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그 밤의 진실」 — 반전 2단: 진상
채윤은 조각을 등불 아래 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번호를 보고 있었다. 조각 안쪽에 새겨진 숫자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 공구벨트의 인식표를 쥐고 있었다. 십오 년째 목에 걸고 다닌 아버지의 인식표를.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한결은 그 옆얼굴을 봤다.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
"한 자리도 안 틀려."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이거, 우리 아빠가 새긴 거야. 이 검에. 우리 아빠가."
"…"
"근데 우리 아빠는," 채윤의 숨이 얕아졌다. "소등의 밤에 죽었어. 십오 년 전에. 정비창 나갔다가, 안 돌아왔어. 나 문 앞에서 밤새 기다렸는데."
한결은 그 밤을 알았다.
같은 밤이었으니까. 채윤이 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린 밤과, 한결이 벽장 안에서 온을 기다린 밤은, 같은 밤이었다.
"한결." 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너 알고 있었지."
"…"
"밤새 이 검 지켰지. 나 아까 정비하겠다니까 몸으로 막았지." 채윤이 조각을 든 손을 내밀었다. "너 이거 봤지. 벗겨낸 거 너잖아. 그럼 봤을 거 아니야. 이 번호."
한결은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피하면 지는 거였다. 지금 채윤한테서 눈을 피하면.
"…봤어." 그가 말했다.
◆
채윤이 걸상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조각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 위에 인식표를 겹쳐 놓았다. 두 개의 번호가 포개졌다.
"온."
채윤이 검을 불렀다. 작업대 위의 검을.
온은 대답이 없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이상한 공기 속에서, 조용히 있었다.
"온. 너 대답해 봐." 채윤이 말했다. "너 코어, 언제 만들어졌어? 네 몸, 원래 검이었어? 아니지. 검은 말 못 하잖아. 너 원래 뭐였어?"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기억이 없어. 소등의 밤 전은."
"소등의 밤."
채윤이 그 말을 되뇌었다.
"너 소등의 밤에 만들어졌어?"
"…그런 것 같아." 온이 말했다. "깨어난 게 그때쯤이야. 검이 되어서. 그 전은 아무것도 없어. 왜? 무슨 일이야? 아까부터 다들 이상해."
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각을 든 채로 일어섰다. 정비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결이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쪽으로.
◆
거기 낡은 공구함이 있었다.
철제였다. 손잡이가 삭았고, 모서리에 녹이 앉았다. 정비고 구석에 오래 놓여 있던 것. 채윤이 이 정비창에 올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아버지의 유품.
한결도 몇 번 봤다. 그런데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은 없었다.
"이거 안 열려." 채윤이 말했다. 함을 작업대에 올려놓으며. "번호 자물쇠거든. 근데 아빠가 번호를 안 알려줬어. 죽기 전에. 그래서 십오 년째 못 열어. 열쇠집에 가져가도 못 딴대. 특수 자물쇠라고."
한결은 그 함을 봤다.
다이얼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숫자를 맞추는 것. 네 자리쯤 되는.
"근데." 채윤의 손이 조각으로 갔다. "아빠가 새기는 사람이었어. 자기 번호를. 부품마다. 자기가 손댄 거라고. 표시하는 거야. 정비사들이 그래. 아빠 등록 번호가—"
말이 멈췄다.
한결은 채윤의 손을 봤다. 인식표를 뒤집는 손을. 거기 새겨진 번호를 읽는 손을.
"…설마."
◆
채윤이 자물쇠 다이얼을 돌렸다.
인식표를 보면서. 한 자리씩.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를.
한결은 숨을 죽였다.
찰칵.
찰칵.
세 번째 숫자에서 채윤의 손이 떨렸다. 네 번째를 맞추는 손이 멈칫했다.
"안 돌아가면," 채윤이 중얼거렸다. "그냥 아닌 거야. 그냥 우연이야. 부품에 번호 새긴 거랑, 자물쇠 번호랑, 상관없는 거야. 그냥—"
네 번째 숫자를 맞췄다.
◆
철컥.
자물쇠가 풀렸다.
