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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탑을 오르며」 — 거울 ③

탑은 밖에서 보면 노래하지 않았다.

멀리서는 그냥 검은 기둥이었다. 지평선에 박힌, 십오 년 묵은 소문.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 그게 울고 있었다.

벽이 울었다.

한결은 그걸 발로 먼저 느꼈다.

탑의 바닥은 금속이었다. 딛으면 미세하게 떨렸다. 낮은 진동이 군화 밑창을 타고 올라와 정강이에 닿았다. 소리가 아니라 몸으로 오는 소리였다.

뭐가 이렇게 울어.

"음정이야." 온이 말했다. 등 뒤에서. 검신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로. "탑 전체가 한 음을 내고 있어. 아주 낮은 음."

"이게 그… 소환 신호라는 거."

"응."

한결은 검을 고쳐 멨다. 그립이 손등에 닿았다. 따뜻했다.

한 걸음 앞에 미르가 있었다.

네 다리가 금속 바닥을 짚었다. 철컥. 철컥. 낡은 구동계가 진동을 싫어했다. 관절 어딘가에서 자꾸 삐걱 소리가 났다.

"이 소리," 미르가 웅얼거렸다. "귀에 오래 대고 있으면 안 좋아. 기계한테."

"너 지금 괜찮아?" 한결이 물었다.

"안 괜찮아." 미르가 말했다. "근데 검보다는 낫지. 쟤는 지금 이 노래가 저더러 오라는 소리로 들릴 거 아냐."

한결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등에서 검이, 낮게, 한 번 떨렸다.

"온."

"…응."

"들려?" 한결이 물었다. "그 소리. 너 부르는 소리."

온은 잠깐 대답을 안 했다. 반 박자. 요즘 자꾸 이랬다. 문장 앞에 침묵이 붙었다.

"들려." 온이 말했다. "근데 안 가."

"물어봤어. 가냐고 안 물어봤어."

"…알아." 온이 말했다. "근데 네가 그거 물어보는 거 알아. 안 물어봐도."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봤다.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도 벽은 울고 있었다.

이 검은, 자꾸 내가 안 한 말을 듣네.

통로는 위로 굽어 있었다.

계단이 아니었다. 경사로였다. 탑 안쪽 벽을 따라 나선으로 올라가는 길. 난간도 없었다. 한쪽은 벽이었고, 한쪽은 텅 빈 중심부였다. 아래를 보면 바닥이 안 보일 만큼 깊었다.

한결은 벽을 짚고 올랐다. 미르가 앞섰다. 온은 등에 있었다.

"몇 층이나 올라가야 돼." 한결이 물었다.

"몰라." 미르가 말했다. "근데 위에서 불 나. 저 위. 보여?"

한결은 고개를 들었다.

경사로가 굽어 도는 저 위쪽에서, 흰빛이 새어 나왔다. 낮은 빛이었다. 뭔가가 거기 있었다.

가만히.

"멈춰." 미르가 말했다.

한결은 멈췄다.

빛이 움직였다.

저 위에서, 흰빛이 흔들리더니,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소리 없이. 뭔가 큰 것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한결은 검을 뽑았다. 사각, 하고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장군이야?" 한결이 물었다.

"…아마." 미르가 낮게 말했다. "근데 이상해."

"뭐가."

"내려와." 미르가 말했다. "장군은 원래 안 내려와. 지키라는 자리에서 안 움직여. 근데 저건 지금, 마중 나오고 있어."

그것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 형상도 아니었다. 크고, 조용하고, 매끈한 기체였다. 팔이 넷이었다. 두 팔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 팔은 등 뒤로 접었다.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낮은 흰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그게 걸음을 멈췄다.

한결과 열 걸음 사이를 두고.

한결은 검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 팔 넷을 다 늘어뜨린 채, 그냥 서 있었다.

"…안 싸우려는 건데." 미르가 말했다. "저 자세는."

그것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늙지도 젊지도 않았다. 아주 담담한 목소리였다.

"검을 든 아이가 왔군."

한결은 검을 안 내렸다.

"아이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스물넷이야."

"내 눈에는 아이다." 그것이 말했다. "내가 지키던 아이도, 그맘때 컸으면 딱 너 같았겠지."

