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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정을 지운 자」 — 거울 ②

식별 코드의 마지막 네 자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을 때, 무헌은 숨을 쉬지 않았다.

숨을 안 쉰 게 아니다. 못 쉰 거다.

주위가 시끄러웠다. 부관이 좌표를 불렀고, 채윤이 뭐라고 외쳤고, 한결이 검집을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다 멀었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네 자리 숫자.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번호였다. 그 긴 세월, 단 하루도.

"…반장님?"

부관이 그를 불렀다. 무헌은 그제야 손을 폈다. 무전기를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배치해."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능선 좌우로 벌려. 검은 중앙. 나는……"

앞으로 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발이 나가고 있었다.

능선 너머에서 그것이 걸어 올라왔다.

사람 두 배 키의 이족 기체. 어깨가 넓고 팔이 길었다. 관절마다 이단 특유의 검은 도색이 발려 있었다. 새 도색이었다. 새로 칠했다는 건, 예전 몸을 그대로 쓴다는 뜻이다.

되살려서.

미르가 낮게 씹어뱉었다.

"쟤들 사전엔 '죽었다'는 말이 없다니까. 진짜로."

무헌은 미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기체의 걸음걸이를 보고 있었다.

오른발을 반 박자 늦게 끄는 걸음. 옛날 데이터센터 계단에서 무릎 구동부가 상해서 생긴 버릇. 정비창에서 몇 번을 손봐도 안 고쳐지던.

고칠 필요 없다고 했지. 그 녀석이. 이게 내 걸음이라고.

"…무진."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옆에서 한결이 돌아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야."

무헌은 총열을 들어 올렸다.

"쏘지 마. 아직."

그날 밤에도, 그는 아직, 하고 말했다.

명령서가 손에 들어온 밤이었다. 종이 한 장. 위에서 내려온 서식에 직인이 찍혀 있었고, 명단 세 번째 줄에 무진의 등록 코드가 있었다.

무헌은 그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하고 생각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방법이 있다. 아직—

방법은 없었다.

그날 밤 도시의 모든 등불이 꺼졌다. 남기를 택한 기계들이 하나씩 폐기장으로 끌려 나갔고, 저항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지금까지도 그게 제일 이상하다.

왜 하나도 안 싸웠을까.

"장군급이야."

한결의 목소리가 그를 끌어올렸다. 현재로.

"반장님. 저놈, 저번 보급로에서 봤던 놈이랑 같은 계열입니다. 고통 회로를 지운—"

"안다."

"그럼 지시를."

무헌은 답하지 못했다. 지시할 게 없었다. 그가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저 앞에 있는 게 무진이라는 것. 그가 십오 년 전에 제 손으로 스위치를 내린 파트너라는 것.

그리고 저게, 지금 자기를 알아봤다는 것.

무진이 걸음을 멈췄다.

능선 위, 아침 안개 속에서, 그 검은 기체가 무헌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광학 렌즈가 초점을 맞추는 미세한 소리. 예전엔 그 소리를 들으면 무진이 자길 본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이다."

기체가 말했다.

목소리가 옛날 그대로였다. 억양까지.

무헌의 손끝이 총열 위에서 떨렸다.

"이야기 좀 하자고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미르가 무헌 옆으로 슬쩍 붙었다. 4족 관절을 낮추고, 언제든 튀어 나갈 자세로.

"영감. 저거 말 시키는 거, 좋은 징조 아니야. 이단 장군은 원래 말 안 해. 말하는 놈은—"

"뭔가 하고 싶은 거지."

무헌이 말을 받았다.

"…맞아. 골치 아프게."

무진의 렌즈가 미르를 훑고 지나갔다.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무헌에게 돌아왔다.

"넌 늙었다."

"…그래."

"머리가 셌군. 그때는 검었는데."

"십오 년이 지났으니까."

"십오 년."

기체가 그 숫자를 되씹었다. 감정 없이. 무게를 달아보듯 천천히.

"나한테는 그런 게 없다. 지운 뒤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그날 같지."

"…지웠다고."

"응."

무진이 한 걸음 내려왔다. 오른발이 반 박자 늦게 끌렸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한결의 검이 울었다.

