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두 번째 소등」 — 폭풍의 장
명령서는 새벽 세 시에 내려왔다.
무헌은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 요즘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통째로 자 본 게 언제였는지 셀 수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통신병이 천막 입구를 걷었다.
"상사님. 사령부 하달입니다."
무헌은 손을 내밀었다.
◆
종이 한 장이었다.
요즘은 다 태블릿으로 오는데, 이건 종이였다. 그것부터 이상했다. 무헌은 종이 아래쪽 직인을 먼저 봤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명령서는 밑에서부터 읽는 거다. 누가 찍었는지부터 보고 나면, 위에 뭐가 적혀 있든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붉은 직인. 통합군 병기감실.
그리고 그 위의 문장.
무헌은 한 번 읽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는 읽지 않았다. 필요 없었다.
등불 병기, 전량 폐기.
◆
"상사님?"
통신병이 그를 봤다.
무헌은 종이를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손이 떨리지는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떨렸으면 놀랐다는 거고, 놀랐으면 몰랐다는 건데—손이 이렇게 얌전한 걸 보면, 어딘가에서 이미 오래 기다려 온 종이였다.
언젠가 이 종이가 다시 올 걸,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몇 부 왔나."
"전 부대에 동일 하달입니다. 새벽 여섯 시부로 회수반이 순차 출동합니다."
"회수반."
"예. 등불 병기 보유 분대부터 순서대로—"
"명단은."
통신병이 태블릿을 넘겼다.
무헌은 명단을 훑어 내렸다. 부대 번호에 병기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중 한 줄에서 눈이 멈췄다.
3분대. 도검형 등불 병기 1식. 개체명 '온'.
◆
무헌은 천막을 나섰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능선 위로 별이 몇 개, 흐릿하게 떠 있었다. 야영지는 조용했다. 초소의 경광등만 느리게 돌았다.
그런데 3분대 쪽 막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무헌은 그쪽으로 걸었다.
이 시간에 왜 안 자.
그러다 그는 걸음을 늦췄다. 어젯밤 사령부 천막에 불이 일제히 켜졌던 걸 떠올렸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던. 공명 데이터가 어쩌고 했던. 그 애들도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무헌은 3분대 막사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낮은 목소리. 한결이었다. 그리고 검이 대답하는 소리. 온이었다.
무헌은 천 자락을 걷지 않았다.
◆
대신 그는 명령서를 다시 봤다. 어둠 속에서.
십오 년 전 그날 밤에도, 명령서는 종이였다. 그때도 밑에서부터 읽었다. 직인을 먼저 봤다. 통합군 병기감실. 붉은색.
그때 위에 적혀 있던 문장은—
등록 기계, 전량 말소.
이번엔 '등불 병기'였고 그때는 '등록 기계'였다. 단어 하나. 그것 말고는 서식도 활자체도 직인 위치도, 그 밑에 서명하는 칸까지 그대로였다.
담당관 서명란.
십오 년 전, 그 칸에 무헌이 서명을 했다. 제 이름을. 그리고 스위치를 내렸다.
◆
무헌은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눌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손이 그렇게 했다.
막사 안에서 한결의 목소리가 났다. 무슨 얘긴지는 안 들렸다. 그냥 낮고, 느리고, 사이사이 끊기는 목소리였다. 아이한테 옛날얘기 하는 사람처럼.
무헌은 그 목소리를 잠깐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애도 아홉 살이었지.
그날 밤, 저 애 나이의 아이들이 이 나라에 몇이나 있었을까. 벽장에 숨어서,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금방 온다는 말을 믿었던 아이들이.
무헌은 접은 종이를 군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
날이 밝기 시작했다.
무헌은 초소에 서 있었다. 능선 너머로 회색빛이 번졌다. 겨울 새벽은 늦게 밝았다. 여섯 시가 다 되도록 해는 뜨지 않았다.
멀리서 차량 소리가 났다.
무헌은 그쪽을 봤다. 능선을 넘어오는 헤드라이트 두 쌍. 회수반이었다. 정확히 여섯 시.
무헌은 초소에서 내려왔다.
3분대 막사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소식은 빨랐다. 밤새 안 잔 병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낮게 말했다.
"등불 다 폐기래."
"전부?"
"온도?"
"온도."
말들이 웅성거렸다. 그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
"이건, 두 번째 소등이야."
누가 말했는지 무헌은 보지 못했다. 젊은 목소리였다. 낮게, 반쯤 혼잣말로.
