 말했다. "오래된 물건이 다 그래. 눈앞의 인간 버릇부터 줍는 거지. 고물 되면 별걸 다 외운다. 나도 그래."
한결은 그 말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동일 계열 보이스 모듈 옆에. 다 비슷하다 옆에.
주머니가 어쩐지, 꽉 차 있었다.
불가에 눕기 전에 보충병이 벽의 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벽이랑, 길이랑."
"…응."
그게 다였다. 그 짧은 대답에 보충병은 이상하게 안심한 얼굴이 되어 눈을 감았다.
"쟤도 참." 아저씨가 서 일병의 무릎 옆에서 웅얼거렸다. "검한테 존대하는 놈은 오래 산다. 통계다."
"아저씨가 무슨 통계를 압니까."
"마흔 자루 넘게 봤다, 내가. 검 말 잘 듣는 놈. 검한테 인사하는 놈. 검을 쇳덩이 취급하는 놈." 걸걸한 목소리가 반 박자 쉬었다. "셋째 부류가 제일 빨리 죽더라. 요새 하나 지켜보는 중인데 — 오래 버티면 통계를 고치지, 뭐."
불가의 누구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누구 얘긴지는 다 알았으니까.
한결은 못 들은 척했다.
그 방면으로는 이골이 나 있었다.
◆
불침번 첫 번은 그가 맡았다.
캐노피 기둥에 등을 대고 서서, 그는 버릇대로 어둠 속 굴뚝을 세기 시작했다. 폐허 너머 검게 선 것들. 넷, 여섯, 아홉—
"열여섯이야."
검이 말했다. 그에게만 닿는 크기로.
한결은 아홉에서 멈췄다.
무언가를 대신 세어 주는 목소리를, 그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커튼 고리를 하나씩 넘기면서.
그 기억은 꺼내지 않았다. 오래 묻어 둔 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라고 안 했다."
"응. 근데 셌어. 너보다 빨라서 미안."
미안하다는 말을 저렇게 안 미안하게 하는 법도 모듈에 들어 있나.
그는 마저 세지 않았다.
"자도 돼." 검이 말했다. "내가 보고 있어."
"불침번은 내 일이다."
"응. 그래서 같이 보는 중이야."
같이.
그 두 글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그는 그냥 어둠만 봤다.
세지 않아도 되는 밤이 언제였는지, 그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편해서 —
편하다는 게 불편했다.
교대를 넘기고 침낭에 들어갔다. 불이 낮아지고, 숨소리들이 가라앉고, 미르의 냉각팬이 낡은 자장가처럼 돌았다.
그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잠시 뒤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한 번 남았어."
"…뭐가."
"뒤척이는 거. 꼭 세 번 하고 자."
한결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세 번째를 참기로 했다.
어깨가 결렸다. 목이 배겼다. 등 밑의 자갈이 정확히 견갑골을 눌렀다.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어금니를 물었다.
삼 분을 못 채웠다.
부스럭.
세 번째였다.
담요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안 하는 게 제일 시끄러웠다.
"…어떻게 알았어?"
"…그러게."
그러게.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대답 아닌 대답이, 아는 척보다도 모르는 척보다도 이상하게 들렸다.
어떻게 아는지 저도 모른다는 말이었으니까.
한결은 캐노피 구멍으로 겨울 하늘을 봤다. 별이 몇 개 있었다.
세지 않았다.
왼쪽 어금니. 세 번의 뒤척임. 열여섯 개의 굴뚝. 위기에서 그의 눈이 늦는 방향까지.
나흘 된 검이 줍기엔 너무 많았다.
그 셈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끝까지 해 보는 걸로 끝났다.
언젠가 — 그의 세 번째 뒤척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불깃을 어깨까지 올려 주던 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기억에는 얼굴이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그가 안 붙이는 거였다. 얼굴을 붙이는 순간 뭐가 무너지는지,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넌 꼭,"
그는 말했다. 어둠에게 하는 말처럼.
"나를 오래 본 사람처럼 굴어."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닥불에서 젖은 나무가 탁, 하고 한 번 울었다.
대답하지 않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쇠는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