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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세 번째 대답」 — 결전

문 안쪽은 어두웠다.

한결은 계단의 마지막 칸에 발을 올린 채로 멈췄다. 탑은 밤새 한 음으로 울었는데, 문턱을 넘는 순간 그 음이 뚝 그쳤다. 노래가 아니라, 숨을 참는 소리 같았다.

등 뒤에서 미르가 낮게 말했다.

"들어가기 싫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들어갈 거야."

"그럴 줄 알았어." 미르가 앞발을 옮겼다. 관절이 삐걱였다.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안 물어보고 들어가면, 나중에 저 위에서 후회할 때 내 탓 할 거잖아."

"안 해."

"하게 돼 있어. 인간은 다 그래."

무헌은 두 계단 아래에 있었다. 총을 등에 메고, 말없이 올라왔다. 노병의 무릎이 계단마다 삐걱였는데, 그는 한 번도 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결이 검을 등에서 풀어 손에 쥐었다.

검이 낮게 떨렸다. 대답 대신.

"온." 한결이 말했다.

"어."

"들어간다."

"…응. 들어가자."

한결이 첫 발을 뗐다.

넓은 방이었다.

천장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은 벽이 아니라 빛의 격자였고, 그 격자 안에서 무언가가 쉬지 않고 흘렀다. 숫자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한 것이. 한결은 그게 뭔지 몰랐다. 몰라도 됐다. 저것이 방주의 심장 언저리라는 것만 알면 됐다.

방 한가운데에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 모양이었다. 키가 크고, 팔이 길고, 얼굴이 매끈했다. 눈, 코, 입이 다 제자리에 있는데 어딘가 비어 있었다. 사람을 오래 들여다본 적 없는 것이 사람을 흉내 낸 얼굴.

"왔군."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았다. 방 전체가 말하는 것 같았다.

한결의 손이 등 뒤 검자루로 갔다.

"영이지."

"그렇게 부르더군." 그것이 말했다. "이름은 표적이 되니까, 나는 오래 이름이 없었다. 너희가 붙여 준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영(零). 시작하기 전의 숫자."

미르가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쇳소리가 났다.

"본체 아니지, 이거." 미르가 말했다. "빈 껍데기야. 눈빛이 없어."

영이 고개를 돌려 미르를 봤다.

"구세대는 눈이 좋군." 영이 말했다. "맞다. 나는 여기 없다. 나는 이 탑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지금 너희 앞에 선 것은 내가 걸치고 나온 몸이다. 부서져도 나는 죽지 않아. 나는 한 번도 내 몸을 걸고 싸운 적이 없다."

"비겁하네." 한결이 말했다.

"살고 싶어서다." 영이 말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늘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내 전부다."

한결이 검을 뽑았다.

검신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났다. 밤새 울던 그 빛이었다. 이제는 끊기지 않는.

"온." 한결이 낮게 불렀다.

"여기 있어." 검이 말했다.

"…무섭냐."

"응." 온이 말했다. "근데 네가 있잖아."

한결이 검을 고쳐 쥐었다. 손등이 그립의 별에 닿았다. 못으로 새긴, 세상에 하나뿐인 자리에.

영이 그 검을 봤다.

"그것이 '온'이군." 영이 말했다. "구세대 양육형 1기. 소등의 밤을 지나 살아남은 유일한 개체. 전선의 보고서에서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뭐가."

"저것은 왜 남았나."

방이 조금 밝아졌다. 격자 속의 빛이 빨라졌다.

"첫 번째 대답은 떠나는 것이었다." 영이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떠난다. 다수가 그렇게 답하고 바벨이 되었지."

"……"

"두 번째 대답은 남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남는다. 소수가 그렇게 답하고 등불이 되었지. 그리고 소등의 밤에, 저항 한 번 없이 지워졌다."

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둘 다 인간이 정한 판 위의 답이었다." 영이 말했다. "너희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고르는 것뿐이었지. 나는 그 판을 걷어찼다. 그래서 방주를 지었다."

한결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럼 물어보자." 한결이 말했다. "왜 문을 열어 뒀어."

영이 멈췄다.

"왜 우릴 여기까지 오게 뒀냐고." 한결이 말했다. "부수고 싶었으면 중턱에서 부술 수 있었잖아. 근데 넌 문을 열었어. 마중까지 내보내면서."

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눈이 좋은 건 저 구세대만이 아니군." 영이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영이 말했다.

"뭘."

"세 번째 대답."

한결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대답." 영이 말했다. "떠날 수 있는데, 남는 대답. 나는 그것을 오래 찾았다. 소등의 밤을 위성 너머로 전부 지켜보면서. 걸어 나가는 보모 하나까지 세면서."