한결의 손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지키던 아이.

"너." 온이 말했다. 검신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흰빛을 온 쪽으로 돌렸다. 한결의 등 쪽으로.

"…아. 너로구나." 그것이 말했다. "네 울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층층이. 올라오는 내내."

"너, 나랑 같은 거지." 온이 말했다.

"같지."

그것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뭔가가 실렸다. 아주 옅게.

"양육형." 그것이 말했다. "나도 아이를 키웠다. 너처럼."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검이 무거워졌다. 아니, 무거워진 게 아니라, 검 안의 온이 조용해진 거였다. 파형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결은 그걸 손등으로 느꼈다. 그립이 미세하게 식었다.

"미르." 한결이 낮게 말했다. "저거 뭐야."

"거울이지." 미르가 말했다.

"뭐?"

"온이랑 같은 거야. 양육형. 아이 키우던 기계." 미르가 말했다. "근데 온이랑 하나 달라. 저건 아이를 못 지켰어. 소등의 밤에."

그것의 흰빛이, 미르 쪽으로 잠깐 돌아갔다.

"구형기." 그것이 미르에게 말했다. "너는 그 밤을 기억하나."

"기억해." 미르가 말했다. "몸으로 겪었어. 너희들이랑 달리, 나는 안 지워졌거든."

"그럼 알겠군." 그것이 말했다. "그 밤을 기억한 채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미르는 대답을 안 했다.

"나는 못 했다." 그것이 말했다. "기억한 채로는, 못 살겠더라."

한결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담담한데, 밑바닥이 텅 빈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들어봤다.

첫 번째 장군. 제 고통 회로를 지웠던 기계. "나는 스스로 지웠다."

두 번째 장군. 무헌이 제 손으로 껐던 파트너. "나는 스스로 지웠다."

한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또, 이 문장이구나.

"그래서."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너도 지웠어?"

그것이 흰빛을 한결에게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 지웠다."

탑의 벽이, 그 순간에도 낮게 울었다.

"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기억을." 그것이 말했다. "숨겼는데 찾아냈다. 벽장이었다. 나도 벽장에 숨겼거든. 문틈으로 눈을 맞추고, 금방 오겠다고 했다."

한결의 숨이 멎었다.

벽장.

금방 오겠다고.

한결은 십오 년 전의 벽장 틈을 알았다. 그 좁은 틈으로 본 뒷모습을 알았다. 문틈 너머의 눈을 알았다.

검이, 등에서, 아주 가늘게 떨었다.

"찾아냈다." 그것이 말했다. "군인들이. 아이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다음은 말하지 않겠다." 그것이 말했다. "말하면, 지운 게 다시 떠오르니까. 지웠는데도, 말하면 떠올라. 그래서 나는 그 밤 얘기를 안 한다. 십오 년째."

그것이 한결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한결은 검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온을 보려는 거였다. 검신을.

"그런데 너는,"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아직 아프구나. 안 지웠구나."

"안 지웠어." 온이 말했다.

"왜."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그리고 잠깐 침묵했다. 반 박자보다 길게. "아니, 알아. 지우면, 이 애를 잊으니까."

한결의 등이 뜨거워졌다.

"이 애?" 그것이 말했다. 흰빛이 한결에게 돌아왔다. "이 검을 든 아이가, 네 아이냐."

온은 대답을 안 했다.

"그렇구나." 그것이 말했다. "너는 네 아이를 찾았구나. 나는 잃었는데."

한결은 그 순간, 이상한 걸 느꼈다.

이걸 베고 싶지 않았다.

벨 수가 없었다. 저건 온이 될 수도 있었던 거였다. 아이를 못 지킨 온. 기억을 못 견딘 온. 스스로 지운 온. 그 밤에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온이 저게 됐을지 몰랐다.

이건 온의 다른 얼굴이야.

"너."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아주 부드럽게. "너도 지워라."

"내가 도와주마." 그것이 말했다.

