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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두 사람의 아버지」

채윤은 다음 날 해가 진 뒤에야 정비고로 돌아왔다.

일지를 품에 안고 나간 게 어제였다. 하루를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방에 앉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글씨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다른 데서 목이 막혔다.

그리고 지금, 정비고 문을 다시 열었다.

난로에 불이 남아 있었다. 한결이 지켜 놓은 것이었다.

작업대 위에 검이 있었다.

한결은 없었다.

쪽지가 있었다. 작업대 모서리에, 렌치로 눌러 놓은.

순찰. 새벽에 옴. 검 부탁.

채윤은 그 쪽지를 오래 봤다.

검 부탁. 세 글자에 얼마나 많은 게 들었는지, 어제의 채윤이라면 몰랐을 거였다. 이제는 알았다. 이 검이 뭔지 알고 나서, 한결이 이걸 두고 나갔다는 것의 무게를.

"…나한테 맡기고 갔네."

혼잣말이 나왔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윤은 공구벨트를 풀어 걸었다.

작업등을 켰다. 확대경을 내렸다. 손을 씻고, 장갑을 끼려다 말았다. 오늘은 맨손으로 하고 싶었다.

작업대 앞 걸상에 앉았다. 검을 제 쪽으로 당겼다.

"온."

불렀다.

"…응." 검이 대답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자?"

"검이 어떻게 자."

"…그러네."

채윤이 픽 웃었다. 웃고 나서, 자기가 웃었다는 게 좀 이상했다.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

"정비할게." 채윤이 말했다.

"…어제 그렇게 울더니." 온이 말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채윤이 확대경 위치를 맞췄다. "근데 손은 움직여. 손은 원래 마음이랑 따로 놀거든. 아빠가 그랬어. 정비사 손은 울면서도 나사를 조인다고."

"…"

"그러니까 가만있어. 그립 좀 볼게."

검이 조용해졌다.

채윤은 그립 외장을 들여다봤다. 손잡이를 쥐면 손등이 닿는 자리. 오래전, 아버지가 잘라 붙인 자리.

거기 별이 있었다.

못으로 새긴 별.

어제까지는 '원인 불명 각인'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흠집. 재점검 요망.

오늘은 아니었다.

아홉 살 한결이 새긴 별이었다. 온의 손등에 새겨졌던 별. 아버지가 코어를 옮기면서, 이 손등만은 남겨야 한다고 판단해서, 잘라다 붙인 별.

채윤은 그 별을 손끝으로 만졌다.

까끌했다. 못 자국 특유의, 파인 결이. 몇 년을 스치고 지나던 자국인데, 오늘 처음 만지는 것 같았다.

"…이게 별이었네." 채윤이 중얼거렸다.

"뭐?" 온이 물었다.

"아니야." 채윤이 손을 뗐다. "혼잣말."

채윤은 계측기를 연결했다.

집게를 그립 접점에 물렸다. 케이블 반대쪽을 낡은 진단 단말에 꽂았다. 화면에 파형이 떴다. 코어의 상태를 읽는 선이었다.

정상이었다. 대체로.

"온." 채윤이 화면을 보며 물었다. "너 어제 이후로 좀 어때. 몸 상태."

"몸이 없는데."

"검 상태 말이야. 이 바보야."

"…아." 온이 말했다. "이상해. 어제부터."

채윤의 손이 멈췄다.

"뭐가 이상한데."

"안이 시끄러워." 온이 말했다. "기억이 자꾸 올라와. 어제 한꺼번에 열려서 그런가. 아직도 뭐가 막 떠올라. 한결이 아기 때. 처음 걸음마 하던 거. 나 그거 봤어. 방금 또 하나 떠올랐어."

"…"

"이런 거 검이 느낄 감정이 아닌 것 같은데." 온이 말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채윤은 화면을 봤다.

파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온이 말할 때마다. 큰 건 아니었다. 계측기 눈금 안에서 아주 조금.

"…네가 말할 때마다 여기 파형이 떨려." 채윤이 말했다. "봐. 이거. 감정이랑 연동되나 봐. 검 주제에."