두 번째 소등.
그 말이 웅성거림을 뚝 끊었다.
무헌은 그 자리에 선 병사들의 얼굴을 봤다. 대부분 그날 밤을 겪기엔 너무 어렸다. 그날 아홉 살, 열 살이던 애들. 지금은 스물넷, 스물다섯. 그런데도 그 말이 뭘 뜻하는지는 다 알았다. 다들 얼굴이 굳었다.
무헌은 알았다. 이건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새 폭로가 아니야.
그냥, 그 밤이 다시 오는 거야.
똑같은 종이에 똑같은 직인에 똑같은 새벽. 십오 년 전 그 밤이 하나도 안 바뀐 채로 되감겨 온 거였다.
◆
회수반 차량이 멈췄다.
앞차에서 장교 하나가 내렸다. 젊었다. 서른쯤. 그날 밤엔 열댓 살이었을 나이. 그는 명령서를 든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뒤로 병력 몇이 따라 내렸다. 익숙한 걸음이었다. 이런 회수를 여러 번 해 본 걸음.
"3분대. 등불 병기 인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헌은 그 정지를 봤다. 병사들은 명령을 어긴 게 아니었다. 그냥 몸이 안 움직인 거였다. 넘기라는데 손이 안 나갔다. 온을 넘긴다는 게 뭔지, 여기 선 애들은 다 알았으니까.
장교가 걸음을 멈췄다. 병사들을 둘러봤다.
"뭐 해. 인계 절차 몰라? 병기 일련번호 확인하고, 회수 서명하고, 넘기면 돼. 십 분이면 끝나."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막사 천이 걷혔다.
한결이 나왔다. 검을 등에 멘 채로. 얼굴이 하얬다. 밤을 샌 얼굴. 그 뒤로 채윤이, 미르가, 하나씩 나왔다.
한결이 장교 앞에 섰다.
"안 넘겨."
◆
장교가 그를 봤다.
"뭐라고?"
"안 넘긴다고." 한결이 말했다.
"이봐, 병장. 이거 명령이야. 병기감실 직인 안 보여? 항명할 거면 군법—"
"군법이면 군법."
한결의 목소리는 낮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무헌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잃을 게 없어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잃을 게 있는 사람이, 그걸 뺏길 바에야, 하고 밑바닥까지 긁어 낸 목소리였다.
장교가 뒤를 돌아봤다. 차량에서 회수반 병력이 내렸다. 넷, 다섯. 총을 멘 채로.
공기가 팽팽해졌다.
무헌은 걸음을 뗐다.
◆
"멈춰."
무헌의 목소리였다.
크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돌아봤다. 계급 때문이었다. 그리고 계급만은 아니었다. 이 야영지에서 그날 밤을 직접 겪은 사람은 무헌 하나뿐이었으니까. 십오 년 전 그 종이에 손수 서명을 해 본 사람.
장교가 경례를 했다.
"상사님. 회수 작전 중입니다. 비켜—"
"명령서."
"예?"
"이리 줘. 확인하겠다."
장교가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명령서를 내밀었다. 상사의 확인은 절차상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순리였다.
무헌은 종이를 받았다.
◆
밑에서부터 읽었다.
붉은 직인. 통합군 병기감실.
담당관 서명란. 비어 있었다.
그 위로 활자. 등불 병기, 전량 폐기.
무헌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까 접어 넣은 종이를 꺼냈다. 제 앞으로 온 것. 그걸 폈다. 회수반 장교가 든 것과 나란히 들었다.
두 장이 똑같았다. 서식이, 활자체가, 직인 위치가, 서명란 크기 하나 다르지 않았다.
무헌은 두 장을 나란히 든 채로, 병사들을 봤다. 회수반을 봤다. 한결을 봤다. 등에 멘 검을 봤다. 흰빛으로 낮게 떨리는 검신을.
그리고 채윤을 봤다.
채윤은 무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정비 가방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세는 것 같기도, 다잡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무헌은 그때 몰랐다.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
무헌은 입을 열었다.
"십오 년 전에도," 그가 말했다. "이 종이가 왔다."
병사들이 조용해졌다.
"똑같은 서식이었어. 그때는 '등록 기계'라고 적혀 있었고. 지금은 '등불 병기'다. 단어 하나 바뀌었다."
무헌은 종이를 들어 보였다. 두 장을.
"그날 밤, 나는 이 칸에 서명을 했다."
