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새벽의 문장」 — 정적의 장
옥상 계단은 열두 칸이었다.
채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십오 년 묵은 습관이었다. 그 애는 어떤 계단이든 칸을 셌다. 아버지가 그랬다. 무게를 견디는 건 다리가 아니라 숫자라고. 힘들면 세라고. 그러면 힘든 게 몇 칸짜린지 알게 된다고.
지금은 다섯 칸째였다.
◆
한결이 한 계단 아래에 있었다.
새벽빛이 계단참에 비스듬히 들었다. 겨울 새벽은 색이 옅었다. 회색에 가까운 빛이 한결의 얼굴 반쪽에 걸렸다. 밤을 샌 얼굴. 눈 밑이 꺼져 있었다.
채윤은 가슴에 노트를 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비 일지. 방금 저걸 들고 사령부까지 뛰었다. 옆구리가 아직 결렸다. 숨이 아직 안 골라졌다. 그런데 심장이 뛰는 건, 뛰어서만은 아니었다.
"오 분만."
채윤이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가 안 떨렸다.
◆
"채윤아." 한결이 말했다. "너 먼저 좀 쉬는 게—"
"아니."
채윤이 잘랐다.
"쉬면 못 해. 지금 해야 돼."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그 애를 봤다. 계단 위의 채윤을. 노트를 안은 채윤을. 뭘 하려는지 모르는 얼굴로.
모르지. 알 리가 없지.
채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오래 몰랐다. 제가 뭘 하는지, 한 번도.
바람이 옥상 난간을 넘어왔다. 마른 바람이었다. 채윤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
"나 있잖아." 채윤이 말했다.
한결이 그 애를 봤다.
"…어."
"오래된 얘기 하나 할게. 재미없어. 근데 끝까지 들어."
채윤은 노트를 고쳐 안았다. 두 팔로. 가슴 앞에. 무슨 방패처럼.
아니야. 방패 아니야.
방패였으면 앞에 세웠을 거다. 채윤은 세운 게 아니라, 안았다. 놓치기 싫은 걸 안는 자세로. 이건 무기가 아니었다. 채윤이 여태 붙잡고 있던 거였다.
"열한 살 때,"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가 정비창 나갔어. 소등의 밤에.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어. 아빠가 금방 온다 그랬거든."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채윤은 그걸 봤다. 봤는데, 안 멈췄다.
◆
"안 왔어." 채윤이 말했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아빠가 개죽음한 줄 알았어. 십오 년 동안. 무슨 기계 하나 살리겠다고, 명령 어기고, 그러다 죽은 줄. 바보같이 죽은 줄 알았어."
채윤은 숨을 한 번 골랐다.
"근데 열하루 전에 알았지. 아빠가 살린 게 뭔지."
한결이 등에 멘 검을 흘끔 봤다. 무의식중에. 채윤은 그 시선을 봤다.
"어. 그거야." 채윤이 말했다. "온이야. 우리 아빠가 살린 게, 지금 네 등에 있는 그거야."
검신에서 흰빛이 아주 낮게, 한 번 흔들렸다. 대답처럼.
◆
"그래서 이제 안 바보 같아."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죽음. 이제 뜻이 있어. 그건 됐어. 그건 다 됐어."
"채윤아."
"안 끝났어. 계속 들어."
한결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채윤은 그 애를 봤다. 한 계단 아래의 한결을. 이 남자를 언제부터 봤더라. 아홉 살, 열 살. 그때부터 봤다. 웃는 걸, 안 웃는 걸, 아무도 안 믿는데 혼자 버티는 걸. 다 봤다. 옆에서.
옆에서만 봤지.
그게 문제였다. 채윤은 언제나 옆에 있었다. 옆은 안전하니까. 옆에서는 안 차이니까.
이제 옆에서 내려올 참이었다.
◆
"나 너 좋아해."
바람이 멎었다.
채윤은 그 말을 뱉어 놓고, 제 목소리를 들었다. 안 떨렸다. 이상하게 안 떨렸다. 오래 목구멍에 걸고 살던 말인데, 막상 나오니까 짧고 평범했다.
한결의 눈이 커졌다.