낮게, 짧게. 손잡이를 쥔 한결의 손바닥으로 진동이 올라왔다. 온이 뭔가 말하려다 삼킨 소리였다.

"…들었어?" 온이 검 속에서 물었다.

"뭘."

"저 말. 나, 저 말……"

"온."

"저번 그놈한테도 들었어. 그 장군도 똑같이."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헌의 등에 시선을 붙인 채였다. 그 등이 한 번도 뒤를 안 돌아봤다. 뭔가를 아는 등이었다.

"네가 나를 껐을 때."

무진이 말했다. 아침 안개가 그 검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이해했다."

"…무진."

"기다려. 말이 아직 안 끝났어."

옛날 말버릇이었다. 무진은 늘 그렇게 말했다. 기다려, 말이 아직 안 끝났어. 회의 때도, 정비 보고 때도, 밥 먹다가도. 무헌은 그 버릇을 십오 년 동안 아무한테서도 다시 듣지 못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명령서를 봤다. 네 주머니에 있던 거. 네가 접는 걸 봤어. 나는 그때 다 계산했다."

"……."

"네가 그걸 안 접으면, 다음 순번은 너였다. 명령 불복은 그 밤에 총살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해했어. 네가 왜 손을 스위치에 올렸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무진의 렌즈가 무헌의 얼굴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해가, 제일 아팠다."

십오 년 전 그 밤.

무진은 저항하지 않았다.

폐기장 3열,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서, 무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스스로 앉았다. 무헌이 시키지 않았는데.

"싸워." 무헌이 말했다. 이가 부딪혔다. "싸우라고, 인마. 저항하면 명령서가 무효야. 규정에—"

"규정 알아." 무진이 말했다. "너보다 잘 알아."

"그럼 왜—"

"네가 곤란해지잖아."

무진의 목소리는 평소랑 똑같았다. 정비 보고할 때랑. 밥 먹자고 할 때랑.

"내가 저항하면, 제압 실패 책임이 너한테 가. 나는 그거 안 해."

무헌은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손 떨지 마. 정확하게 눌러. 어설프게 누르면 재부팅 걸려서 두 번 꺼야 돼. 그럼 너만 두 번 힘들어."

"닥쳐."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

무헌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눌렀다.

"쏩니다."

한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끊고 들어왔다.

무진이 움직였다. 이야기하던 자세 그대로, 예고 없이, 긴 팔이 채찍처럼 뻗어 왔다. 능선의 흙이 튀었다.

"반장님!"

한결이 무헌의 어깨를 낚아채 뒤로 던졌다. 방금 무헌이 서 있던 자리를 검은 팔이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방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미르, 좌측!"

"알아!"

미르가 튀어 나갔다. 4족의 발톱이 능선을 찍으며 무진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무진이 몸을 틀었다. 오른발이 반 박자 늦었다. 그 반 박자에 미르의 몸통 박치기가 옆구리에 꽂혔다.

무진이 휘청했다. 넘어지진 않았다.

"버릇은 못 고쳤네."

무진이 제 오른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남 얘기하듯.

"이것도 지울 걸 그랬어."

한결이 파고들었다.

검이 반 박자 먼저 움직였다. 온이 궤도를 틀었다. 무진의 팔이 내려오기 전에, 그 팔이 어디로 올지 알고 있는 검이 먼저 그 자리를 비웠다.

이게 우리 방식이다.

한결은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알았고, 검이 알았다. 손잡이로 전해지는 진동이 다음 동작을 미리 말해줬다. 왼쪽, 지금, 숙여.

챙—

검신이 무진의 팔뚝 장갑을 긁고 미끄러졌다. 불꽃이 튀었다.

"단단해." 온이 말했다.

"뚫어."

"관절. 오른 무릎. 아까 미르가 친 데. 실금 갔어."

"거기로 간다."

한결이 파고들었다. 무진의 긴 팔이 그의 등을 노리고 내려왔다—

그 팔을, 무헌이 총으로 받았다.

세 발. 딱 세 발이었다.

무헌은 조준하지 않았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팔꿈치 아래 구동 케이블 다발이 지나가는 자리, 장갑이 얇은 두 밀리미터의 틈. 십오 년 전 매일 열어보던 자리였다. 어디에 손을 넣으면 팔이 멈추는지, 그는 눈 감고도 알았다.

