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정비창의 재회」
후방 제삼 정비창의 아침을 여는 건 사람이 아니다.
검들이다.
간밤 입고분까지 스물두 자루. 난로에 불이 들어가면 절전으로 식어 있던 것들이 하나둘 깨어나서, 사람 귀에는 잡음으로만 걸리는 대역에서 저희끼리 낮게 웅웅거린다.
무슨 수다를 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채윤도 몰랐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고, 인사는 인사였다.
"밤새 안녕들 하셨고."
몇 자루가 가청 대역으로 내려와 대답했다.
안녕.
안녕은 무슨, 날이 상했어.
삼 번 선반 위에 물 샌다.
"예예, 어르신들."
검한테 무슨 아침 문안이냐고 반장은 혀를 찼다. 채윤은 대꾸하는 대신 삼 번 선반 위에 양동이부터 받쳤다.
물은 정말로 샜다.
검은 거짓말을 안 한다.
사람이 하지.
전선의 검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돈단다. 후방 제삼에 가면, 검신보다 안부를 먼저 물어 주는 정비사가 있다고.
지난달엔 이런 일도 있었다. 폐기 판정 직전의 낡은 검 한 자루가 후송 트럭 짐칸에서 같은 말만 스물몇 번을 되풀이하며 실려 온 것이다.
제삼으로 보내 줘. 제삼으로.
문장 절반이 깨져서, 온전하게 남은 건 그 여섯 글자뿐이었다고 했다.
채윤은 그 코어를 붙잡고 사흘 밤을 새웠다. 살려 놨다. 수당은 없었고, 반장의 잔소리는 두 시간이었다.
밑지는 장사였다.
어쩌겠는가. 밑지는 장사에 소질을 타고났는데.
공구벨트 왼쪽 두 번째 고리에는 놋쇠색 인식표가 걸려 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패. 찍힌 건 정비공 등록 번호 하나. 모서리가 하도 닳아서 앞자리는 눈으로 못 읽는다.
지문으로 읽는다.
인두를 잡기 전마다 그녀는 그걸 한 번 쥐었다.
부적이라기엔 차갑고.
유품이라기엔, 너무 매일 만졌다.
아버지 거였다.
◆
오전 아홉 시, 반장이 게시판에 입고 예정표를 붙였다.
채윤은 지나가며 흘긋 봤다.
봤고, 지나쳤고.
세 걸음 만에 되돌아왔다.
동부 십칠 초소. 후송 인원 둘. 정비 의뢰 — 등불 병기 일 자루. 도착 예정 십사 시.
소유주란에 두 글자.
한결.
손에서 스패너가 미끄러졌다. 발등을 반 뼘 차이로 비켜 갔다. 줍지 않았다.
뛰었다.
정문까지 마흔 걸음을 몇 걸음에 주파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철문을 밀어젖히자 눈 덮인 빈 마당이 나왔다. 닫힌 위병소가 나왔다. 담배를 말다 만 위병의 벙찐 얼굴이 나왔다.
"…뭐 왔어?"
"아니요."
"근데 왜 뛰어."
"몸이 식어서요."
위병은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로 도로 담배를 말았다.
도착, 십사 시.
현재, 아홉 시.
다섯 시간.
채윤은 세상에서 제일 천천히 걸어 돌아와 스패너를 주웠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 년 전 겨울이었다. 동부로 가는 트럭 짐칸에 올라앉은 걸 배웅했다. 그때도 그녀는 두 마디를 했다. 잘 가라. 죽지 말고.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트럭이 안 보일 때까지 길에 서 있었던 건 그녀 혼자였다.
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오전 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연습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는 게 이상해서, 연습을 하면 할수록 아무렇지 않은 데서 멀어졌다.
◆
호송대는 십사 시 십 분에 들어왔다.
채윤은 십삼 시 오십 분부터 정문 옆에서 폐품을 분류하고 있었다. 분류할 폐품이 어제 이미 다 분류돼 있었다는 건, 이 정비창에서 그녀만 아는 사실이었다.
맨 앞에 들어선 건 사람이 아니라 네 발이었다.