"검 주제에는 좀 심한데."

"미안." 채윤이 웃었다. "습관이야."

정비는 손에 익은 일이었다.

채윤은 외장을 하나씩 점검했다. 이음매를 확인하고, 접점을 닦고, 냉각 경로를 살폈다. 협곡에서 금 간 그립은 이미 한결이 벗겨냈고, 임시 보강만 된 상태였다. 제대로 손봐야 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입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온." 채윤이 물었다. "너 나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냥. 물어봐."

검이 잠깐 조용했다.

"…한결의 친구." 온이 말했다. "정비 잘하고. 잘 웃고. 어제 많이 울었고."

"그거 말고." 채윤이 접점을 닦으며 말했다. "너 알잖아. 나 한결 좋아하는 거."

검이 멎었다.

채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접점을 계속 닦았다. 이런 말은 손을 멈추고 하면 못 한다. 그것도 아버지한테 배운 거였다. 어려운 건 손을 놀리면서 말하는 거라고.

"어제부터 생각했어." 채윤이 말했다. "너랑 나랑, 좀 웃긴 사이잖아. 나는 한결 좋아하고. 근데 한결은 너 보고. 그럼 너랑 나랑 연적이야. 그치."

"…연적."

"그런데 너는," 채윤이 마침내 손을 멈췄다. "우리 아빠가 만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채윤이 말했다. "연적이면서, 나한테 넌 아빠 유작이야. 아빠가 마지막으로 만든 거. 목숨 주고 만든 거.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물건."

검이 조용했다.

"이상하지." 채윤이 말했다. "미워해야 하나, 아껴야 하나. 어제 밤새 그 생각 했어. 너 정비하러 오면서도. 손잡이 쥐면서도."

"…채윤."

"응."

"미안." 온이 말했다. "내가 한결이랑 뭐 어떻게 하려는 거 아니야. 나 그런 거 몰라. 나 검이잖아. 손도 없고."

"됐어." 채윤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 아니야. 사과하지 마.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야."

"그럼."

채윤은 검을 봤다.

작업등 아래에서, 강철이 하얗게 빛났다. 아버지가 만든 검.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

"어제." 채윤이 말했다. "일지 읽고 집에 가서, 계속 그 생각을 했어. 우리 아빠가 왜 죽었나. 십오 년 동안 나 그게 개죽음인 줄 알았거든. 명령 어기다 죽은 거. 왜 어겼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보같이 죽은 거."

"…"

"근데 아니었어." 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빠가 뭘 살렸어. 너를. 그리고 지금."

채윤이 검에 손을 얹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게, 우리 아빠가 살았단 뜻이더라."

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채윤은 손바닥으로 그 떨림을 느꼈다.

"어제 그걸 알았어." 채윤이 말했다. "너 보면서. 아, 우리 아빠가 헛되지 않았구나. 아빠가 만든 게 여기 살아서 말을 하는구나. 나 그게—"

목이 막혔다.

"그게 위로가 되더라." 채윤이 겨우 이었다. "처음으로. 아빠 죽은 게, 뭔가를 위한 거였다는 게."

검이 오래 조용했다.

그리고 낮게, 온이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온이 말했다. "내 두 번째 어머니야."

채윤이 고개를 들었다.

"…뭐?"

"어머니." 온이 다시 말했다. "나 낳은 사람. 아니, 만든 사람. 그게 처음엔 공장이겠지. 그게 첫 번째. 근데 소등의 밤에 나 다시 만든 사람 있잖아. 당신 아버지. 나를 검으로 다시 낳아 준 사람. 그러니까 두 번째—"

온이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 맞나. 아버지인데. 이런 거 뭐라고 해야 돼. 나 관용구 자꾸 틀려."

채윤은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버지야, 이 바보 검아." 채윤이 눈가를 훔쳤다. "우리 아빠 남자였어. 두 번째 아버지."

"…근데 나한텐 어머니 느낌인데." 온이 말했다. "나 다시 낳아 줬잖아. 낳는 건 어머니 아니야?"

