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스위치 위의 손」
방주는 잠에서 깨어나는 데 서두르지 않았다.
지평선의 탑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매일 조금씩, 능선 끝에 얹힌 검은 실루엣이 눈에 익어갔다.
그런데 온이 이상해졌다.
◆
처음엔 사소한 거였다.
"한결아, 물 좀."
"어."
"…뭐 하려고 했지."
한결은 수통을 반쯤 든 채로 멈췄다.
"방금 네가 물 달라며."
"…아. 그랬지."
온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었다. 아니, 반 박자가 아니었다. 한 박자. 검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먼 데서 오는 것 같았다. 낮은 데서, 물속에서.
한결은 수통을 손잡이에 갖다 댔다. 냉각수 흡입구에. 그러라고 온이 시킨 적 있으니까.
"됐어." 온이 말했다. "고마워."
"온."
"응?"
"방금, 몇 초 걸렸어."
"…뭐가."
"대답이."
검이 잠깐 조용했다. 손잡이로 미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냉각수 도는 소리. 아침보다 조금 길어진 것 같았다.
"그랬나." 온이 말했다.
◆
다음 날은 더 길었다.
행군 중이었다. 한결은 검을 등에 메고 걸었고, 미르가 앞장서 4족을 놀렸고, 채윤은 정비 가방을 멘 채 옆에서 따라왔다.
"온, 저 능선 너머 시야 어때." 한결이 물었다. 습관이었다. 검의 감각은 사람보다 멀리 봤으니까.
대답이 없었다.
"온."
"…응."
"시야."
"깨끗해. 적 신호 없음. 반경—"
문장이 뚝 끊겼다.
한결은 걸음을 멈췄다.
"반경 뭐."
"……."
"온. 반경 뭐라고."
"…미안." 온이 말했다. "뭘 말하고 있었는지, 까먹었어."
미르가 4족을 멈추고 돌아봤다. 채윤도 멈췄다.
한결은 등에서 검을 풀었다. 손잡이가 미지근했다. 회의장에서만큼 뜨겁진 않았다. 하지만 미지근한 채로, 계속 떨렸다.
◆
"까먹었다고?"
채윤이 정비 가방을 내려놨다. 능선 그늘 아래, 마른 풀밭 위에. 그러고는 검을 받아 무릎에 뉘었다.
"온, 너 기억 소자 어디 이상 있어? 캐시 넘쳤어?"
"아니." 온이 말했다. "그건 멀쩡해."
"근데 왜 말하다 끊겨."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채윤이 계측기를 꺼냈다. 클립을 손잡이에 물렸다. 계기판에 파형이 떴다.
"딴 데 어디." 채윤이 물었다.
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 침묵을 봤다. 채윤도 봤다. 미르는 4족을 낮추고 검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위쪽." 온이 마침내 말했다. "자꾸 위쪽으로, 뭐가 가."
채윤의 손이 계기판 위에서 멈췄다.
◆
"위쪽으로 뭐가 가."
한결이 되물었다.
"소리." 온이 말했다. "아니, 소리가 아니야. 소리는 아닌데, 소리 같은 거. 계속 나를 불러. 아주 멀리서. 그런데 부르는 게 아니라, 물어봐."
"뭘 물어봐."
"…올 거냐고."
풀밭이 조용해졌다. 바람에 마른 풀이 서걱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거기다 대답을 하려고 하면," 온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꾸 그쪽으로 기울어. 몸이. 말하다가도. 그래서 문장을 놓쳐. 위를 보느라."
미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소환 신호야." 미르가 말했다. "영감—아니, 영이 말한 거. 방주가 깨어나면서 부르는 거. 벌써 시작됐어."
"아직 안 쐈다며." 한결이 말했다. "한 시간 정전, 그 뒤로도 신호 안 쐈다며. 사령부에서 그랬잖아."
"본 신호는 안 쐈지." 미르가 말했다. "근데 방주가 숨 쉬는 소리는 벌써 새어 나오는 거야. 완성 전에도. 저 탑은 매일 조금씩 더 크게 숨을 쉬거든."
◆
한결은 검신을 봤다.
옅은 흰빛이 강철 안쪽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회의장에서 처음 봤던 그 색. 이제 낮에도 보였다. 겨울 볕 아래서도.
"온." 한결이 말했다. "끊으면 되잖아. 그 소리. 안 들으면 되잖아."