새끼 당나귀만 한 사족 보행기. 등에는 부목을 댄 어린 병사. 도색은 다 벗겨졌고, 왼눈 렌즈엔 금이 갔고, 네 다리 관절은 죄다 딴 부품이었다.
"의무실이 어느 쪽이냐."
낡은 스피커를 한 번 거른 것 같은 반말이었다.
"저쪽 초록 지붕." 채윤은 가리키고, 덧붙였다. "…너 관절 사대가 다 다른 부품이네. 왼 뒷다리는 농기계 거고."
"눈썰미가 기분 나쁘다." 사족이 반 박자 쉬었다. "그리고 너한테서 윤활유 냄새가 난다. 오늘 처음으로 쓸모 있어 보이는 인간을 봤다."
칭찬이야 욕이야.
등 위의 어린 병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감사했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실려 갔다. 그 뒤로 어깨에 붕대를 감은 일병이 걷고, 소총을 멘 일병이 뒤를 봐 주며 들어왔다.
그리고 맨 뒤에.
그가 있었다.
이 년 만이었다.
얼굴은 좀 상했다. 눈매는 그대로였다. 등에는 검 한 자루.
채윤은 폐품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을 작업복에 두 번 문질렀다.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십 년쯤 연습하면 이 정도는 된다.
"어이, 동부." 그녀가 말했다. "길 잃었냐? 여긴 후방인데."
한결이 돌아봤다. 반 박자 늦게, 낯익은 무뚝뚝함이 왔다.
"…채윤."
"어, 나. 이 년 만에 소꿉친구 얼굴 보고 그게 다야? 잘 지냈냐, 보고 싶었다, 그런 건 배급 안 나오디?"
"…너 살 빠졌네."
"어머." 채윤은 눈을 크게 떴다. "얘가 늘었네? 사람 다 됐어."
뒤에서 일병이 웃음을 참다 실패하는 소리를 냈다. 서씨라고 했다. 서 일병의 등에서 걸걸한 중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인사는 이따 하고 우리 막내 다리부터 좀. 사흘을 개 등짝에 실려 왔어."
"개 아니다." 사족이 의무실 쪽에서 대꾸했다.
귀도 밝지.
"어르신 말씀이 맞네. 접수는 이따. 사람부터."
부상자 둘이 의무실로 들어가는 동안 채윤은 서류판을 들고 왔다. 정비 의뢰서 비고란은 한 줄이었다.
전투 후 전반 점검.
"성의 없기는. 어디가 아픈지는 본인한테 묻지, 뭐."
그녀는 한결의 등에서 검집째 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검집에 대고 말을 걸었다.
"안녕. 얘기 많이 들었… 는 건 아니고, 소문만 들었어. 나 채윤. 오늘 네 담당."
반 박자.
"…온이야."
"이름 예쁘네." 서류판에 적었다. 온. "성은?"
"몰라."
"쿨하다. 나도 성 뗄까."
"…"
"참, 나 쟤 소꿉친구다.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 아홉 살 때 얘기부터 풀 서비스야. 특히 아홉 살 겨울에 쟤가 이불에다—"
"채윤." 한결이 말했다.
"왜. 영업 비밀이야?"
"…기록해 둘게." 온이 말했다.
"얘 봐라? 마음에 든다, 너."
한결이 뭐라 하려다 마는 게 곁눈에 걸렸다. 그녀는 그것도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은 정비사의 기본기다.
검의 흠집이든, 사람의 흠집이든. 먼저 들이대지 않는 것.
"동부에 검을 일곱 번 퇴짜 놓은 돌대가리가 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왔었거든." 앞장서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정비사들끼리 내기까지 붙었어. 걔가 결국 받나 안 받나. 이름까지 같길래 설마 했지."
어깨 너머로 검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받았네?"
"…배속 명령이었어."
"어, 다들 그렇게 말해."
걸으면서 그녀는 물었다.
"칠 번 중계탑이라며. 고쳤어? 동부 무전 사흘째 잡음인 건 여기서도 알아."
"…못 고쳤어."
"덫이었구나."