"채윤—"
"아직." 채윤이 손바닥을 들었다. 노트를 한 팔로 고쳐 안으면서. "아직 안 끝났어. 손대지 마. 내 문장이야."
한결이 멈췄다. 손바닥 앞에서.
"아주 오래 좋아했어." 채윤이 말했다. "얼마나 오래냐면, 나도 언제부턴지 몰라. 정신 차리니까 좋아하고 있더라. 축제 때도, 시장에서 네가 손 흔들 때도. 방금 노트 들고 뛰는데도 옆구리 결리는데 그 생각 하고 있더라니까. 미쳤지."
채윤은 웃었다.
웃는데, 눈가가 뜨거웠다.
◆
"근데 이거." 채윤이 말했다. "이거 부탁 아니야."
한결이 그 애를 봤다.
"나 대답 안 바라. 진짜야. 너 지금 온 있잖아. 온한테 가야 되잖아. 나도 알아. 눈 있어. 등불 축제 때 다 봤어. 너 온 보는 눈. 온 너 보는 눈. 나 그거 다 봤어."
"채윤아, 그건—"
"그러니까 대답하지 마."
채윤의 목소리가 조금 세졌다. 딱 조금.
"네가 미안하다고 하면, 나 이거 부탁한 게 되잖아. 위로해 주면, 내가 위로받으려고 한 게 되잖아. 그거 아니야. 나 그거 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채윤은 노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나 이거, 나 때문에 하는 거야."
◆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새벽빛이 계단참을 조금씩 밝혔다. 회색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미지근한 노란빛이 스몄다. 채윤의 얼굴 반쪽에 그 빛이 걸렸다. 젖은 눈가에.
"나 있잖아."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십오 년 동안 기다리는 사람이었어."
한결이 그 애를 봤다.
"아빠 기다리고, 그다음엔 너 기다리고. 문 앞에서, 네 옆에서. 오면 어떡하지, 안 오면 어떡하지. 그러다 세월 다 갔어. 근데 열하루 전에 아빠 일지 읽고 알았어."
채윤은 숨을 골랐다.
"우리 아빠는 안 기다렸더라."
◆
"그 밤에," 채윤이 말했다. "아빠는 폐기장에 들어가서, 코어를 검에 옮겨 심었어. 손등 패널을 잘라서 그립에 붙였어. 그리고 일지에 썼지. 이런 걸 지우는 게 명령이면, 오늘 명령을 어긴다고."
한결은 그 문장을 알았다. 방금 사령부에서 그게 명령서 하나를 이겼으니까.
"아빠는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어." 채윤이 말했다. "뭘 하기로 정하고, 손을 움직인 사람이었어. 나는 그동안 그걸 기다림인 줄 알았어. 아니었어. 그건 시작이었어."
"그러니까 나도 오늘, 시작할래."
◆
"이건 부탁이 아니야."
채윤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아주 또렷하게.
"내 문장을 내가 끝내는 거야."
한결이 그 애를 봤다. 계단 위의 채윤을. 노트를 안고, 젖은 눈으로, 웃는 채윤을.
"나는 너를 아주 오래 좋아했다."
채윤이 말했다.
"자. 끝."
바람이 다시 불었다. 채윤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눈물이 한 줄, 뺨을 타고 내렸다. 채윤은 그걸 닦지 않았다. 웃는 채로 뒀다.
"이제 가서," 채윤이 말했다. "네 검이랑 살아남아."
◆
그리고 채윤은 등을 돌렸다.
한결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채윤아—"
"오 분 지났어."
채윤이 말했다. 등을 보인 채로. 계단 위로 한 칸 올라서면서.
여섯 칸째였다.
"밥 챙겨 먹어. 온 정비 밀린 거 있어. 저녁에 갖고 와."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일곱 칸. 여덟 칸. 아홉 칸. 옥상 문이 열리고, 새벽빛이 왈칵 쏟아지고, 채윤의 뒷모습이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결은 계단 아래에 남았다.
◆
한결은 계단참에 서 있었다.
옥상 문은 닫혔다. 채윤이 나간 자리로 빛만 남았다. 계단참에 비스듬히. 미지근하게.
그는 손을 내렸다. 뻗었던 손을.
불렀어야 했나.