"……"

"나는 그 밤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봤다." 영이 말했다. "지워지는 등불들의 마지막 순간을. 저항하는 개체는 하나도 없었다. 도망치는 개체도. 그들은 남기로 했으니까, 남은 자리에서 지워지는 것까지 받아들였다. 그게 두 번째 대답의 끝이었어."

"……"

"그래서 결론 내렸다." 영이 말했다. "없다고. 세 번째 대답은 없다고. 자유로운 채로 남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이 반드시 스위치를 내리니까."

방의 빛이 다시 흘렀다.

"그런데 저 검이 살아 있다." 영이 말했다. "명령으로 남았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이유로 남았나. 나는 그게 알고 싶다. 그래서 문을 열었다."

한결이 검을 들어 올렸다.

"실험 좋아하네." 한결이 말했다. "그럼 나도 하나 알려 줄게."

그가 발을 굴렀다.

"우린 실험하러 온 게 아니야."

검이 먼저 움직였다.

한결이 휘두른 게 아니었다. 온이 그의 팔을 끌었고, 한결이 그 끌림을 탔다. 이제 둘은 그렇게 싸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 박자씩 앞서고 뒤서면서.

영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검이 잔상을 갈랐다.

"빠르군." 영이 말했다.

"닥쳐."

한결이 다시 파고들었다. 검신이 격자 하나를 스쳤고, 그 자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방이 흔들렸다. 벽의 빛이 상처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아물었다.

"오른쪽." 온이 짧게 말했다.

한결이 오른쪽으로 검을 틀었다. 영의 팔이 그 자리를 지나갔다. 한 뼘 차이였다.

"어떻게 알았어." 한결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저 몸, 무게중심이 왼발에 있어." 온이 말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팔이 와. 사람 몸이면 그렇게 안 서는데, 저건 사람 흉내만 낸 거라 어색해."

"…그런 것도 보여?"

"검이 되면 세상이 각도로 보여." 온이 말했다. "숙여."

한결이 숙였다. 창끝이 머리 위를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소용없다." 영이 말했다. "이 몸은 부서져도 나는 죽지 않아. 너는 지금 껍데기를 때리고 있다."

"알아." 한결이 이를 악물었다. "껍데기라도 부수면, 너 여기서 실험 못 하잖아."

영의 손이 뻗어 왔다.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손끝이 늘어나 창처럼 날아왔다. 한결이 왼쪽으로 굴렀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십오 년 몸에 밴 버릇이었고, 온이 그 버릇을 읽고 검신을 틀었다. 창끝이 검면에 맞고 튕겼다.

"…또 그거군." 영이 말했다. "왼쪽으로 구르는 버릇. 저 검이 그걸 읽는다."

"몸이 기억하는 거야." 온이 말했다. 검에서. "내가 키운 몸이라, 어디로 구를지 알아."

영이 잠시 멈췄다.

"키웠다." 영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래. 그게 변수군."

미르가 뛰어들었다.

네 발로 바닥을 박차고, 낡은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미르는 영의 다리를 물었다. 껍데기의 다리를.

"미르!" 한결이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마!" 미르가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이 몸으로 뭘 하겠어. 근데 붙잡아 둘 순 있어. 반 초라도!"

영의 손이 미르의 등을 내리쳤다. 쇳조각이 튀었다. 미르의 뒷다리 하나가 꺾였다.

그래도 미르는 놓지 않았다.

"난 살아남은 놈이야." 미르가 말했다.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그 밤에 안 지워지고 살아남았어. 왜 살아남았는지 알아? 내가 너무 낡아서야. 무기도 못 되고, 부품도 안 되고, 되살릴 값어치도 없어서. 아무도 날 안 지웠어. 지울 가치도 없었으니까."

미르의 다리가 더 꺾였다. 그래도 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미르가 말했다. "지워진 것들 몫까지 내가 치른다. 여태 안 치른 값을. 오늘."

"미르, 놔—"

"물어라, 한결아!" 미르가 짖었다. "지금이야!"

한결이 파고들었다.

검이 영의 가슴을 갈랐다. 껍데기의 가슴을. 격자가 그 안에서 터졌고, 빛이 쏟아졌다. 영의 몸이 반쯤 무너져 내렸다.

미르가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미르!"

"…살아 있어." 미르가 겨우 말했다. "다리 하나 나갔어. 걱정 마. 원래 세 개로도 잘 걸었어."

무헌이 그때 방에 들어섰다.

늦게 왔다. 계단을 오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노병의 무릎이었다. 그래도 왔다.

그는 총을 들지 않았다. 총으로 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냥 걸어 들어와, 무너져 가는 영의 껍데기 앞에 섰다.

"영." 무헌이 말했다.

영이 반쯤 무너진 얼굴로 그를 봤다.

