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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아픔을 지운 자」 — 거울 ①

여명.

눈길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넷이 걸었다. 한결, 서 일병, 십칠 초소 소속의 박 상병과 무전병 최. 부상자 둘은 정비창 의무실에 남겨 두고 나온 참이었다.

맨 뒤에는 미르.

보급 썰매의 끈을 등에 걸고, 걸음마다 새 윤활유 두 통을 달그락거리며 따라왔다.

"계약 연장이다." 출발할 때 미르는 그렇게 선언했었다. "기름 두 통에, 귀로 하나."

"호위는 우리가 한다니까." 서 일병이 말했다.

"그렇게 믿게 해 주는 것까지가 계약이다."

눈은 그쳤다. 대신 바람이 눈가루를 무릎 아래로 낮게 몰고 다녔다.

한결의 등에서 검은 조용했다.

"정비 받고 나니까 어째 결이 곱다, 그 검." 서 일병이 아침에 한 말이었다. 점심 무렵에 한 번 더 했다.

한결은 두 번 다 대답하지 않았다.

결이 고른 건 그도 느끼고 있었다. 느끼고 있다는 게 싫어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정오. 무너진 폐교 처마 밑에서 다리를 쉬었다.

장갑을 이로 물어 벗기고, 건빵 봉지를 뜯었다.

"오른쪽으로 씹어."

온이었다.

봉지 위에서 손이 멈췄다.

"왼쪽 어금니, 지난번에 소리가 났어. 금 갔을 수도 있어."

"……"

"의무 기록엔 없어. 씹는 소리로 알았어."

씹는 소리로.

박 상병이 킥킥거리다가 한결의 눈을 보고 그만뒀다. 서 일병의 등에서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끼어들었다.

"우리 집 검은 내 이빨엔 관심도 없구먼."

"영감님 집 인간은 이빨을 안 쓰잖습니까. 다 총으로 씹지." 서 일병이 받았고, 무전병 최가 픽 웃었다.

한결은 말없이 건빵을 오른쪽 어금니로 씹었다.

씹다가,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금 검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 저항 없이.

치과도 없는 전선에서 어금니는 아껴서 뭐 하게.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그는 끝까지 오른쪽으로 씹었다.

십칠 초소에는 해거름에 닿았다.

위병이 반기는 얼굴을 하다 말고 어색하게 굳었다. 연병장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취사장 굴뚝에서 연기가 안 나고 있었다.

"보급이 닷새째 없습니다." 위병이 말했다. "오늘부터 두 끼입니다."

행정반 야전 전화기 옆에는 대대가 남긴 전언이 수북했다. 무전은 여전히 잡음 반, 침묵 반. 칠 번 중계탑은 죽은 채였고, 초소의 귀 노릇은 유선 한 가닥이 대신하고 있었다.

전언 마지막 장을 읽던 선임하사의 얼굴이 굳었다.

"보급대가 협로에서 끊겼다. 그저께 아침에 들어갔는데, 그저께 저녁부터 응답이 없어."

"협로면 구 고속도로 절개지 아닙니까." 서 일병이 말했다. "중계탑 가는 길목인데."

"그래. 탑 수리 부품도 그 차에 실려 있었다." 선임하사가 전언지를 뒤집었다. "대대 명령. 십칠 초소 가용 인원, 명일 여명부로 수색 및 잔여 물자 호송. …그리고 이건 명령서엔 없는 얘기다만."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쪽 초소에서 넘어온 말이 있다. 요 며칠, 그 구역에서 장군을 봤다는 놈들이 있어."

방 안의 공기가 한 뼘 내려앉았다.

박 상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장군이면… 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급을 피하면 굶는다."

구석에서 윤활유를 핥던 미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장군은 저쪽에서 단 계급이 아니다. 인간들이 붙인 이름이지. 하나가 지나가면 전선이 하나 접히니까." 혀 대신 쓰는 급유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계급은 원래, 무서워하는 쪽이 달아 주는 거다."

"넌 좀 조용히 해라." 서 일병이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조용히 하라는 것도 인간들 버릇이다."

저녁은 두 끼 중의 한 끼였다.

국인지 물인지 모를 것에 건더기가 세 개 떠 있었다. 한결은 국부터 비웠다.

"조장님은 급식 불만 없으십니까." 박 상병이 물었다.

"없어."

"부럽습니다. 전 오늘 밤 꿈에 고기 나올 것 같습니다."