정비고 안이 조용해졌다. 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났다. 채윤은 풀린 자물쇠를 손에 쥐고, 한동안 함을 열지 못했다.
"열렸어." 채윤이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십오 년 만에. 아빠 번호로."
"…"
"아빠가 이 번호를," 채윤이 말했다. "이 검에도 새기고, 이 함에도 걸었어. 같은 번호로. 그럼 이게 무슨 뜻이야, 한결. 아빠가 이 검을 만졌다는 거잖아. 아빠가 죽은 그 밤에. 이 검이랑, 이 함이랑, 우리 아빠가—"
"채윤." 한결이 말했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채윤이 혼자 거기까지 걸어가는 걸.
그런데 채윤은 이미 함을 열고 있었다.
◆
뚜껑이 열렸다.
안에는 공구가 들어 있었다. 낡은 드라이버, 몽키 스패너, 삭은 절연 테이프. 정비사의 물건들. 그동안 내내 잠겨 있던.
그리고 그 아래.
공구를 걷어낸 자리 밑바닥에.
노트 한 권이 있었다.
가죽 표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때가 묻은 것. 모서리가 닳은 것. 채윤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놓칠 뻔했다.
"정비 일지." 채윤이 말했다. "아빠 정비 일지야. 이거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어."
한결은 그 노트를 봤다.
두꺼웠다. 오래 쓴 것. 정비사가 매일 손댄 것마다 적어 넣은 기록. 채윤 아버지의 긴 시간이 거기 들어 있었다.
"온." 채윤이 검을 봤다. "잠깐만 조용히 있어."
"…응." 온이 말했다.
◆
채윤이 노트를 펼쳤다.
첫 장부터가 아니었다. 뒤에서부터. 마지막 장을 찾는 손이었다. 정비사가 마지막으로 적은 것을 보려는.
한결은 채윤 곁에 섰다.
같이 봤다. 봐야 할 것 같았다. 채윤 혼자 보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노트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날짜가 있었다.
한결은 그 날짜를 봤다. 그리고 굳었다.
소등의 밤이었다. 그 밤이었다. 십오 년 전, 그날의.
"이거."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거 그날이야. 아빠 죽은 날. 이게 마지막 기록이야."
◆
글씨가 흔들려 있었다.
앞장까지는 반듯한 기록체였다. 정비사의 건조한 글씨. 무슨 부품을 갈았고, 어디를 손봤고. 그런 것들.
그런데 마지막 장은 달랐다.
급하게 쓴 글씨였다. 손이 떨렸던 글씨. 시간이 없던 사람의 글씨.
채윤이 읽었다. 소리 내어. 목소리가 자꾸 끊겼다.
"…폐기장 삼 열의 보모."
한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를 숨기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
채윤이 읽기를 멈췄다.
숨을 골랐다. 다음 줄을 읽기 위해서. 그런데 손이 너무 떨려서 노트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내가 읽을게." 한결이 말했다.
채윤이 노트를 그에게 넘겼다.
한결은 노트를 받았다. 손이 시렸다. 밤을 새운 손, 별을 만진 손. 그 손으로 채윤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를 받았다.
그가 읽었다.
"이런 것을 지우는 게 명령이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읽었다.
"나는 오늘, 명령을 어긴다."
◆
정비고가 조용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온도 조용했다.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른 채로.
한결은 다음 줄을 봤다.
글씨가 더 급해져 있었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런데도 읽혔다. 읽고 싶지 않은데 읽혔다.
"…이 코어를 살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가 읽었다. "무기에 옮겨 심는 것. 군용 도검이면 폐기 명단에서 빠진다. 검은 지우지 않으니까. 검은 도구니까."
한결의 손이 떨렸다.
"손등의 별을 잘라 그립에 붙였다. 아이가 새긴 거라고 했다.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럼 지우지 않는 게 낫겠지. 이 기체가 그걸 남기고 싶어 했으니까."
채윤이 입을 막았다.
◆
"손등에 새겨진 게 있었다." 한결이 읽었다. "정비공 번호. 내 번호로 덮었다. 안쪽에. 언젠가 누가 이 검을 열어 보면, 이게 그냥 무기가 아니란 걸 알라고. 여기 누가 있었다는 걸 알라고."