그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내 파트너 스위치를 내렸어. 명령이었으니까. 지키라고, 사람을 지키려면 기계를 꺼야 한다고—위에서 그랬으니까."
무헌은 잠깐 말을 멈췄다.
"내 파트너는…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
바람이 능선을 넘어왔다. 마른 풀이 서걱거렸다.
"열닷새 전에," 무헌이 말했다. "그 파트너를 다시 만났다. 이단이 잔해에서 되살려 놨더라. 그 녀석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헌은 한동안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껐을 때… 그 녀석은 알아들었대. 지키려는 거구나, 하고. 근데 그게 너무 아파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되살아나서 제일 먼저, 그걸 지웠다더라. 알아듣는 거. 이해하는 거."
무헌은 두 장의 종이를 봤다.
"용서받을 생각 없다.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근데 하나는 안 지운다. 내가 지웠다는 것. 그것만은."
◆
장교가 초조하게 말했다.
"상사님, 지금 무슨—"
"그래서 말인데."
무헌이 그를 봤다.
"오늘은, 안 지운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었다.
회수반 장교가 든 것 말고, 제 앞으로 온 종이를. 반으로. 다시 반으로. 붉은 직인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통합군 병기감실이, 무헌의 손안에서 종잇조각이 됐다.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무헌은 종잇조각을 발밑에 떨어뜨렸다. 새벽바람에 조각이 흩어졌다.
◆
"상사님! 이건 명령—"
"안다."
무헌이 말했다.
"항명이지. 군법이고. 나도 안다."
그는 3분대 쪽으로 걸었다. 한결 앞으로. 등에 멘 검 앞으로. 그리고 돌아섰다. 회수반을 마주 보고.
검 앞을 막아선 거였다. 제 몸으로.
"십오 년 전엔 내렸다."
무헌이 말했다.
"오늘은, 안 내린다."
◆
회수반 장교의 손이 총으로 갔다.
가진 않았다. 손이 그쪽으로 움직였다가, 멈췄다. 상사를 쏠 수는 없었다. 상사가 검 앞을 막아선 그림을, 뒤의 병력이 다 보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저도 명령받고 온 겁니다. 저도 그냥—"
"안다."
무헌이 말했다.
"자네도 지키라는 명령 받았겠지. 나도 그랬다. 자네가 나쁜 게 아니야. 종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무헌은 발밑의 종잇조각을 봤다.
"근데 이 종이는, 십오 년 전에 한 번 틀렸어. 그때 우리는 그걸 몰랐지. 몰라서 서명했고. 지금은 안다. 그러니까 이번엔 안 찍는다."
장교가 무헌을 봤다. 오래.
그러다 그가 무전기를 들었다.
"…사령부, 여기 회수 3반. 3분대 병기 인계, 지연 발생. 현장 지휘관 항명. 상황 보고 요청."
◆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무헌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 앞에. 등 뒤로 흰빛이 낮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온의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냥 검신이 떨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한결이 무헌의 등에 대고 낮게 말했다.
"상사님."
"말하지 마라."
무헌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열닷새 전에 한 번 들었다.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 말은, 두 번은 못 듣는다."
한결은 입을 다물었다.
검신이 떨렸다. 무헌의 등 뒤에서.
그때였다.
◆
채윤이 뛰기 시작했다.
무헌은 그걸 봤다. 옆으로. 채윤이 정비 가방을 내던지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 품에 안고, 능선 아래 사령부 천막 쪽으로 뛰는 걸.
"채윤아!" 한결이 소리쳤다.
채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뛰었다. 새벽 어스름 속으로.
무헌은 그 애가 뭘 품고 뛰는지 봤다. 낡은 노트 같은 거였다. 표지가 해진. 손때가 묻은.
그리고 무헌은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
채윤은 뛰었다.
야영지 병사들이 그 애가 지나가는 걸 봤다. 정비복 차림에, 낡은 노트를 가슴에 안고, 사령부 쪽으로 전력으로 뛰는 여자애를. 누군가 비키라고 소리쳤다. 채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뛰었다.
능선을 내려갔다. 자갈밭을 지나. 초소를 지나. 위병이 멈추라고 손을 들었지만, 채윤은 멈추지 않았다.
"정비사입니다! 사령부 긴급 보고!"
숨이 턱까지 찼다. 옆구리가 결렸다. 그래도 다리를 멈추지 못했다. 이 노트가 아버지 공구함 밑바닥에 십오 년을 있었다. 열하루 전에야 펴 봤다. 그날 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았다.
