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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협곡의 밤」

협곡은 눈이 늦게 녹았다.

온이 말한 대로였다. 벽이 높아 해가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그늘진 바위 틈마다 지난 계절의 눈이 얼음이 되어 붙어 있었다. 발밑이 미덥지 못했다.

침투조는 다섯이었다. 한결이 앞. 무헌이 뒤. 사이에 셋.

미르는 협곡 초입에 남았다. 몸집이 커서 좁은 바위 길을 못 지난다고 했다.

"짐받이가 걸린다." 미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관측반이 아니라 너희를 관측하러 왔다."

"무슨 뜻이야." 한결이 물었다.

"돌아오는 머릿수를 세겠다는 뜻이다."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갔다. 미르의 목소리에는 원래 그런 데가 있었다.

한결은 대꾸하지 않고 협곡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기 전에, 검집을 한 번 고쳐 멨다.

"온."

"응."

"들어간다."

"응."

"나오는 것도, 넷이 나온다."

검집 속에서 반 박자가 지나갔다.

"…다섯이야. 무헌 넣으면."

"무헌은 안 세."

"왜."

"저 사람은 스스로 걸어 들어온 사람이야. 세면 부담돼."

온은 그 말을 잠시 곱씹는 듯했다.

"인간은 이상해." 온이 말했다. "세는 게 부담이라니. 나는 세는 게 마음 놓이는 건 줄 알았는데."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의 걸음을 쉰다섯까지 세던 목소리가 생각났고, 생각난 걸 들키기 싫어서였다.

관측소까지는 지도상으로 사 킬로였다.

지도는 협곡의 굽이를 다 담지 못했다. 바위가 꺾일 때마다 길도 꺾였다. 꺾인 자리에 그늘이 고여 있었다.

"위. 오른쪽." 온이 말했다.

한결이 검집을 오른쪽 벽으로 틀었다. 벼랑 위 능선을 따라 아무것도 없었다. 새 한 마리 뜨지 않았다.

"뭐가 있어."

"몰라. 없어서 이상해."

"없는 게 왜 이상해."

"까마귀가 없어. 아까부터."

한결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전장에서 십오 년을 굴렀다. 그가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거였다. 시체가 있으면 까마귀가 온다. 까마귀가 없다는 건, 까마귀도 오지 않는 무언가가 먼저 와 있다는 뜻일 때가 있었다.

"매복." 그가 낮게 말했다.

뒤에서 무헌이 손을 들었다. 정지 신호였다. 늙은 군인은 이미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셋이 따라 붙었다.

협곡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바람 소리도 없었다. 벽이 높아 바람이 바닥까지 안 내려오는 건지. 아니면 뭔가가 바람까지 죽여 놓은 건지.

"저기." 온이 말했다. "삼 시 방향. 바위 그늘. 열이 있어."

한결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야?"

"아니야. 사람 열은 흩어져. 저건…."

온이 말을 멈췄다. 반 박자.

"저건 안 흩어져. 고여 있어. 기계 열이야."

그리고 협곡이 열렸다.

─쾅!

첫 발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못 봤다.

앞장선 셋 중 하나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두 번째가 날아왔을 때 한결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엎드린 거였다.

"왼쪽!" 온이 외쳤다.

한결이 왼쪽으로 굴렀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예광탄이 훑고 지나갔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였다. 벼랑 위 능선 세 군데에서 화력이 쏟아졌다. 아래로 내리꽂히는 각도. 침투조는 협곡 바닥에 갇힌 채였다.

교과서에 그림까지 그려 놓은 매복이었다.

"관측반이 미끼였어." 무헌의 목소리가 바위 뒤에서 건조하게 들려왔다. "고립된 여섯. 수복 포기 판정. 침투조가 올 걸 알고 판을 깔았다."

"이단이 우리 통신을 읽었단 말입니까?"

"읽었거나. 우리가 읽으라고 흘렸거나."

한결은 그 말의 뜻을 곱씹을 겨를이 없었다.

낙석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쏟아지는 건 총알만이 아니었다. 포화가 협곡 벽을 때릴 때마다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사람 머리만 한 것. 궤짝만 한 것. 그보다 큰 것.