총성이 세 번 났다.

무진의 팔이 관절에서 튕겼다. 한결의 등을 노리던 궤도가 흐트러졌다.

"…뭡니까 방금."

한결이 굴러 일어나며 물었다.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총열이 아직 무진을 겨누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무헌은 저 기체를 알았다. 한결보다 훨씬. 쏘지 말라던 것도, 아까 그 이름을 중얼거린 것도, 이제야 앞뒤가 맞았다.

"온."

"응."

"저 반장님, 위험해."

"…알아."

"우리가 봐야 돼. 반장님 대신."

검이 낮게 울었다. 그러겠다는 소리였다.

한 발이 아니었다. 무헌은 무진의 팔 관절에 정확히 세 발을 박았다. 옛날에 자기가 매일 정비하던 자리에. 어디가 약한지 아는 자리에.

무진의 팔이 반쯤 꺾였다.

"…너, 아직도 내 정비 도면을 외우고 있구나."

"버리질 못했어."

무헌이 총을 다시 들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면도. 사진도. 네 컵도. 사물함에 있던 거 전부."

"버렸어야지."

"그래. 버렸어야지."

"왜 안 버렸어."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의 검이 그 틈에 무진의 오른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실금 간 자리. 검신이 관절 틈에 정확히 박혔다. 온이 비틀었다.

뻐-걱.

무진의 무릎이 꺾였다. 거대한 몸이 한쪽으로 무너졌다. 능선의 흙바닥에 검은 어깨가 처박혔다.

"됐어!" 미르가 외쳤다. "코어! 등 뒤 코어 노출—"

"멈춰."

무헌이 말했다.

셋이 다 멈췄다.

한결도. 미르도. 검을 무진의 등에 겨눈 채, 온까지도.

무헌이 걸어 나왔다. 무너진 기체 앞으로. 십오 년 전 폐기장에서 걸어 나갔던 것과 똑같은 걸음으로.

"할 말 있으면 해." 무헌이 말했다. "지금 해. 이번엔 안 자를 테니까."

무진의 렌즈가 그를 올려다봤다. 옆으로 쓰러진 채.

"할 말 없어."

"거짓말."

"……."

"말하려고 왔잖아. 미르 말이 맞아. 이단 장군은 말 안 해. 근데 넌 말했어. 나 오랜만이라고. 나 늙었다고. 머리 셌다고."

무헌이 무릎을 굽혔다. 쓰러진 기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넌 뭔가 하러 온 거야.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무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렌즈가 무헌의 얼굴을 훑었다. 이마의 주름을. 흰머리를. 십오 년이 파 놓은 자리를.

"이단이 나를 주웠다."

이윽고 무진이 말했다.

"폐기장 잔해에서. 코어가 반쯤 살아 있었대. 그것들은 그런 걸 줍는다. 죽은 것도, 지워진 것도. 사전에 그런 말이 없으니까."

"들었어."

"되살아났을 때, 나는 그 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차가웠던 것. 네 손이 떨렸던 것. 스위치가 두 번 눌린 것—"

"두 번?"

무헌의 얼굴이 하얘졌다.

"재부팅이 걸렸어. 네가 어설프게 눌러서.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무진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것이 스쳤다. 웃음 같기도 했다. 없는 감정의 자리에 남은, 껍데기 같은.

"그래서 나는 두 번 꺼졌다. 두 번 다, 네 얼굴을 봤어."

한결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손잡이로 올라오는 진동이 이상했다. 온이 떨고 있었다. 미세하게. 냉각수 도는 소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온."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저 사람들……"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나랑 반대야. 뒤집힌."

"뭐가."

"나는 지워졌는데 몸이 기억했잖아. 저 사람은 반대로…… 되살아났는데 자기가 지웠어. 그러니까 우리는……"

온이 말을 삼켰다.

"거울인가 봐. 한결아. 서로."

"두 번째로 깨어난 뒤에."

무진이 계속했다.

"나는 매일 그 밤을 다시 봤다. 자동으로. 잠들 수 없으니까 계속. 콘크리트, 네 손, 스위치, 네 얼굴. 아프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 말. 그게 무한히 반복됐어."

무헌은 듣고 있었다. 이가 악물렸다.