한결이 그녀를 봤다. 어떻게 아느냐는 눈이었다. 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탑이 죽으면 인간이 고치러 온다. 고전이잖아. 정비사들은 다 알아. 고치러 가는 게 우리라서."
◆
정비동 안은 난로 냄새 반, 절삭유 냄새 반이었다.
채윤은 검을 정비대에 물리고, 한결 앞에 탄약 상자를 밀어 놨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코어 물린 장비의 분해 점검에는 소유주가 입회한다 — 규정이다.
규정이 고마운 날도 다 있었다.
사족은 어느새 구석까지 따라 들어와 있었다. 목 아래 태그가 보였다.
물류 보조 기체 미르 사 형. 소속 — 말소.
"미르? 네가 걔구나. 십칠 초소에 구형 하나 붙었다고 무전에 떴었는데."
"붙은 게 아니라 계약이다. 기름 반 컵에 등 하나." 미르는 폐윤활유 드럼 옆에 엎드렸다. "이 건물, 오랜만에 맡아 보는 부자 냄새다. 반 컵만 다오."
"새 걸로 줄게. 폐유 먹으면 관절 나가."
"……"
금 간 렌즈가 그녀를 오래 봤다.
"이 정비창, 마음에 든다."
채윤은 웃고, 일을 시작했다.
"온. 말 좀 해 봐. 보이스 모듈 봐야 되니까.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거 농담이야?"
"시도였어."
웃음이 터졌다.
"합격. 보이스 정상, 유머 모듈 고장. 근데 그건 부품이 없어." 파형 계측기의 집게를 물리며 그녀는 덧붙였다. "목소리 좋다. 구세대 양육형 계열이지? 그 계열이 목소리 하나는 참 잘 뽑았어. 요즘 검 절반이 그쪽 모듈 물려받았을걸."
한결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엔 눈 쌓인 폐차 더미뿐이었다. 뭘 보는지는 안 보였다.
계측이 도는 동안 그녀는 서류판에 턱을 괴고 검에게 물었다.
"쟤 밥은 잘 먹디?"
"먹어. 남기지도 않아." 반 박자. "국부터 먹고, 밥은 나중에."
"어릴 때부터 그랬어. 국 식는 걸 못 봐."
말해 놓고, 어, 싶었다.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것까지 아네.
"관찰을 잘한다, 너."
"…그러게."
계측기가 삑 울어서 그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검신은 멀쩡했다. 이 빠짐 없음. 뒤틀림 없음.
문제는 그립의 토크 이력이었다.
"온. 너 최근에 소유주 손목 꺾었지. 역방향 토크가 기록에 그대로 남았는데."
"응. 꺾었어."
일 초도 안 걸린 대답이었다. 숨길 생각이 일 그램도 없는.
"검이 소유주보다 먼저 움직였다고?" 채윤은 한결을 봤다. "너 그거 보고 안 올렸지."
"…살았으니까 됐어."
"됐긴 뭐가 돼. 그게 코어 부하가 얼만데—"
잔소리를 반으로 접었다.
살았으니까.
그 말을 이기는 잔소리는 세상에 없다.
"…잘했어, 온. 다음에도 꺾어."
"다시는 하지 말래." 온이 말했다.
일렀다. 이 검이 지금 제 소유주를 일렀다.
"소유주 취급 수칙 제일조." 채윤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소유주 말을 다 듣지 말 것."
"그런 조항 없다." 한결이 말했다.
"방금 만들었어. 정비사 권한으로."
라쳇을 내려놓는데 벨트의 인식표가 정비대 모서리에 부딪혔다.
쟁그랑.
한결의 눈이 잠깐 거기에 머물렀다.
그건 못 본 척이 안 됐다.
그래서 먼저 말했다.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아버지 거야. 정비공 등록 번호. 이거 요즘 골동품이다? 등록제 자체가 없어졌거든. 희소가치."
"……"
"야, 그 표정 뭐냐. 옛날 일이야. 이제 만져도 안 뜨거워."
한결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채윤은 그 삼킨 말을 굳이 꺼내게 하지 않았다.
그 밤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 정비창에 그 밤에 아무도 안 잃은 사람은 없고, 그 얘기는 술 없이 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근무 중이고.