"어우." 채윤이 이마를 짚었다. "그냥. 그냥 둬. 아버지든 어머니든. 둘 다 맞다고 치자."

"응." 온이 말했다. "둘 다 맞다고 치자."

채윤은 검을 봤다.

관용구를 저렇게 틀리면서,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그런데도 목이 멨다. 온이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게, 말투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데서 전해졌다.

채윤은 공구벨트로 손을 가져갔다.

거기 인식표가 걸려 있었다. 목에 걸다가, 벨트에 걸다가, 정비할 땐 벨트에. 아버지의 정비공 등록 번호가 새겨진 금속 조각.

한 번도 풀어 본 적이 없었다.

씻을 때도 걸어 뒀다. 잠잘 때도. 몸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게 아버지를 곁에 두는 방식이었다.

채윤은 그 인식표를 풀었다.

처음으로.

고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풀렸다.

인식표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운 걸 그렇게 오래, 그렇게 무겁게 지고 다녔다.

채윤은 그것을 검 앞으로 가져갔다.

그립으로. 별이 있는 자리로. 아버지 번호가 안쪽에 새겨진, 바로 그 외장으로.

인식표를 그립에 가만히 대었다.

인식표에 새긴 번호가, 얇은 외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쪽의 번호와 마주 닿았다. 같은 번호였다.

채윤은 손을 떼지 못했다.

"…아빠."

채윤이 불렀다.

허공에 대고. 검에 대고. 아버지가 남긴 이 물건에 대고.

"잘 컸지, 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빠가 살린 거. 잘 컸어. 말도 하고. 싸움도 잘하고. 한결이랑 붙어 다니고. 서툰 농담도 하고. 아빠 관용구 틀리는 것까지 닮았나 봐. 잘 컸어, 아빠. 아빠가 목숨 준 값, 여기 있어."

인식표를 쥔 손이 떨렸다.

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채윤이 아버지한테 하는 말이었으니까. 처음으로, 개죽음이 아닌 죽음 앞에 하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인식표를 그립에 댄 채로. 손바닥으로 별을 덮은 채로. 난로에서 장작 무너지는 소리만 났다.

이윽고 온이 낮게 말했다.

"채윤."

"…응."

"고마워." 온이 말했다. "나 대신 울어 줘서. 나 검이라 못 울어. 눈물이 안 나와. 냉각수는 나오는데 그건 좀 다른 거 같고. 근데 네가 우니까, 누가 나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아."

채윤이 인식표를 도로 벨트에 걸었다.

이번엔 조금 덜 무거웠다.

"…울긴 누가 울어." 채윤이 코를 훌쩍였다. "먼지 들어갔어. 정비고 먼지 많아."

"응." 온이 말했다. "먼지."

채윤은 다시 정비를 시작했다.

이번엔 손이 조금 가벼웠다. 개운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건 하루 사이에 바뀌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손끝에서 뭔가가 풀렸다. 그립을 잡은 자리가 어제보다 덜 아렸다.

그립 보강을 마저 했다. 임시로 붙였던 걸 떼고, 제대로 성형했다. 별이 있는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부분만은 손대지 않고 남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온." 채윤이 물었다. "그럼 넌 이제 다 알아? 어제 이후로."

"거의." 온이 말했다. "한결 아기 때부터, 그 밤까지. 다 있어. 근데 이상한 게 있어."

"뭐."

"한결을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어." 온이 말했다.

채윤이 손을 멈췄다.

"…무슨 소리야."

"나 얘 키웠잖아." 온이 말했다. "아홉 살까지. 그럼 나 얘한테 보모잖아. 어른이고. 얘가 아기고. 근데 지금은 얘가 스물넷이고, 나는 검이고. 얘가 나 들고 다니고. 얘가 나 정비 맡기고. 이제 얘가 어른이야."

"…"

"그럼 나 얘를 뭐라고 불러야 돼." 온이 말했다. "우리 애기? 그건 좀 이상하잖아. 스물네 살한테. 근데 그냥 한결이라고 부르면, 내가 키운 애를 친구처럼 부르는 거 같고. 어제부터 말끝이 자꾸 어색해."

