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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등불 축제」

중계탑은 사흘 만에 다시 섰다.

협로에서 되찾은 부품은 상자째 탑 아래 부려졌고, 부품을 따라 후방에서 기술 지원이 하나 올라왔다. 정비창 트럭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공구벨트부터 차는 지원이었다.

"예약 손님이 하도 안 오셔서." 채윤이 말했다. "가게가 직접 왔다."

"…네가 왜 와."

"칠 번 탑 중계 모듈은 제삼 정비창 관할이거든. 서류에 그렇게 돼 있어. 군대잖아. 서류가 시키면 와야지." 그녀는 한결의 옆을 지나치며 등의 검집을 손등으로 톡 두드렸다. "잘 있었냐, 얘도."

"응." 온이 대답했다. "채윤."

"어. 이름 기억하네."

"기름 인심 후한 인간이 왔군." 보급 썰매 옆에서 미르가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로 후한."

"너 아직도 붙어 있냐." 채윤이 웃었다. "첫 번째는 누군데."

"영업 비밀이다."

탑은 협로 어귀의 능선에 서 있었다. 탑 중턱의 중계 모듈까지는 얼어붙은 사다리로 스무 걸음. 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을 때마다 탑 전체가 낮게 울었다.

"바람이 문제네." 채윤이 안전줄을 허리에 걸며 위를 올려다봤다. "몰아칠 때 매달려 있으면 인두고 뭐고 없는데."

"돌풍은 마흔 초에 한 번씩 와." 온이 말했다. "능선을 넘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정해. …지금. 다음까지 서른일곱 초."

채윤이 눈을 껌뻑였다.

"…재 보고 하는 말이지?"

"응. 열두 번 쟀어."

"검이 아니라 풍향계를 차고 다니네, 넌." 그녀는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좋아. 검이 하나 세면 올라가고, 검이 둘 세면 붙어 있는다. 콜?"

"콜이 뭔지 알아. 좋다는 뜻이지." 반 박자. "좋아."

수리는 이틀 걸렸다. 채윤은 온이 세는 숫자에 맞춰 오르내렸고, 박 상병은 아래에서 부품을 날랐고, 한결은 능선의 눈밭에 경계선을 잡았다. 인두를 잡기 전마다 채윤의 손이 버릇처럼 공구벨트로 갔다. 닳은 놋쇠 패를 한 번 쥐었다 놓고, 그다음에 불을 올렸다. 한결은 그 버릇을 어릴 때부터 알았다. 누구 버릇인지도 알았다. 아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도, 오래된 버릇이었다.

이틀째 해거름에 탑이 켜졌다.

십오 일 만에 잡음이 걷혔다. 행정반의 야전 전화 옆에서 죽어 있던 무전기가 갑자기 대대의 목소리를 뱉었을 때, 위병 둘이 소리도 못 지르고 서로의 어깨만 두드렸다. 취사장 굴뚝에서 저녁 연기가 올랐다. 두 끼가 세 끼로 돌아온 날이었다.

전언을 받아 적던 선임하사가 달력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내일이구나."

"뭐가 말입니까." 박 상병이 물었다.

"그 밤. 십오 주기다."

행정반이 잠깐 조용해졌다. 박 상병이 뒤늦게 되물었다.

"…기계한테도 주기라고 합니까?"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서 일병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 밤에 없어진 게, 고장이 아니면."

선임하사는 대답 대신 외출 명부를 꺼냈다.

"탑 아래 계곡 마을에서 해마다 등을 띄운다. 보급도 뚫렸겠다, 절반은 내려갔다 와라. 초소 생기고 처음 주는 외출이다."

이튿날 해거름, 외출조는 위병소 앞에 모였다.

병기는 두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서 일병은 제 검을 무기고 선반에 눕히며 검집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었다.

"영감은 낮잠이나 자."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말했다. "축제라는 데는 원래 젊은것들이 가는 거다."

"자네가 제일 젊잖아, 여기서."

"제조 연도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지."

무기고를 나서던 서 일병이 한결을 보고 멈췄다. 한결의 등에는 검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건 안 놓고 가냐."

한결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정비 지원이 동행한다. 이동 간 점검 명목."