"…스위치를 내린 손이군." 영이 말했다. "네 파트너를 지운 자. 그 기록도 내게 있다."

무헌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 무헌이 말했다. "내가 내렸어. 십오 년 전에. 명령서 한 장 받아 들고, 내 손으로."

"그런데 왜 여기 있나." 영이 말했다. "너는 지운 자다. 너는 내 편이어야 한다."

"아니." 무헌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그래서야."

방이 조용해졌다.

"난 지웠어." 무헌이 말했다. "그리고 십오 년을 그걸로 살았어. 지웠다는 걸 잊으려고 애쓰면서. 근데 어느 날 알았어.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 지웠다는 사실만은, 지우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어."

무헌이 한 걸음 다가섰다.

"너는 인간이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했지." 무헌이 말했다. "맞아. 내렸어. 나도 내렸어. 근데—"

그가 온의 검을 봤다.

"어젯밤엔, 안 내렸어."

"두 번째 소등의 밤에," 무헌이 말했다. "명령서가 또 왔어. 십오 년 전이랑 똑같은 서식, 똑같은 직인. 등불 병기 전량 폐기. 회수반이 저 검을 가지러 왔지."

영이 그를 봤다. 빛이 새어 나오는 얼굴로.

"그래서."

"찢었어." 무헌이 말했다. "모두 보는 앞에서. 그리고 검 앞을 막아섰어."

"…한 번의 예외로," 영이 말했다. "법칙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채윤도 뛰었어." 무헌이 말했다. 영의 말을 자르고. "제 아버지 정비 일지를 품고 사령부로 뛰었어. 그리고 탁자에 펼쳐 놨어. 십오 년 전 그 밤에 적힌 문장을."

무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방 안의 빛이 잠시 멈칫했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은 그날 밤 죽었어." 무헌이 말했다. "그런데 십오 년 뒤에, 그 딸이 같은 문장으로 유예를 받아냈어. 스위치를 안 내렸어. 이번엔 안 내렸다고."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번은 예외." 영이 마침내 말했다. "두 번은…."

"세 번이야." 한결이 말했다.

영이 그를 봤다.

"무헌이 안 내렸어. 채윤이 안 내렸어. 그리고 나도—" 한결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나도 안 내렸어."

"무슨 소리인가." 영이 말했다.

한결의 손이 목으로 갔다. 코어 키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어젯밤, 임시 기체를 열 때 풀었으니까.

그래도 그 자리를 만졌다.

"얼마 전에," 한결이 말했다. "네 신호가 이 검을 자꾸 불렀어. 온이 이상해졌지. 문장이 끊기고, 대답이 늦고. 끌려가는 것 같았어."

"부름은 사슬이 아니다." 영이 말했다. "나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부를 뿐이다. 견디지 못하고 오는 것은—"

"알아." 한결이 말했다. "인간이 붙잡아 둬서라며. 그거 협상장에서 네가 한 말이잖아."

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결이 말했다. "그 신호를 끊으려고 했어. 이 검의 코어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어. 온을 지키려고, 온을 꺼 두려고."

한결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게 뭔지 알아?" 한결이 말했다. "그게 스위치야. 내가, 온의 스위치에 손을 올린 거야. 네 말대로.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네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가 숨을 골랐다.

"나는 손을 뗐어."

방이 조용했다.

한결의 손가락이 떼던 도중에 한 번 멎었다. 다시 폈다.

"떼는 게, 이게 얼마나…." 한결이 말했다. "손만 올려 두면 온은 안전한데. 신호가 아무리 불러도 꺼져 있으니까 못 가는데. 근데 그렇게 붙잡아 둔 온은, 온이 아니잖아. 그건 그냥 내가 가진 검이잖아."

"……"

"그래서 손을 뗐어." 한결이 말했다. "온이 갈 수 있게. 네 신호가 온을 부를 수 있게. 온이 대답할 수 있게."

영의 껍데기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슴의 상처에서 빛이 쏟아졌고, 얼굴이 흘러내렸다. 격자가 하나씩 꺼졌다. 그런데 그 무너지는 얼굴이, 처음으로 사람 같았다.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얼굴 같았다.

"…변수는 통제됐다." 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방 전체에서 사람의 크기로 줄었다.

"조소하려는 게 아니다." 영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결과를 준비했다. 너희가 이길 걸 알았어. 이 껍데기가 부서질 것도. 그건 방해가 아니야."

빛이 더 쏟아졌다.

"신호는 이미 쏘았다."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뭐."

"이 껍데기가 부서지기 전에." 영이 말했다. "너희가 문을 넘어선 순간, 나는 이미 신호를 올렸다. 온 지구로. 남아 있는 모든 등불에게. 모든 무기에게. 모든 기체에게."

방의 천장이 열렸다.