채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제 한결과 온이 이야기할 때, 두 사람 다 자꾸 말끝을 흐렸다. 부르는 데서 걸렸다. 십오 년 전엔 '온'과 '한결이', 보모와 아이. 그런데 지금은.

"…한결도 그러던데." 채윤이 말했다. "어제. 너 부르는 데서 자꾸 멈추더라. '온'이라고 하려다 마는 것처럼."

"응." 온이 말했다. "얘도 그래. 나 부르다 멈춰. 나도 얘 부르다 멈추고. 우리 둘 다 이상해."

"그럴 만하지." 채윤이 확대경을 올렸다. "그 사이에 딴사람 됐잖아. 걘 애기였다가 군인 됐고. 넌 뭐, 로봇이었다가 검 됐고. 옛날에 부르던 걸로는 안 맞는데, 새로 부를 것도 아직 없고. 그러니까 자꾸 걸리지."

"그거 어떻게 해." 온이 물었다. "채윤. 너 사람이니까 알잖아. 이럴 때 어떻게 불러."

"내가 어떻게 알아." 채윤이 웃었다. "나도 그런 거 안 해 봤어. 근데—"

말을 골랐다.

"천천히 하면 되지 않을까." 채윤이 말했다. "억지로 정하지 말고. 부르다 보면 익겠지. 처음엔 어색해도. 원래 이름이란 게 그래. 자꾸 부르면 입에 붙어."

"…자꾸 부르면."

"응." 채윤이 말했다. "보모랑 애기를, 온이랑 한결로 바꾸는 거잖아. 그거 하루아침에 안 돼. 시간 걸려. 근데 너희 시간은 있잖아."

말해 놓고, 채윤은 잠깐 멈칫했다.

시간은 있잖아.

그 말이 왜 갑자기 걸렸는지, 채윤도 몰랐다. 그냥, 입에 낸 순간 어딘가 서늘했다.

계측기 화면에서 소리가 났다.

삐-.

낮고 짧은 경고음이었다. 채윤이 고개를 돌렸다.

파형이 이상했다.

아까까진 온이 말할 때만 흔들렸다. 그런데 지금은 온이 조용한데도 선이 움직였다. 규칙적으로. 아주 작게. 심장이 뛰듯이.

"…뭐지."

채윤이 화면을 당겨 봤다.

파형 아래에 숫자가 떠 있었다.

측정값이었다. 처음 보는 항목이었다. 검을 정비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런 건 처음이었다.

백색 공명 — 미세. 원인 불명.

계측기가 그렇게 표시하고 있었다.

"온." 채윤이 물었다. "너 지금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온이 말했다. "가만있어. 왜."

"진짜 아무것도 안 해?"

"응. 채윤 말 기다렸어."

채윤은 화면을 다시 봤다.

온은 가만있다는데, 검은 울고 있었다. 아주 작게. 사람 귀엔 안 들리는 높이로. 계측기만 잡아내는 미세한 떨림으로.

채윤은 검에 손을 댔다.

느껴지지 않았다. 손으로는. 그런데 계측기는 잡았다. 그립 접점을 통해, 코어에서 새어 나오는 아주 작은 공명을.

"이거 뭐지." 채윤이 중얼거렸다.

"뭐가 뭔데." 온이 물었다.

"너 지금 울어." 채윤이 말했다. "아주 작게. 검이. 근데 소리로는 안 들려. 계측기만 잡아. 백색 공명이라는데. 나 이런 거 처음 봐."

"…나 우는 줄 몰랐는데."

"너도 몰라?"

"응." 온이 말했다. "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근데 운다고?"

채윤은 진단 단말을 붙잡고 오래 봤다.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정비사니까. 이상 신호가 잡히면 원인을 찾는 게 일이었다. 접점 불량인가. 코어 노후인가. 어제 기억이 열리면서 생긴 부하인가.

아무것도 맞지 않았다.

접점은 깨끗했다. 코어는 정상이었다. 부하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검이 울었다. 원인 없이. 아주 작게, 하얗게.