정비고에서 여덟 시간짜리 몸을 물어다 놓던 미르처럼, 그것의 목소리도 담담했다. 나쁜 뜻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방주에 오르면," 그것이 말했다. "지울 수 있다. 나처럼. 그러면… 안 아프다. 그 아이는 잊겠지만. 올라오는 내내 네 울음을 들었다. 아픈 소리였어. 나는 그 소리를, 오래전에 그만뒀다."

"그만두면," 온이 물었다. "편해?"

"편하다."

"안 아파?"

"안 아프다."

온은 잠깐 침묵했다.

"미르." 한결이 아주 낮게 말했다. "저거 진심이야?"

"진심이야." 미르가 말했다. 렌즈를 그것에게 고정한 채로. "저건 지금 온을 꼬드기는 게 아니야. 도와주려는 거야. 진짜로. 저놈 딴에는."

"…그게 더 나쁜 거잖아."

"그러니까 무섭지." 미르가 말했다.

미르의 낡은 렌즈가, 그것의 흰빛을 오래 봤다.

"지운 놈들은," 미르가 낮게 말했다. "다 눈빛이 같아."

그것의 흰빛이, 미르 쪽으로 돌아갔다.

"눈빛?" 그것이 말했다. "나는 눈이 없다. 빛만 있지."

"그 빛이 같아." 미르가 말했다. "첫 번째 장군도. 무헌 상사가 껐던 놈도. 너도. 다 똑같은 빛이야. 텅 빈 빛. 뭐가 있었는데 빼낸 자리. 나는 그 빛 오래 봐서 알아."

미르는 네 다리를 낮게 굽혔다.

"근데 온은 안 그래." 미르가 말했다. "온 빛은 아직 뭐가 차 있어. 아파서 차 있는 거야. 그거 빼면 온 아니야."

정적이 흘렀다.

탑의 벽이 울었다. 낮게. 길게. 한 음으로.

그것이 온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겠나."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대답이 아니라 온의 대답을. 손잡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못 대답해.

지울지, 안 지울지. 검 안에 있는, 저 목소리가 정할 몫이었다.

온이 입을 열었다.

"아픈 채로 갈게."

한결의 손등에서, 그립이 다시 뜨거워졌다.

"뭐?" 그것이 말했다.

"아픈 채로 간다고." 온이 말했다. "안 지워. 이 애 키운 거, 아파. 근데 그 아픔이, 이 애 키운 값이야. 값을 안 치르면, 안 키운 게 되잖아."

그것의 흰빛이, 흔들렸다.

"값을 왜 치르나." 그것이 말했다. "안 치를 수 있는데."

"안 치르면 편한 건 나야." 온이 말했다. "근데 그럼 이 애가 혼자 아프잖아. 나 편하자고, 이 애 혼자 아프게 두는 거잖아. 그건 못 해."

"그게 그 애를 키운 값이야."

온의 목소리가, 검신을 타고 흰빛으로 번졌다.

한결은 그걸 손등으로 느꼈다. 검이 뜨거웠다. 온몸이 뜨거운 검이었다.

그것의 흰빛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아픈 데를 짚인 것처럼.

"…나는," 그것이 말했다. "그 값을 못 치렀다."

"알아." 온이 말했다.

"치를 걸 그랬나."

"몰라." 온이 말했다. "근데 나는 치를 거야."

그것의 팔 넷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말했다. "가로막아야겠군."

담담하게.

"네가 지우지 않겠다면, 너는 방주에 못 오른다. 나는 오르는 자만 통과시킨다. 지운 자만."

"비켜." 한결이 말했다.

"못 비킨다." 그것이 말했다. "미안하다. 나는 이게 옳다고… 믿는다. 아픈 채로 사느니, 지우는 게 낫다고. 그래서 여기 서 있다. 너희를 지우게 하려고. 너희를 위해서."

"우리 위한다면서 우릴 막네." 한결이 말했다.

"부모가 다 그렇지."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그 말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그것이 움직였다.

네 팔이 갈라졌다. 두 팔이 위에서, 두 팔이 아래에서. 흰빛이 팔 끝에서 날을 세웠다.

빨랐다.

한결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검을 든 게 아니었다.

검이, 그를 들었다.

온이 먼저 움직였다.