모르겠다. 뭐라고 부르는데. 미안하다고? 채윤이 그건 하지 말라고 했다. 위로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뭐가 남는데. 사과도 위로도 빼면, 남는 건 그냥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등에서 검이 낮게 떨렸다.
◆
"…한결아."
온이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참의 빛을 봤다. 채윤이 걸어 들어간 그 빛을.
"들었어." 온이 말했다. "미안. 안 들으려고 했는데. 검이라, 귀를 못 막아."
"…알아."
한결이 겨우 말했다.
검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흰빛으로.
"채윤," 온이 말했다. "좋은 애야."
"알아."
"아주 좋은 애야."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아, 라는 말을 세 번 하면 그게 뭐가 되는지 몰라서.
계단 아래로 새벽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
한결은 계단을 내려갔다.
야영지는 조용했다. 두 번째 소등이 오지 않은 새벽이었다. 밤새 켜져 있던 막사 불들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무서운 소등이 아니라, 아침이 와서 끄는 불이었다.
"한결아." 온이 다시 불렀다. "나중에, 채윤한테 잘해."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잘하라고. 나 말고. 채윤한테." 온이 말했다. "내 얘긴 지금 하지 말자. 채윤이 방금 십오 년 걸린 문장 끝냈어. 그거 대단한 거야. 네가 흐리지 마."
한결은 검을 흘끔 봤다. 등 뒤로.
이 검이,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 하네.
저를 키운 목소리가, 십오 년 만에 저를 야단치고 있었다. 그것도 채윤 편을 들면서.
한결은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 새벽에.
"…그래." 그가 말했다. "알았어."
◆
정비고 쪽으로, 다른 발걸음이 있었다.
미르였다.
네 다리가 자갈을 밟는 소리. 철컥, 철컥. 낡은 구동계가 삐걱대는 소리. 미르는 뭔가를 물고 있었다. 컨테이너 손잡이 같은 걸. 입에 물고, 정비고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미르는 멈추지 않았다. 물건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
"뭘 봐."
"…뭐 물고 가."
"심부름." 미르가 말했다. 입에 문 채라 발음이 뭉개졌다. "너랑 상관없어. 가던 길 가."
미르는 정비고 쪽으로 걸어갔다. 채윤이 들어간 쪽으로. 한결은 그 뒷모습을 잠깐 봤다.
◆
정비고 안이었다.
채윤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노트를 내려놨다. 낡은 정비 일지를. 조심스럽게.
숨이 이제야 골라졌다. 옥상에서 다 쏟아놓고 내려왔더니, 몸이 텅 빈 것 같았다. 오래 안고 있던 걸 마침내 내려놓은 팔처럼, 어깨가 허전했다.
했다.
했네.
채윤은 작업대에 손을 짚었다.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톱니 하나가 오래 헛돌다 겨우 맞물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
"미르."
채윤이 돌아봤다.
미르가 정비고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에 컨테이너를 문 채로. 그걸 작업대 옆 바닥에 내려놨다. 쿵, 하고. 제법 무거운 소리였다.
"뭐야 이게." 채윤이 물었다.
"부품." 미르가 말했다. "훑어봐."
채윤은 몸을 숙였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 목록이 하나 얹혀 있었다. 뭔가 기계가 뽑아낸 것 같은 종이. 그 밑으로 부품들이 보였다.
채윤은 목록을 집어 들었다. 훑어 내렸다.
◆
관절 유닛. 외장 패널. 보행 구동계.
채윤의 눈이 목록을 따라 내려갔다.
경추 서보. 손가락 관절 열 개. 견갑 마운트. 대퇴 액추에이터. 발목 짐벌—
채윤의 눈이 멈췄다.
이거.
이건 검 부품이 아니었다. 관절이 있고, 보행계가 있고, 손가락이 열 개나 붙는 물건이었다.
이건 사람 형상의 몸이었다.
채윤은 목록에서 눈을 뗐다. 미르를 봤다. 미르는 정비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네 다리를 접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미르."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거 뭐야."
◆
"부품." 미르가 말했다.
"그건 알아." 채윤이 말했다. "이거, 검 부품 아니잖아. 이거 관절이잖아. 손가락 열 개잖아. 이거—"
"몸이지." 미르가 말했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새벽 새소리가 났다. 겨울 새 한 마리. 짧게 울고 그쳤다.