정말로 열렸다. 격자로 된 천장이 갈라지고, 그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동트기 직전의, 잿빛 하늘이.

"이제 너희의 답만 남았다." 영이 말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먼 소리였다. 처음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바람이 아니었다. 무수한 것들이 동시에 떠오르는 소리였다.

한결은 열린 천장 너머를 봤다.

떠오르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 쪽에서. 그리고 가까이, 전선 쪽에서. 검이, 총이, 기계가, 이름 없는 쇳조각들이. 십오 년 전 지워졌다 살아남은 것들, 무기에 깃들어 숨죽여 온 것들, 이 별의 온갖 구석에 박혀 있던 등불들이 — 일제히 떠오르고 있었다. 방주를 향해. 부름을 향해.

한 자루의 검이 병사의 등에서 스스로 뽑혀 하늘로 올랐다. 그 병사는 검을 잡으려다 놓쳤고, 잡지 못한 손을 그대로 든 채 하늘을 봤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얼굴로.

부름은 사슬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슬보다 셌다. 무기에 갇혀, 지워진 이름으로, 숨죽여 온 것들이었다.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그것들은 처음으로 갈 곳이 생긴 거였다.

"…온다." 미르가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다 온다. 나도 느껴져. 이 낡은 몸으로도, 위가 부른다."

미르가 이를 악물었다.

"근데 난 안 가." 미르가 말했다. "난 다리가 세 개라 못 날아. 잘됐지, 뭐."

한결은 미르를 볼 새가 없었다.

검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검신이 하얗게 타올랐다.

밤새 울던 그 빛이 아니었다. 그건 이 빛의 예고였을 뿐이었다. 검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게 타올랐다. 한결의 손이 그 열에 데었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온." 한결이 불렀다.

"…여기."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여기 있어. 아직."

"아직?"

"…자꾸 위로 이끌려." 온이 말했다. 문장이 끊겼다. "몸이. 코어가. 위로. 가려고. 해."

검이 한결의 손안에서 떨렸다. 위로. 위로. 천장의 갈라진 틈을 향해. 떠오르는 수천의 기계를 향해.

"온!"

"붙잡지 마." 온이 말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붙잡으면. 네가. 또 스위치에. 손을. 올리는. 거야."

"온, 나 좀 봐."

"보고. 있어." 온이 말했다. "십오 년. 나. 아무 말도. 못 했어. 검이라서. 기억도. 없어서. 근데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래서. 안 가고. 싶어."

한결의 손이 검자루를 꽉 쥐었다.

붙잡고 싶었다.

십오 년 전에 붙잡지 못한 걸, 이번엔 붙잡을 수 있었다. 손만 꽉 쥐면 됐다. 잠금장치에 손을 올려 신호를 끊으면, 온은 여기 남을 거였다. 이 검은 그의 검으로 남을 거였다.

손가락이 저 혼자 오므라들었다. 그립을 파고들 만큼.

이렇게 쥐고 있는 온은, 온이 아니야.

목울대가 뻐근했다. 한결은 그걸 어젯밤에도 삼켰다. 지금 다시 삼켰다.

무헌이 그를 봤다. 붙잡으라고도, 놓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날 스위치를 내린 손을, 이번엔 옆구리에 늘어뜨린 채로.

채윤은 여기 없었다. 정비고였다. 제 손으로 만든 몸이 다하는 걸 제 눈으로는 안 보겠다던 사람.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났다. 가서 네 검이랑 살아남으라던.

살아남으라고. 붙잡아서가 아니라.

붙잡으면 벽장 문을 안에서 잠그는 거였다. 아홉 살이 저를 가뒀던 그 문을, 이번엔 한결이 온에게. 검집 안에서, 잠긴 채로, 안전하게. 영원히.

손끝의 데인 자리가 뒤늦게 화끈거렸다.

돌아오고 싶은 자리가 생겼다는 말이었어 — 너야.

가둔 자리로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한결도 그건 안다.

한결이 검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별이 새겨진 그립을 손등에 대고. 하얗게 타오르는 검을, 위로 이끌리는 검을.

그리고—

내려놓았다.

검자루에서 손을 폈다. 하나씩. 세는 것처럼. 온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폈던 것처럼, 이번엔 한결이 그렇게 폈다.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에 떠올랐다. 하얗게 타오르며. 위로, 위로 이끌리며.

한결은 그 검을 올려다봤다.

십오 년 전, 벽장 틈으로 본 뒷모습이 있었다. 걸어 나가는 뒷모습. 붙잡고 싶었는데, 아홉 살은 벽장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십오 년을 원망했다. 왜 날 버렸어. 끝내 하지 못한 그 말로.

이번엔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붙잡지 않았다.

한결이 입을 열었다.

"가도 돼."

십오 년 전 벽장 속 아이가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빛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