협곡이 무너지고 있었다.

"관측소가 어디야." 한결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이백 미터. 열두 시 방향. 하지만—"

"하지만 뭐."

"길이 무너지고 있어. 지금 뛰면 반은 못 가."

"반은 간다는 거잖아."

온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검집 속에서 아주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결심 같은 것이 몸을 통과할 때 나는 소리.

한결은 뛰었다.

바위 그늘에서 그늘로. 낙석 사이로. 무헌이 뒤에서 엄호 사격을 넣었다. 살아남은 둘도 따라 뛰었다.

이십 미터.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졌다. 온이 말했던, 얼음 위에 눈이 덮인 자리. 그는 옆으로 던지듯 몸을 피했다. 등이 벽에 부딪혔다.

오십 미터.

능선의 화력이 그를 쫓아왔다. 예광탄이 발치를 따라 그었다.

"오른쪽 벽 붙어!" 온이 외쳤다. "거기가 사각이야!"

그는 오른쪽 벽에 붙었다. 정말 사각이었다. 위에서 그를 조준할 각이 벽 하나에 가려졌다.

백 미터.

관측소의 낮은 콘크리트 지붕이 보였다. 창 하나에서 손이 하나 흔들렸다. 살아 있었다. 여섯이든 몇이든, 누군가는 살아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능선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보다 컸다. 사람보다 빨랐다. 그것이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계였다.

장군은 아니었다. 장군보다 작았다. 그러나 사관급은 됐다. 팔이 넷이었고, 그중 둘 끝에 포신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한결을 봤다.

포신 둘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피해!"

온의 목소리였는데, 그 순간 한결은 피할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은 벽. 왼쪽은 낭떠러지. 뒤는 무너진 길. 앞으로 뛰기엔 반 박자가 모자랐다.

그 반 박자 안에서, 검이 움직였다.

한결이 검을 뽑은 게 아니었다.

검이 스스로 뽑혔다.

검집에서 튀어나온 검신이, 그의 손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그의 몸 앞을 가로질렀다. 넓적한 면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방패처럼.

포화가 왔다.

한결은 나중에도 그 순간을 순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빛과 소리와 손목이 꺾이는 느낌이 한 덩어리로 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벽으로 밀려나 있었다.

다만 하나는 또렷했다.

검신에 포탄이 꽂히는 순간.

그립에서 소리가 났다.

빠지직.

나무가 쪼개지는 것도, 쇠가 우는 것도 아닌 소리. 손으로 깎아 맞춘 외장의 결이 안쪽에서부터 갈라지는 소리.

그 소리를, 그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귀가 멍했다. 한쪽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화약 연기가 눈에 매웠다.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놓지 않은 게 아니라, 놓을 줄 몰라서 쥐고 있던 손이었다.

"온."

대답이 없었다.

"온."

한결은 검신을 봤다. 넓적한 면 한가운데가 시커멓게 그을려 우그러들어 있었다. 검신은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립이—

그립 외장에 금이 가 있었다.

이음매를 따라 길게. 손으로 깎아 맞춘 자리가 어긋나, 벌어진 틈으로 안쪽의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했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검이 조용했으니까.

열이레 동안 반 박자면 돌아오던 대답이, 오지 않았으니까.

"온." 그는 세 번째로 불렀다. "야."

검집 속에서, 아니 검 자체에서, 아주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가 마지막 힘으로 짜내는, 회로가 식어 가는 소리.

"…한결."

"어,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포신, 둘 다… 못 막았어. 하나만."

"됐어. 하나면 됐어. 말하지 마."

"하나는… 무헌이 쐈어. 봤어?"

그는 못 봤다. 그러나 그 순간 무헌이 어디선가 그 기계의 관절 하나를 정확히 끊어 놓은 모양이었다. 능선의 화력이 한 각도만큼 줄어 있었다.

"봤어." 그는 거짓말을 했다. "봤어. 그러니까 말하지 마."

"…너, 안 다쳤어?" 온이 물었다. 저는 그 꼴이면서 그걸 먼저 물었다.

"안 다쳤어. 하나도."

"거짓말. 왼쪽 어깨, 벽에 부딪혔잖아."

"…안 아파."