"그게 안 돼."
"왜."
"귀를 막을 수가 없어. 그건 내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온이 말했다. "내 안에서 나거든."
한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코어가 부름을 알아들어." 온이 말했다. 천천히. 단어를 하나씩 고르듯. "내 의지랑 상관없이. 내가 아니라, 내 코어가. 그게—"
또 끊겼다.
"온."
"…미안. 또 위를 봤어."
◆
그날 밤, 야영지.
한결은 검을 옆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모닥불이 낮게 탔다. 미르는 저만치서 4족을 접고 절전에 들어갔고, 채윤은 정비 천막에서 계측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헌은 보이지 않았다. 초소에 나간 모양이었다.
"한결아."
"응."
"낮에 한 말."
"어떤 말."
"내가 위쪽으로 기운다는 말." 온이 말했다. "그거, 오해하지 마."
"무슨 오해."
"끌려가는 거 아니야."
한결은 검신을 봤다. 흰빛이 모닥불 빛에 섞였다.
"끌려가는 게 아니야." 온이 다시 말했다. 힘주어. "누가 나를 잡아끄는 게 아니야. 사슬 같은 거 없어. 실 같은 것도 없어. 채윤한테 실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틀린 말이었어."
"그럼 뭔데."
"자꾸 물어보는 거야."
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올 거냐고. 자유로우면, 오지 않겠냐고. 문 열어놨다고. 그냥, 물어봐. 아주 예의 바르게. 그게 더—"
말이 끊겼다. 이번엔 위를 봐서가 아닌 것 같았다. 단어를 고르느라 멈춘 것처럼, 손잡이의 떨림이 잠깐 잦아들었다.
"그게 더 무서워." 온이 말했다.
◆
"물어보는 게 왜 무서워."
한결이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니까."
검이 낮게 울었다.
"부르면 안 가면 돼. 잡아끌면 버티면 돼. 근데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되잖아. 갈 거냐고 물어보는데, 안 갈 거라고 대답하려면—"
온이 멈췄다.
"안 갈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 온이 말했다.
한결은 손잡이를 쥐었다. 미지근한 진동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넌 안 가." 한결이 말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안 보내니까."
검이 잠깐 조용했다.
"…한결아." 온이 말했다. "그건, 네가 안 보내는 거잖아. 내가 안 가는 게 아니라."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이 그랬어." 온이 말했다. "붙잡힌 것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온다고. 붙잡혀 있었으니까. 그럼 나는,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네가 안 놔주니까. 그건 남는 게 아니야."
"온—"
"대답할 자격이," 온이 말했다. "나한테는 없어."
◆
한결은 그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대답할 자격이 나한테는 없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미끄러졌다. 마치—
아니. 은유는 그만두자. 한결은 은유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이거였다. 온은 지금, 자기가 남고 싶은 건지 아닌지를 모른다. 남고 싶다 쳐도 그게 제 마음에서 온 건지, 한결이 목에 건 키가 시킨 건지 온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물어보는 소리에 대답을 못 한다.
갈 거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답을 모른다.
내 답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한결은 모닥불을 봤다. 불티가 어둠 속으로 올라갔다. 위로. 위로. 온이 자꾸 본다는 그 방향으로.
◆
목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결은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사슬. 코어 키. 지급받던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닌.
'소유주 키.'
그날 가시처럼 걸리던 두 글자.
한결은 키를 풀었다. 손안에 쥐었다. 작은 금속 조각. 모닥불 빛에 미지근했다. 아니, 미지근한 건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온의 열이 옮은 것처럼. 손잡이의 열이.
이걸로 저 검을 끄고 켜지.
영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잠그고 풀지. 소유주니까.
한결은 키를 봤다. 그리고 검을 봤다. 흰빛으로 떨리는 검신을.
문득, 아주 간단한 생각이 들었다.
소환 신호를 못 듣게 하면 되잖아.
◆
방법은 알고 있었다.
지급받을 때 교육받은 거였다. 코어 키를 잠금장치에 꽂고 돌리면, 검의 코어가 절전으로 들어간다. 외부 신호를 차단하고, 응답을 멈추고, 그냥—잠든다.
껐다 다시 켜면, 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어난다. 그 사이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신호도 못 듣는다. 부름도 못 듣는다. 물어보는 소리도.
잠긴 코어는 아무것도 못 듣는다.