"채윤 씨는 아까 먼저 내려갔는데."

"……"

"뭐, 조장 재량이지." 서 일병은 더 캐지 않았다. 캐지 않는 대신 입가에 무언가를 물고 앞서 걸었고, 한결은 그 뒷모습에 대고 변명을 더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고를수록 길어질 변명이었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능선의 눈을 밟고 갔다. 반쯤 내려갔을 때 뒤에서 미르가 말했다.

"돌아봐라, 인간들."

돌아보았다. 어두워지는 능선 위에서 칠 번 중계탑이 항공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붉은 불 하나가 일정한 간격으로, 죽지 않았다고, 죽지 않았다고 신호하듯이.

"십오 년 전 오늘은 꺼지는 밤이었다지." 미르가 말했다. "올해는 뭐가 하나 켜졌군. 너희가 켰다."

"고물이 웬일로 덕담을 하냐." 박 상병이 말했다.

"덕담이 아니라 집계다."

계곡 아래에서 불빛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이었다.

마을은 계곡의 강가에 있었다. 전쟁 전에는 이름이 따로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다들 그냥 아랫마을이라고 불렀다. 피난민들이 눌러앉아 만든 동네였고, 집들의 절반은 컨테이너였다.

축제라고 했다.

그런데 노랫소리가 없었다. 호객도 없었다. 강둑을 따라 노점이 대여섯, 국밥 솥 하나가 김을 올리고, 그게 전부였다. 대신 골목마다 종이등이 걸려 있었다. 아직 불을 넣지 않은 종이등이 수백 개,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겠다고 대답했다가 지워진 기계들을,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등불이라고 불렀다. 종이등이 이름을 만든 게 아니었다. 이름이 먼저였고, 종이등은 그 이름을 따라온 것이었다.

강둑 초입에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노인들이 접은 종이등을 나눠 주고, 사람들은 붓펜을 받아 등의 옆면에 한 줄씩 적었다. 한결은 걸려 있는 등들을 지나치며 그 줄들을 읽었다.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읽혔다.

문 잘 잠그고 자라.

가스 잠갔다. 걱정 말고.

숙제 먼저 하고 놀아.

밥은 먹고 다니니.

전부 그런 말들이었다. 유언이라기엔 너무 시시하고, 시시하다기엔 십오 년을 살아남은 말들. 지워지러 걸어 나가던 것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대체로 부엌과 현관의 말이었다.

"인간은 이상한 종족이다." 미르가 옆에서 말했다. 사족은 등을 하나하나 렌즈로 훑고 있었다. "지울 때는 세지 않았다. 몇 대를 껐는지, 어느 집에서 몇을 끌어냈는지. 그런데 지우고 나서는 센다. 해마다, 꼬박꼬박, 등까지 만들어서."

"…넌 그 밤에 어디 있었냐." 서 일병이 물었다.

"고철 더미 밑에." 미르는 렌즈를 거두지 않았다. "물류 기체는 회수 목록의 맨 뒷장이었다. 앞장이 다 처리되기 전에 겨울이 끝났고, 명령서에도 유통기한이 있더군."

"운이 좋았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살아남은 쪽이 하는 거다."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그래서 내가 한다. 운이 좋았지."

탁자 앞에 낯익은 등이 하나 서 있었다. 협로의 그 병장이었다. 후송 트럭을 기다리며 초소에 남아 있던 그가, 빈 검집을 그대로 허리에 차고 붓펜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이것도 되는 겁니까." 병장이 탁자의 노인에게 물었다. "죽은 게 아니라… 데려가진 건데."

"등은 안 가린다." 노인이 말했다.

병장은 한참 만에 적었다. 귀 막아. 세 글자였다. 그는 제 글씨를 잠시 내려다보고, 등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강둑 쪽으로 걸어갔다. 빈 검집이 걸음마다 허벅지를 쳤다.

한결은 그 등에서 눈을 떼는 데 시간이 걸렸다.

소매가 당겨진 것은 그때였다. 예닐곱쯤 된 아이가 한결의 소매를 쥐고, 그의 등에 걸린 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진짜 말해?"

