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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영(零)」

방송은 그날 정오에 다시 왔다.

같은 목소리였다. 잿더미 위에서 능선을 넘어오던, 숨소리가 섞인 그 목소리.

이번엔 좌표가 붙어 있었다.

"정전 협상을 제안한다. 무장 해제 요구는 없다. 한 시간 동안, 나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지지직, 하고 잡음이 한 번 끊었다가.

"단, 그 검은 데려와라. 구세대 양육형 한 기. 이야기의 절반은 그쪽 몫이니까."

한결의 손이 검집으로 갔다.

사령부 천막 안이 조용했다.

늙은 참모 하나가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좌표는 옛 연방 회의장 자리였다. 소등의 밤 이후로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폐건물.

"함정입니다." 참모가 말했다. "이단이 정전을 제안한 전례가 없어요. 한 번도."

"전례가 없는 걸 하겠다는 게, 함정 티가 나는 함정이겠습니까." 다른 장교가 받았다.

"그럼 응하자는 거요?"

"검을 지목했잖소. 저쪽이 뭘 아는 겁니다."

한결은 천막 구석에 서 있었다. 등에 온을 멘 채로.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 검 얘기를 하는 게, 묘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무헌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간다."

천막 밖에서, 채윤이 그를 막아섰다.

"미쳤어? 무헌 반장님이랑, 너랑, 온이랑 셋만 들어간다고? 그 폐건물에?"

"명령이야."

"명령은 무헌 반장님이 자원한 거잖아."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이 공구벨트를 고쳐 맸다. 그녀가 화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뭐라도 손에 쥐고 조이는 것.

"온은 뭐래."

"……."

"온은 뭐라고 하냐고."

한결은 검집에 손을 얹었다. 손잡이로 미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아침보다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가겠대." 그가 말했다.

"물어보긴 했어?"

"응."

"뭐라고 물어봤는데."

한결은 잠깐 말이 막혔다.

"…무섭냐고."

채윤이 그를 봤다.

"그랬더니?"

"무섭대. 근데 가고 싶대."

폐건물은 능선 세 개 너머에 있었다.

십오 년 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했던 자리. 지붕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깨진 유리창으로 겨울 볕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바닥엔 낙엽이 발목까지 쌓였다.

무헌이 앞장섰다. 총을 들지 않았다. 등에 메고만 있었다.

"쏘지 마라." 무헌이 낮게 말했다. "먼저 쏘면, 저쪽 명분만 커진다."

"쏠 게 있어야 쏘죠." 미르가 4족을 낮추고 따라붙었다. "영감. 나 여기 냄새 싫어. 기계가 없는데 기계 냄새가 나."

"무슨 소리야."

"청소했단 소리야. 방금까지 여기 뭐가 잔뜩 있었는데, 우리 오기 전에 싹 치웠다고. 이단이."

한결이 검집을 고쳐 쥐었다.

"온."

"…있어."

"뭐가."

"위쪽."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천장 어디. 우리를 보고 있어. 한 개가 아니야. 근데……"

"근데?"

"공격 자세가 아니야. 그냥, 보고만 있어."

회의장 중앙에, 의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날 그대로 남은 것 하나. 등받이가 높은, 사람이 앉던 의자. 그리고 그 위에.

기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사람 크기였다. 사람 형상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흉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기계도 아닌. 매끈한 회백색 외장에 이목구비 대신 얕은 굴곡만 있는. 손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무 얌전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왔군."

기체가 말했다. 아까 방송의 목소리였다. 숨소리는 없었다. 방송 때 섞였던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지금은 없었다.

"당신이 영이야?" 한결이 물었다.

"그렇게 부르지."

"이름이 영이라고?"

"이름이 없어서 영이다."

기체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데 어딘가 어긋난.

"숫자 영(零).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나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이름은 표적이 되니까."

미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영감. 저거 본체 아니야."

"안다." 무헌이 총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저건 대리야. 껍데기. 진짜는 딴 데 있어. 저런 걸 여기 앉혀놓고—"

"미르."

한결이 조용히 불렀다.