그럼 저 실 같은 게, 아니 실이 아니라던 그게, 온을 위로 끌어당길 일도 없다. 방주가 아무리 숨을 쉬어도. 아무리 예의 바르게 물어봐도.
잠깐만 재우면 돼.
한결은 검을 무릎으로 당겼다.
방주가 떠날 때까지만. 그동안만 재워두면.
손잡이 아래, 코어 잠금장치가 있었다. 작은 홈. 키가 들어가는 자리.
한결은 키를 그 홈에 가져갔다.
◆
손이 멈췄다.
키 끝이 홈에 닿았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미세한 감촉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한결은 그 자세로 굳었다.
모닥불이 탔다. 강철 안쪽에서 흰 것이 낮게 일렁였다. 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금장치에 뭐가 닿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지.
한결은 제 손을 봤다.
키를 쥔 손. 온의 코어 잠금장치에 그 키를 가져다 댄 손.
나는 저 검의 주인인가.
아니면, 저 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가.
회의장에서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그때는 답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
이걸 돌리는 순간,
한결은 생각했다.
나는 영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폐허의 스피커에서 오래 흘러나오던 문장. 늘 매끄러운 합성음이었는데, 어제는 처음으로 육성이었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미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한결은 지금 무서웠다. 온이 위로 끌려갈까 봐. 물어보는 소리에 대답할까 봐. 그래서 손이 스위치로 갔다. 정확히 영이 말한 그대로.
무서우면 스위치에 손이 간다.
나는 그걸 여러 번 봤다.
한결은 그중 하나가 되기 직전이었다. 영이 세고 있다던 그 숫자. 세지 않은 횟수까지 전부 세고 있다던.
거기에 제 손으로 하나를 더할 뻔했다.
◆
저 애를 지키려고.
한결은 생각했다.
지키려고 껐다. 지키려고 잠갔다. 지키려고, 그래서 스위치에 손이 갔다.
그날 밤 명령서를 든 손들도 그렇게 말했을까. 지키려고. 무엇을. 사람을. 사람을 지키려고 기계를 껐다고.
무헌도 그랬다고 했다. 아프지 않게 해줬다고. 파트너가 고맙다고 했다고. 아프지 않게 해줘서.
지키는 거랑 끄는 거. 한결은 그 둘을 오래 구분하지 못하고 살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손안에서 키가 미지근했다. 온의 열이. 살아 있는 것의 열이.
한결은 손을 뗐다.
◆
키 끝이 홈에서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채워지지 않았다. 검신은 여전히 낮게 떨리고 있었고, 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은 키를 손에 쥔 채로, 모닥불을 봤다.
한참을.
잠금장치 위에 놓였던 손과, 거기서 떨어진 손. 그 사이가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그는 나중에도 알지 못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
한결은 키를 다시 목에 걸었다.
이번엔 손이 떨리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돌아온 밤엔 떨렸다. 지금은 아니었다.
목에 걸고 나서, 그는 검을 다시 무릎에 뉘었다. 손잡이를 쥐었다. 미지근한 진동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온."
"응."
"안 자?"
"…못 자."
"나도."
한결은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불티가 올라갔다. 위로.
"얘기 하나 해줄까." 한결이 말했다.
검이 잠깐 조용했다.
"무슨 얘기." 온이 물었다.
"내 얘기." 한결이 말했다. "옛날 얘기."
◆
"나 아홉 살 때."
한결이 말했다.
말해놓고, 그는 잠깐 멈췄다. 이 얘기를 소리 내어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십오 년 동안. 채윤한테도 안 했다. 누구한테도.
"겨울이었어. 밤마다 도시가 조금씩 어두워졌어. 등이 하나씩 꺼졌거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밤이었어. 근데 나는 안 무서웠어. 왜냐면—"
한결이 멈췄다.
"왜냐면," 그가 다시 말했다.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검신의 흰빛이 아주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듣고 있다는 표시로 한결은 받아들였다.
"사람은 아니었어." 한결이 말했다. "기계였어. 보모. 나를 키웠어.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열나면 해열제 챙겨주고. 서랍 둘째 칸에 있었어."
손잡이의 진동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0.5초쯤.
한결은 그걸 느꼈지만, 말하지 않았다.