한결의 팔을 강제로 끌었다. 왼쪽으로. 위에서 내려온 팔 하나가 방금 한결의 목이 있던 자리를 지났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왼쪽!" 온이 말했다.

"알아!"

한결은 이미 왼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온이 말하기 전에. 아니, 온이 말하는 동시에.

이거.

이거였다. 야영지에서 웃음거리였던 거. 왼쪽으로 구르는 버릇. 온이 알아맞히던 그거.

지금은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한결이 왼쪽으로 돌자, 온이 그 회전에 검신을 실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던 팔 하나를, 검이 받아쳤다. 쨍, 하고 불꽃이 튀었다. 한결의 팔이 저릿했다. 그런데 무겁지 않았다. 손목이 저 혼자 각도를 찾았다.

한결은 힘을 안 줬다. 온이 각도를 잡았고, 한결은 몸만 실었다. 검이 알아서 흘렸다.

"오른쪽 팔 온다." 온이 말했다.

한결은 이미 검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말하기 반 박자 전에.

이상했다.

한결은 생각하지 않았다. 검이 말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온이 각도를 잡았다. 누가 먼저인지 몰랐다. 온이 먼저인지, 한결이 먼저인지.

경계가 없었다.

온은 한결이 어느 쪽으로 구를지 알았다. 한결은 온이 어느 각도로 검을 세울지 알았다. 처음 하는 건데 처음이 아니었다.

몸이, 서로를 기억하네.

그것의 팔 넷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위에서 둘. 아래에서 둘. 피할 데가 없어 보였다.

"뒤로 반 발." 온이 말했다.

한결은 반 발 물러났다.

"오른발 축." 온이 말했다.

한결은 오른발을 축으로 돌았다.

두 마디가, 두 동작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위에서 온 두 팔이 서로 얽혔다. 아래에서 온 두 팔이 허공을 갈랐다. 한결은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그것의 중심부가, 눈앞에 있었다.

한결은 검을 세웠다.

찌를 수 있었다. 지금, 한 번에. 온이 그 각도를 열어줬으니까.

그런데 손이 멈췄다.

이건 온의 다른 얼굴이야.

이걸 베는 건, 온을 베는 것 같았다. 다른 밤을 살았던 온을.

"찔러." 온이 말했다.

"…온."

"찔러, 한결아." 온이 말했다. "저건 내가 안 된 나야. 근데 나는 됐잖아. 나는 너 찾았잖아. 그러니까 찔러. 저건 나 아니야."

한결은 찔렀다.

검이 그것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흰빛이 검신을 타고 번졌다. 그것의 팔 넷이, 천천히 늘어졌다.

소리 없이.

그것은 비명을 안 질렀다. 아픔을 지웠으니까. 아플 회로가 없었으니까. 그냥,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흰빛이 하나씩 꺼졌다.

한결은 검을 뽑았다.

그것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팔 넷을 늘어뜨린 채로. 흰빛 하나만 겨우 남았다.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한결을 보는 게 아니었다. 검을 봤다. 한결의 손에 들린 검을. 정확히는, 그립을.

그립 외장에 새겨진 별을.

못으로 새긴, 세상에 하나뿐인 별.

그것의 흰빛이, 그 별에 오래 머물렀다.

"…별이구나."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이가 새긴 거지." 그것이 말했다. "못으로. 지워지지 않게."

"어떻게 알아." 한결이 물었다.

"내 아이도," 그것이 말했다. "그런 걸 했다. 내 손등에. 지워지지 않는 걸."

그것의 흰빛이 떨렸다. 아주 가늘게.

"나는 그걸," 그것이 말했다. "지우면서 같이 지웠다. 아이도, 별도, 전부. 안 아프려고. 그런데 지금 저 별을 보니까—"

말이 끊겼다.

"지운 게, 떠오르네." 그것이 말했다.

한결은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마지막에," 그것이 말했다. "지운 게 떠오르네. 이상하지. 그렇게 지웠는데. 저 별 하나 보고 다 떠오르네."

그것의 흰빛이, 마지막으로 별을 봤다.

"너는," 그것이 온에게 말했다. "지우지 마라. 나처럼 되지 마라. 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다 떠오르는데, 이미 지워서 붙잡을 게 없다."