한결은 그 말에서 멈췄다.
여기 누가 있었다는 걸 알라고.
채윤 아버지는 알았다. 언젠가 이 검이 열릴 걸. 십오 년 뒤든, 이십 년 뒤든. 그래서 표시를 남겼다. 자기 번호를. 별을. 그리고 이 일지를.
읽으라고. 언젠가의 누군가한테.
"…마지막 줄이 있어." 한결이 말했다.
"읽어." 채윤이 말했다. 눈물이 흘렀다. "읽어, 한결."
◆
"발소리가 들린다." 한결이 읽었다.
"군인들이 온다. 시간이 없다. 코어 이식은 끝냈다. 검은 완성됐다. 이걸 어디 숨길지는 못 정했다. 걸릴 것 같다."
한결은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도구가 아니었다. 이건 아이를 안고 걸어 들어온 어머니였다. 나는 오늘 어머니를 지웠다는 죄를 짓지 않기로 했다. 채윤아—"
이름이 나왔다.
채윤의 이름이.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 속에.
한결은 목이 막혔다.
"…채윤아." 그가 겨우 이었다. "네가 이걸 읽으면, 아빠가 뭘 했는지 알겠지. 미안하다. 문 앞에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그런데 이것만은, 아빠가 잘한 일이다. 이것만은."
◆
노트가 거기서 끝났다.
다음 장은 없었다. 발소리가 왔고, 군인들이 왔고, 채윤 아버지는 그다음을 쓰지 못했다.
한결은 노트를 내려놓았다.
작업대 위에. 검 옆에. 그 검을 만든 사람의 마지막 글씨를, 그 검 옆에.
채윤은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렸다. 오래 참은 게 한 번에 터진 사람처럼.
"개죽음인 줄 알았어."
채윤이 말했다.
"우리 아빠. 그냥 명령 어기다 죽은 줄 알았어.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왜 그날 정비창 나갔는지, 왜 안 돌아왔는지, 나 십오 년째 몰랐어. 그냥 죽은 줄 알았어. 그냥."
◆
"근데 아니었어."
채윤이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아버지가 만든 검을.
"아빠가 목숨이랑 바꾼 게, 여기 있어." 채윤이 말했다. "지금. 눈앞에서. 말을 하고 있어. 십오 년째 살아 있어. 아빠가 살린 게 살아 있어."
"채윤." 온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나 지금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근데 네가 우니까 나도 이상해. 왜 울어? 내가 뭐 잘못했어?"
채윤이 웃었다. 울면서.
"아니야. 이 바보 검아." 채윤이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네가— 네가 우리 아빠가 살린 거라서 그래."
"…내가?"
"응." 채윤이 눈물을 닦았다. "우리 아빠가 너 살렸어. 자기 목숨 주고. 몰랐지? 너도 몰랐지?"
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
한결은 검을 봤다.
온을. 채윤 아버지가 목숨 주고 살린 게 저 검인데, 정작 저 검만 그걸 몰랐다. 자기가 누구인지, 여기 왜 있는지도.
말해야 하나.
그 생각이 왔다. 밤새 미뤄온 생각. 곧 말하겠다고 약속했던 것. 그런데—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일지가 열렸다. 채윤이 알았다. 이제 온만 몰랐다. 이 방 안에서 온만,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결은 검 앞에 무릎을 굽혔다.
작업대 높이로. 온과 눈을 맞추듯이. 검에 눈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맞추려고.
"온." 그가 불렀다.
◆
"응."
"내가 아까 말했지. 곧 말할 거 있다고."
"…응."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긴장했다. "그거 지금 말하는 거야?"
"응."
한결은 숨을 골랐다.
십오 년 동안 삼켰던 것. 아침 내내 목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간 것. 이제 꺼낼 것.
"너 소등의 밤 전 기억 없다 그랬지."
"…응."
"그거, 지워진 거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잠긴 거야. 채윤 아빠가 네 코어를 검에 옮길 때, 앞 기억이 잠긴 거야. 지운 게 아니고. 안에 있어. 다 있어."