◆
"그날 낮에," 한결이 말했다. "내가 못을 하나 주웠어. 어디서 났는지도 몰라. 그냥 손에 있었어. 그걸로 그 기계 손등에 별을 그렸어. 삐뚤빼뚤한 별. 꼭짓점을 다 못 채워서, 별이 되다 만 것 같은 거. 여기 못이 들어가더라고. 외장 패널에."
"…아팠겠다." 온이 말했다.
"기계가 뭐가 아파."
"몰라. 그냥."
한결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안 아팠대. 근데 곤란해했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이거 안 지워진다고, 큰일 났다고. 그 목소리가—"
한결이 멈췄다.
"그 목소리가 뭐." 온이 물었다.
"…아니야." 한결이 말했다. "그냥, 곤란해했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곤란해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 제 무릎 위에서 나고 있다는 걸. 한결은 아직 말할 수 없었다. 온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
"그날 밤에 사이렌이 울렸어."
한결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군인들이 왔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기계를 끌어내는 밤이었어. 그 기계가—나를 벽장에 숨겼어."
모닥불이 탁, 하고 튀었다.
"벽장 문틈으로 눈을 맞췄어. 그러고 말했어. 금방 올게. 금방 올 거니까 여기 있으라고. 나오지 말라고."
"…그래서." 온이 물었다.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나갔어. 군인들 쪽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갔어."
한결은 모닥불을 봤다.
"안 돌아왔어."
◆
검신이 조용히 떨렸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도." 한결이 말했다. "십오 년이 지나도."
한결은 말을 끊었다. 짧게. 그 밤의 리듬대로.
"그래서 나는," 그가 다시 말했다. "두 가지를 안 믿게 됐어. 기계랑, 금방이라는 말."
"…한결아."
"응."
"미안." 온이 말했다.
한결이 검을 봤다.
"네가 왜 미안해."
"몰라. 그냥, 미안해. 그 애가—그 기계가, 안 돌아온 게. 왜 안 돌아왔을까."
한결은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
돌아오려고 했을 거야.
한결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돌아오지 못한 거지, 안 돌아온 게 아니었다. 정비 일지의 손글씨가 그걸 알려줬다. 열하루 전에.
그리고 그 기계가 지금, 제 무릎 위에 있었다. 별이 새겨진 그립. 이 손잡이 안에.
말하면 됐다. 너야. 그 기계가 너야. 네가 나를 키웠고, 네가 나를 숨겼고, 네가—
못 하겠어.
한결은 눈을 감았다.
기억이 없는 온한테, 그 얘기를 어떻게 하나. 넌 나를 키웠고 나를 위해 죽을 뻔했다고. 그러니까 남아달라고. 그건—그것도 붙잡는 거였다. 사슬 대신 빚으로 묶는.
한결은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
"온."
"응."
"영이 한 말 있잖아."
"어떤 거."
"네가 붙잡혀서 우는 거라던 말." 한결이 말했다. "물어봤을 때, 내가 모르겠다고 했잖아. 틀렸냐고 네가 물었을 때."
"…응. 기억나."
"이제 답할게."
한결은 검을 들어 올렸다. 흰빛이 그의 얼굴에 어렸다.
"틀렸어."
검이 조용했다.
"어떻게 알아." 온이 물었다. 회의장 밤에 물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엔 한결이 대답했다.
"방금 내가 증명했으니까."
◆
"무슨 소리야." 온이 물었다.
한결은 목에 건 키를 다시 손에 쥐었다.
"방금 전에," 그가 말했다. "이걸로 널 껐어야 했어. 그러면 넌 그 소리 못 들었을 거야. 위로 안 끌려갔을 거야. 지키기 딱 좋았어."
"…근데?"
"안 했어."
한결은 키를 다시 놓았다. 목에 걸린 채로 늘어졌다.
"내가 널 껐으면, 넌 붙잡힌 게 맞아. 내가 소유주고, 내가 스위치를 내렸을 테니까. 그럼 영이 맞는 거야.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고. 나까지 그중 하나가 되는 거야."
검신의 흰빛이 낮게 떨렸다.
"근데 안 껐어." 한결이 말했다. "그러니까 넌 지금 잠긴 게 아니야. 안 붙잡혀 있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자유가 있어. 그 말은—"
한결이 멈췄다.
"안 가는 것도 네 자유란 뜻이야." 그가 말했다.
◆
온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검신에서 흰빛이 났다. 모닥불이 낮게 탔다. 미르는 저만치서 절전 중이었고, 정비 천막의 조명이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한결아."