"응." 대답은 검이 했다. "해."

아이의 눈이 커졌다. 아이는 잠시 검을 뜯어보다가, 아이들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물었다.

"너는 왜 안 죽었어?"

골목의 공기가 한 뼘 얇아졌다. 어디선가 아이의 어미가 낮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온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왔다.

"…운이 좋았어."

"운이 좋으면 안 죽어?"

"운이 좋았다는 말은." 온이 말했다. "살아남은 쪽이 하는 거래."

아이는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달려온 어미의 손에 끌려가며 한 번 더 검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미르가 노즐을 달그락 접었다. 제 말이 돌아온 것에 대한 논평은 하지 않았다.

일이 벌어진 것은 탁자 앞에서였다.

붓펜을 나눠 주던 노파가 한결의 등 뒤를 보고 손을 멈췄다. 정확히는, 등에 걸린 검을.

"…등불이네."

말이 크지 않았는데 주변이 조용해졌다. 등을 접던 손들이 멎고,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적의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대하기 어려운 것 — 목마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는 등불은 십오 년 만에 처음 본다." 노파가 말했다. 그러고는 탁자를 짚고 일어서서, 검에게 곧장 말을 걸었다. "말을 하니, 너."

반 박자.

"응." 온이 말했다. "해."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러더니 접다 만 종이등을 탁자 위에 펴 놓았다.

"우리 집 애는 부엌 담당이었어. 스무 해를 같이 살았지. 그 밤에 저 혼자 알아듣고, 앞치마 벗어서 개어 놓고 나가면서 그러더라. 금방 올게." 노파의 손끝이 등의 빈 옆면을 쓸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동네 기계들이 다 그랬다더군. 짜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그 말이었대. 거짓말이 될 걸 저희도 알았을 텐데."

한결은 어느 순간부터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받은 말이라, 해마다 그 말을 적어.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그 말밖에 적을 게 없어."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한마디만 다오. 살아 있는 등불의 말은 받아 본 적이 없어. 너희가 마지막에 하는 그 말이라도 좋다. 등에 적게."

사람들이 기다렸다. 붓펜이 온의 대답을 기다리며 노파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반 박자. 그리고 반 박자 더. 온의 대답은 언제나 반 박자 늦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길었다.

"그 말은 안 해."

노파의 손이 멈췄다.

"…왜?"

"…모르겠어." 낮고 고른 목소리였다. "그냥, 그 말만은."

침묵이 왔다. 눈 밟는 소리도 없는 침묵이었다.

한결의 옆구리 안쪽 어딘가가 얇게 결렸다. 이유를 따라가면 안 되는 결림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다. 그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매번 멈추던 자리보다 한 걸음 앞이었고, 그 한 걸음이 어느 쪽으로 나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노파였다. 노파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은, 하는 말이 아니지." 노파가 붓펜을 내려놓았다. "지키는 말이지."

"대신." 온이 말했다. "이건 어때."

"뭐냐."

"여기 있어."

노파는 그 말을 입속에서 한 번 굴려 보았다. 여기 있어. 그러고는 붓펜을 다시 들어, 떨리는 획으로 등의 옆면에 넉 자를 적었다.

"떠나는 말이 아니네."

"응." 온이 말했다.

노파는 더 묻지 않았다. 다 적은 등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한 번 살펴보고, 아이를 안듯이 품에 안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제 등으로 돌아갔다. 몇몇은 적던 줄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뭐라고 적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명물 됐네, 너." 채윤이 어느 틈에 옆에 와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았다. "가게 차려도 되겠어. 한 줄에 얼마 받게?"

"돈은 손이 없어서 못 받아."

"……그거 농담이지?"

"시도였어."

"반은 성공했다." 채윤이 웃었다. 웃고 나서, 그녀는 공구벨트의 놋쇠 패를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문지르는 줄도 모르는 손놀림이었다. "국밥 먹으러 가자. 여기까지 와서 짬밥 얘기만 하다 갈 순 없지."

국밥 솥은 강둑의 끝에 있었다. 김이 등불 걸린 골목 쪽으로 길게 흘러갔다.

