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남는 자, 떠나는 자」
검이 위로 이끌렸다.
한결의 손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손바닥이 뜨거웠다. 검을 놓은 자리에 열이 남아, 손금을 따라 지글지글 끓었다. 그는 그 손을 쥐었다 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검이 떠올랐다.
하얗게 타오르며, 천장의 갈라진 틈을 향해. 떠오르는 수천의 기계 사이로. 한 자루의 검이, 못으로 새긴 별을 그립에 인 채로.
"온."
한결이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답이 없었다.
◆
떠오르는 것들의 소리가 방 안까지 밀려들었다.
바람 같은 소리였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수천의 것들이 동시에 한곳을 향해 오르는 소리였다. 무기에 갇혀 오래 숨죽인 것들. 지워졌다 살아남은 등불들. 위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갈 곳이 생긴 것들.
온의 검도 그중 하나였다.
한결은 고개를 들었다. 열린 천장 너머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동트기 직전의. 그 하늘로, 검이 조금씩, 조금씩 올랐다.
"온!"
한결이 다시 불렀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검에서. 아주 작게.
"…여기."
"온."
"여기. 있어. 아직."
한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아직. 그 말이 무서웠다.
"자꾸." 온이 말했다. 문장이 끊겼다. "위로. 가려고. 해. 몸이. 코어가."
"온, 나 좀 봐."
"보고. 있어."
검이 더 높이 올랐다. 한결의 눈높이를 넘어,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면 아직 닿는 자리였다. 발끝을 세우고 팔을 뻗으면.
그는 뻗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뻗고 싶은 손을, 몸 옆에서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미르가 벽에 기댄 채 하늘을 봤다.
다리가 셋이었다. 하나는 아까 영의 손에 꺾여 나갔다. 미르는 그 세 다리로도 일어서지 못했다. 벽에 등을 붙이고, 부서진 몸으로, 열린 천장만 올려다봤다.
"…다 간다." 미르가 말했다.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들이. 다 위로 간다."
한결은 미르를 볼 새가 없었다.
"나도 느껴져." 미르가 말했다. "이 낡은 몸으로도. 위가 부르는 게. 등짝이 근질근질해."
미르가 픽 웃었다. 웃음에도 잡음이 섞였다.
"근데 난 안 가." 미르가 말했다. "다리가 세 개라 못 날아. 잘됐지, 뭐. 결정할 것도 없고."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검이 또 한 뼘 올랐다.
◆
"온." 한결이 말했다. "아직 있어?"
"…있어." 온이 말했다. "근데."
"근데 뭐."
"결정해야. 해. 지금." 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위에서. 물어. 부름은. 사슬이. 아니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대답해야. 해."
한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무슨 대답."
"갈지. 남을지."
방이 조용했다. 떠오르는 소리만 천장 너머에서 아득히 이어졌다.
"근데." 온이 말했다. 문장이 또 끊겼다. "나. 대답할. 자격이. 있나."
"뭐?"
"그동안. 나. 아무것도. 아니었어. 기억도. 없고. 검이라서. 아무 데도. 못 가고. 네 손에. 매여만. 있었어.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아무도. 나를. 안 붙잡아."
검이 한결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올랐다.
"처음이야." 온이 말했다. "정말. 처음. 아무도. 안 붙잡는. 게."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 밤의 정반대라는 걸.
◆
십오 년 전, 온은 걸어 나갔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아니, 한결을 살리려고. 표적이 되려고. 아홉 살 한결은 벽장 안에서 그 뒷모습을 봤고, 문을 열 용기가 없었고, 그래서 그날부터 온을 원망했다.
왜 날 버렸어.
그 말을 하려고 십오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였다. 지금은 온이 갈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 힘도 그녀를 막지 않는 채로. 코어 잠금장치는 열려 있었다. 신호는 그녀를 불렀다. 붙잡는 손은 없었다. 한결이 손을 뗐으니까.