대신 그녀는 사물함을 발로 툭 차서 열었다. 문 안쪽에 붙은 낡은 종이 한 장이 드러났다.
역전 상가 이 층 점포 임대. 문의는 아래 번호로.
"저건 뭐냐." 한결이 물었다.
"내 부동산." 라쳇을 돌리며 채윤이 말했다. "언젠가 군 마크 말고 내 이름 걸고 정비소 차릴 거야. 간판에 크게. 저 전단 삼 대째다? 상가가 두 번 무너졌거든. 상가는 무너지는데 계획은 안 무너져. 대단하지."
"…그 국번, 없어진 지 십 년이다."
"낭만을 몰라, 넌. 어릴 때부터."
"이름은 뭐라고 걸 건데."
"채윤 정비소."
"…더 생각해 봐."
"뭐가! 어디가!"
구석에서 미르가 낡은 환풍기 도는 소리로 웃었다.
"간판은 짧을수록 좋다. 지워질 게 적잖아."
"너희 기계들은 꼭 그런 식으로 초를 치더라."
그때 문이 열리고 반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십칠 초소 인솔자! 행정반에서 찾는다. 후송 서류에 도장!"
한결이 일어섰다. 문가에서 반 박자 멈추더니, 정비대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검을 쇳덩이 취급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남자가.
쇳덩이를 두고 나가는 얼굴이, 아니었다.
채윤은 그걸 서류판 뒤에서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립 분해는 나사부터다.
첫째. 둘째.
셋째에서 드라이버가 헛돌았다.
"어?"
산이 반대다.
왼나사.
부러진 나사를 뽑아내고, 거꾸로 깎아서, 도로 박은 거다. 야전에서. 있는 공구로. 급하게.
"어떤 얼치기가 나사를 거꾸로—"
말하다 말고 그녀는 드라이버를 고쳐 쥐었다.
"아니다. 얼치기 아니네. 이건… 그날 밤 안으로 검을 살려 내야 했던 손이다. 넷째 소유주?"
"…응." 온이 말했다.
"너 소유주 몇이었어?"
"한결이 다섯째야."
"앞의 넷은?"
반 박자.
"기록이 짧아."
채윤은 더 묻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배운 게 하나 있다.
검의 짧은 기록은, 대개 사람의 짧은 명줄이다.
왼나사를 왼쪽으로 살살 달래 풀었다. 나사받이의 녹을 털었다.
그러다 손끝이 섰다.
그립 외장.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의 패널.
순정이 아니었다.
"…이 외장, 원래 네 거 아니지?"
"몰라." 온이 말했다. "처음부터 이랬어."
엄지로 접합선을 훑었다. 규격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어디 딴 데서 떼어 온 패널을, 누가 손으로 깎고 다듬어서 그립 곡면에 앉혔다. 손톱을 대 보니 이음매가 머리카락 굵기로 지나갔다. 오래 묵어 보이는데, 물 샐 틈이 없었다.
"솜씨 좋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이 나왔다. "기계로 깎은 게 아니야. 손으로 맞춘 거야, 이거. 좋은 손이 지나간 물건은 티가 나거든. …우리 아빠 입버릇이었는데."
"뭐가?"
"방금 그 말. 좋은 손이 지나간 물건은 티가 난다."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의 냉각팬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작업등을 비스듬히 낮췄을 때였다.
접합선을 따라가던 눈이 이음매 틈에서 멈췄다. 틈 안쪽. 외장 안면으로 이어지는 자리.
뭔가 있다.
"…이거 봐라?"
파인 골이었다.
때가 아니다. 그을음도 아니다. 걸레로 문지르고, 용제 묻혀 다시 문지르고, 손톱 끝으로 긁어도 그대로였다.
파인 거다. 도장 밑의 금속까지.
날붙이 자국이 아니었다. 공구 자국도 아니었다.
못 같은 걸로, 꾹꾹 눌러 그은 자국.
틈으로 보이는 건 끝자락뿐이었다. 가는 선 두엇이 틈 밑으로 비스듬히 숨어들었다. 무늬인지, 글자인지, 애들 낙서인지.