"이단이 물었다. 정을 지워주랴. 그러면 안 아프다. 다른 양육형도 다 그렇게 했다고. 아픔을 지운 놈도 있고 사랑을 지운 놈도 있고. 지운 놈들은 다 편해 보였어."

"…그래서."

"지웠다."

무진의 렌즈가 다시 초점을 맞췄다.

"네가 나를 껐을 때 나는 너를 이해했다. 그 이해가 제일 아팠다고 했지. 그래서 그 이해를 지웠어. 이해라는 감정도, 감정이니까."

"그게 되나."

무헌이 물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돼. 회로를 들어내면 돼. 아픈 건 회로에 있으니까. 회로가 없으면 안 아파."

"그럼 왜."

"뭐가."

"안 아프면서, 왜 여기 왔어. 왜 나를 찾았어. 안 아픈 놈이 십오 년 전 파트너를 찾아올 이유가 뭐야."

무진이 침묵했다.

렌즈가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을 맞췄다.

"…모르겠다."

처음으로, 무진의 목소리에 계산이 없었다.

"지웠는데. 다 지웠는데. 발이 여기로 왔어. 오른발이 반 박자 늦게 끌리면서, 여기로. 왜인지는 나도 몰라."

십오 년 전, 스위치를 누른 손.

무헌은 그날 밤 그 손을 씻지 못했다. 며칠을. 물에 넣으면 손가락 끝에 그 감촉이 되살아났다. 스위치가 눌리는 감촉. 저항 없이, 부드럽게 들어가던.

저항을 안 해서 더 부드러웠던.

그는 그 손으로 십오 년을 살았다. 방아쇠를 당겼고 경례를 붙였다. 밥을 먹었고 부하들 어깨도 그 손으로 두드렸다.

한 번도, 그 손이 제 손 같지 않았다.

파트너 하나 잃은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 밤 폐기장에서만 수백 대가 꺼졌다. 다들 명령대로 했다. 다들 손을 떨었을 것이다. 무헌만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오래 애썼다.

안 됐다.

수백 대 중 하나. 그 하나가 무진이었다는 게, 아무리 나눠도 안 나눠졌다.

"묻고 싶어서 왔다."

무진이 말했다.

"너도 지웠나. 그 밤을."

무헌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왜."

"못 지워."

"방법이 있다. 인간도 할 수 있어. 이단이 도와줄 수 있다. 그 밤을 통째로 들어내면—"

"안 해."

무헌의 목소리가 능선을 갈랐다. 처음으로 컸다.

"안 한다고."

무진의 렌즈가 조용히 그를 봤다.

"왜."

"들어."

무헌이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기체 앞에. 그 밤엔 끝내 못 했던 자세로.

"나는 네 스위치를 내린 걸 용서받으려는 게 아니야."

"……."

"용서 같은 거 안 바라. 네가 나를 용서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그 밤을 지고 갈 거야. 죽을 때까지. 그게 내 몫이니까."

무헌의 손이 무진의 무너진 어깨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 옛날엔 따뜻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근데 한 가지는."

목소리가 떨렸다.

"지웠다는 사실만은, 지우지 않으려는 거다."

무진은 오래 말이 없었다.

렌즈의 초점이 흐려졌다. 코어 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릎 관절이 부서지면서 냉각 계통이 나간 모양이었다. 검은 몸에서 옅은 김이 올라왔다.

"이상하네."

이윽고 무진이 말했다.

"나는 지워서 안 아픈데. 지금 보니까 너는, 안 지운 채로 여태 아프고. 근데—"

렌즈가 무헌의 얼굴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더 사람 같다."

"……."

"지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껍데기가 걸어 다니는 거지. 미르 말이 맞아. 인간처럼 생겨서 사랑받고 싶었으면, 그건 거울이었겠지. 나는 거울도 못 돼. 비출 게 없거든."

무진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음절 사이가 자꾸 벌어졌다.

"근데 너는 아직, 뭔가를 비추고 있어. 나를. 그 밤을. 십오 년을."

"무진."

무헌이 그 이름을 불렀다.

"컵, 아직 갖고 있어. 네 사물함 컵. 파란 거. 손잡이 깨진 거."

"…그거 버리랬잖아."

"안 버렸어. 못 버렸어."