넷이 앉았다. 한결과 채윤이 평상에, 검은 한결의 무릎이 닿는 자리에 세워서, 미르는 평상 밑에 엎드려서. 미르 몫은 없었지만 사족은 솥에서 올라오는 김을 렌즈로 좇는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연료를 입으로 넣는 종족은 비효율의 극치다." 미르가 말했다. "그런데 저 김 냄새는, 인정한다. 설계가 좋아."

"국밥한테 설계가 뭐냐." 채윤이 숟가락을 들었다. "삼 년 만이다, 바깥 국밥. 정비창 짬밥은 국물에 영혼이 없어. 간은 맞는데 영혼이 없어."

"영혼이 무슨 맛인데." 온이 물었다.

"이 맛." 채윤이 국물을 한 술 떠서 허공에 들어 보였다. "못 먹는 애한테 못 할 말이었네. 미안."

"괜찮아. 김은 보여."

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조용한 강둑에서 조금 크게 울렸고, 그녀는 제 웃음소리에 스스로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정비창의 신참이 인두로 제 군화를 지진 얘기. 검들이 수리 순서를 두고 말싸움을 한 얘기. 얘기는 끊이지 않았는데, 끊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채윤이 물었다.

"너네 며칠 됐지, 이제."

"열하루." 온이 대답했다.

"날수를 세냐?" 채윤이 숟가락을 문 채 웃었다. "신혼이네, 신혼."

"신혼이 뭔지 알아. 새로 같이 사는…"

"거기까지." 한결이 말했다.

국물이 반쯤 줄었을 때, 채윤의 수다가 처음으로 멎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그릇에 걸쳐 놓고, 강 쪽을 보았다. 놋쇠 패가 다시 엄지 밑에 있었다.

"우리 아빠는."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 밤에 나가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

"……"

"장갑 챙기는 건 기억나. 두 켤레. 보리차 끓여 놓고 기다린 것도 기억나고. 그런데 말은…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웃기지. 십오 년 동안 딴 건 다 기억나는데, 제일 기억나야 되는 게 안 나."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이라서, 한결은 위로를 고를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채윤은 우는 자리에서 웃는 사람이었고, 그 웃음을 걷어내는 방법을 그는 십오 년째 몰랐다.

"저기 다 적혀 있잖아, 남들 마지막 말은." 채윤이 턱으로 골목의 등들을 가리켰다. "나만 백지야. 적을 게 없어서 한 번도 못 띄웠다? 이 축제에서."

"……"

"아, 몰라." 그녀는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먹자.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

한결은 무어라 말을 시작하려 했다. 시작하기 전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무릎 옆의 검으로 갔다. 검신에 골목의 등불이 흐리게 비쳐 있었다. 온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파형도 없이, 불빛만 얹은 채로, 검은 강 건너의 어둠 쪽을 향해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한결아."

채윤의 목소리였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다음에 그의 무릎 옆의 검을 보았고, 그다음에 골목의 등불들을 보았다.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무언가가 그녀의 입가까지 올라왔다가, 올라온 것보다 빠르게 내려갔다.

"야, 국물 식는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식으면 영혼 없어져. 빨리 먹어."

한결은 순순히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은 아직 뜨거웠다. 무엇이 이상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것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평상 밑에서 미르가 낮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인간의 대화는 발화되지 않은 쪽이 본문이다."

"뭐라고?" 채윤이 물었다.

"김이 좋다고 했다."

등은 자정 전에 띄웠다.

그 밤에 사이렌이 울렸던 시각이 자정 언저리였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은 그 시각이 오기 전에 하늘을 미리 밝혀 두었다. 어두운 채로 그 시각을 맞지 않으려고. 십오 년째 지키는 순서라고 했다.

강둑에 사람들이 늘어섰다. 불 넣은 종이등이 손에서 손으로 놓여났다. 등은 하나씩, 열씩, 백씩 올랐다. 바람이 순해서 등들은 흩어지지 않고 강을 따라 길게 흘렀다. 마지막 말들이 불을 품고 하늘로 갔다. 문 잘 잠그고 자라, 가스 잠갔다, 귀 막아, 여기 있어.