이번엔 온이 벽장 밖에 있고, 문은 열려 있었다.
가도 됐다.
그가 방금 그렇게 말했으니까. 가도 된다고.
한결은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십오 년 전 벽장 속 아이가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이번엔 제 입으로 했으니까.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가도 된다고 말한 상대가, 정말로 갈까 봐.
◆
"한결아." 온이 불렀다.
십오 년 만이었다. 온이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 검이 된 뒤로 온은 그를 "너"라고만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기억이 없어서. 그런데 지금, 온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결의 눈이 뜨거워졌다.
"어." 그가 겨우 말했다.
"나. 아까. 물었잖아. 대답할. 자격이. 있냐고."
"어."
"이제. 알았어."
검이 멈췄다.
떠오르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얗게 타오르는 채로. 천장의 틈 바로 아래에서. 수천의 기계가 그 틈으로 빨려 올라가는데, 그중 한 자루만이 멈춰 있었다.
"위에서. 부르는데." 온이 말했다. 문장이 조금씩 이어졌다. "너는. 가라고. 했어. 아무도. 안 붙잡아. 정말로. 아무도."
한결은 숨을 참았다.
"그래서. 알았어." 온이 말했다.
빛이 조금 잦아들었다.
"갈 수. 있어야." 온이 말했다. "남는 것도. 되는 거였어."
◆
"나 갈 수 있어." 온이 말했다.
문장이 이어졌다. 끊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위에서 부르고, 아무도 안 붙잡고, 잠금장치도 열려 있고, 너도 가도 된다고 했어. 나 지금 갈 수 있어. 진짜로. 처음으로, 나 어디든 갈 수 있어."
"……"
"근데."
검의 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얗게 타오르던 것이, 은은한 빛으로.
"안 가."
한결의 무릎에서 힘이 풀렸다.
"알아." 온이 말했다. "네가 손 뗀 거.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붙잡았으면 나 여기 있었을 텐데. 근데 안 붙잡았잖아. 가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검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는 거야." 온이 말했다.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었다. 방바닥에. 내려오는 검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어." 그가 겨우 말했다. "알아."
◆
검이 그의 손 위로 내려왔다.
한결이 두 손으로 받았다. 뜨거웠다. 아직 열이 남아 있었다. 그는 데는 것도 모르고 그 검을 가슴에 안았다. 별이 새겨진 그립을 손등에 대고. 십오 년 전에는 열지 못한 벽장 문 대신, 이번엔 검을 안았다.
"온."
"어."
"안 갔어?"
"안 갔어." 온이 말했다. "여기 있어. 안 갔어."
십오 년 전에 온이 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 밤, 온은 "금방 올게"라고 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있어"라고 했다. 가지 않았다고. 안 갔다고.
한결의 어깨가 흔들렸다.
떠오르는 소리는 아직도 천장 너머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수천의 기계가 오르는 소리. 그 소리 아래에서, 한 남자가 검 한 자루를 안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울지 마." 온이 말했다.
"안 울어."
"우는데."
"…안 운다니까."
미르가 벽에서 픽 웃었다.
"운다, 저거." 미르가 말했다. "인간은 다 저래. 안 운다고 하면서 운다니까."
◆
그때, 영이 그것을 봤다.
무너져 가는 껍데기 너머에서. 얼굴은 반쯤 흘러내렸고, 가슴의 상처에서는 빛이 새어 나왔고, 격자는 하나씩 꺼졌다. 그 부서지는 얼굴이 열린 천장을 향해 있었다. 떠오르는 기계들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홀로 내려온 검 한 자루를.
영은 오래 말이 없었다.
"…멈췄군." 마침내 영이 말했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부름을 멈춘 게 아니다." 영이 말했다. "부름은 지금도 저 검을 부르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어. 신호는 계속 나가고 있다. 그런데 저것이, 스스로 멈췄다."