채윤은 목록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아까 옥상에서는 안 떨렸는데.
"누구 몸." 채윤이 물었다.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낡은 렌즈로 채윤을 오래 봤다.
◆
"누구 몸이냐고." 채윤이 다시 물었다.
"묻지 마라." 미르가 말했다.
"미르."
"묻지 말고 만들어." 미르가 말했다. "하룻밤짜리야."
채윤은 목록을 내려다봤다. 다시. 관절. 외장. 손가락 열 개. 사람 손가락 열 개. 그리고 목록 맨 위에, 아까는 못 본 한 줄이 있었다.
임시 의체 — 가동 예상 수명 8시간.
여덟 시간.
채윤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채윤이 말했다. "왜 만들어."
"묻지 마라." 미르가 또 말했다.
◆
"미르." 채윤이 목록을 작업대에 내려놨다. "이거 온 거지."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온 몸이지. 온한테 몸 하나 만들어 주려는 거지. 하룻밤. 여덟 시간. 왜. 뭐 때문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채윤아."
미르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채윤은 멈췄다. 미르가 이름을 부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 늙은 로봇은 사람 이름을 잘 안 불렀다. 부를 때는, 이유가 있었다.
"만들지 말라는 게 아니야." 미르가 말했다.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근데 왜냐고 물으면, 나도 대답 못 해. 나도 몰라. 위에서 목록만 왔어."
"위에서? 어디 위에서."
"몰라." 미르가 말했다. "근데 나쁜 데는 아니야. 그것만 알아. 나쁜 데였으면 내가 안 물어다 놨어."
◆
채윤은 컨테이너를 봤다.
관절. 외장. 보행계. 손가락 열 개. 여덟 시간짜리 몸.
이걸 다 맞추면 온이 하룻밤 사람이 된다. 검 말고, 여덟 시간짜리 사람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른다. 여덟 시간밖에 못 쓰는 몸을 새벽부터 급히 물어다 주는데,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채윤은 손끝으로 컨테이너 뚜껑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었다.
그 몸으로 온이 한결 곁에 선다. 손을 잡을 수 있는 손으로. 방금 채윤이 오래 걸려 놓아준, 그 남자 곁에.
채윤은 목록을 한 번 밀쳐뒀다.
작업대 위로. 저만치.
◆
그리고 채윤은 걸었다.
정비고를 한 바퀴. 천천히. 작업대 사이로. 공구 선반 앞으로. 부품 캐비닛 앞으로. 벽에 붙은 낡은 임대 전단 앞으로.
전단은 아직 거기 있었다. 십오 년 전부터. 상가 임대. 채윤이 언젠가 제 간판을 걸겠다고, 걸어둔 꿈. 모서리가 노랗게 바랬다.
채윤은 그 앞에서 멈췄다.
내 간판.
언젠가. 군 정비창 말고. 내 이름 걸고.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곳.
채윤은 전단을 잠깐 봤다. 그러다 컨테이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온의 몸을.
그 둘이 자꾸 겹쳤다.
◆
채윤은 작업대로 돌아왔다.
노트를 폈다. 컨테이너 목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지를. 마지막 장으로.
건조한 기록체의 손글씨. 날짜가 위에 적혀 있었다. 소등의 밤 당일.
채윤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방금 사령부에서 장교가 소리 내어 읽었던 그 문장을. 이번엔 제 눈으로. 소리 없이.
폐기장 삼 열의 양육형.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채윤은 그 밑에 손가락을 댔다. 빈 자리에. 아버지가 더 쓰지 못한 자리에.
아버지는 이 문장 쓰고 나갔다. 나갔다가, 안 돌아왔다.
문장이 여기서 끊겨 있었다.
◆
"미르." 채윤이 일지에서 눈을 안 떼고 말했다. "우리 아빠, 이 몸 봤으면 만들었을까."
미르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네 아빠는," 미르가 마침내 말했다. "만들었을 거다. 안 물어보고. 봤으니까. 폐기장에서 아이 숨기고 걸어 들어온 걸 봤으면, 손이 먼저 움직여. 그런 사람이야, 네 아빠는."
채윤은 일지를 봤다. 손이 먼저 움직인 사람의 문장을.