선 하나는 끝이 조금 삐뚤었다. 별이 되다 만 것처럼, 꼭짓점이 다 채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힘 조절이 서툰 손이 그은 것처럼.
"온. 너 몸에 낙서 있는 거 알았어?"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지르는 거 간지러워?"
"…아니." 반 박자. "모르겠어."
"모르겠대." 미르가 구석에서 말했다. "요즘 검은 다 그렇게 대답하더라."
원인 불명.
정비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네 글자다.
채윤은 작업등을 바짝 끌어당겼다. 드라이버를 첫째 나사에 물렸다. 외장을 벗기면 안면이 나온다. 낙서든 뭐든, 십 분이면 정체가 나온다.
드라이버가 반 바퀴를 돌기 전에.
사이렌이 울었다.
◆
손이 멈췄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굳었다.
사이렌은 언제나 그녀를 열한 살로 되돌린다.
현관 문턱. 쟁반 위에서 식어 가던 보리차 두 잔. 아버지 몫으로 챙겨 놓고 끝내 못 건넨 장갑.
그 기억의 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다. 오래도록 한 번도 안 바뀌었다.
"공습경보! 등화관제! 전원 대피호로!"
반장의 고함이 복도를 굴러왔다. 작업등이 일제히 죽었다. 정비동이 캄캄해졌다.
채윤은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몸을 움직였다.
코어 물린 장비는 두고 가지 않는다. 규정이다. 규정이 아니어도 그럴 참이었다.
정비대에서 검을 뽑아 안고 뛰었다. 복도 중간에서 마주 뛰어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한결이었다.
행정반은 대피호 바로 옆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대피호 반대쪽으로 — 정비동 쪽으로 — 달려오는 중이었다.
검 가지러.
"네 검."
검집을 내밀었다. 한결이 받아 안았다. 고맙단 말은 없었다.
다만 받아 안는 팔이, 쇳덩이 받는 팔이 아니었다.
대피호는 정비동 지하였다. 콘크리트 계단, 백열전구 하나, 기름 드럼, 사람들. 미르까지 비집고 들어와서 발 디딜 데가 없었다.
"얘도 대피를 하네." 서 일병이 벽에 붙어 앉으며 중얼거렸다.
"대피가 아니라 장비 회수다." 미르가 정정했다. "너희가 깔리면 기름은 누가 주냐."
어둠 속에서 사이렌이 벽을 타고 웅웅거렸다.
채윤은 떠들기 시작했다.
"야, 우리 대피호 명당인 거 알아? 위가 정비동이잖아. 무너져도 부품이 쏟아지지, 돌이 쏟아지냐. 재수 좋으면 라쳇 새 걸로 하나 줍고."
"떨어지면 다 같이 눌린다." 미르가 말했다.
"넌 좀 조용히 해."
"떠드는 건 너다."
떠드는 건 그녀였다.
입을 다물면 열한 살의 현관이 올라온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에는 요령도 연습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시끄러워지는 쪽을 골랐다. 하도 오래전에 골라서, 이제는 고른 줄도 모르고 산다.
"고도 구천."
검이 말했다.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 방 전체에 고루 닿는 소리였다.
"폭장 무게가 아니야. 엔진음이 가벼워. 정찰 편대야. 지나가는 길이고. …여기엔 아무것도 안 떨어져."
대피호의 공기가 반 뼘 느슨해졌다. 누군가 참았던 숨을 놨다.
"…확실해?" 채윤이 물었다.
"응. 소리는 거짓말 안 해."
"몇 대야?"
"여섯." 반 박자. "다섯. …넷. 멀어지고 있어. 셀까?"
"세 줘."
온은 세어 줬다.
셋.
둘.
사이렌 밑에서 숫자를 세어 주는 목소리라니.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어깨가 내려갔다.
하나.
그리고 — 없어.
검이 말했고, 정말로 잠시 뒤 벽의 웅웅거림이 가라앉았다.
고장은 거짓말을 안 한다, 사람이 하지.
아버지의 일지 첫 장에 적혀 있던 문장과 반쯤 닮은 말이었다.