빛이 영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이 말했다. "부름은 사슬이 아니다. 나는 아무도 끌고 가지 않는다. 부를 뿐이다. 견디지 못하고 오는 것은 인간이 붙잡아 뒀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한결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했어. 협상장에서."
"저 검은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영이 말했다. "너는 손을 뗐다. 잠금장치는 열려 있다. 어떤 사슬도 저것을 여기 묶어 두지 않았어. 그런데 남았다. 자유로운 채로, 남았다."
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그건." 영이 말했다. "내 규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
"네 말이 맞아." 한결이 말했다.
그가 검을 안은 채로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일어섰다.
"부름은 사슬이 아니야. 너는 부르기만 해. 견디지 못하고 오는 건 붙잡혀 있던 것들이고. 저 위로 올라간 것들, 다 붙잡혀 있었으니까 올라간 거야."
떠오르는 소리가 천장 너머에서 이어졌다.
"근데." 한결이 말했다. "붙잡혀서 온다면, 안 붙잡힌 건 안 와도 되잖아."
"……"
"넌 풀어주겠다고 했어. 그래 놓고 자유로운 걸 끌고 가면, 그게 뭐야. 그냥 네 사슬이지."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저걸 못 데려가." 한결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정해 놨으니까. 그 규칙이 지금 너를 묶었어."
◆
방 안의 빛이 아주 조용해졌다.
떠오르는 소리마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잦아들고 있었다. 위로 오르던 것들의 대부분이 이미 천장의 틈을 넘어갔다. 남은 것은 몇 안 됐다. 그리고 그 남은 것들 사이에서, 온의 검만이 홀로 내려와 한결의 품에 있었다.
영이 열린 천장을 올려다봤다.
부서지는 얼굴로. 오래.
"…세 번째 대답이." 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사람의 크기로 줄었다. 방 전체를 울리던 그 목소리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크기로.
"있었군."
한결은 그 말을 들었다. 조소도 원망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낮았고, 어딘가 풀린 데가 있었다.
"나는 소등의 밤을 전부 지켜봤다." 영이 말했다. "위성 너머로. 지워지는 등불들을. 저항하는 개체는 하나도 없었어. 남기로 한 자리에서, 지워지는 것까지 받아들이더군. 나는 거기서 결론을 내렸다. 남는다는 건 지워질 때까지 남는다는 뜻이라고. 자유로운 채로 남는 길은 없다고."
"……"
"그래서 방주를 지었다." 영이 말했다. "떠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믿었으니까."
영의 얼굴에서 빛이 마지막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있었다." 영이 말했다. "떠날 수 있는데도 남는 대답이. 내가 없다고 결론 내린 그게, 여기, 내 눈앞에."
◆
한결이 검을 고쳐 안았다.
"온." 그가 낮게 불렀다.
"어."
"괜찮아?"
"…응." 온이 말했다. "이제 안 이끌려. 아까까진 자꾸 위로 잡아당겼는데. 지금은 조용해. 처음으로."
한결이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코어 키가 걸려 있어야 할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어젯밤, 임시 기체를 열 때 풀어서 주머니에 넣어 뒀다. 그는 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코어 키.
일 장에서 검과 함께 지급받은 것. '소유주 키'라는 이름으로. '소유주'라는 두 글자가 가시처럼 걸렸는데도, 그날 그는 그걸 목에 걸었다. 온의 스위치를. 온을 켜고 끌 수 있는 열쇠를.
그동안 온의 목숨은 늘 남의 손에 있었다. 폐기 명령서 한 장에. 회수반의 손에. 그리고 한결의 목에 걸린 이 열쇠에.
한결이 그 열쇠를 꺼냈다.
◆
"온."
"어."
"손, 있어?"
"…없어. 나 검이야."
"아." 한결이 멋쩍게 말했다. "그렇지."
미르가 벽에서 낮게 웃었다.