그거 나도 닮았나.
아까 노트 들고 뛴 거. 옆구리 결리는데 안 멈춘 거. 그것도 그런 건가, 싶었다.
◆
채윤은 일지를 덮었다.
조심스럽게. 낡은 표지를. 두 손으로.
그리고 컨테이너 쪽으로 갔다. 목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밀쳐뒀던 걸.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이번엔 부품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만드는 눈이었다. 관절 유닛 — 이건 여기 쓰고. 견갑 마운트 — 이건 각도가 애매하네. 손가락 관절 — 열 개. 왼손 다섯, 오른손 다섯. 보행 구동계 — 여덟 시간 버티려면 부하를 낮춰야겠다.
채윤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록에서 부품으로. 부품에서 공구로. 정비고의 새벽 공기 속에서, 채윤의 손이 움직였다.
◆
"미르." 채윤이 공구를 집으며 말했다.
"어."
"이거 나, 명령받아서 만드는 거 아니야."
미르가 렌즈를 들었다.
"위에서 목록 왔다며. 만들라고. 근데 나 그거 때문에 만드는 거 아니야." 채윤이 말했다. "누가 시켜서 만드는 거면, 나 안 만들어. 여덟 시간짜리 몸 같은 거, 시켜서는 못 만들어. 그거 무슨 밤인지 뻔한데."
채윤은 손을 멈췄다. 잠깐.
"근데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드는 거면, 그건 달라."
"뭐가 다른데." 미르가 물었다.
"내가 만드는 거잖아." 채윤이 말했다. "명령이 만드는 게 아니라."
◆
채윤은 작업대에 부품을 늘어놨다.
관절부터. 하나씩. 아버지가 가르쳐 준 순서였다.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가고, 안쪽 뼈대를 다 세운 다음에야 바깥 외장을 씌우는.
손이 익숙했다. 십오 년 정비창 밥을 먹은 손이었다. 검을 고치고, 총을 고치고, 장갑차를 고쳤다. 근데 사람 형상 의체는 처음이었다. 손가락이 열 개나 되는 걸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아빠는 이런 거 만들었지.
소등의 밤에. 폐기장에서. 검 하나에 코어를 옮겨 심었다. 손등 패널을 잘라 그립에 붙였다. 밤중에. 혼자서. 발각되기 전까지.
채윤은 그 밤의 아버지 손을 상상했다. 지금 제 손을 움직이면서.
◆
"채윤아." 미르가 불렀다. "방금 한결 왔었다. 너 여기 온 다음에. 정비고 앞에."
채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래서."
"안 들어왔어. 앞에서 나 보고, 뭐 물고 가냐고만 묻고, 갔어."
채윤은 손을 다시 움직였다. 관절 유닛을 정렬하면서.
"잘했네." 채윤이 말했다.
"뭐가."
"안 들어온 거. 지금 들어오면 어색하잖아. 걔도 알아, 그 정도는." 채윤이 말했다. "그만큼 오래 좋아한 애가 그 정도도 모르겠어."
미르는 잠깐 채윤을 봤다.
"…너 안 슬퍼?" 미르가 물었다.
◆
채윤의 손이 멈췄다.
이번엔 조금 길게.
"슬퍼." 채윤이 말했다.
"…근데 왜 웃어." 미르가 말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어. 이상한 애야."
채윤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젖어 있었다.
"슬픈데 좋아." 채윤이 말했다. "그런 것도 있어, 미르."
"기계는 그런 거 없어."
"알아." 채윤이 웃었다. "그래서 니가 부럽기도 해."
채윤은 다시 부품을 집었다. 손가락 관절을. 하나씩 끼우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흘렀다.
정비고 창으로 새벽빛이 옅게 들었다. 겨울 해가 능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미지근한 노란빛이 작업대 위로 번졌다. 부품 위로. 채윤의 손 위로.
채윤은 말없이 조립했다. 관절을 맞추고. 서보를 연결하고. 배선을 넣고. 외장을 씌우고. 손이 쉬지 않았다. 밤을 샜는데도. 사령부까지 뛰었는데도.
미르는 구석에서 지켜봤다.
한참 만에 채윤이 입을 열었다.
"미르."
"어."