"거짓말." 온이 다시 말했다. "너 아플 때 목소리, 그렇게 나."

한결은 목이 막혔다. 이 검이, 절전으로 꺼져 가는 와중에도 제 목소리로 아픔을 읽고 있었다. 열이레 전부터 그의 버릇을 읽던 그 방식으로.

"…절전으로 들어가야 해."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냉각이… 안 돼. 코어를 지켜야 하니까. 미안."

"미안이라니. 미안이라니 그게."

"금방—"

그리고 온은 말을 멈췄다.

멈춘 자리가 어딘지, 한결은 알았다.

'금방'까지 말하고, 그 뒤를 말하지 않았다.

그 뒤는 아수라장이었다.

관절 하나를 잃은 사관급 기계가 각도를 잃고 주춤한 사이, 무헌이 관측소까지 길을 텄다. 살아남은 관측반은 넷이었다. 여섯 중 넷. 나머지 둘은 이미 새벽에 갔다고 했다.

암호 장비를 챙기는 손들이 떨렸다.

한결은 그 와중에 검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안 펴졌다.

"철수." 무헌이 말했다. "왔던 길은 무너졌다. 하류로 돈다."

"하류는 이단 회수반 통로 아닙니까."

"통로니까 뚫려 있지. 무너진 길보단 낫다."

늙은 군인의 판단은 빨랐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결은 그 등을 따라 걸었다. 등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등을.

협곡을 빠져나오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세 시간 동안, 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르가 협곡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머릿수를 세겠다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르는 나오는 인원을 하나하나 스캔했다. 넷의 관측반. 무헌. 살아남은 둘. 그리고 맨 뒤에, 검을 안은 한결.

미르의 시선이 검에 닿았다.

"…절전인가."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 미르가 검을 향해 말했다. "복창해라. 명령이다."

검은 조용했다.

미르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 다리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계가 침묵하는 방식으로.

"코어는 살아 있다." 이윽고 미르가 말했다. "발열 패턴이 있다. 죽은 게 아니야. 자는 거다."

"언제 깨."

"모른다."

"안 깨면."

"안 깬다는 말은 안 했다." 미르가 말했다. "너 지금 최악을 먼저 물었다. 인간들 나쁜 버릇이지."

한결은 대꾸할 힘이 없었다.

미르가 짐받이를 낮췄다.

"검, 여기 눕혀라. 안전하게—"

"안 눕혀."

한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컸다. 미르의 눈이 반 박자 그를 향했다.

"…내가 안는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갈 때까지."

미르는 더 말하지 않았다.

무헌이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검을 안은 팔에 시선이 오래 닿았다가, 곧 딴 데로 옮겨 갔다. 낮에 연병장에서도 저런 눈이었다. 뭘 봤는지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무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철수 대열의 맨 뒤로 조용히 물러나, 한결의 뒤를 걸었다.

대답 없는 것을 안고 걷는 등 뒤를, 무헌은 한 발쯤 뒤에서 따라왔다.

돌아가는 밤길은 길었다.

트럭이 협곡 초입까지 들어오지 못해서, 절반을 걸어야 했다. 달이 없었다. 관측반의 조명등 하나에 의지해 산길을 내려갔다.

한결은 검을 야전 상의 안쪽에 품고 걸었다.

편지를 넣던 그 자리였다. 종이 한 장이 돌덩이보다 무거울 수 있다는 걸 배웠던 주머니. 이번엔 진짜 무게가 있었다. 검은 무거웠고, 차가웠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슴께에서 검이 미지근한 열을 냈다.

미르가 말한 발열이었다. 살아 있다는 표시. 그는 그 열에 자꾸 손을 갖다 댔다. 식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확인하고 나면 또 불안해서 다시 확인하려고.

앞에서 무헌이 걸었다. 무헌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산길을 오래 걸어 본 사람의 걸음이었다. 발을 어디 디뎌야 소리가 안 나는지 아는 걸음.

한결은 그 걸음을 따라 밟았다.

"원사님." 그가 낮게 불렀다.

무헌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반쯤 고개를 돌렸다.

"낮에요." 한결이 말했다. "능선 위 기계. 그 관절, 원사님이 끊으셨습니까."