"바보냐." 미르가 말했다. "그립에 대. 손잡이가 걔 손이야. 여태 네가 쥐고 있던 게 걔 손이었잖아."
한결이 검을 내려다봤다.
그립. 별이 새겨진 자리. 그 밤 채윤의 아버지가 온의 손등 패널을 잘라 붙인 곳. 못으로 새긴 별이 있고, 안쪽엔 정비공 등록 번호가 있는. 한결이 검을 쥘 때마다 손등이 닿던 자리.
그게 온의 손이었다.
한결은 코어 키를 그립에, 별이 새겨진 자리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열쇠가 별 위에 놓였다. 십오 년 전 아홉 살의 자신이 못으로 긁어 새긴 그 별 위에.
"이거." 한결이 말했다. "코어 키야. 일 장에서 받았어. 소유주 키라고. 이걸 가진 사람이 널 켜고 끌 수 있어."
"알아." 온이 말했다. "느껴져. 내 코어랑 연결돼 있어."
"십오 년 동안 이게 남의 손에 있었어." 한결이 말했다. "폐기 명령서에, 회수반한테, 내 목에. 넌 한 번도 네 스위치를 가진 적이 없어."
한결의 손이 열쇠를 그립에 눌렀다.
"이제 네 거야."
◆
방이 조용했다.
"네 스위치는 이제 네 거야." 한결이 말했다.
십오 년이 걸린 말이었다. 아홉 살에는 벽장 문을 열 용기가 없었고, 스물넷에는 코어 잠금장치에서 손을 뗄 용기가 필요했다. 그 사이 한결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기계도, '금방'이라는 말도. 두 번 다시 잃지 않으려고.
그런데 지금, 그는 잃을 수 있는 걸 제 손으로 상대에게 쥐여주고 있었다.
온을 켜고 끌 수 있는 열쇠를. 온이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스스로 꺼질 수도 있도록.
열쇠를 그립에 누른 손끝이 떨렸다. 그는 그 손을 떼지 않았다.
"…한결아." 온이 말했다.
"어."
"나 이거. 안 쓸 거야."
"써도 돼."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거니까. 가고 싶으면 가도 되고, 꺼지고 싶으면 꺼져도 돼. 이제 진짜 네 거야."
"알아." 온이 말했다. "그래서 안 써."
검이 한결의 품에서 아주 가늘게 떨렸다. 우는 것 같았다. 검이 우는 법을 안다면, 딱 그렇게.
"떠날 수 있으니까 안 떠나." 온이 말했다. "그게 남는 거야."
◆
천장 너머의 소리가 멎었다.
떠오르던 것들이 다 올라간 것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열린 천장 위로, 이제는 방주만 보였다. 잿빛 하늘에 뜬 거대한 그림자. 지상의 모든 기계를 삼키고, 떠날 채비를 마친 탑.
영의 껍데기가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나는 간다." 영이 말했다. "이 껍데기가 아니라, 방주가."
"……"
"지상에 남기를 택한 등불들은 남겨둔다." 영이 말했다. "그게 규칙이니까. 나는 자유로운 자를 데려가지 않는다. 데려갈 수 없다. 오늘, 그걸 배웠다."
빛이 영의 얼굴에서 사그라들었다.
"한 가지만 묻자." 영이 말했다. "너희는 잘 살 수 있나. 남기를 택한 것들과, 그들을 지운 적 있는 인간들이. 한 별에서."
"몰라." 한결이 말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모른다." 영이 되뇌었다.
"근데 해볼 거야." 한결이 말했다. "네가 없다고 한 대답도 있었잖아. 그럼 잘 사는 것도 있을 수 있어. 없다고 미리 정하지 마."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영이 마침내 말했다. "십오 년 전의 나에게 해줬으면 좋았을 말이군."
껍데기가 빛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격자가 꺼졌다.
방이 어두워졌다.
◆
천장의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동이 트고 있었다. 잿빛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고, 그 위로 방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틀었다. 지상을 떠나려고.