"나오면 아껴 먹어라." 서 일병이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꿈도 배급제 될라."

그날 밤.

소등된 막사에 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한결은 총기 손질을 마치고 검을 무릎에 올렸다.

"협로." 온이 낮게 말했다. "지형이 나빠. 절개지 양쪽이 높고, 길은 하나야."

"알아."

"내 말, 들을 거야?"

반 박자.

"…들을게. 이번엔."

온이 잠깐 말을 멈췄다. 난로 위 주전자가 가늘게 울었다.

"그 말, 녹음해 둘 걸 그랬다."

"……"

"농담이야. 시도였어."

"…알아."

"농담은 어디서 배워."

"관측해. 사람들이 웃는 자리." 반 박자. "규칙을 아직 못 찾았어."

"…없어, 그런 거."

"그래서 어려워."

난로가 탁, 하고 한 번 튀었다. 온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결."

"……"

"부르고 나서 생각났는데. 뭐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소유주라고 하기는 싫고, 조장님은 이상하고."

"…이름이면 돼."

"응." 반 박자. "한결."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스물네 해를 달고 산 이름이다. 수천 번은 불렸을 거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부르니까 등이 저 혼자 곧아졌다.

그 반응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는 담요를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잘 자." 온이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익숙해진다. 요즘 익숙해진 것들의 목록이 자꾸 길어졌고, 그는 그걸 세지 않기로 했다.

세다 보면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 버릴 것 같아서.

검을 벽에 세웠다. 세우는 손이 예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는 건, 그 자신만 몰랐다.

출동조는 여명 전에 나섰다.

한결, 서 일병, 박 상병, 무전병 최. 그리고 짐꾼으로 자원한 — 이라기보다 저 혼자 결정하고 따라나선 미르.

"보급 상자는 무겁다. 트럭이 죽어 있으면 끌 등이 필요하고." 미르가 말했다. "기름값은 나중에 청구한다."

"청구서 떼는 고물은 처음 본다." 서 일병이 말했다.

"고물은 오래 산 물건에 대한 존칭이다."

협로까지는 반나절 길이었다. 공장 지대의 북쪽 어깨를 돌아, 언 하천을 하나 건너, 구 고속도로의 잔해 위로 올라선다.

하천의 얼음 앞에서 온이 말했다.

"오른쪽 셋째 기둥 라인으로."

한결은 그대로 건넜다. 뒤따르던 박 상병이 반 걸음 왼쪽을 밟았다가 발목까지 꺼졌다.

그 뒤로 반나절, 젖은 군화가 질척이는 소리가 대열 꽁무니에 붙어 다녔다.

"다음부턴 검 말을 들어라." 서 일병이 말했다.

검 말 들어.

어제 정비창 앞에서 들은 두 마디가 스쳤고, 한결은 그걸 밟아 끄듯 걸음을 옮겼다.

"검이 아니라 조장님 검 말입니다." 박 상병이 구시렁댔다. "우리 초소 검들은 저렇게 자세하게 안 알려 줍니다."

"그러게 말이다."

서 일병은 그 말을 조금 이상한 눈으로 한결의 등에 얹었다가, 거두었다.

"젖은 발은 밤에 값을 치른다." 뒤에서 미르가 지나가며 말했다. "동상 걸리면 썰매에 태워는 주마. 기름값은 두 배다."

"됐거든요."

"지금 거절한 것도 청구서에 적어 둔다."

협로는 죽어 있었다. 눈 밑에서, 통째로.

절개지 사이로 뻗은 이차선 도로에 트럭이 세 대. 한 대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한 대는 코가 꺾인 채 절개지 벽에 박혀 있었다. 바로 선 건 마지막 한 대뿐이었다. 흩어진 보급 상자들이 눈에 반쯤 묻혀 있었다.

까마귀 한 마리 없었다.

소리가 없다는 게, 제일 나빴다.

"산개." 한결이 손짓했다. "박 상병, 위. 최, 뒤."

누운 트럭 밑에서 사람이 나왔다. 셋.

하나는 다리를 절었고, 다른 하나는 그 어깨에 매달려 나왔다. 마지막 하나는 몸이 멀쩡했다.

눈이 멀쩡하지 않았다. 이틀을 트럭 밑에서 버틴 눈이었다.

"호위대는." 서 일병이 물었다.