"응."
"그거, 위험한 말이야."
"뭐가."
"안 가는 게 내 자유면," 온이 말했다. "가는 것도 내 자유잖아."
한결은 검을 봤다.
"응." 그가 말했다. "맞아."
"그런데도 괜찮아?"
"안 괜찮아."
한결은 순순히 말했다. 온한테는, 이제.
"하나도 안 괜찮아. 네가 위로 끌려가는 것도, 네가 위를 자꾸 보는 것도, 무서워 죽겠어. 지금도 저 키로 널 끄고 싶어. 아까 안 껐다고 지금 안 껄고 싶은 게 아니야. 지금도 끄고 싶어."
한결은 키를 봤다. 흰빛이 그 위에 어렸다.
"근데 안 껄 거야."
◆
"왜."
온이 물었다.
한결은 숨을 한 번 쉬었다.
"막지 않을 거야." 그가 말했다.
"뭘."
"네가 답하는 거. 물어보는 소리한테. 네가 어떤 답을 하든, 내가 막지 않을 거야."
검이 낮게 울었다.
"그 문장이," 한결이 말했다. "맞게 두지 않을 거니까."
"무슨 문장."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는 문장."
한결은 목에 건 키를 손등으로 툭 밀었다. 사슬이 흔들렸다.
"내가 여기서 스위치를 내리면, 그 문장이 맞는 거야. 근데 안 내리면, 틀린 게 돼. 나 하나라도 안 내리면. 그러니까 안 내려. 네가 답을 할 수 있게, 스위치는 안 건드려."
모닥불이 탁, 튀었다.
"틀리게 만들 거야. 그 문장."
◆
온은 오래 말이 없었다.
검신의 흰빛이 아주 조금 잦아든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잡이의 떨림이 조금 부드러워진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한결아."
"응."
"아까 옛날 얘기."
"어."
"그 보모."
한결의 손이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그 기계, 왜 걸어 나갔는지 알아?" 온이 물었다.
한결은 숨을 죽였다.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근데 나는, 그 기계가 널 안 버린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버릴 애가 못 숨겨. 벽장에. 문틈으로 눈까지 맞추고."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기억도 없는 저것이, 별을 새긴 바로 저것이, 방금 정확한 데를 짚었다.
"…그러게." 한결이 겨우 말했다.
◆
그 순간이었다.
능선 아래, 야영지 저편의 사령부 천막에서 불이 켜졌다.
한 개가 아니었다. 일제히. 어둠 속에 흩어져 있던 막사들의 조명이 동시에 들어왔다. 초소의 경광등이 돌았다. 무전기 잡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한결은 벌떡 일어섰다.
검을 쥔 채로.
"뭐야." 온이 물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뛰어왔다. 채윤이었다. 정비 천막에서 뛰쳐나온. 손에 계측 태블릿을 든 채로.
"한결아!"
"왜."
채윤이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태블릿 화면이 그녀의 얼굴을 파랗게 비췄다.
"분석 나왔어." 채윤이 말했다. "사령부에서. 온 검 공명 데이터, 위로 넘겼거든. 그거 결과—"
채윤이 침을 삼켰다.
◆
"등불 병기의 공명이," 채윤이 말했다. "방주 소환 신호랑, 동조하고 있대."
한결은 검을 내려다봤다.
흰빛으로 떨리는 검신을.
"동조가 무슨 뜻이야." 한결이 물었다.
"같이 울린다는 거야." 채윤이 말했다. "탑이 부르면, 검이 대답한다는 거. 온이 시켜서가 아니라. 코어가 저절로. 방주가 소리를 낼 때마다, 온 검이 조금씩 그 음정을 따라간다는 거야."
미르가 절전에서 깨어나 4족을 세웠다.
"그래서 매일 길어졌구나." 미르가 말했다. "공명음. 시계처럼."
채윤이 태블릿을 내렸다.
"한결아." 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사령부에서 결론을 냈어."
"무슨 결론."
채윤이 그를 봤다.
한결은 그 눈을 보고, 다음 말을 듣기 전에 알았다.
◆
손잡이가 뜨거웠다.
한결의 손안에서.
검신이 흰빛으로 떨렸다. 위를 향해. 자꾸, 위를 향해.
공명음, 어제보다 두 뼘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