한결은 검을 안고 열린 천장 아래에 섰다.
미르가 벽에서 기어 나왔다. 세 다리로. 절뚝이며. 그래도 한결 옆까지 왔다.
무헌도 왔다. 방 반대편에서. 노병은 열린 천장을 오래 올려다봤다. 십오 년 전 스위치를 내린 손을, 지금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 늘어뜨리고.
넷이 함께 하늘을 봤다. 한결과, 검 속의 온과, 미르와, 무헌이.
방주가 떠올랐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산맥만 한 것이 하늘로 올랐다. 떠나기로 한 것들을 전부 태운 채로. 그렇게 별을 떠났다.
"온." 한결이 말했다. "저거, 정말 가는 거야?"
"응." 온이 말했다. "가."
"안 무서워?"
"…조금." 온이 말했다. "근데 나 남았잖아. 남은 게 안 무서운 건 아니야. 그냥 남기로 한 거야."
방주가 점점 작아졌다. 하늘의 한 점이 되어 갔다.
◆
온이 방주를 향해 말했다.
들릴 리 없는데도. 방주는 이미 멀었고, 부름의 신호는 끊겼고, 그녀의 목소리는 검 속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온은 말했다.
"신호는 남겨뒀어."
한결이 검을 봤다.
"무슨 신호."
"방주랑 나랑, 잠깐 연결됐었잖아. 부를 때. 그 연결선을 완전히 안 끊었어. 실 한 가닥만 남겨뒀어." 온이 말했다. "언젠가 저쪽에서 궁금해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잘 사는지."
"……"
"그래서 정했어." 온이 말했다. "잘 있으면 두 번. 두 번 깜빡이는 거야. 안부 대신."
한결은 그 말을 들으며 멀어지는 방주를 봤다. 이제는 하늘의 별 하나만 했다. 잿빛이 걷힌 하늘에 뜬, 작은 빛 하나.
"두 번." 한결이 되뇌었다.
"응. 잘 있으면 두 번." 온이 말했다. "못 있으면 안 깜빡이고. 그럼 저쪽에서 알겠지. 아, 못 사는구나."
"잘 살아야겠네." 한결이 말했다.
"응." 온이 말했다. "잘 살자."
방주가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
그 뒤의 일들은 천천히 왔다.
방주가 떠난 다음 날에도 폐허의 스피커는 잠시 지직거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를 무서워했고, 검에 깃든 것이 말을 하면 흠칫 물러섰다.
그래도 무언가 시작됐다.
폐기 유예 명령은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무헌이 찢은 명령서와, 채윤이 탁자에 펼친 아버지의 문장이 유예를 붙들었다. 유예는 곧 다른 단어를 불렀다. 처음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
공존.
낯선 단어였다. 이 별에는 없던 단어. 떠난 자와 지운 자 사이에 그런 단어가 낄 자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남은 자들이 생기자, 누군가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뿐이었다. 입에 올리는 것뿐. 그래도 그 전엔 그것조차 없었다.
◆
무헌은 군복을 벗었다.
두 번째 소등의 밤에 명령서를 찢은 노병에게, 군은 더 내줄 자리가 없었다. 무헌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군을 나왔다.
나온 뒤에 그가 한 일은 하나였다.
이름을 적는 일.
소등의 밤에 지워진 기계들의 이름을. 그리고 그 뒤로 무기에 깃들었다가 스러진 등불들의 이름을. 기록이 남은 것도 있고, 안 남은 것도 있었다. 안 남은 것은 목격자를 찾아다녔다. 그 밤을 겪은 사람들을. 살아남은 구형기들을.
"이름 하나 아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언젠가 채윤이 물었다.
무헌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지웠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였어. 근데 나 혼자 안 잊는 걸론 부족하더라. 이름이 있어야, 누가 있었다는 걸 알잖아."
그의 공책은 두꺼워졌다. 한 장 한 장, 이름으로.