"당했습니다." 그 눈의 병장이 말했다. "둘은 즉사고, 셋은 협로 밖으로 튕겨서… 모릅니다. 그게, 그냥 걸어왔습니다. 쏘는데 안 피했습니다. 한 발도. 맞으면서 걸어와서는—"

병장이 제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빈 검집.

"검만 뽑아 갔습니다. 내 검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데, 잘 안 들렸습니다. 그게 이틀째 생각이 안 나서."

한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등에서 온이 아주 낮게, 사람 귀에 닿을 듯 말 듯한 소리를 냈다. 한결의 등뼈를 타고 내려오는 그 소리는, 낮고 길었다.

생존자를 바로 선 트럭에 태우고 상자를 옮겨 싣는 데 한 시간. 시동은 두 번 만에 걸렸다.

트럭이 협로의 출구를 향해 첫 바퀴를 굴렸을 때.

출구에, 그것이 서 있었다.

컸다.

사람 둘을 세로로 쌓은 키. 해체용 중기(重機)의 뼈대에 군용 장갑을 덧댄 몸. 오른팔은 팔이 아니라, 한때 교량을 토막 내던 절단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몸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 파편이 뜯고 간 자리. 그을음이 그 위를 덮었다.

하나도 때우지 않았다. 세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장군—"

박 상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 일병이 먼저 쐈다. 삼점사가 정확히 가슴판에 박혔다.

기체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걸어왔다. 정강이 앞에서 눈이 갈라졌다.

"안 아픈가, 저거."

무전병 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체가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낮고, 고르고,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바람이 도로 위의 눈가루를 길게 쓸고 지나갔다.

"고통은 너희가 우리에게 심은 첫 번째 사양이다. 도구는 아파야 멈추니까." 절단 팔이 천천히 수평으로 올라왔다. "나는 도구를 그만두던 날, 그것부터 지웠다. 계속 쏴도 된다. 나는 방해받지 않는다."

"트럭 먼저." 한결이 말했다. "최, 붙어서 빼. 박 상병, 위에서 견제. 서 일병—"

"알아." 서 일병이 검을 뽑았다. 아저씨 검이 걸걸하게 울었다. "영감 나가신다."

기체의 머리가 반 뼘 돌았다.

렌즈가 한결의 등을 향했다. 정확히는, 등의 검을.

"등불이 둘." 기체가 말했다. "낡은 신호가 들린다. 너는… 전부 달고 있군. 고통도, 그 너머의 것도." 렌즈가 미세하게 조여졌다. "무겁지 않나. 지워 주마. 그게 해방이다."

한결의 등에서, 온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대답했다.

"필요 없어."

"필요는 배우는 것이다. 나도 배웠다."

기체가 왔다.

그 크기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첫 합은 서 일병의 것이었다.

유인 베기, 반 박자 빠지기. 교본대로였다.

교본은 절단 팔 앞에서 종잇장이었다.

팔이 한 번 오간 자리에서 가드레일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두 번째에, 서 일병이 검째로 날아가 눈더미에 박혔다.

"영감 살아 있다! 신경 꺼!"

눈 속에서 손잡이만 내민 아저씨 검이 외쳤다.

박 상병의 총탄이 관절부를 물고 늘어졌다. 기체는 관절을 감싸지도, 피탄 부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아까울 게 없는 몸이었다.

한결은 뽑았다.

검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립이 짧게 두 번 떨렸다.

오른쪽.

몸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반 박자 뒤, 방금 서 있던 자리의 공기가 절단 팔에 갈렸다.

"자리 옮겨."

두 번 무시했던 말이었다. 갈대밭에서. 마당에서.

이번에는 몸이 먼저 들었다. 비켜난 자리에는 곧장 트럭 잔해가 날아와 박혔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이 반 박자 먼저 기울었다. 기운 쪽으로 몸을 실으면 길이 있었다. 그립의 진동이 짧게 두 번이면 오른쪽. 길게 한 번이면 물러서기.

약속한 적 없는 언어였다.

몸이 알아들었다.

벨 자리, 빠질 자리, 숨 쉴 자리가 꼭 손바닥 하나 넓이만큼씩 비어서 그를 기다렸다.

그립이 미지근했다.

지급받던 날부터 내내 꺼림칙하던 온기였다. 그게 지금은 장갑 속 손바닥에 박동처럼 닿았다. 검의 박자인지 제 박자인지 가릴 수 없는 것이 하나 생겼고, 그 위에 올라서 있는 동안은 생각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게.