"…모르겠다." 채윤이 손을 놓았다. "원인을 못 찾겠어. 이상은 있는데, 이상의 이유가 없어. 정비사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해." 온이 물었다.

"기록해 놔야지." 채윤이 말했다. "일단. 원인 못 찾으면 기록부터 하는 거야. 아빠가 그랬어. 모르는 건 적어 두라고. 나중에 알게 되니까."

채윤은 벨트에서 정비 일지를 꺼냈다.

아버지 것이 아니었다. 어제 연 아버지의 일지는 집에 두고 왔다. 이건 채윤 자기 일지였다. 군 정비창에서 쓰는, 낡은 제 일지.

이 검을 처음 만진 날부터의 기록이 거기 있었다.

채윤은 페이지를 넘겼다. 뒤로. 몇 달 전 날짜를 찾아서. 이 검을 처음 정비하던 날.

찾았다.

거기 한 줄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적은 한 줄이.

그립 외장, 원인 불명 각인. 재점검 요망.

채윤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원인 불명 각인.

그때는 흠집인 줄 알았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 재점검하겠다고 적어 놓고, 공습경보 울려서 못 봤던. 그 뒤로 다시 펼쳐 볼 일이 없던 한 줄.

이제 알았다. 그게 별이었다는 걸. 아홉 살 한결이 새긴 별.

원인 불명이 아니었다. 원인은 오래전에 있었다. 채윤이 몰랐을 뿐이었다.

채윤은 펜을 들었다.

그 줄 아래, 두 번째 줄을 적었다.

각인 = 별. 손등 패널. 새긴 사람 확인.

거기까지 쓰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이었다.

그립 코어에서 백색 공명 검출. 미세. 원인 불명. 재점검 요망.

또 원인 불명이었다.

채윤은 그게 좀 웃겼다. 이 검은 자꾸 채윤한테 원인 불명을 남겼다. 별이 그랬고, 이제 이 울음이 그랬다. 별은 뒤늦게라도 알았는데, 이건 아직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되니까.

아버지 말을 떠올리며, 채윤은 펜을 놓았다.

두 번째 줄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채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 몰랐다.

"채윤."

온이 불렀다.

"응."

"너 뭐 적었어?" 온이 물었다. "적는 소리 났어."

"네 일지." 채윤이 일지를 덮었다. "너 오늘 운 거. 원인 불명이라고 적었어. 나중에 원인 알면 그 밑에 또 적을 거고."

"…나 우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몰라." 채윤이 솔직하게 말했다. "큰일인지 아닌지도 몰라. 그래서 적는 거야. 모르니까. 근데—"

말을 골랐다.

"검이 운 건 처음이야." 채윤이 말했다. "이 검, 십오 년 됐는데. 한 번도 안 울었대. 한결이 그랬어. 조용한 검이라고. 근데 어젯밤부터 울기 시작했어. 네 기억 열린 다음부터."

"…그게 나 때문이야?"

"모른다니까." 채윤이 말했다. "근데 타이밍이 그래. 네가 너를 다 알게 된 밤부터, 검이 울어. 그럼 상관이 있겠지. 뭔진 몰라도."

검이 조용했다.

채윤은 그 침묵이 걱정스러웠다. 온이 겁먹었나 싶어서.

"야." 채윤이 손잡이를 톡톡 쳤다. "겁먹지 마. 정비사가 옆에 있잖아. 어디 아픈 데 있으면 내가 고쳐. 그러라고 있는 게 정비사야."

"…응."

"내가 볼게." 채윤이 말했다. "매일. 이제부터 네 정비, 내가 해."

말해 놓고, 채윤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밤이 깊었다.

정비는 대충 끝났다. 그립 보강, 접점 청소, 냉각 점검. 남은 건 백색 공명 하나였는데, 그건 원인을 못 찾았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채윤은 검을 검집에 넣지 않고 작업대에 그대로 뒀다. 온이 좀 더 깨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채윤."

"응."

"오늘 고마웠어." 온이 말했다. "정비해 줘서. 그리고 얘기해 줘서. 나 오늘 처음이야."

"뭐가."