"…끊었다."

"어떻게 그 각도가 나옵니까. 아래에서 위로. 그 거리에서."

무헌은 잠시 걸었다. 몇 걸음.

"오래 쐈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이 아니라는 걸, 한결은 알았다. 회수반 출신. 소등의 밤 때의 그 회수반. 기계를 정확히 무력화하는 각도를, 그 손은 십오 년 전에 배웠을 거였다. 사람 각도가 아니라, 기계 각도를.

한결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답의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게 낫다는 걸 배웠다. 낮에 초소장이 무헌의 대답을 더 캐묻지 않던 것처럼.

무헌이 다시 앞을 봤다.

한결도 다시 앞을 봤다.

"온." 그는 걸으면서 낮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협곡은 눈이 늦게 녹는다며. 네가 말해 줬잖아. 벽이 높아서."

없었다.

"위기에서 왼쪽으로 구르라며. 나 왼쪽으로 굴렀어. 네 말대로."

없었다.

"…한 번 더 말해 두는 거랬잖아. 중요한 건 두 번 말해도 된다며."

없었다.

그는 자기가 검에게 온이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 말해도 되는 것들을. 대답이 없는 쪽에 대고.

명치 어디가 뻐근했다. 엿을 씹어 누를 수도 없는 뻐근함이었다.

산길이 중간쯤 왔을 때, 그 밤이 왔다.

십오 년 전의 밤이.

부르러 온 게 아니었다. 그냥, 발밑의 얼음 밟는 소리에 얹혀서 왔다.

벽장 문틈으로 새어 들던 사이렌. 눈을 맞추던 온의 얼굴. "금방 올게." 그리고 군인들 쪽으로 걸어가던 뒷모습.

그날 밤에도 그는 불렀었다.

벽장 안에서. 처음엔 크게. 그다음엔 작게. 나중엔 입 모양으로만.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는 존재를, 그는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날의 벽장은 좁았다. 무릎을 안고 앉으면 딱 맞는 크기였다. 외투 냄새가 났다. 온이 다림질해 걸어 둔 외투들.

문틈으로 방 안이 조금 보였다. 그 틈으로 그는 온의 신발을 봤다. 걸어 나가는 신발을. 뒤꿈치가 한 번 멈칫하다가, 다시 걸어 나가는 것을.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낯선 발소리들. 무언가가 끌려 나가는 소리.

그는 그때 불렀다. 소리 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불렀다.

작게. 더 작게. 나중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온.

온.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그때 배웠다. 부르는 걸 그만두는 법을. 대답을 안 기다리는 것도, 뭐가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그 벽장 안에서 다 배웠다.

그러고 그 법으로 살았다. 여태.

그런데 지금 그는 대답 없는 것에 대고 다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때 관둔 짓을.

발이 얼음을 헛디뎠다.

무헌의 손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앞을 봐라." 무헌이 말했다.

그게 다였다. 늙은 군인은 손을 떼고, 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결은 앞을 봤다.

앞은 어두웠다. 조명등 불빛 끝에서 산길이 다시 어둠으로 접혔다.

그는 검을 조금 더 깊이 품었다.

초소가 보인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정문의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채윤이 세워 둔 거였다. 트럭이 새벽에 정비창으로 돌아간다더니,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채윤이 정문에서 뛰어나왔다.

"야! 왜 이렇게—"

말이 끊겼다.

채윤의 눈이 한결의 얼굴에서, 그의 품으로 내려갔다. 검을 안은 팔. 우그러든 검신. 금 간 그립.

채윤은 정비사였다. 검이 어떤 상태인지, 한결보다 먼저 읽었다.

"…절전." 채윤이 낮게 말했다. 물음이 아니었다.

"어." 한결이 말했다.

"코어는."

"살아 있대. 미르가."

채윤이 짧게 숨을 뱉었다.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이었다.

"들어가자. 정비고. 계측기 있어."

정비고는 따뜻했다.

난로가 하나 있었고, 채윤이 트럭에서 내려 둔 공구가 좌판처럼 늘어놓여 있었다. 작업대 위에 검을 눕히는데, 한결의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세 시간을 쥐고 있던 손이었다.