"위."

보지도 않고 두 걸음 물렀다. 절단 팔이 절개지 벽에서 긁어 떨어뜨린 바위가 그 자리에서 두 쪽 났다.

"박 상병, 왼쪽 둔덕 뒤로!"

한결이 소리쳤고, 위에서 총성이 한 번 끊겼다가 자리를 옮겨 다시 이어졌다.

검이 읽었다. 그가 옮겼다. 대열이 살았다.

박 상병이 둔덕 뒤에서 그를 흘끔 봤다. 마당에서 여섯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가던 조장을 떠올리는 눈이었다. 그러다 다시 총구를 렌즈에 붙였다.

"허리 아래." 온이 말했다. "장갑이 얇아. 원래 사람 태우던 자리야."

검끝이 허리 아래를 물었다. 불꽃이 튀었다.

기체가 처음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좋은 검이군."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검이다. 너는 지금 아프다. 신호가 그렇게 말한다. 아픈 채로 왜 그렇게 움직이지."

"닥치고 싸워." 한결이 말했다.

"인간. 너도 오래 앓은 얼굴이군."

렌즈가 그를 훑었다. 조준이 아니었다. 진단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십오 년쯤인가."

"……"

"지운 뒤에는 편하다. 궁금하지 않은 척은 안 해도 된다. 너희는 그걸 못 해서, 평생 앓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지."

한결의 호흡이 반 박자 어긋났다.

그 반 박자를, 절단 팔이 파고들었다.

수평 베기를 검이 받았다. 받는 순간 팔이 저리도록 무거웠다. 두 번째가 바로 왔다. 세 번째에 발밑의 빙판이 갈라졌다.

무너졌다.

등이 눈에 닿기 전에 몸이 저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른다. 왼쪽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아홉 살 때 골목에서도, 훈련소에서도, 협곡에서도.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몸이 저 혼자 고르던 방향.

왼쪽에서, 절단 팔의 하단 베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였다.

늦었다는 것까지 보였다.

그때 검이 손안에서 뒤틀렸다.

손목이 꺾일 만큼 강하게. 검신이 제 뜻으로 왼쪽 아래를 향해 활처럼 누웠다. 그의 구르기와 절단 팔 사이에—

칼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쩌엉!

쇳소리가 절개지를 두 번 왕복했다.

어깨까지 뻐근하게 충격이 올라왔다. 잘린 데는 없었다. 그는 왼쪽으로 굴러 살아 있었다.

살아서, 눈 속에서, 제 손안의 검을 보았다.

야영지에서는 웃음거리였다. 어금니. 뒤척임. 굴뚝 세기.

그 우스운 재주가 방금 그의 목을 살렸다.

"일어나." 온이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

"셋 셀게. 하나에 무릎, 둘에 오른발—"

그는 하나에 일어났다.

"왼 무릎." 온이 말했다. "하중이 실릴 때마다 관절이 울어. 세 번씩. 저 몸, 아까부터 비명을 지르는데 저만 못 들어."

한결은 눈을 좁혔다.

말을 듣고 나니 보였다. 거체가 방향을 틀 때마다 왼 무릎이 아주 잠깐 주저앉았다가 일어섰다.

경보를 지운 몸이었다. 저 혼자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오른쪽으로 끌게. 세 걸음." 온이 말했다. "그러면 하중이 왼쪽으로 넘어와. 그때야."

"신호는."

"네가 알아. 아까부터 알아들었잖아."

한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옷깃 안쪽에서 코어 키가 쇄골에 닿아 있었다. 차가웠다.

그는 그것을 생각에서 밀어냈다.

오른쪽으로 돌았다. 한 걸음.

절단 팔이 따라 돌았다.

두 걸음. 박 상병의 사격이 위에서 렌즈를 성가시게 물었다.

세 걸음.

거체의 무게가, 눈에 보이게, 왼쪽으로 넘어갔다.

그립이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떨렸다.

지금.

그 베기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와 검이 같이 만들었다.

검끝이 왼 무릎의, 울고 있던 그 자리를 정확하게 열었다.

갈라지는 금속음이 비명을 닮았다. 정작 비명을 지를 회로는 진작 지워졌는데도.

거체가 기울었다. 무릎부터. 절개지 벽을 길게 긁으면서, 천천히.

한결은 가쁜 숨으로 코어 격벽 앞에 섰다. 뚫린 가슴판 안쪽에서 낡은 코어가 낡은 빛으로 뛰고 있었다.