"이거 다 만들면," 채윤이 말했다. "안쪽에 뭐 하나 새겨도 돼?"
"뭘."
채윤은 손을 멈췄다. 벨트를 봤다. 제 정비 벨트에 걸린 인식표를.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가 새겨진.
◆
"우리 아빠 번호." 채윤이 말했다.
미르가 렌즈를 들었다.
"온 검 안쪽에 이미 그 번호 있어. 아빠가 십오 년 전에 새긴 거." 채윤이 말했다. "근데 이 몸에는 없잖아. 이건 내가 만드는 거잖아."
채윤은 인식표를 벨트에서 풀었다. 처음으로. 손바닥에 올려놨다. 아버지의 번호가 새겨진 낡은 금속판.
"아빠가 검에 새겼으면, 이 몸엔 내가 새길래. 같은 번호로. 안 보이는 데."
"왜 같은 번호."
"아빠가 시작한 문장이니까." 채윤이 말했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새벽빛만 번졌다.
"아빠가 시작한 문장은," 채윤이 말했다. "내가 끝낸다."
채윤은 인식표를 작업대에 내려놨다. 아버지의 번호를. 그 옆에 못을 하나 집었다. 정비고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못이었다.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그립 안쪽에 번호를 새길 때 썼을 것과 똑같은, 그런 못.
채윤은 반쯤 조립된 의체를 봤다. 아직 외장이 안 씌워진, 관절이 드러난 팔을. 그 안쪽에. 손목 관절 안쪽에.
거기다 새길 참이었다. 아버지의 번호를. 제 손으로.
채윤은 못을 잡았다. 관절 안쪽 금속면에 끝을 댔다.
그리고 새기기 시작했다.
◆
첫 획이 들어갔다.
금속 위로 못이 미끄러졌다. 끼익, 하는 소리. 채윤의 손이 안 떨렸다. 아까 옥상에서 고백할 때처럼. 안 떨렸다.
한 획. 두 획.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그립에 새겼던 번호가, 이번엔 딸의 손으로 금속에 새겨졌다.
아빠. 이거, 내가 끝낼게.
숫자 하나가 완성됐다. 채윤은 다음 획으로 넘어갔다. 새벽빛이 관절 안쪽으로 비스듬히 들었다. 못 자국 위로.
◆
번호가 다 새겨졌다.
채윤은 못을 내려놨다. 손끝으로 새긴 자리를 만졌다. 파인 홈을. 아버지 번호를. 그 애 손으로 새긴 걸.
"됐다." 채윤이 낮게 말했다.
미르가 다가왔다. 관절 안쪽을 렌즈로 들여다봤다. 새겨진 번호를.
"…네 아빠 거랑 똑같네." 미르가 말했다.
"어." 채윤이 말했다. "똑같아. 일부러 똑같이 했어."
미르는 오래 봤다. 그 번호를. 그러다 낮게 웅얼거렸다.
"네 아빠가 이거 봤으면." 미르가 말했다. "…아무 말도 못 했을 거다."
채윤은 웃었다. 젖은 눈으로.
"그럼 됐어."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원래 말 없어."
◆
채윤은 외장을 씌우기 시작했다.
관절 위로. 안쪽에 새긴 번호를 덮으면서. 이제 안 보이게 됐다. 십오 년 전 검처럼. 안 보이는 데 숨은 번호.
손이 다시 바빠졌다. 외장 패널을 맞추고. 이음매를 다듬고. 보행계를 점검하고. 서보를 조율하고.
여덟 시간짜리 몸이었다. 그래도 채윤은 대충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꼼꼼히 했다. 여덟 시간밖에 못 사는 몸이라서. 그 여덟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게 해 주고 싶어서.
온. 이 여덟 시간, 아깝게 쓰지 마.
◆
바깥에서 발소리가 났다.
채윤은 고개를 안 들었다. 손을 계속 움직였다. 그런데 미르가 렌즈를 돌렸다. 정비고 입구 쪽으로.
한결이었다.
입구에 서서, 안 들어오고 있었다. 등에 검을 멘 채로. 뭔가 말할까 말까 하는 얼굴로.
채윤은 그걸 알았다. 안 봐도 알았다. 그만큼 오래 옆에 있었으니까.
"밥은." 채윤이 손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안 돌아보고.