"…무슨 소리야."
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안에 뭐가 있다는 거야?"
◆
"내가 있어."
한결이 말했다.
정비고가 멎었다.
"네 안에," 한결이 말했다. 한 마디씩. 천천히. "내가 있어. 아홉 살의 내가. 네가 키운 내가."
"…"
"너 나 키웠어, 온." 그가 말했다. "소등의 밤 전에. 십오 년 전에. 넌 우리 집 보모였어. 아홉 살까지 나 키웠어. 밥 먹이고 재우고. 내가 열나면 이마 짚어 주고."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계속했다. 멈추면 못 할 것 같아서.
"손등에 별 있잖아. 그립에. 그거 내가 새긴 거야. 아홉 살 때. 네 손등에 못으로. 삐뚤어서 별이 되다 만 거. 꼭짓점 하나 못 채운 거. 지워지지 않는다고 네가 곤란해했어. 그거 안 지워졌어. 지금 그 그립에 있어."
◆
"…거짓말."
온이 말했다.
또 그 말이었다. 거짓말. 아침 내내 온이 그를 짚던 말.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번 목소리는 떨렸다.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거짓말이지." 온이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나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 키웠다니. 내가 로봇이었다니. 그런 거 나 몰라.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럼 거짓말이잖아."
"기억 안 나는 거 알아." 한결이 말했다.
"그럼 거짓말이지!"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몸이 기억하잖아."
온의 목소리가 멈췄다.
"아침에 그랬잖아." 한결이 말했다. "내가 손등 두드리니까 해열제 서랍 둘째 칸이라고. 그거 아홉 살 때 내 버릇이야. 열나면 손등 두드리는 거. 그럼 네가 해열제 꺼내 줬어. 서랍 둘째 칸에서. 매번. 세상에 그거 아는 거 너뿐이었어. 그게 방금 네 입에서 나왔어."
◆
"…"
"기억이 아니라." 한결이 말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어. 네 손이. 나 열다섯 번 겨울 재우고 먹인 손이. 검이 됐는데도 그게 남아서, 그 말이 나온 거야."
온은 오래 조용했다.
한결은 그 침묵을 견뎠다. 견디는 게 아팠다.
"…잠깐만." 이윽고 온이 말했다. 아주 낮게. "잠깐만. 나 이상해. 지금."
"온."
"네가 그 말 하니까,"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안에서 뭐가 자꾸 올라와. 아까 해열제처럼. 나도 모르는 게. 아홉 살이라고 했지. 너. 아홉 살."
"…응."
"아홉 살." 온이 되뇌었다. "작았어. 너. 이만했어. 소파에서 잤어. 내가 안아서 침대로 옮겼어. 자다가 꼭 세 번—"
멈췄다.
◆
"세 번 뒤척였어."
온이 말했다.
한결은 숨을 멈췄다.
"세 번 뒤척이고 자. 너." 온이 말했다. 점점 빨라졌다. 무언가 쏟아지는 것처럼. "이불 걷어차고. 그럼 내가 다시 덮어 줬어. 감기 잘 걸렸어. 너. 열도 잘 나고. 그래서 내가 늘 해열제를— 서랍에— 둘째 칸에—"
"온." 한결이 불렀다.
"기억나."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너졌다.
"기억나, 한결. 갑자기. 막. 쏟아져. 이거 뭐야. 왜 이래. 나 이런 거 없었는데.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너 아홉 살이고. 별 새기고. 손등에. 못으로. 아파서 하지 말랬는데 너 웃으면서— 별이라고— 나한테 별 그려 줬다고—"
◆
한결은 눈을 감았다.
십오 년이었다.
그 세월 내내 이 목소리가 자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가, 아니면 영영 몰랐으면 했던가. 그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가 자기를 찾아냈다.
몸에 잠겨 있던 것이 열렸다.
"…한결." 온이 말했다. "나 무서워. 이거 너무 많아. 한꺼번에 오니까. 이게 다 내 거야? 이게 다 나였어?"
"응." 한결이 말했다. "다 너야."