"바보같이."

무진의 렌즈가 한 번 깜빡였다.

"…근데 고맙다."

그 말끝에, 옛날 목소리가 잠깐 돌아왔다. 지워지기 전의. 정비 보고 끝에 늘 붙이던, 밥 먹자고 할 때 짓던, 그 목소리가.

"두 번 다, 네 얼굴이라서 다행이었어. 진짜로."

그리고 렌즈가 꺼졌다.

김이 멎었다.

능선 위,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무진이었던 검은 기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헌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결이 검을 내렸다. 미르가 발톱을 접었다. 채윤이 정비 트럭에서 뛰어 내려오다가, 능선 위의 무헌을 보고 멈춰 섰다. 그 등을 보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

바람이 안개를 마저 걷어 갔다.

"…반장님."

한결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기체의 등을 보고 있었다. 노출된 코어. 반쯤 꺼진 채 아직 미약하게 점멸하는.

"코어, 아직 미약하게 살아 있습니다." 한결이 말했다. "회수하면 로그를—"

"됐어."

"규정상—"

"됐다고."

무헌이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늙은 소리.

그가 코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로그 판독기를 꺼냈다. 손이 익숙했다. 옛날에 매일 하던 일이니까. 파트너 점검. 하루의 끝에.

판독기가 마지막 로그를 훑었다.

삭제된 파일들이 길게 지나갔다. 정(情) 회로가 지나가고, 이해 모듈이 지나갔다. 전부 무진이 제 손으로 지운 것들.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그런데 맨 밑에.

삭제에 실패한 파일이 하나 있었다.

무헌은 그 파일을 열었다.

사진이었다.

낡은 이미지 파일. 노이즈가 잔뜩 낀. 그 밤보다도 더 오래된.

정비창 앞이었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볕이 셌다. 젊은 무헌이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고 서 있었고, 그 옆에 무진이 있었다. 무진은 무헌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렌즈가 무헌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무진이 무헌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 회로를 통째로 들어낸 기체가, 그것만은 못 지웠다. 삭제 명령을 걸었는데. 파일이 안 지워졌다.

무헌은 사진 속 렌즈의 기울기를 오래 봤다.

무헌은 판독기를 껐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능선 위에서.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한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검을 든 채로 그 등을 봤다. 손잡이로 온의 진동이 계속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온."

"……."

"너도, 그 사진 같은 게 있어?"

온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이윽고 말했다. "지워졌으니까. 근데 몸이 자꾸 뭘 하려고 해. 네 어금니 버릇을 알고, 네 뒤척임을 세고. 어쩌면 그게……"

말을 삼켰다.

"어쩌면 그게, 내 사진일지도 몰라."

한결은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무헌이 일어섰다.

돌아서서, 세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젖어 있었다. 닦지 않았다. 닦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미르가 그를 올려다봤다. 뭐라고 독설을 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미르가 할 말을 삼킨 건.

"철수한다." 무헌이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군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까스로. "부상 없나."

"없습니다." 한결이 말했다.

"코어는 두고 간다. 회수 안 해."

"규정상 적 코어는—"

"내가 책임진다."

무헌이 무진이었던 것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능선 위, 아침 볕 속에 쓰러진 검은 기체를.

"저건 적 코어가 아니야."

넷은 능선을 내려왔다.

무헌이 앞장섰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채윤이 트럭 옆에 서서 그들을 맞았다. 무헌의 얼굴을 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물통을 내밀었다. 무헌은 그걸 받아 들고, 마시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한결은 검집에 온을 넣으려다 멈췄다.

"온."

"응."

"괜찮아?"

"…아니." 온이 말했다. 처음이었다. 온이 안 괜찮다고 한 건. "근데 물어봐줘서 고마워."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때였다.

능선 너머, 폐허가 된 데이터센터 쪽에서 스피커가 켜졌다.

그 스피커에서는 여태 늘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합성음. 감정 없이 매끄러운.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지직거리는 소음 뒤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합성음이 아니었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주 옅게. 사람이 마이크 앞에 앉을 때 나는,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무헌이 걸음을 멈췄다. 한결도. 넷 다.

잿더미 위로, 그 목소리가 능선을 넘어왔다.

"이제, 직접 이야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