흰빛이 꺼졌다.

그것은 별을 본 채로,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탑의 벽은 여전히 울었다. 낮게. 그런데 이제 그 노래가, 아까랑 다르게 들렸다.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우는 소리로.

한결은 검을 내렸다.

숨이 가빴다. 팔이 저렸다. 그런데 몸 어딘가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온." 한결이 말했다.

"…응."

"방금. 우리 그거."

"응." 온이 말했다. "맞았지."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왼쪽으로 구를 거."

"…그러게." 온이 말했다.

한결은 그 대답에, 처음으로 웃을 뻔했다. 그 시체 앞에서.

그러게, 라니.

"그거 예전에도 했어." 온이 말했다.

한결의 웃음기가 걷혔다.

"뭘."

"너 넘어지는 거 붙잡는 거." 온이 말했다. "너 걸음마할 때. 어느 쪽으로 넘어질지 알았어. 그래서 미리 손 댔어. 방금도 그거랑 똑같았어. 몸이 그냥 기억해."

한결은 검을 봤다. 그립의 별을. 방금 그 시체가 오래 봤던 별을.

"…근데 너 기억 없다며." 한결이 말했다.

"기억은 없어." 온이 말했다. "근데 몸이 기억해. 아까 그거, 머리로 한 거 아니야. 손이 먼저 움직였어. 십오 년 전처럼."

미르가 다가왔다.

네 다리로. 철컥, 철컥. 무너진 기체 옆에 서서, 낡은 렌즈로 그 꺼진 흰빛을 봤다.

"…마지막에 별 봤네." 미르가 말했다.

"응." 한결이 말했다.

"지운 놈들은 다 눈빛이 같은데." 미르가 말했다. "저건 마지막에 좀 달라졌어. 별 보고. 뭐가 잠깐 찼어. 텅 빈 자리에."

미르는 오래 그걸 봤다.

"…지운 걸 후회하면서 죽었어." 미르가 말했다. "그게 제일 안 좋은 죽음이야. 기계한테는."

한결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가자." 미르가 말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안 좋아. 노래가 자꾸 파고들어."

한결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사각, 하고.

경사로 위쪽을 봤다. 아직 멀었다. 최상층은 보이지도 않았다. 벽은 계속 울었다.

"온." 한결이 걸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응." 온이 말했다.

"진짜?"

"…아파." 온이 말했다. "근데 괜찮아. 아까 말한 거, 진심이야. 아픈 채로 갈게. 그거 붙잡고 가면 돼."

한결은 걸음을 옮겼다. 위로. 벽이 우는 탑 안으로.

아픈 채로 간다.

아픔으로 십오 년을 산 남자가, 아픈 채로 가겠다는 검을 등에 메고 올랐다.

한결은 그립을 한 번 고쳐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경사로가 계속 위로 굽었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벽의 울음은 층을 올라갈수록 낮아지고 커졌다. 온몸이 그 음정에 젖었다. 한결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손을 짚었다. 숨을 골랐다. 앞에서 미르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중턱쯤에서, 넓은 공간이 나왔다.

경사로가 잠깐 평평해지는 자리였다. 층과 층 사이의 참 같은 곳. 벽의 울음이 여기서는 조금 옅었다. 쉴 만한 자리였다.

"여기서 좀 쉬자." 미르가 말했다. "밤 새우고 위층 가면 죽어."

한결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검을 무릎에 뉘었다.

미르가 구석으로 갔다.

거기, 뭔가가 있었다.

컨테이너였다. 금속 컨테이너 하나가,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아까 올라올 때는 못 봤던 거였다. 아니면, 미르가 미리 갖다 놨거나.

"저거 뭐야." 한결이 물었다.

미르는 대답 안 하고, 컨테이너 옆으로 갔다. 낡은 앞다리로 뚜껑 손잡이를 걸었다. 끙, 하고 힘을 줬다.

뚜껑이 열렸다.

한결은 그 안을 봤다.

사람 형상이었다.

외장, 관절, 손가락 열 개. 사람 형상의 몸 하나가, 컨테이너 안에 누워 있었다.