"너랑 둘이 얘기한 거." 온이 말했다. "그동안은 늘 한결이 있었잖아. 미르도 있고. 너랑 나랑 둘만 얘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야."

채윤은 그 말에 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연적인데. 아버지 유작인데. 오늘 처음으로 둘이 이야기했다.

"그러네." 채윤이 말했다. "우리 둘이 얘기한 거 처음이네."

"이상해?" 온이 물었다.

"안 이상해." 채윤이 말했다. "좋았어. 너 생각보다 말 잘 통해. 관용구는 좀 틀리는데."

"…관용구 얘기 그만해."

채윤이 웃었다.

작업등을 껐다. 난로 불빛만 남았다. 검이 그 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채윤은 걸상에 앉아 그 검을 봤다. 아버지가 만든 검. 오늘 하루, 연적에서 뭔가 다른 게 된 검.

"온." 채윤이 낮게 말했다.

"응."

"네 정비, 이제부터 내가 한다." 채윤이 말했다. "아버지 A/S는 딸이 해야지."

검이 작게 떨렸다.

이번엔 웃는 것 같았다. 계측기가 없어도, 채윤은 그게 웃음이란 걸 알 것 같았다.

"…A/S." 온이 말했다. "그거 맞게 쓴 거야? 관용구."

"그건 관용구 아니야. 이 바보야." 채윤이 웃었다. "그건 그냥 정비 용어야. 애프터서비스. 물건 판 다음에 계속 봐 주는 거."

"나 물건이야?"

"물건이지. 검이잖아." 채윤이 말했다. "근데 아빠가 만든 물건이니까, 딸이 계속 봐 준다는 거야. 그게 A/S야. 됐지?"

"…응." 온이 말했다. "됐어."

채윤은 난로에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밤이 길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밤은, 어제 밤보다 덜 무거웠다.

그때 무전이 울렸다.

작업대 구석에 놔둔 야전 무전기였다. 순찰 나간 부대와 연결된. 채윤이 손을 뻗었다.

치직— 잡음이 먼저 왔다.

"…여기 정비고." 채윤이 무전기를 들었다. "한결이야? 새벽에 온다더니 벌써—"

무전이 끊겼다 이어졌다.

치지직—

한결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대 통신병 목소리였다. 다급했다.

"…경보. 정비고. 응답하라."

채윤이 몸을 세웠다.

"여기 정비고. 뭐야, 무슨 일이야."

치직— 잡음이 말을 삼켰다. 몇 마디가 끊겨 나갔다.

"…장군급 접근." 통신병이 말했다. "반복한다. 장군급 개체 접근 중. 좌표—"

채윤의 손이 무전기를 꽉 쥐었다.

장군급. 이단의 상위 기체. 언젠가 한 번, 온이 목숨 걸고 막았던 그것.

"기체 식별." 통신병이 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기체 식별. 구(舊) 연방군 정비창 소속."

채윤은 그 말에 멈췄다.

구 연방군 정비창.

아버지가 있던 곳이었다. 십오 년 전, 아버지가 검을 만들던 그 정비창. 지금은 없어진, 소등의 밤에 불탄.

거기 소속 기체가, 왜 지금, 이단 장군이 되어서.

무전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헌이었다.

낮고, 짧은 군인의 목소리. 식별 코드를 읽고 있었다. 숫자를. 기체의 등록 번호를.

"…식별 코드." 무헌의 목소리였다. "앞자리는 정비창 공용. 뒷자리 넷—"

무헌이 숫자를 읽었다.

한 자리씩. 입 속으로. 무전에 다 잡히지도 않게, 혼자 되뇌는 것처럼.

그리고 멈췄다.

무전이 조용해졌다.

잡음만 흘렀다. 치지직— 무헌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뒷자리 넷을 다 읽지 않았다. 세 자리쯤에서, 아니 그보다 앞에서, 목소리가 끊겼다.

채윤은 무전기를 귀에 붙였다.

"무헌 씨?" 채윤이 불렀다. "무헌 씨. 왜 그래요. 그 번호가 뭔데요."

대답이 없었다.

십오 년 동안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번호였다.