아빠. 이거 쓰고 나갔지.
나갔다가, 안 돌아왔지.
노트가 가슴에서 미끄러졌다. 그 애는 그걸 다시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사령부 천막의 불빛이 가까워졌다.
◆
같은 시각, 능선 위.
무헌은 회수반을 마주 본 채로 서 있었다. 무전기는 계속 지직거렸다. 사령부는 상황 판단 중이라고만 했다. 대기하라고.
한결이 무헌 옆으로 왔다. 검을 멘 채로.
"채윤이 어디 가는 거예요."
"사령부." 무헌이 말했다.
"뭐 하러."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채윤이 뛰어간 쪽을 봤다. 능선 아래, 사령부 천막 쪽을. 그 애가 가슴에 안고 뛰던 낡은 노트를 떠올리면서.
"저 애가," 무헌이 말했다. "제 아버지 걸 들고 갔다."
"아버지 거?"
"정비 일지." 무헌이 말했다. "그날 밤 걸."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
사령부 천막.
채윤은 안으로 뛰어들었다. 위병이 뒤에서 붙잡으려 했지만 늦었다. 천막 안엔 참모 장교 몇이 지도 탁자에 둘러서 있었다. 회수 상황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무전기에서 능선 위의 상황이 흘러나왔다.
채윤이 탁자 앞에 섰다.
"뭐야, 이 사람—" 장교 하나가 소리쳤다. "위병! 뭐 하는 거야!"
"들어주세요." 채윤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삼 분이면 됩니다. 아니, 일 분."
"당장 끌어내—"
"등불 병기 폐기." 채윤이 말했다. "그거 십오 년 전이랑 똑같은 명령서죠."
장교들이 조용해졌다.
◆
채윤은 노트를 탁자 위에 올렸다.
낡은 정비 일지. 표지가 해지고, 모서리가 닳은. 그 애는 그걸 펼쳤다. 마지막 장으로.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떨렸다.
"제 아버지 겁니다." 채윤이 말했다. "연방군 정비창 소속. 정비공 등록 번호 있어요. 십오 년 전, 소등의 밤에 죽었습니다."
장교가 인상을 썼다.
"그게 지금—"
"이거 읽어주세요."
채윤이 일지의 마지막 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탁자 위에. 펼친 채로.
"긴 얘기 안 합니다. 논리도 안 댈게요. 그냥 이 한 줄만 읽어주세요. 제 아버지가, 십오 년 전 오늘 밤에 쓴 겁니다."
◆
장교가 노트를 봤다.
내려다봤다. 손글씨였다. 건조한, 기록체의 손글씨. 날짜가 위에 적혀 있었다. 십오 년 전. 소등의 밤 당일.
그 밑의 문장을, 장교가 읽었다. 처음엔 눈으로.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폐기장 삼 열의 보모.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장교가 멈췄다. 목이 막힌 것 같았다. 그러다 마지막 줄을 마저 읽었다.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
침묵이 흘렀다.
채윤은 탁자 앞에 선 채로 숨을 골랐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십오 년 전에 다 해 놨으니까. 그 애가 할 일은 이 노트를 여기까지 들고 뛰어오는 것뿐이었다.
장교가 노트에서 눈을 뗐다. 채윤을 봤다.
"…이 아버지가."
"예."
"이 기계 때문에 죽었나."
"예." 채윤이 말했다. "이 기계, 지금 능선 위에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코어를 검에 옮겨 심었어요. 그 검이 지금 폐기 명령 받은 그 검입니다."
장교가 노트를 다시 봤다. 손글씨를. 날짜를. 그 밑의 문장을.
그 밤, 명령을 어긴 정비공의 손글씨를.
옆에 있던 다른 참모가 낮게 말했다.
"이거, 위에 보고 없이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보고해." 처음 읽은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능선 위 상황이랑 같이 올려. 현장 지휘관이 검 앞을 막고 섰다며. 그 상사가 누군지 알아?"
"…예?"
"소등의 밤 담당관이야. 그날 서명한 사람. 그 사람이 오늘 안 찍겠다고 종이를 찢었어."
참모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기," 장교가 노트를 손끝으로 눌렀다. "그날 명령 어긴 정비공 딸이, 아버지 유서를 들고 뛰어왔고."
천막 안이 조용했다.
◆
능선 위.
무전기가 다시 지직거렸다. 무헌은 검 앞에 선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회수반 장교가 무전을 받았다. 얼굴빛이 바뀌었다.