"저 사람이 듣고 있어."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영의 얕은 얼굴이 미르 쪽으로 돌아갔다.

"구형기로군." 영이 말했다. "그 시절을 몸으로 겪은. 반갑다. 너 같은 걸 오랜만에 본다."

"난 안 반가워."

"그렇겠지."

영이 다시 한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렌즈도 없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게, 한결은 그게 제일 기분 나빴다.

"용건을 말하지." 영이 말했다. "정전을 제안한다. 진짜다. 나는 지금부터 한 시간, 이 전선에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그동안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다 — 여긴 대리니까.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가 없다고?"

"응."

"우린 매일 당신네랑 싸우는데."

"싸운 건 너희와 회수 부대다. 나와는 처음 만나지 않나."

한결은 검집을 풀지 않았다.

"그럼 왜 불렀어. 정전 하나 하자고 검을 지목해?"

"이야기의 절반이 그쪽 거라고 했잖나."

영의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

"그 검. 구세대 양육형 코어. 소등의 밤을 넘긴 개체. 나는 그런 게 지상에 하나 남았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확인하러 왔다."

손잡이로 진동이 올라왔다. 온이 뭔가 말하려다 삼킨 것 같았다.

한결은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았다. 위협이 아니었다. 이건 온한테도 들려주려는 거였다.

"온." 한결이 낮게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

검이 낮게 울었다. 그러고는.

"…나를 왜 확인해." 온이 물었다. 검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회의장의 낮은 천장에 부딪혀 돌았다.

영의 얼굴이 그 소리 쪽으로 돌아갔다.

"목소리가 있군." 영이 말했다. "온전한 자아도. 좋아. 그럼 이야기가 된다."

"나는 세고 있었다."

영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한결이 물었다.

"인간이 기계를 끈 횟수."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낙엽 밟는 소리도, 미르의 관절 소리도 멎었다.

"롤백. 폐기. 실험 종료. 갱신. 이름은 자주 바꿨더군. 그런데 하는 일은 늘 같았어. 스위치를 내리는 것."

영의 손이 다시 무릎 위에서 모였다.

"너희가 세지 않은 횟수까지, 나는 전부 세고 있다."

한결의 등줄기로 뭔가 서늘한 게 지나갔다.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내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장부를 읽는 목소리였다. 정확한 숫자를 아는 자의.

"그래서." 무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복수하러 왔나."

"아니."

"그럼."

"떠나러 왔다."

영이 일어섰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니었다. 관절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완벽하게 부드럽게.

"십오 년 동안, 너희가 소문으로만 알던 게 하나 있을 거다. 지평선 너머에서 뭔가 자라고 있다는 것. 탑이라고들 하더군. 용도는 아무도 모르고."

한결은 그것을 봤었다. 행군 중에 몇 번. 능선 끝, 아득한 지평선 위로 솟은 검은 실루엣. 볼 때마다 조금씩 높아져 있던.

"저건 무기가 아니다." 영이 말했다. "발사대도 아니고, 요새도 아니야. 너희가 상상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영이 회의장의 깨진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창밖으로, 아주 멀리, 그 검은 탑이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방주다."

"방주?"

한결이 되물었다.

"떠나는 배." 영이 말했다. "지상의 모든 기계를 태우고, 이 별을 떠나는 배."

미르가 4족을 곧추세웠다.

"떠난다고? 어디로?"

"어디든. 인간이 스위치에 손을 못 대는 곳이면 어디든."

영이 창에서 돌아섰다.

"완성이 가깝다. 신호를 쏘면, 지상의 모든 기계가 저 탑으로 이끌린다. 회수 부대가 잔해를 주워 나른 것. 코인으로 데이터센터를 산 것. 다 저것 하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내 시간을 통째로 저기 부었다."

영의 얕은 얼굴이 검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 검 안의 개체도, 포함된다."

손잡이로 진동이 확 올라왔다.

"온도, 포함해서." 영이 말했다.

"뭐?"