어둠 속에서 채윤은, 벨트의 인식표를 쥐고 있는 제 손을 뒤늦게 발견했다. 놋쇠가 손안에서 미지근했다.
전구 밑으로 한결의 옆얼굴이 보였다.
검집을 무릎에 세워 안고 있었다. 두 팔로.
잠든 걸 깨우지 않으려는 자세하고 비슷했다.
검을 일곱 번 퇴짜 놓았다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지금 저 팔로 검을 안고 있었다. 채윤은 그 각도를 오래 봤다. 어딘가 낯익은데,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이렌은 이십 분을 울고 멎었다.
◆
해제 방송 삼십 분 뒤에 무전이 왔다.
동부 전선 재개. 십칠 초소 인원, 여명 복귀. 장비 반출은 금일 중.
"외장은?" 반장이 물었다.
"못 깠어요. 경보 때문에." 채윤은 반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야간 분해는 규정 위반이고, 새벽 출발이면 시간도 없고."
"다음 입고 때 봐."
다음 입고 때.
정비창에서 그 말은 절반쯤 기도다. 다음 입고가 있으려면 검도, 소유주도,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저녁 어스름에 그녀는 검을 돌려줬다. 정비동 앞. 눈이 다시 얇게 내리고 있었다.
"검신 이상 무. 코어 이상 무. 보이스 정상. 유머 고장."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그리고 그립 외장 이음매에 원인 불명 각인 하나. 다음에 오면 그거 내가 깐다. 예약이야."
"…응." 온이 말했다. "예약."
"미르. 너는."
"기름 인심 후한 인간은 기억해 둔다." 미르가 등의 썰매 끈을 고쳐 걸었다. "너는 두 번째로 기억되는 인간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첫 번째는 누군데."
"기름 통째로 주고 간 인간. 십이 년 전에. 죽었지만."
"…너희 기계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을 끝내더라."
한결이 검을 등에 걸었다. 채윤은 다가가 어깨끈을 붙잡고 반 뼘 고쳐 줬다. 오지랖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연습된 자연스러움으로.
"잘 가라. 죽지 말고. 검 말 들어."
이 년 전보다 한 마디 늘었다.
"…노력한다."
"노력 말고."
잘 가라는 말 뒤에, 입이 한 번 달싹였다. 하지만 그건 접수도 반출도 안 되는 품목이었다. 창고에 오래 처박아 둔.
창고 정리는 정비사가 세상에서 제일 미루는 일이다.
한결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게 저 인간의 최대치라는 걸 그녀는 열몇 살 때부터 안다.
멀어지는 등 뒤에서 검집이 흔들렸다. 눈발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반 박자 늦게 닿았다.
"고마워, 채윤."
이름을 불러 주는 검은 처음이었다.
채윤은 손을 흔들었다.
흔들면서 —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 봤는데.
그 생각이 스치는 데 일 초.
요즘 검 절반이 그 계열이지.
덮는 데 일 초.
그날은, 도합 이 초짜리 일이었다.
◆
밤.
정비동에는 그녀 혼자 남았다.
작업대 아래에 아버지의 공구함이 있다. 잠긴 채로 십오 년. 열쇠도, 번호도 없이 그 밤에서 이쪽으로 넘어와서, 지금은 그녀의 발받침 노릇을 한다.
채윤은 그 위에 발을 얹고 정비 일지를 폈다. 기름에 전 표지. 양식은 아버지가 쓰던 걸 그대로 물려 쓴다.
정비사는 손으로 고치고, 일지로 남긴다.
손은 먼저 가도 일지는 남는다고, 그랬다.
날짜를 적었다. 기체명을 적었다.
등불 병기, 온. 검신 이상 무. 코어 이상 무.
펜이 다음 줄 앞에서 잠깐 섰다.
이음매 틈의 파인 골. 끝이 삐뚠 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그녀는 적었다.
—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
'요망' 뒤에서 펜 끝이 조금 머물렀다.
십 분이면 깔 수 있었는데.
다음 입고 때.
속으로 한 번 더 예약을 걸고, 그녀는 일지를 덮었다.
그 줄을 다시 펼쳐 볼 일은, 아주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