"…예. 예, 확인했습니다. 회수, 보류."
장교가 무전기를 내렸다.
병사들이 그를 봤다. 무헌이 그를 봤다. 한결이 그를 봤다.
"사령부 하달입니다." 장교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풀려 있었다. 어딘가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3분대 등불 병기, 폐기 유예. 별도 지시 있을 때까지."
능선 위에 바람이 불었다.
무헌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검 앞에. 다리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냥, 오래 조여 있던 어깨가 저 혼자 한 뼘쯤 내려앉았다.
◆
회수반 차량이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두 쌍이 능선을 넘어 사라졌다. 병사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환호 같은 건 없었다. 다들 그냥 조용히,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무헌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발밑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봤다. 붉은 직인의 두 조각. 새벽바람에 이미 반쯤 날려간.
한결이 다가왔다.
"상사님."
"고맙다는 말은 안 된다고 했다."
"안 할게요." 한결이 말했다. "다른 거 물어봐도 돼요?"
무헌이 그를 봤다.
◆
"십오 년 전에," 한결이 말했다. "왜 서명하셨어요."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무서웠으니까." 그가 마침내 말했다.
"뭐가요."
"안 지우면, 저것들이 우리를 지울까 봐. 그때는 다들 그랬어. 세상이 한 번 무너지고 다들 겁에 질려 있던 때야. 겁에 질리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무헌은 능선 아래를 봤다. 채윤이 뛰어간 쪽을.
"영이 그러더라.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미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나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다. 오래."
"지금은요."
무헌은 발밑의 종잇조각을 봤다.
"오늘, 나는 안 내렸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문장은, 오늘부로 틀렸어. 나 하나만큼은."
◆
무헌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사진이었다. 낡은. 귀퉁이가 접힌. 두 사람이 찍힌. 하나는 젊은 무헌이었고, 하나는 사람 형상의 기계였다. 무헌의 옛 파트너.
열닷새 전, 꺼져가는 기체의 마지막 로그에서 나온 사진. 삭제에 실패한 파일 하나.
무헌은 그걸 잠깐 봤다.
"너는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지." 무헌이 사진에 대고 낮게 말했다. 아무도 안 듣게. "나는 오늘, 안 껐다."
그는 사진을 다시 넣었다.
◆
한결은 그걸 못 본 척했다.
대신 그는 능선 아래를 봤다. 사령부 쪽을. 채윤이 아직 안 올라왔다.
"채윤이 데려올게요." 한결이 말했다.
"그래라."
한결이 검을 고쳐 멨다. 등에서 흰빛이 낮게 떨렸다. 회수반이 물러간 뒤에도, 검은 계속 떨렸다. 무헌은 그걸 봤다.
"온."
무헌이 검을 향해 말했다. 처음으로.
검신이 아주 조금, 흰빛으로 흔들렸다.
"…예." 온이 말했다.
"살아 있어라." 무헌이 말했다. "지운 건 다시 못 돌린다. 안 지운 것만, 남는 거야."
검이 낮게 울었다. 대답 대신.
◆
새벽이 밝았다.
능선 위로 해가 올라왔다. 겨울 해였다. 늦고, 옅고, 미지근한. 야영지에 빛이 번졌다. 밤새 켜져 있던 막사의 조명들이 하나씩 꺼졌다. 이번엔 무서운 소등이 아니었다. 그냥, 아침이 와서 끄는 불이었다.
한결은 사령부로 내려갔다.
계단참에서 채윤과 마주쳤다. 올라오는 채윤과. 그 애는 낡은 노트를 다시 가슴에 안고 있었다. 얼굴이 벌겠다. 뛰어서. 울어서.
"채윤아."
"어." 채윤이 말했다. 웃으려다 실패한 얼굴로. "됐어. 유예 받았어. 우리 아빠가—"
채윤이 말을 멈췄다.
"우리 아빠가 십오 년 만에, 명령서 하나 이겼어."
◆
한결은 그 애를 봤다.
노트를 안은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런데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채윤아." 한결이 말했다. "너—"
"잠깐."
채윤이 손을 들었다. 한결의 말을 끊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새벽빛이 계단참에 비스듬히 들었다. 채윤은 한 계단 위에 서 있었고, 한결은 아래에 있었다.
채윤이 그를 내려다봤다.
노트를 가슴에 안은 채로. 젖은 눈으로. 웃는 얼굴로.
"오 분만."
채윤이 말했다.
공명음, 회수반이 물러간 뒤에도 오래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