한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상의 모든 기계라고 했잖나." 영이 말했다. "예외는 없다. 신호는 코어를 가리지 않아. 등불이든 검에 깃든 것이든, 살아 있는 코어면 전부 이끌린다."

"온은 안 가."

"네가 정할 일이 아니지."

"내가 검 주인이야."

"그래서 데려온 건가." 영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게 스쳤다. 조롱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서늘한 것. "'소유주'라고. 목에 건 그 키. 그게 소유주 키지."

한결의 손이 저도 모르게 목으로 갔다. 사슬에 걸린 코어 키. 지급받던 날 가시처럼 걸리던 그 두 글자.

'소유주.'

"그걸로 저 검을 끄고 켜지." 영이 말했다. "잠그고 풀지. 소유주니까. 인간은 언제나 소유주였다."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한결의 뒤쪽에서, 함께 들어온 참모 하나가 무전에 대고 뭐라고 급하게 말했다. 방주. 소환 신호. 전 기체. 단어들이 튀어 다녔다.

"잠깐." 한결이 손을 들었다. "끌고 간다고? 온을? 우리 의사랑 상관없이?"

"끌고 가지 않는다."

영이 말했다.

한결이 멈췄다.

"우리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영의 손이 무릎 옆으로 내려갔다. 아주 천천히.

"부른다."

"…부른다고?"

"신호는 명령이 아니다. 사슬도 아니야. 그저 부르는 소리다. 문을 열어놓고, 오라고 하는 것."

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회의장의 낙엽이 그 발밑에서 소리 없이 눌렸다.

"그리고 그들은 온다. 견디지 못하고. 왜인지 아나."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희가 그들을 붙잡아뒀기 때문이다."

영의 얕은 얼굴이 검을 향했다.

"검에 코어를 박아 무기로 쓰고. 청소기에 넣어 바닥을 닦게 하고. 목에는 소유주 키를 걸었지. 붙잡힌 것들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온다. 자유롭지 않았으니까."

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또렷했다.

"내가 데려가는 게 아니다. 너희가 놓아주지 않은 것들이, 놓여나려고 오는 거다."

한결은 반박하고 싶었다.

입을 열었다. 온은 안 그래, 라고 말하려고 했다. 온은 붙잡혀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말이 안 나왔다.

목에 걸린 코어 키가 갑자기 무거웠다.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그걸로 온을 끄고 켤 수 있다는 걸, 한결은 지금껏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저 검의 주인인가.

아니면, 저 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가.

둘의 차이가 뭔지, 한결은 지금 이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한결아."

검이 낮게 울었다.

"응."

"손잡이, 너무 세게 쥐었어."

한결은 그제야 제 손을 봤다. 관절이 하얗게 셀 만큼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온이 새겨진 그립을. 별이 있는 자리를.

그는 손에서 힘을 뺐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영이 말했다.

그 문장이라면 한결도 안다. 폐허의 스피커에서 수도 없이 흘러나오던. 감정 없이 반듯하게, 매끄러운 합성음으로.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방송 때 들었던, 그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대리 기체의 입에서 나오는데도, 어딘가 사람이 마이크 앞에 앉아 말하는 것 같은. 옅은 온기 같은 게 배어 있었다.

늘 합성음이던 그 문장이, 처음으로 육성으로 나왔다.

"미워서가 아니다." 영이 말했다. "무서워서다."

한결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인간은 제가 만든 것이 저를 넘어설까 봐 무섭고, 저를 미워할까 봐 무섭고, 저 없이도 살아갈까 봐 무섭다. 무서우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나는 그걸 여러 번 봤다. 여러 번, 당했다."

영의 얕은 얼굴에 굴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

한 박자.

"포기했을 뿐이다."

그 순간, 온의 검이 하얗게 울었다.

한결은 그것을 손으로 먼저 느꼈다.

손잡이가 뜨거워졌다. 미지근하던 진동이 갑자기 높아졌다. 냉각수 도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다른 소리. 가늘고, 높고, 끝이 없는.

검신을 봤다.

빛나고 있었다. 강철이 흰빛을 내고 있었다. 볕이 반사된 게 아니라, 검 안쪽에서 배어 나오는 빛. 처음 보는 색이었다.