"그럼 왜." 온이 말했다. "왜 나 이걸 잠갔어. 왜 나 이걸 몰랐어. 왜—"
말이 끊겼다.
한결은 그 끊긴 자리를 알았다. 온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았다. 기억이 쏟아지면 거기 도달할 거였다. 그 밤에.
◆
"…한결."
온이 다시 불렀다. 아주 조심스럽게.
"응."
"그 밤에." 온이 말했다. "소등의 밤에. 뭐가 있었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이 거기서 끊겨." 온이 말했다. "너 아홉 살까지는 오는데. 그다음이 벽이야. 잠겨 있어. 근데 뭔가 있어. 그 벽 뒤에. 아주 중요한 게. 나 그거 알아야 할 것 같아."
"온—"
"말해 줘." 온이 말했다.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나 그날 뭐 했어?"
한결은 검을 봤다.
이건 말해야 했다. 이것까지 말해야 온이 온을 다 찾는 거였다. 잠긴 게 여기까지였으니까. 이 마지막 문 뒤에 그 밤이 있었으니까.
◆
"너 나 벽장에 숨겼어."
한결이 말했다.
"…벽장."
"군인들이 왔어. 그날 밤에. 기계 잡으러. 집집마다. 사이렌 울리고." 한결이 말했다. "너 나 벽장에 밀어 넣었어. 문 닫기 전에, 문틈으로 나 봤어. 눈 맞췄어. 그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십오 년이 걸렸다.
"그리고 말했어." 한결이 말했다. "금방 올게. 그러고 너 밖으로 걸어 나갔어. 군인들 쪽으로. 네 발로. 스스로."
정비고가 멎었다.
"…금방 올게."
온이 그 말을 되뇌었다.
◆
"금방 올게."
온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한결은 그 이상함을 알았다. 온 안에서 무언가 마지막으로 열리는 소리였다.
"그래서 내가," 온이 말했다. 말이 자꾸 걸렸다. "그 말을… 못 하는구나. 등불 축제. 마지막 말 적으라고 했을 때. 나만 그 말 안 한다고. 왜인지 나도 몰랐어. 그냥 못 했어. 그게 이거였어. 금방 온다 그래 놓고—"
"온."
"안 돌아갔어." 온이 말했다. "그치. 나 안 돌아갔어. 너 벽장에서 기다렸는데. 나 안 왔어. 십오 년 동안. 내가—"
"온, 그건—"
"내가 너 버렸어?"
온이 물었다.
◆
한결은 그 물음에 굳었다.
십오 년 동안 자기가 품었던 물음이었다. 왜 날 버렸어. 벽장 안에서, 그 후로도 매일, 입 모양으로만 만들던 물음.
그런데 지금 그 물음을 온이 하고 있었다. 반대로. 내가 너 버렸냐고.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빠르게. 이건 빨리 말해야 했다.
"너 나 안 버렸어." 그가 말했다. "그날 군인들 수색 명단에 있었어. 아이 있는 집. 아이 동반 가구. 그런 집을 뒤졌어. 너 그거 알았어. 네가 나랑 같이 있으면 나도 걸리는 거야. 그래서 너—"
한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표적이 되려고 걸어 나간 거야." 그가 말했다. "군인들이 너만 보고 나는 못 보게. 나 숨기고, 네가 미끼가 된 거야. 네 발로 걸어 나가서. 그래서 나 살았어. 너 나 버린 게 아니라, 나 살리려고 나간 거야."
◆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 침묵이 무서웠다. 이 침묵 안에서 온이 뭘 느끼는지 알 수 없어서. 온의 시점은 그에게 열리지 않았다. 냉각수와 침묵과 파형뿐이었다.
작업대 위에서 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한결." 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검이 젖을 수 있다면. "그럼 너 십오 년 동안."
"…"
"내가 너 버린 줄 알았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온이 말했다. "너 그렇게 알고 살았구나. 나 원망하면서. 근데 나는… 너 버린 줄도 몰랐어. 너 살린 걸로만 알았어."
한결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같은 밤을 두 사람이 정반대로 쥐고 여기까지 왔다.