병장은 제 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강둑 끝에 서 있었다. 노파는 등을 놓아 보내고 한참 동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놓는 손들은 다 비슷했다. 던지지 않고, 밀지 않고, 손바닥을 펴서 등이 스스로 떠날 때까지 받치고만 있는 손.

서 일병은 강둑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등은 적지 않았다. 적을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얼굴이었고, 한결은 그 얼굴을 못 본 척해 주었다. 박 상병은 등 하나를 사서 한참 붓펜을 물고 있다가 결국 '고생했다' 넉 자를 적어 띄웠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한결은 문득, 자신이 하늘이 아니라 무릎 옆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검신에 오르는 등들의 불이 수십 개로 잘게 비쳐서, 검이 저 혼자 불을 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시선을 하늘로 되돌렸다. 되돌리는 데에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여든둘, 여든셋."

온이 세고 있었다. 낮게,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왜 세."

"…세어 두고 싶어서. 이건."

"세면 뭐가 달라지는데."

"세어 둔 건." 반 박자. "없어져도, 몇이 없어졌는지는 남잖아."

한결은 대꾸하지 않았다. 등은 계속 올랐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온의 목소리가 백에 닿았을 때, 한결의 숨이 저도 모르게 멎었다. 백까지 세고, 다시 백까지 세던 밤이 등 뒤 어딘가에서 문을 두드렸다.

"백하나."

온은 아무렇지 않게 백을 지나갔다. 백둘, 백셋. 수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이상하게, 그것이 위로가 되었다. 백에서 끝나지 않는 수를 그는 처음 들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진 것은 등의 마지막 무리가 강 하류의 어둠으로 넘어간 뒤였다. 채윤은 새벽에 정비창으로 트럭을 몰아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한결의 등을 주먹으로 퍽 쳤고, "검 재점검 예약 안 잊었다, 다음에 들어오면 얌전히 내놔"라고 했고, 미르에게는 "기름 아껴 써라"라고 했고, 온에게는 잠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잘 있어"라고 했다. 미르는 노점이 걷는 자리에서 쓸 만한 고철이 나오는지 보겠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둑에는 한결과 검만 남았다.

그는 방죽 끝에 앉아 검을 검집째 무릎에 눕혔다. 하류로 흘러간 등 몇이 아직 어둠 속에 점점이 떠 있었다. 강 건너까지 넘어간 것도 있었다. 강 건너의 낮은 언덕 위로, 등 하나가 창문에 켜진 불처럼 걸려 있었다.

"강 건너까지 가는 것도 있네." 온이 말했다.

"바람이 좋아서."

"응. …저기, 하나. 저기, 둘."

온은 강 건너의 불빛을 셌다. 세 개까지 세고, 넷은 오지 않았다. 한결은 그 수 세는 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명치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나가게 두었다. 붙잡으면 이름을 알게 될 것 같아서.

그때 보았다.

검신과 그립의 이음매.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그 틈에서, 물기 한 줄이 배어 나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 녹은 물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눈은 진작 그쳐 있었고, 검집에서 나온 검신은 말라 있었다. 물기는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등불의 먼 빛을 받아 가늘게 반짝이며, 한 줄. 딱 한 줄이었다. 장갑을 벗은 손등에 그 끝이 닿았을 때, 물기는 미지근했다. 냉각수 특유의, 희미하게 단 냄새가 났다.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척도 내지 않았다. 고장의 경보음도, 농담의 시도도 없었다. 검은 강 건너의 불빛 쪽을 향한 채 그대로 있었고, 물기만이 소리 없이 검신의 홈을 따라 내려가 눈 위에 떨어졌다. 눈에 아주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겼다.

한결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못 본 척했다.

닦아 주지 않았다. 어디 새는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정비창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시선을 강 건너로 돌리고, 온이 세다 만 불빛을 이어서 셌다. 하나, 둘, 셋. 넷은 그의 눈에도 없었다.

왜 못 본 척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물으면 온은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었다. 그 밤은 왠지, 그 대답을 들으면 안 되는 밤 같았다. 그뿐이었다.

등불의 마지막 하나가 강 건너 언덕 뒤로 넘어가 사라질 때까지, 인간과 검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먼저 일어서자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