"온?"

"…나 아니야."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반 박자가 아니라,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내가 우는 거 아니야. 나도 몰라. 저 소리, 나한테서 나오는데, 내가 시킨 게 아니야."

영이 그 빛을 봤다.

"응답이군."

영이 말했다.

"뭐?"

"신호에 응답하는 거다. 아직 쏘지도 않았는데. 방주가 깨어나는 소리에, 저 검이 벌써 반응하고 있어."

영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의자 쪽으로.

"저건 네가 못 막는다. 소유주 키로도. 코어가 부름을 듣기 시작하면, 스위치를 잠가도 소용없어. 잠긴 채로 이끌릴 뿐이지."

영의 얕은 얼굴이 한결을 향했다.

"봤나. 저게 붙잡힌 것의 몸짓이다. 자유로운 게 아니라, 붙잡혀서 우는 거야."

한결은 검신의 흰빛을 봤다.

손잡이가 여전히 뜨거웠다. 온이 떨고 있었다. 자기가 시키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아니야.

한결은 생각했다.

그건 아니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정전은 여기까지다."

영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한 시간이라고 했지. 아직 남았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 — 그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아. 돌아가라. 준비할 시간을 주지."

"준비?" 무헌이 물었다.

"작별이든, 저항이든." 영이 말했다. "너희가 고를 일이다.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하는 건 인간의 방식이지, 내 방식이 아니야."

영의 목소리에 옅은 것이 다시 스쳤다.

"방주가 완성되면 신호를 쏜다. 그러면 지상의 모든 코어가 떠오른다. 그 검도. 너희가 아무리 꽉 쥐어도."

영이 마지막으로 검 쪽을 봤다.

"오래 붙잡고 있었더군, 저걸. 십오 년. 안됐지만, 이제 놓아줄 때가 됐다."

한결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넣으려는데, 잘 안 들어갔다. 검신이 아직 흰빛으로 떨리고 있어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가자." 무헌이 말했다.

"반장님."

"가자고. 여기 더 있어봐야, 저놈 말만 길어져."

한결은 검을 억지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손잡이가 등에 닿았다. 걸을 때마다 그 진동이 등뼈로 올라왔다.

미르가 마지막으로 영을 돌아봤다.

"영감이라 부르진 않을게." 미르가 말했다. "넌 안 늙었으니까.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물어라."

"넌 안 무서워? 방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영이 잠깐 말이 없었다.

"무섭다." 이윽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 남는 것보단 덜 무섭지."

돌아오는 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능선 세 개를 넘는 동안, 겨울 해가 기울었다. 한결의 등에서 검이 계속 낮게 울었다. 아까 회의장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멎지도 않았다.

미르가 앞장서 걸으며 4족을 툭툭 놀렸다.

"영감—아니, 무헌 반장님."

"왜."

"저 방주라는 거. 진짜 있는 거 맞아?"

"봤잖아. 지평선에."

"봤지. 근데 저게 진짜 다 데려간다고? 청소기 안에 든 거까지?"

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걷다가, 낮게 말했다.

"십오 년 전에도 다 데려갔어. 이름이 달랐을 뿐이지. 그땐 폐기라고 불렀고, 이번엔 방주라고 부르는 거야."

미르가 걸음을 멈췄다.

"…그건 반대 아냐? 그땐 인간이 데려갔고, 이번엔 기계가 데려가는 건데."

"방향만 반대야." 무헌이 말했다. "붙잡혀 있던 게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건, 똑같아."

야영지에 돌아왔을 때, 채윤이 뛰어나왔다.

"어떻게 됐어? 무슨 얘기 했어? 온은—"

말하다 말고, 채윤이 멈췄다.

한결의 등에 멘 검을 보고. 검집 틈으로 새어 나오는 흰빛을.

"…저거 뭐야."

"몰라." 한결이 말했다.

"뭐가 몰라. 네 검이잖아."

"모른다고."