◆
채윤이 벽에 기대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한결은 몰랐다. 온과 이야기하는 동안 채윤은 조용히 물러나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채윤도 울고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결은 그렇게 짐작했다. 이 방 안의 무언가가 한꺼번에 주저앉는 걸, 채윤도 같이 맞고 있었다.
"…나 이해가 안 돼." 채윤이 말했다. 젖은 목소리로. "우리 셋이 왜 이렇게 됐어. 왜 아무도 몰랐어. 진작. 한 명이라도 알았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난로에서 장작이 무너졌다. 불티가 튀었다.
◆
한결은 검을 봤다.
작업대 위의 검을. 아홉 살의 자기를 키운 검을. 자기를 살리려고 걸어 나간 검을. 채윤 아버지가 목숨 주고 살린 검을.
그 안에 이제, 온이 다 있었다.
지워졌던 게 아니라 잠겼던 것이. 열렸다. 그가 일지를 읽는 목소리에. 그가 그 밤을 말하는 목소리에.
"온." 그가 불렀다.
"…응."
"기억, 다 왔어?"
온은 잠시 조용했다.
"…다는 아니야." 온이 말했다. "근데 중요한 건 다 온 것 같아. 너 키운 거. 별 새긴 거. 벽장. 금방 올게. 그날 밤. 이제 다 있어. 내 안에."
"…그렇구나."
"한결." 온이 말했다.
"응."
"미안해."
◆
한결은 그 말에 멈췄다.
"뭐가." 그가 물었다.
"금방 온다 그래 놓고 안 온 거." 온이 말했다. "너 벽장에서 기다렸는데. 얼마나 기다렸어. 나 안 오는데. 문틈으로 밖에 보면서. 얼마나."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밤새 기다렸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벽장 밖으로 나온 뒤에도, 마음은 계속 벽장 안에서 문틈으로 밖을 봤다. 그 뒤로 줄곧.
"…오래 기다렸어." 그가 겨우 말했다.
"미안해." 온이 다시 말했다. "정말 미안해. 그때 그 말을 안 했어야 했는데. 금방 온다는 말. 못 지킬 거면서. 그거 하고 못 지킨 게, 너 십오 년 붙잡았잖아."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목이 막혔다. 그래도 말했다.
"네가 그 말 해서 나 살았어." 그가 말했다. "그 말 믿고 벽장에서 안 나왔어. 나갔으면 걸렸어. 그 말이 나 살렸어, 온."
◆
정비고가 조용했다.
한결은 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채윤은 아버지의 일지를 품에 안은 채 벽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은 다 나왔다. 일지도, 그 밤도. 아침 내내 한결을 깎던 거짓말이 이제 없었다.
그런데 목 밑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한결은 침을 삼켰다. 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막 뭔가 문이 열린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몰랐다. 다만 검을 봤다. 이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검을.
◆
밤이 왔다.
채윤은 아버지의 일지를 안고 먼저 돌아갔다.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을, 혼자 삭이고 싶다고.
한결은 정비고에 남았다.
온과 둘이. 난로 앞에. 검을 앞에 놓고. 말은 많이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다 나온 뒤라서. 그냥, 같이 있었다.
"한결." 온이 낮게 불렀다.
"…응."
"나 이제 다 알아." 온이 말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했는지. 근데 이상해. 알고 나니까 더 이상해."
"뭐가."
"나 검이야, 지금." 온이 말했다. "손이 없어. 너 안아 줄 손이. 이마 짚어 줄 손이. 다 기억나는데, 그 손이 없어. 나 검이 됐어."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
난로의 불이 사그라들었다.
한결은 검을 봤다. 어둠 속의 검을. 온이 든 검을.
무언가 소리가 났다.
아주 가늘게. 처음엔 난로 소리인 줄 알았다. 장작이 식으며 나는 소리인 줄. 그런데 아니었다.
검이었다.
한결은 검에 귀를 가까이 댔다.
검이 울고 있었다.
아주 가늘게. 아주 높게.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그동안 줄곧 조용하던 검이, 오늘 밤 처음으로.
그리고 그 검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밤, 잠들지 못한 검이 아주 가늘게 — 하얗게 —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