채윤이 그 손을 봤다. 뭐라 말하려다 관뒀다. 대신 검을 조심스럽게 받아 작업대에 눕혔다.

계측기의 집게를 그립에 물렸다.

바늘이 흔들렸다. 미약하게. 그러나 흔들렸다.

"살아 있네." 채윤이 말했다. 이번엔 제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발열 정상. 코어 온도… 조금 높은데, 위험선은 아니야. 절전 맞아. 자기 보호. 코어 지키려고 나머지 다 끈 거야."

"언제 깨."

"…그건 나도 몰라." 채윤이 계측기 화면을 들여다봤다. "손상 정도에 따라 달라. 외장이 저렇게 갈라졌는데도 코어를 지켰다는 건, 온이 마지막에 남은 힘을 전부 코어로 돌렸다는 뜻이야. 다른 걸 다 포기하고."

채윤은 우그러든 검신을 손끝으로 만졌다.

"방패로 썼구나." 채윤이 조용히 말했다. "이걸로. 널."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미친 검이." 채윤이 말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검이 왜 검을 방패로 써. 자기가 벨 물건인데."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알아. 그러니까 미친 검이지." 채윤이 눈을 세게 한 번 감았다 떴다. "스스로 그런 거잖아. 명령도 없이."

정비고가 조용해졌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났다.

채윤은 검을 밤새 지키겠다고 했다.

"계측기 붙여 놓고, 발열 떨어지면 바로 조치할게. 넌 좀 자."

"안 자."

"야."

"안 자." 한결이 말했다. "못 자."

채윤은 그 얼굴을 봤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채윤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홉 살의 그가 아무도 없는 벽장 앞에 앉아 있던 밤에.

채윤은 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자겠다고 했다. 새벽에 트럭을 몰아야 한다고. 그러나 그건 핑계였고, 채윤은 실은 이 자리를 한결에게 비워 주려는 거였다.

채윤이 나가기 전에, 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

"온 깨면." 채윤이 말했다. "나 깨워. 나도 인사할래."

"…어."

"진짜다. 나 빼놓고 둘이서 감동 실컷 하면 죽여 버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되게 만들 거야, 내가."

낮에 했던 말이었다. 채윤은 그 말을 다시 꺼내 놓고,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씩씩하게 나갔다.

씩씩할수록 등이 얇아 보였다. 한결은 그 등이 문틀을 빠져나갈 때까지 봤다.

문이 닫혔다.

정비고에 한결과 검만 남았다.

난로의 불이 낮게 탔다. 등불 하나가 작업대를 비췄다.

한결은 작업대 옆 걸상에 앉았다. 검을 오래 들여다봤다.

우그러든 검신. 갈라진 그립. 이음매를 따라 벌어진 틈.

그 틈으로 무언가가 보일락 말락 했다.

낮에는 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겨를이 있었다. 겨를만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갈라진 외장의 끝을 손끝으로 만졌다. 손으로 깎아 맞춘 자리였다. 누가 이렇게 정성껏 깎았는지 몰라도, 사람 손으로 한 일이었다. 기계가 찍어 낸 자리가 아니었다.

틈이 벌어져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더 벌어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봐야 했다.

손상 부위를 알아야 채윤이 고칠 테니까. 그런 핑계를 대 봤지만 얇았다. 그도 알았다.

그냥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틈 안에, 오래전부터 봐야 했던 뭔가가 들어 있는 것처럼.

왜인지는 몰랐다. 온이 자주 하던 대답이 떠올랐다.

몰라. 아직. 그런데 있어. 그건 알아.

그는 손끝에 힘을 주려다 멈췄다.

이걸 벗기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넘어갈 것 같았다. 십오 년 동안 닫아 둔 문 하나를 여는 것 같았다. 열면 다시 못 닫는 문.

난로가 낮게 탔다. 계측기 바늘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살아 있다는 표시.

그는 검을 한 번 더 봤다.

"온." 그는 대답 없는 검에게 말했다. "잠깐 볼게. 아프면 미안."

검은 조용했다.

한결은 등불을 조금 끌어당겼다.

그리고 금 간 외장의 조각을, 제 손으로 벗겨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