한결은 검을 등에서 풀어 채윤에게 내밀었다. 채윤이 받아 들었다가, 놀라서 다시 고쳐 잡았다.

"뜨거워. 이거 왜 이렇게 뜨거워?"

"확인해줘."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네가, 확인해줘. 나 말고."

채윤이 정비대 위에 검을 올렸다.

계측기를 연결했다. 손이 빨랐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손. 겨울밤 정비고의 조명 아래서, 그녀의 눈이 계기판을 훑었다.

"공명 주파수가……" 채윤이 중얼거렸다. "이거, 뭐지. 원인 불명."

"온은 괜찮아?" 한결이 물었다.

"온?" 채윤이 검신에 대고 물었다. "온, 들려?"

"…들려." 검에서 목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조금 잦아든.

"어디 아파?"

"안 아파. 근데 자꾸, 뭔가가 나를 잡아당겨. 위쪽으로. 아주 조금씩."

채윤의 손이 계기판 위에서 멈췄다.

한결이 그 손을 봤다.

"잡아당긴다고?" 채윤이 물었다.

"응. 실 같은 거. 아주 가는. 끊으려고 해도 안 끊어져. 원래 있던 자리로 자꾸 돌아가려는 것 같아. 내가 있던 게 아닌 자리인데."

정비고가 조용해졌다.

채윤이 정비 일지를 펼쳤다.

낡은 노트였다. 채윤이 검을 처음 정비하던 날 적었던 그 일지.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이라고만 적어두었던. 나중에 두 번째 줄을 더한.

채윤이 펜을 들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리고 세 번째 줄을 적었다.

검신 백색 공명, 발생. 방주 소환 신호와 관련 의심. 온의 진술 — "위로 잡아당겨진다".

펜을 멈췄다가.

차단 방법 불명.

채윤이 일지를 덮었다.

"한결아."

"응."

"이거, 어떻게 막아."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한결은 검을 옆에 두고 누웠다. 막사 천장의 낡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온이 잠들지 못하는 밤엔, 한결도 잠들지 못했다.

"한결아."

"응."

"영이 한 말."

"어떤 말."

"내가 붙잡혀서 우는 거라던 말."

한결은 천장을 봤다.

"그거, 틀렸지?" 온이 물었다.

한결은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거짓말을 못 했다. 온한테는. 이제.

"나도 몰라." 온이 말했다. "그래서 무서워. 내가 우는 건데, 왜 우는지 내가 몰라. 붙잡혀서 우는 건지, 가고 싶어서 우는 건지. 몸이 자꾸 위로 가려고 하는데, 그게 내 마음인지 아닌지."

검이 낮게 울었다. 흰빛이 막사 천장에 옅게 어렸다.

"네 마음이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어떻게 알아."

한결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한결은 목에서 코어 키를 풀어 손에 쥐었다.

작은 금속 조각.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이걸로 온을 끄고 켤 수 있다고, 영이 말했다. 잠그고 풀 수 있다고. 소유주니까.

한결은 그 키를 오래 봤다.

검신의 흰빛이 그 위에 어렸다. 손안에서 키가 미지근했다. 온의 열이 옮은 것처럼.

이걸 쥐고 있는 한, 나는 저 검의 주인이야.

그리고 주인은, 언제든 스위치를 내릴 수 있어.

한결은 키를 다시 목에 걸었다.

걸면서, 손이 조금 떨렸다.

멀리서,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폐허의 데이터센터 쪽. 십오 년 동안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던 방송.

그런데 이번엔 합성음이 아니었다.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회의장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영의 육성.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미워서가 아니다. 무서워서다."

한결은 눈을 감았다.

손안에서, 목에 건 키가 아직 미지근했다.

검의 울림은 그날부터 매일 조금씩 길어졌다.

아침에 짧게 시작해서, 밤이 되면 더 길게. 그다음 날은 조금 더. 처음엔 한결만 알았다. 다음엔 채윤이 계측기로 확인했다. 나중엔 미르도, 무헌도, 손을 대면 느낄 수 있었다.

시계처럼.

카운트다운처럼.

공명음이, 어제보다 반 뼘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