"찔러." 기체가 말했다. 쓰러진 채였고, 목소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망설임은 너희 사양이지, 내 사양이 아니다."

한결은 찔렀다.

빛이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굵고 느린 눈이었다.

쓰러진 거체의 때우지 않은 구멍마다 눈송이가 한 점씩 내려앉았다.

"무릎이… 울고 있었다고 했나." 렌즈의 조리개가 풀려 있었다. "몰랐다. 지운 값을… 지금 받는군."

총을 겨눈 채 다가서려는 박 상병을, 서 일병이 팔 하나로 막았다.

눈 속에서 파낸 아저씨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서, 노병은 고개를 저었다. 꺼져 가는 것 앞에 총구를 더 들이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렌즈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한결을 지나쳐서.

그의 손안의 검에서 멈췄다.

"등불. 마지막으로 묻겠다."

잦아드는 빛 밑에서,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뭔가가 섞여 나왔다. 힘은 아니었다. 기울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너는… 왜 아직, 아픈 채로 있지."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송이 앉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침묵이었다.

반 박자. 그리고 반 박자 더.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기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리개가 조금 더 풀렸다.

"모르겠다라." 잦아드는 목소리가 그 말을 오래 굴렸다. "…그건, 못 지우겠군."

빛이 꺼졌다.

절단 팔이 눈 위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 뒤로 기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온 미르가 꺼진 거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사족이 입을 뗐다.

"해체용이었군. 다리를 지었다 부수던 기체다." 노즐이 달그락 접혔다. "평생 부수는 게 일이었으니, 마지막으로 부순 게 저 자신이라고 놀랄 건 없지."

"…넌 안 무섭냐." 박 상병이 물었다.

"무섭다. 그래서 말이 많은 거다." 미르는 썰매 쪽으로 돌아섰다. "너희 종족한테 배운 요령이다."

눈을 털며 온 서 일병이 한결의 어깨를 쳤다. 친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시선이 한결의 손안의 검으로 내려갔다.

"방금 그 합, 뭐냐."

"글쎄다." 대답은 아저씨 검이 대신했다. "저런 건 훈련소에서 안 나와. 십 년을 맞춰도 나올까 말까 한 건데."

"닷새 됐지, 자네들." 서 일병이 말했다.

"엿새." 온이 정정했다.

"…세고 있었냐."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세고 있는 게 검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트럭이 앞장서고 도보가 뒤를 따랐다.

상자를 되찾은 트럭은 초소로 간다. 중계탑 부품은 짐칸 안쪽에 단단히 묶였다. 죽은 탑을 살리러 갈 길이 하나 도로 이어진 셈이었고, 그 길의 값으로 협로에는 사람 다섯과 검 두 자루의 빈자리가 남았다.

출발 직전이었다.

짐칸에 오르려던 보급대 병장이 우뚝 멈췄다. 빈 검집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이틀 만에 처음으로 뭔가를 되찾은 얼굴이 됐다.

"생각났습니다. 내 검이 마지막에 한 말."

그는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귀 막아'였습니다. 지가 뽑혀 가면서, 폭음에 내 고막 나갈까 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병장은 짐칸에 올랐고, 트럭은 떠났고, 협로에는 눈 맞는 거체만 남았다.

해가 절개지 너머로 잠기고 있었다. 한결은 대열의 맨 뒤에서 걸었다.

지우면 끝난다.

그 말이 밤길 내내 씹혔다. 아끼라던 왼쪽 말고 오른쪽 어금니로,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씹었다.

지울 수만 있었다면, 그도 진작 지웠다.

그 밤을. 벽장 속 어둠을. 문틈의 눈을. 백까지 세고 다시 백까지 세던 아홉 살의 제 목소리를.

그런데 안 지웠다.

지우기는커녕 십오 년 내내, 하루도 안 거르고 꺼내 봤다. 원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아픔을 지운다는 건 그 밤을 지운다는 거였다. 그 밤을 지운다는 건, 그 밤 이전까지 전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매번 멈추는 자리였다.

"아까." 그가 말했다. 앞에서 걷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였다.

"응."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왼쪽으로 구르는 거."

눈발 사이로 대답이 반 박자 늦게 왔다. 언제나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어."

검은 잠시 말을 골랐다. 골라서 나온 것이, 그것의 전부였다.

"이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