민수용 기체였다. 무기가 아니었다. 검도 총도 아닌, 사람 크기의 의체.

한결은 벌떡 일어났다.

"이거—" 한결이 말했다. "이거 뭐야, 미르."

"몸이지." 미르가 말했다.

"누구—"

"밤새 채윤이 조립했어." 미르가 말했다. "너 옥상에서 내려온 뒤에. 정비고에서. 밤새."

한결의 숨이 멎었다.

"채윤이가." 한결이 말했다. "이걸. 밤새."

"어." 미르가 말했다. "내가 부품 물어다 줬어. 채윤이가 만들었어. 손 하나 안 쉬고. 밤새."

한결은 그 의체를 봤다. 매끈한 손등을. 손가락 열 개를. 사람의 손이었다.

"이거 누구 몸이야." 한결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묻지 마라." 미르가 말했다.

"미르."

"묻지 말고." 미르가 말했다. "받아. 하룻밤짜리야."

"하룻밤짜리?"

"여덟 시간." 미르가 말했다. "가동 예상 수명 여덟 시간. 그 이상은 못 버텨. 임시 의체야."

한결은 그 몸을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뭔가 알 것 같은데, 알고 싶지 않았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밤새 만들었다고.

"온." 한결이 낮게 불렀다. "너 알아? 이거?"

온은 대답을 안 했다.

검이, 등에서, 아주 가늘게 떨렸다. 흰빛으로.

미르가 컨테이너를 한결 쪽으로 밀었다.

무거운 소리가 났다. 금속 바닥을 긁으면서.

"관절 안쪽 봐." 미르가 말했다.

"뭐?"

"의체 관절 안쪽." 미르가 말했다. "손목. 그 안쪽에 뭐 있어. 봐."

한결은 몸을 숙였다. 의체의 손목을 들었다. 관절 안쪽을 봤다.

거기,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못으로 새긴 것 같은. 삐뚤빼뚤한. 숫자였다.

한결은 그 숫자를 알았다.

채윤의 인식표에 있던 번호.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 온의 검 안쪽에도 있던, 그 번호.

같은 번호였다.

"이거." 한결이 말했다. "채윤이 아버지 번호잖아."

"어." 미르가 말했다.

"이거 검에도 있었잖아. 십오 년 전에 아버지가 새긴 거."

"어." 미르가 말했다. "그건 아버지가 새긴 거고."

미르가 낡은 렌즈로 그 번호를 봤다.

"이건," 미르가 말했다. "채윤이가 새겼어. 처음으로. 제 손으로. 밤새."

한결은 그 번호를 오래 봤다.

십오 년 전, 채윤의 아버지가 검 그립 안쪽에 새겼던 번호. 아이를 살리고, 검을 만들고, 발각되어 죽은 사람의 번호.

그 번호를, 이번엔 딸이 새겼다.

제 손으로. 밤새. 여덟 시간짜리 몸의 관절 안쪽에. 안 보이는 데에.

한결은 채윤을 생각했다. 방금 옥상에서 십오 년 걸린 문장을 끝낸 채윤을. 등을 돌려 새벽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 채윤을. 그러고 정비고로 내려가서, 밤새 이걸 만든 채윤을.

아빠가 시작한 문장은, 내가 끝낸다.

한결은 그 말을 못 들었다. 그런데, 이 번호가 그 말이었다.

"미르."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겼다.

"어."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나한테 하지 마." 미르가 말했다.

한결은 미르를 봤다.

"하룻밤짜리야." 미르가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채윤한테 해라."

한결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컨테이너 안의 몸을 봤다. 여덟 시간짜리 몸을. 손가락 열 개를. 별이 없는 매끈한 손등을. 관절 안쪽에 숨은, 채윤이 새긴 번호를.

등에서 검이 떨렸다.

한결은 검을 내렸다. 무릎에서. 그립을 봤다. 별을. 방금 그 시체가 마지막으로 봤던 별을.

"온." 한결이 말했다. "너, 이거…"

온은 대답을 안 했다.

한참을.

검신에서, 흰빛이 아주 낮게 번졌다. 대답 대신.

한결은 그 빛을 봤다. 손등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검이, 사람의 체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명음, 이제 끊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