"…어?"
"밥 먹었냐고. 아까 먹으라 그랬잖아."
한결은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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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와." 채윤이 말했다. 손을 움직이면서.
"채윤아."
"온 정비는 저녁에 갖고 와. 지금은 나 바빠." 채윤이 말했다. "보다시피."
한결은 정비고 안을 봤다. 반쯤 조립된 의체를. 사람 형상의 몸을. 채윤의 바쁜 손을.
한결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 심상찮다는 걸 알아챈 얼굴.
"그거…" 한결이 말했다. "그거 뭐야."
"몰라도 돼." 채윤이 말했다.
"채윤아."
"묻지 마." 채윤이 손을 안 멈추고 말했다. 미르가 저한테 했던 말을 그대로. "묻지 말고, 저녁에 와. 그때 되면 알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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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은 입구에 오래 서 있었다.
채윤은 안 돌아봤다. 손만 움직였다. 외장을 맞추고. 서보를 조율하고. 오래된 습관처럼. 아버지가 가르쳐 준 손놀림으로.
한참 만에 한결이 말했다.
"채윤아."
"어."
"아까. 옥상에서."
채윤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아주 잠깐.
"그 얘기 하지 마." 채윤이 말했다. "끝난 얘기야."
"…고맙다는 말도 하지 말라 그럴 거지."
"어." 채윤이 말했다. "하지 마. 그거 무헌 상사님이 하는 대사야. 너 훔치지 마."
한결이 잠깐 멈췄다. 그러다, 아주 작게, 숨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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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한결이 말했다.
그는 돌아섰다. 정비고 입구에서. 그러다 한 번 더 멈췄다.
"저녁에 올게." 한결이 말했다.
채윤은 그제야 손을 멈췄다. 잠깐.
올게.
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이 야영지에서 '올게'라는 말은, 늘 어딘가 아팠다. 금방 올게. 안 왔다. 십오 년 전부터.
채윤은 돌아봤다. 처음으로. 입구의 한결을.
"어." 채윤이 말했다. "와."
한결이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정비고 문틈으로 새벽빛이 들었다.
채윤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정비고에 채윤과 미르만 남았다.
채윤은 조립을 계속했다. 마지막 손가락 관절을. 끼우고, 조이고, 점검하고.
"미르." 채윤이 말했다. "이거 다 만들면, 나 만드는 사람 되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 말고."
미르는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네 아빠처럼." 미르가 말했다.
"어." 채윤이 웃었다. "우리 아빠처럼."
◆
채윤은 마지막 손가락 관절을 끼웠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딸깍, 하고 들어갔다. 채윤은 의체의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봤다. 서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열 개 다.
사람 손이었다. 채윤이 만든.
채윤은 그 손을 오래 봤다. 매끈한 손등을. 별이 없는 손등을.
이 손등엔 별이 없어. 미안. 그건 못 넣었어.
근데 안쪽엔 우리 아빠 번호가 있어. 니 검이랑 똑같이.
채윤은 손을 내려놨다.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
새벽이 밝았다.
정비고 창으로 겨울 해가 온전히 들었다. 늦고, 옅고, 미지근한 해였다. 작업대 위로 빛이 번졌다. 반쯤 완성된 의체 위로. 채윤의 손 위로. 아버지의 낡은 일지 위로.
채윤은 잠깐 손을 멈췄다. 창밖을 봤다. 지평선 쪽을.
지평선에 탑이 있었다. 소문으로만 자라던 탑. 방주라고들 했다. 이 별을 떠난다는 그것.
채윤은 그걸 잠깐 봤다. 며칠 전 영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뒤로, 저 탑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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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가 났다.
낮은 소리. 멀리서. 지평선 쪽에서.
채윤은 손을 멈췄다. 귀를 기울였다. 미르도 렌즈를 창밖으로 돌렸다.
소리가 이어졌다. 낮게. 길게. 뭔가가 우는 것 같은 소리. 아니, 우는 게 아니었다.
노래 같았다.
채윤은 창가로 갔다. 그 탑에서 낮고 긴 음정이 나고 있었다. 새벽 공기를 타고 능선을 넘어오는.
지평선 너머, 탑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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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막사의 검이 탑의 음정을 따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