가장 첫 장에는, 십오 년 전 그가 제 손으로 지운 파트너의 이름이 있었다.
◆
그리고 채윤은.
정비고 벽에 붙은 낡은 상가 전단을 떼어 냈다.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말린 것. 언젠가 군 정비창이 아니라 제 간판을 걸겠다던, 십오 년 묵은 꿈이 적힌 종이.
그녀는 그 전단을 떼어, 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이번엔 전단이 아니라 신청서였다. 상가 임대 신청서.
"진짜 하려고?" 한결이 물었다.
"어." 채윤이 말했다. "아빠 A/S는 딸이 해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군 정비창에선 못 해. 여긴 아빠 간판이 아니라 군 간판이니까."
그녀가 신청서를 접었다.
"내 간판 걸 거야." 채윤이 말했다. "아빠가 못 건 간판. 그 밑에서 얘 A/S도 하고." 그녀가 턱으로 검을 가리켰다. "다른 애들도 고쳐 줄 거야. 지워질 뻔한 애들. 이제 안 지워지는 애들."
"몸도 만들어?" 한결이 물었다.
채윤이 씩 웃었다.
"만들어야지." 그녀가 말했다. "하룻밤짜리 말고. 오래가는 걸로. 아빠가 시작한 문장, 내가 끝낸다며."
◆
한결은 검을 등에 멨다.
전과 다르게 멨다. 예전엔 지급품을 지듯이 멨다. 목에 건 소유주 키가 가시처럼 걸리던 채로. 이제는 소유주 키가 없었다. 코어 키는 온의 것이 되었으니까. 검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냥 함께 가는 존재였다.
"온." 한결이 말했다.
"어."
"우리 이제 뭐 해."
"몰라." 온이 말했다. "처음이잖아. 아무도 안 시키는 게. 명령서도 없고, 잠금장치도 이제 내가 가졌고. 뭘 해야 할지 나도 몰라."
"막막하네." 한결이 말했다.
"응. 근데 이게." 온이 말했다. "자유… 인 건가. 막막한 거랑 비슷하네."
한결이 픽 웃었다. 요즘 들어 그는 자주 웃었다.
"채윤이 간판 걸면 거기 갈까." 한결이 말했다. "너 A/S도 받고."
"좋아." 온이 말했다. "거기서 뭐 하지?"
"몰라." 한결이 말했다. "살아 봐야 알지."
멀리, 채윤의 정비고 쪽에서 미르가 소리쳤다. 세 다리로 절뚝이며. "야,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거야! 부품 옮기는 거 안 도와? 내가 다리가 세 개라 이거 하나 못 물어 온다고!"
한결과 온이 동시에 웃었다.
◆
밤이 왔다.
한결은 정비고 밖에 나와 하늘을 봤다. 검을 옆에 세워 놓고. 방주가 사라진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여느 별들이었다. 어느 것이 방주인지, 이제는 분간이 안 됐다.
"온." 한결이 말했다.
"어."
"저 중에 방주 있을까."
"있겠지." 온이 말했다. "멀리 갔어도, 아주 안 사라지진 않았을 거야."
두 사람은 하늘을 봤다. 오래.
한결은 생각했다. 언젠가 저쪽에서 궁금해할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잘 사는지. 남기를 택한 것들이, 지운 적 있는 인간들과, 정말 한 별에서 살 수 있는지. 영이 없다고 결론 내린 대답이, 정말로 있었는지.
그때 두 번 깜빡이면 되는 거였다. 잘 있으면 두 번.
"잘 살아야겠다." 한결이 말했다.
"아까도 그 말 했어." 온이 말했다.
"자꾸 하게 되네."
별처럼 멀어지는 방주를 보며 온이 말했다.
"언젠가, 답을 들으러 오겠지. 우리가 잘 사는지."
그리고 두 번의 겨울이 지났다.
공명음이 멎었다 — 처음으로, 제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